북핵개발의 아버지는 쿄토대 OB
산께이신문 2012. 5. 19
[한국] 서울 주재 특별 기자 구로다 가쓰히로
북한의 3대째 지도자 김정은 제1서기는 지난번 첫 연설속에서, 향후의 목표로서「경제 강국 건설과 인민 생활 향상」을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실태는 여전히 군사 중심이니까 얼마나 진심인지 모른다.
그런데 연설에서는 경제 건설에 대해 「함남의 불길을 한층 더 강력하게 타오르게 한다…」라고 한다. 「함남」이란 동해안의 「함경남도」의 약어로, 대규모 화학공업 단지 「2·8 비날론 연합 기업소」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비날론」이란 1939(소화 14)년, 일본의 쿄토 대학에서 개발된 「비닐론」이다.
미국에서 발명된 나일론과 같이 합성 섬유의 하나로, 당시 쿄토대 공학부 화학과 사쿠라다 이치로 교수 등과 공동 개발한 한국인 학자 이승기 박사가 전후 월북하여 「비날론」이라고 이름 붙이고 생산에 들어간 것이다.
북한은 이것을 자력 개발이라고 선전하며 “애국 경제”의 심볼로 해왔다. 일본에서는 더이상 어망이나 로프 등에밖에 사용하지 않지만, 북한에서는 아직도 「인민 생활 향상」에 필요한 물자같다.
그런데 이승기 박사(1905~96년)는 실은 북한에 있어서 “핵개발의 아버지”로서도 알려져있다.
1945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대학의 초대 공학부장이 되었지만, 50년 한국 전쟁 때 가족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 최고의 과학자가 되었다. 67년에는 연변 원자력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 많은 핵연구자를 길러내고 사후에는 「애국 열사릉」에 모셔졌다.
「쿄토대 화학과」는 후쿠이 겐이치, 노요리 료지라고 하는 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지만, 이 화학과에는 전쟁 전, 이승기 박사와 동세대에 이태규 박사(1902~92년)가 있었다.
그는 쿄토대로부터 미국 프린스톤대에 유학해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쿄토대 교수가 되었다. 전후 서울 대학의 초대 이공학부장으로 취임, 한국인으로 처음으로 노벨상 후보에 이름이 오른 인물이다.
(내가- 구로다 기자가)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쿄토대의 마츠모토 히로시 총장과 만났을 때 마츠모토 총장으로부터 「우수한 유학생을 쿄토대에 보내느라 수고한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참고로 그런 역사를 (내게)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한국은 옛부터 중앙집권 국가로서 뭐든지 수도 서울이 중심이다. 그런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일본 유학에도 도쿄 지향이 강하고, 쿄토에는 좀처럼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거기서 「쿄토대는 이런 우수한 한국인 과학자를 길렀다」-라고 하는 역사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더 알리면 쿄토대를 목표로 하는 사람이 증가하지 않을까 라는 이유다.
한국에서의 역사 교육은 반일·민족주의가 오로지이니까, 한국의 과학 발전에 끼친 일본의 공헌 등은 공식상 아무도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라도 우수한 인재는 민족, 국경을 넘어 세계로 웅비했던 것이다.
북한에서의 「비날론」은 원래는 의식주의 「옷」이라고 하는 민생 문제 해결책으로서 칭찬받았다. 그 「비날론 정신」은 원래 인민의 생활을 자력으로 개선하여 풍족하게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지금 인민 생활은 뒷전으로, 핵미사일 개발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북쪽으로 건너간 이승기 박사의 영광이라고 해야할 것인가 비극이라고 해야할 것인가?
이 구로다라는 사람은 희한한 게
한국에서는 망언메이커로 뜯기고
일본에서는 밥맛없는 친한파로 뜯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