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년대 초, 쏘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 몰락으로 북한과의 Supply/Demand Chane 망이 붕괴되는 바람에 공장가동 중단으로 수출입 물동량이 90 % 이상 감소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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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 사회주의 몰락과 북한]
–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
1991년 12월 이전 소련은 해체되었다.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조국인 소련의 붕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완전 승리가 눈앞에 왔다고 선전하던 북한에 큰 정치, 경제적, 심리적 타격으로 되었다.
소련의 붕괴원인은 과도한 군비경쟁,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결함, 다 민족 문화,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 등으로 볼 수 있으나 기본은 시장 경제와 경제 분야에서 경쟁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잘 살고 싶어 하는 주민들의 욕망을 실현시켜 줄 수가 없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에서는 당과 국가가 중시하는 분야는 상대적으로 발전하지만 중시하지 않는 분야는 발전할 수 없다. 자본주의 나라들처럼 기를 쓰고 자기 제품을 생산하여 판매하려는 기업가들을 공산주의 체제의 공장 지배인이 이길 수 없다. 생산 수단에 대해 국민 모두가 주인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결국 주인이 없는 사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경제적 대상 건설을 국가의 투자와 주민들에 대한 경제적 자극제로 추동하지 않고 사상 동원 사업과 세 부담으로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바로 동구권 사회주의와 북한경제의 붕괴를 가져 왔다.
– 이에 정치적으로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들고 체제 정비에 들어갔다.
김정일은 1990년 12월 조선인민군 사령관으로 나서서 군대를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고 92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방위원회를 독립기관으로 분리해 국가주권의 최고 기관으로 만들고 자신을 국방위원장으로 내세웠다. 김일성은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었다.
1993년 김정일은 ‘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은 허용될 수 없다’라는 로작을 발표하여 북한이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노선으로 계속 나간다는 입장을 발표한다.
1994년 7월 8일 거의 반세기 동안 북한을 이끌어온 김일성이 사망했다. 세계는 북한이 인차 붕괴될 것이라고 전망했으나 80년대 말부터 사실상 김정일 체제로 운영되어 온 북한은 김일성의 죽음으로 붕괴되지 않았다.
1995년 1월 1일 김정일은 다박솔 초소에 대한 시찰을 하였다. 매년 진행하던 신년사 대신 군부대 시찰을 시작으로 군부 중심의 선군정치로 들어서게 된다. 김일성이 죽은 후 3년 상을 치르고, 97년 10월 김정일은 당 총비서로 되어 권력체계를 완전히 정비했다.
97년부터 북한은 ‘심화조’ 사건을 통해 전 사회적으로 대대적인 숙청을 진행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매일 가족들이 끌려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총살되었다.
이러한 공포 통치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끝나고 심화조 사건은 잘못된 사건으로 재평가를 받는다. 북한 노동당은 매번 정책에서 실패와 좌절을 모르고 승리만을 향해 전진해왔다고 선전했으나 ‘프룬제 아카데미 사건’, ‘심화조 사건’, ‘독일 유학생 사건’도 후에 재평가되었다.
98년 북한은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폐지하고 김정일을 국가의 최고 직책인 국방위원장에 재추대하여 당과 국가의 권력을 김정일에게 집중시켰다.
– 경제적으로 9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세상에서 제일 우월한 사회주의 제도’라고 선전하던 북한 외교관들은 갑자기 ‘식량 공작’에 나섰다. (자서전 ‘3층 서기실의 암호’ 98 페이지 참고) 내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처음 북한 체제에 대해서 괴리감과 회의적인 생각이 들고 점차 내가 무엇을 잘 못 알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95년 처음으로 외국에 식량 협조를 요구했고 외국 대표단을 데리고 지방에 나가보니 눈을 뜨고 볼 수 없고 저절로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평양시에서도 배급이 끊기기 시작했고, 외무성 내에서는 벤또(도시락)를 못 가지고 오는 공무원들이 생겼다. 그들을 위해 외무성 ‘빈민구제식당’에서 점심 한 끼씩 강냉이 국수를 내주었다. 당시에는 아침과 점심을 굶고 나오는 직원들이 많았다. (자서전 ‘3층 서기실의 암호’ 66 페이지 참고)
1996년부터 덴마크에서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일했는데 외교관들은 힘을 다해 식량을 북한으로 들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정일은 수억 달러를 김일성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 태양 궁전’ 재건에 돌리고, 전 국가적으로 태양상 초상화와 건설에 돌렸다.
금수산 의사당에 화강석 70만 개를 깔고 주요 시설들을 순금으로 치장하는데 9억 달러를 투입하였다. 사료용 쌀 1톤에 300불 하던 시기라 9억 달러면 쌀 300만 톤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당시 북한 식량생산이 300-350만 톤 정도여서, 매년 100만 톤 정도만 수입해오면 3년 동안 배급제는 유지할 수 있었다.
한 사람도 굶겨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몇 백만을 굶겨 죽이면서 금수산 기념 궁전을 세계의 최고의 궁전으로 건설했다. 또한, 식량 구입 대신 자기 가문의 사치품을 계속 들여갔으며 핵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덴마크에서 무상으로 받은 치즈는 김정일의 선물로 군대에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