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번째 주제는 대영제국입니다.
작은 섬나라 영국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할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 주제입니다.
영국이 유럽 역사에서 의미를 가질수 있었던 것은 헤이스팅트 전투 이후 윌리엄에 의해 영국이 정복된 시점 부터지만, 실질적으로 영국은 드레이크에 의해 스페인함대를 물리치기 전까지는 사실상 유럽의 변방이었습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프랑스내의 영국 영토를 백년전쟁을 통해 빼앗겻기 때문에 영국이 대륙에 영향력을 미칠 지리적인 거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을 거치고 점차 영국이 해양 세력을 키우면서 제국은 커져가기 시작합니다.
영국이 대륙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것은 클롬웰 시절의 항해조래 덕분으로 경쟁국인 네덜란드를 꺽고 해양 무역의 주 수송루트를 장악하게 되죠. 전에 간략하게 설명드린 것처럼 바다를 통제하면 어느 선박으로 무역을 할것인지를 정할수 있고 이것은 어느나라 화폐로 무역을 할것인지를 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역을 파운드로 하게 되면, 그 파운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상 투자를 위해 은행에 입금되게 됩니다. 그럼 영국은 무역 흑자국의 재산을 투자금으로 유치하는 이득을 얻게 됨니다. 그럼 영국 은행이 어디에 투자할지를 결정하게 되므로, 어느 나라의 노동력을 이용해 경제를 운영하는 지를 결정하는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일전의 가치론에서 디플레이션 상황일때 은행의 신용창조 능력이 왜 역사적으로 그리 중요한 것인지는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가치라는 인식이 존재하는데 창조, 노동, 신용이 필요하기에 상대적으로 부족한 신용을 통제하면 가치를 통제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설명이 그것이었죠. 영국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영국은 유럽에서 자신들을 분리된 세력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유럽의 다른 세력들 처럼 유럽을 통일한다던가 영토를 넓혀나간다던가 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들을 위협할만한 통일 세력이 나오는 것만 억누르는 정책을 사용하죠. 특히 프랑스가 그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왕위 계승 전쟁, 나폴레옹 전쟁등을 거치며 프랑스가 기를 못펴게 하죠. 유럽의 내륙 국가들이 자기들끼리 치고 받는 동안 영국은 무역을 통해 양측에 물자를 공급하며 실리를 취하고, 다른 대륙의 식민지에 집중합니다. divide and rule 이죠.
이러한 영국의 다소 소극적인 제국운영은 로마의 그것과는 좀 다름니다. 로마는 끝없는 정복을 통해 직접통치하고 자국의 법과 문화에 의해 동질화되는 영토를 만들어나가는 것에 비해, 영국은 단지 경제적인 예속 관계에 놓인 느슨하게 통제되는 지역만을 만들어가는 식이죠.
영국이 이렇게 식민지의 독립성을 허용하면서 운영을 한것은 불필요한 반감을 줄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운영을 위한 대규모의 지상 병력을 유지하기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영국은 땅에서의 지배보다는 바다에서의 지배를 선호했습니다.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무역 무트를 장악하고 주요 해군 거점을 장악함으로서 실질적으로 무역에 대한 통제력을 쥐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래서 대영제국의 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십분 활용 식민지역을 통제하죠.
물론 예외는 늘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예속을 유지하려다 독립한 미국이 대표적인 예구요. 또하나는 중국이었습니다. 중국과의 무역에서 일방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보자 영국은 방향을 틀었고 아편으로 만회하려 합니다. 아편이 결국 마찰을 만들게 되자 명분삼아 중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키죠. 물론 중국만큼 큰 지역을 한나라가 꿀꺽할순 없으니 결국 다수의 유럽 연합군을 만들어 나누어 먹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대영제국이 한참 커가는 시기는 17-19세기입니다. 이시기는 유럽은 기술 과학의 발전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은행시스템을 통한 신용의 창조, 아메리카 대륙으로 부터의 금은의 유입, 신대륙과 지리상의 발견을 통한 투자 대상의 증가등 여러 호경기 요인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디플레이션이 주된 흐름이 되지 못했던 거죠. 물론 1870년대 이후 몇번의 mild session이 있었으나, 공황을 유발할 정도의 상황은 없었습니다.
저는 위에서 언급한 요인들에 더해 한가지더. 유럽이 늘 내전에 시달렸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즉 전쟁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구매력으로 전환되는 돈이 아주 많았다는 점이죠. 그러다가 1870년 독일의 성립이후
비스마르크 외교에 의해 유럽의 평화가 만들어지자, 점차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이 커지지 시작합니다.
지리상의 발견도 끝나가고 있었구요. 켈리포니아의 금광은 새로운 경기부양의 요인이 될것으로 기대했으나 미국이 사실상 독식해 버림니다. 기술 부분에서는 여전히 유럽과 서방은 신기술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나,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엔 점차 부족해지고 있었죠.
이런 와중에 유럽 대륙에서 큰 변화가 발생합니다.
독일 총리인 비스마르크가 사실상 퇴진당한 것이죠. 새로운 황제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스마르크가 영국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안정지향주의였다면, 빌헬름 2세는 영국의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선 그는 거대한 해군을 육성하고자 했으며, 새로운 독일 식민지를 필요할 경우 무력으로 뺏어내고자 하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습니다.
일련의 움직임은 독일내의 특권 계층 융커들에 의해서 지지받았습니다. 이들 융커는 원래 비스마르크의 지지층이였으나 지지의 대상을 바꾼 것이죠. 늘 왜? 라는 질문이 중요한데 융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융커는 원래 독일의 지방 제후들의 후손입니다. 독일 통일은 이들 영주들을 하나로 흡수하면서 이루어진 것이구요. 그래서 흡수의 댓가로 이들의 특권을 일정부분 인정하면서 사회 특권층의 해택을 몇가지 줌니다. 귀족 작위는 물론 봉건적 토지의 특권을 일정부분 인정한 것이죠. 또한 독일의 엘리트 층을 구성하는 군대의 장교가 될 자격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점차 보호무역을 철회하고 자유무역 즉 영국이 만들어놓은 국제 시장에 참여하기 시작하자 융커들은 자신들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북미등에서 들어오는 값싼 농작물 때문에 자신들의 영지에서 생산된 물건이 팔리지 않게 된것이죠. 물론 융커들중 발빠르게 산업자본에 투자한 사람들은 독일의 공업생산품과 수출때문에 이득을 보게 되지만, 다수는 자유 무역을 지지하지 않게 됨니다. 그래서 영국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일종의 블럭경제를 추구하는 빌헬름 2세를 지지하기로 마음 먹은 거죠.
이것은 유럽의 외교적 격변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독일이 영국의 체제를 거부하면서, 암묵적인 영국의 독일에 대한 우호적인 중립은 깨져버림니다. 영국의 정책은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할수 있는 유럽의 거대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막는 것이였기에, 이전의 프랑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러시아를 거쳐 이제 독일이 그 대상이 되버린것이죠. 그래서 전통의 원수 프랑스와도 협력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순식간에 비스마르크가 구축해놓은 대 프랑스 포위망은 깨져버리고 전 유럽이 영국파와 독일파로 갈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아주 작은 불씨가 세계대전을 일으켜 버리죠. 사라예보 사건이 있고 나서 평범한 유럽인들 치고 그게 그렇게 엄청난 사건으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던 사람은 드물었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왜 유럽이 전화에 휩싸이는 지는 분명하죠. 파운드화에 의한 세계냐 아니면 마르크화에 의한 세계냐? 이것입니다.
분명 융커들이 처한 상황은 디플레이션의 일부부분이었지만, 그들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작은 문제는 대전으로 이어져 버리게 됩니다. 융커들이 디플레이션의 우선적인 대상도 희생자도 아니었다면 역사는 매우 달랐을지 모름니다. 하지만 디플레이션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했고, 그것은 대전 이후에도 마찮가지 였습니다.
결국 서방의 경제적인 문제는 1929년의 공황을 만들어냅니다. 이어서 2차 대전으로 이어지죠.
이후의 역사는 아시는 바처럼 대영제국의 몰락과 미국이라는 새로운 초 강대국의 등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