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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17 12:07
[중국] 한류 반감 이면 뿌리깊은 중화사상
 글쓴이 : 스크레치
조회 : 1,923  

https://news.v.daum.net/v/20201117073308116







대한민국 문화속국 중국의 열등감 폭발이죠 뭐.. 


한류 반감을 보이려면 확실하게 하던가

예능이니 k팝이니 드라마니 죄다 표절안하면 

현재 제작도 못하는 허접한 나라가 한류 반감을 보인다고 하면


오히려 지들 수준만 불쌍할 뿐인데요...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아직도 14억 진핑이 노예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우리에 살면서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니 뭐니 

외치면 뭐합니까...

머리가 깨어있는 전세계 사람들은 후진국 중국놈들 혐오만 늘어날 뿐인데... 


(중국 이외 60억 이상의 지구촌 사람들 역시 진핑이 사상 노예로 만들수 있다면 혹 중국의 중화사상이 

먹힐 가능성은 있겠으나.. 그건 뭐 말도 안되는 얘기겠구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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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레치 20-11-17 12:07
   
굿잡스 20-11-17 12:20
   
정강의 변 : 송이 신라계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여진(女真)의 추장은 곧 신라인인데, 완안씨(完顏氏)라 호칭하였다. 완안(完顏)은 한어(漢言)로 「왕(王)」과 같다.

ㅡ『송막기문』남송 홍호가 포로로 잡혀간 송 군주의

송환을 위해 15년간 대금의 유배생활을 보내면서 쓴 견문록.


무엇보다 이 사건 당시 휘종 등이 금나라로부터 어느 정도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황제 일가를 제외한 송나라 종실들과 수행원들은 개봉에서 금나라로 이동하면서 많은 수가 풍토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죽었으며(대략 3천 명 중 2천 명) 휘종이 금나라에서 하사받은 옷감들과 자신의 재산을 팔아 이들을 치료받게 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애당초 그나마 좋은 취급을 받은 경우도 이렇게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 한정으로 이 때 끌려간 황족들 중 그나마 두 황제는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조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지옥행 그 자체.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다.(처녀들은 물론이고 유부녀들도 얄짤없었다. 또 원래 모시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또다시 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시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흠종의 황후인 주씨(시호: 인회황후(仁懷皇后)) 또한 치욕을 경험해야만 했다. 외모가 예쁜 편이었던 황후 주씨에게 금나라 장수가 노래를 부르라 시키자 주씨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여진족인 금나라 장수는 가사를 알아듣지 못 해서 오히려 흥겨워하며 다시 노래를 부르라 재촉했다. 그 후에는 아예 술 시중까지 들라고 했고, 주씨가 이를 거부하자 금나라 장수 택리가 주씨를 아예 끌어당기면서 강제로(성 추행..) 술 시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에 주씨는 술자리 시중 들기를 거부하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분노한 택리에게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ㅠㅠ)    

이에 흠종이 결국 참다 못하여 분노를 터트렸는데, 오히려 포로가 반항을 한다고 열받은 택리가 흠종을 죽이려 들었다(...). 이때 현령이 "폐하(금 태종)께서는 저 놈을 생포해오라 했습니다. 죽이면 장군님만 손해입니다."라고 택리를 설득해서 흠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황후 주씨는 이 때 당한 치욕과 폭행으로 인해 결국 몸져 누웠고, 흠종이 눈물을 흘리며 주씨를 치료해달라 요청을 했음에도 철저하게 무시당하여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ㅠㅠ) 더 비참한 것은 한때 일국의 황후였던 그녀의 시신이 금나라 군에게 멍석으로 대충 말아져 지나가던 중 아무 곳에 묻혀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금나라 관기들의 기방인 세의원으로 보내져 창기(娼妓)가 된 경우도 많았다. 서진 시대의 영가의 난처럼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손들의 굴욕적인 몰락이었다.
굿잡스 20-11-17 12:21
   
원나라(몽골)의 법률은 서토 한족은 예외 없이 노예로 취급했으며 "노예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    

노예의 주인은 노예를 임의로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고 언제든지 한족을 살생할 권리가 있었다.    

 한족 20가구를 1甲 으로 편성하였다.    
 각 甲마다 한 명의 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이다.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은 몽골 갑주의 몫이었는데,    
짱국 漢族은 혈통의 순수성 유지를 위해 첫번째 태어난 아기를 죽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몽골은 한족의 반란을 방지하기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한족의 사내아이가 태어 나면 엄지손가락을 절단햇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만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노예는 사유물이므로 노예의 재산은 언제든지 뺏을 수 있다.    
노예인 한족은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관직이나 공직등 중요한 자리에는 몽골인들과 고려인,색목인(북방계)이 우선 등용.
굿잡스 20-11-17 12:22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명말청초의 만주족에 의한 짱국 서토인 대규모 학살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굿잡스 20-11-17 12:28
   
우리나라 복식의 특징은 청동 문화의 고조선시대부터(선대 요하 신석기 문화의 원류를 이어) 근세 조선까지 줄기찬 우리만의 복식의 특징을 이어온데 반해 


서토 최초의 실체하는 왕조는 동북방에서 남하 서토 내륙
황하 하한족을 정복 군림하던 이민족 정복왕조인 동이족 상(은)나라에서부터 시작.(한자의 원형인 갑골문, 옥기문화, 예악, 천자개념, 제천의식의 제단 문화등은 동이족이 원류)

짱국의 복식등 문화 역시 서토 한족들은 이런 북방과 동방 이민족 세력들에게 수시로 털리고 정복 지배 당하면서(피지배종족으로 점철) 강제주입 변화 중구난방.


서토보다 앞선 동아시아 최초의 고조선 금속갑옷   

http://cafe.daum.net/luck5194/MFUT/283?q=%B5%BF%BA%CF%BE%C6%20%B0%A9%BF%CA%C0%C7%20%BF%F8%C1%B6%20%B0%ED%C1%B6%BC%B1-%20%B0%ED%B1%B8%B7%C1����


고대 한류로서 갑옷문화의 국제적 위상(1)    
고조선 갑옷이 중국에 준 영향    

http://m.breaknews.com/a.html?uid=196626



고조선 초기 무덤유적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장식품의 출토상황으로부터 다음의 내용이 정리된다.

첫째는 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인 하가점상층유적에서 출토된 장식단추는 그 양식과 종류에서 고조선의 하가점하층문화와 서로 계승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고조선의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지는 소하 
연문화의 ‘인형방식’ 웃옷에 나타난 둥근달개장식의 사용이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되어 일관되게 후기에 이르기까지 고조선 영역에 전반적으로 확산된 것은 복식문화의 시대적인 조형적 양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달개장식의 사용이 고조선 이후 여러나라시대에 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지고 이후 고구려의 불꽃문양을 표현한 금관과 금동관200)등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태양신을 섬기는 천신신앙201)의 문화적인 전통이 계승되어진 것으로 해석되어진다. 



해모수의 (해)解는 하늘의 해, (모수)慕漱는‘머슴애’를 뜻하는 것으로 해모수는 해의 아들 즉 (일자)日子를 의미한다.208) 즉 고조선의 단군은 해의 아들이라고 불리었으며 태양신을 상징한다. 따라서 고구려는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되고 소하연문화를 이은 고조선문화를 계승하여 태양을 숭배하는 전통과 장식기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원형의 달개장식을 매개체로 하여 태양의 기능인 열과 빛의 모습을 복식 등에 표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오랜 기간 통시적인 발달양상을 보이는 장식기법은 중국이나 북방지역의 복식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한민족의 고유양식인 것이다.

소하연문화의 ‘인형방식’에 나타나는 복식양식과 장식기법은 한국 고대복식의 원형이 중국이나 북방 호복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종래의 통설화 된 견해들이 모순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아울러 홍산문화 복식의 특징적 요소들이 소하연문화로 이어지고 다시 고조선의 고유한 복식전통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옥과 청동 등을 재료로 한 원형의 장식기법은 홍산문화의 복식 전통을 이은 고조선의 고유한 장식기법으로 한민족 복식의 문화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ㅡ소하연(小河沿)문화유적 출토 ‘인형방식(人形蚌飾)’에 보이는 고조선 복식(朴仙姬) 중.


고조선 고(구)려(KOREA) 동방문명권의

한복 복식의 동북아 파급력ㅡ고려풍(열도의 고송총 고분벽화등)

http://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5&wr_id=484396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명나라 육용의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도표로 한눈에 보는 천년 사직 고(구)려의 위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1002&logNo=30152299778


고구려 VS 수나라ㅡ 동아시아의 세계대전급 문명전쟁사.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wr_id=1553119&sca=&sfl=wr_subject%7C%7Cwr


정강의 변 : 서토 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일본 기모노연구가 "기모노의 원류는 백제"

https://www.hankyung.com/life/amp/2004100343698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 ... 나라시대(奈良時代-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해 전체적으로 일본고사기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일본 가타카나 기원은 신라 향찰·이두"  

히로시마대 교수  

http://blog.daum.net/damule/8881879
굿잡스 20-11-17 12:30
   
서토 한족들은 몽골제국 시기에는 최하층 사고 팔리는 노예등급으로 전락.

신라계 황제의 대금의 여진족은 본인들의 부족한 내치 행정과 문화를 오랜 지역 공동체였던(요동) 우리 발해인(고구려계)과 연합 이들을 황실의 외척으로 대거 받아들이면서 수준 높은 문화와 도시문명을 유지했고(서토 송을 멸망시키면서 북경에 고구려계 국무총리격인 장호가 중도 건설 총지휘)

이후 쿠빌라이는 내부분열시기에 이런 북방의 요, 금이 닦아놓은 강북을 기반(발해인들은 원 초기에도 정체성을 유지)으로 대칸에 올랐고

이후 고려가 강화를 맺고 부마국이 되면서 이런 몽골 황실의 문화적 욕구 역시 수준 높은 고려가 충족시키게 되군요.

이 때문에 원 조정내에 고려양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고

이후 원을 몰아낸  명조차 이런 기존 상류 문화의 고려양이 전기에도 상당히 유행.

남북국시대 발해 이후

북방의 패자가 되는 요나라도 5경 체재를 유지하는데

요나라의 실질적 수도격인 중경대정부나

발해땅의 동경등은 우리 발해인 주도로 건설되었군요.

(기본적으로 서토 황하의 하한족 왕조에서는 이런 다중 수도 체재를 선호하지 않군요)

이런 5경 체재는

우리 고조선 고구려 문명권에서 나오던 5부체재가

이후 고구려의 신성한 태왕이 거하는 곳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점하며 천하를 지배하는 5부 대도시 행정으로 발전 이후

남북국시대 발해 5경과 신라 5소경으로

다시 요나라 5경으로 이어지고 이후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대금이 요, 송을 격파 고구려계가 북경에 중도 건설을 총지휘(도시문명과 건설을 주도)
굿잡스 20-11-17 12:31
   
서기 1334년 5월, 원(元)나라 사람의 요청으로 고려 사경승(寫經僧·불경의 글과 그림을 필사하는 승려)이 제작한 감색(紺色) 종이에 금가루로 그린 변상도(變相圖·불교의 경전 내용이나 가르침을 알기 쉽게 그린 불화)가 발견됐다. ‘고려사(高麗史)’는 원나라가 고려 사경승을 원으로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을 정도로 고려의 사경(寫經)기술이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현전 최고(最古) 유물로 평가된다.

https://www.google.co.kr/am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3/06/23/2003062370319.html%3foutputType=amp



몽골 황실과 조정내에는 다양한 고려 양식(고려 의복이나 모자 신발 바둑 고려청자 고려한지 나전칠기 화문석 약과 시루떡 상추쌈등) 뿐 아니라 이런 수준 높은 불교 예술 문화나

세계제국의 통치자였던 대도의 쿠빌라이가 병석에 눕자 주변에 이름난 의원들도 못고치던 병을 신라시대 설총의 후예라는 고려 의원 설경성이 쿠빌라이와 이후 성종을 고치는등 뛰어난 고려 의술을 펼치거나

서구로의 중세 암흑기를 깨고 종교 지식 혁명을 촉발시킨 세계 최초의 고려 금속활자 기술도 이 시기에 전파 및 고려국 유학등이나 고려 몽골간의 다양한 학문 연구 결속과 증진등 여러 방면에서 고려와 몽골간에 수준 높은 문화적 정치적 교류가 증진되었군요.

이런 서토 한족을 노예로 지배한 몽골제국에서 수준 높은 고려의 다양한 문화가 상류 문화로 자리하면서 이후 서토 명 한족 왕조시기에서도 여전한 영향력을 발휘.
mymiky 20-11-17 12:34
   
진상 중에 상 진상들;;;;
수호랑 20-11-17 12:47
   
솔직히 유럽이나 미국의 인종차별은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에 비하면 양반이죠

미국에서 그렇게 인종차별이 심하던 20세기 초중반에도 흑인 음악이나 문화는 미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죠

특히 미국대중음악에서 흑인 음악의 영향은 절대적이었고 이는 미국 사회도 다 인정하는 부분

한마디로 사람은 차별할 지언정 그들의 좋은 문화나 예술은 받아들이고 그들의 문화라고 인정했다는 이야기

반면 중국의 중화사상은 그런게 없죠

한족을 제외한 주변 민족들을 다 오랑캐니 이민족이니 하며 차별한 것은 물론이고

이민족의 문화마저 빼앗아서 자기것으로 둔갑시켰다는 거

한마디로 중국인들이 쓰면 그때부터는 쪽수로 밀어부쳐서 중국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임

이게 바로 중국인들이 말하는 소위 중화사상인 거죠

중국의 중화사상이란 그냥 뻔뻔한 도둑놈들의 낯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이야기
기사란슬롯 20-11-17 18:29
   
중화는 무슨 중하중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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