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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10-26 22:46
쭝화이족 한국의 모든것은 중국문화
 글쓴이 : Korisent
조회 : 2,384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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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남자 21-10-26 22:50
   
중국인들의 문화는 마오의유산뿐..
파연 21-10-26 22:53
   
터키 지역에서도 오스만 투르크의 문화가 다 퍼져서 다들 지들나라꺼라고 우기는 사례가 있다고 독서한 기억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중국하고 한국은 서로 섞여서 살아본 역사가 한번도 없어서..
우겨봐야.. 팩트로 두드려 맞지.. 울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음..
황룡 21-10-26 22:53
   
짜장은 죽어 없어진거 부셔서 사라진거 그게 유산 ㅋㅋㅋ
괴개 21-10-26 23:15
   
니들은 참새 잡는 문화
기드맨 21-10-26 23:32
   
조선이전까지는 중국지역의 수많은 왕조와 싸움으로 점철된 역사였고 조선들어서 성리학 덕분에 중국색을 받아들여서 여기저기 중국색이 나타나긴 했지만 당나라 복색을 가져왔다는건 어불성설이지. 중국애들이 가장 착각하는것중 하나가 우리가 내내 중국을 숭상했다이지만 앞서 적었듯 고려까지는 한족말고 중국을 차지한 넘들과 계속된 투쟁의 역사였고 조선에서 성리학을 국가교리로 삼으면서 당시의 명나라가 같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다는것땜에 형님노릇을 인정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중국사람을 인정한게 아닌 성리학 개념을 숭상한것일뿐 이후 청나라, 공산당으로 이어지면서 저것들과는 너무도 큰 사상적 흐름때문에 아예 서로다른 개별적인 문화로 변질되서 같은 성질을 찾는게 더 어려운 실정. 시진핑의 개인 사상주의가 어떤 과거의 사상보다 우선시되는 공산주의 국가가 과거의 사상은 공산주의 이념과 모순된다며 문화대혁명등을 거쳐서 다 때려부셔가며 부정해놓고선 우리가 조금 문화적으로 잘나간다니까 니들은 우리 문화종주국이라는 개소리를 하기에는 중국색이란게 이젠 있기나 한건지 중국애들 스스로 반성해야 할텐데 그저 좋은건 우리거 나쁜건 우리거 아님을 외치며 호도하는 애들은 사실 중국공산당 이념을 부정하는 매국노가 되는 아이러니가 존재함. 오히려 우리는 유교사상중 좋은것 나쁜것(이틀테면 반상의 구분)을 선별해서 필요한것만 선별 흡수해서 성장하고 있는중. 옛것이 훨씬 좋았으면 뭐하나 현실이 개차반인것을.
계엄하자 21-10-26 23:51
   
쭝화이족 한국의 모든것은 중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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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은 유럽에서 유래함

시진핑은 양복을 즐겨 입음

고로 중공의 모든것은 유럽문화  (콩사당도 유럽이 원류
ashuie 21-10-27 00:17
   
중국문명이라는 것 자체가 죄다 산둥지방에서 시작했고
산둥은 만주문화의 후기문명임.
중국 거대도시들이 왜 동북쪽에 치우쳐 있는가.
어째서 청동기나 철기가 동북쪽에서 차츰 전해져 내려왔는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봐.
벼농사를 제외한 중국의 모든 문명유산은
동북쪽에서 아래로아래로 전해져 내려온것들뿐.
이게 다 우연이지?
밤프림오일 21-10-27 00:39
   
짜앙깨애~
굿잡스 21-10-27 00:57
   
서토 최초의 실체하는 상나라 은허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

장발영(張發潁)의 저서 <봉황토템 동이인 및 그 문화의 공헌>- <시회과학집간>2001년 2기- 에서

동이족 사람들은
- 깃털달린 활과 화살을 발명했으며,
- 문자를 창조했으며,
- 청동기를 제작하고,
- 철을 단련했으며,
- 배(舟)와 수레(車)를 만들었고,
- 농업을 발전시키고 치수(治水)를 하였다.


상나라 자체가 서토 내륙 황하 하한족들이 아니라 동북방에서 남하한 이민 동방족의 정복 왕조사에서 시작.
굿잡스 21-10-27 01:00
   
현대의 쭝국(쭝공)이라는 특정 국가명사와는 달리

※ 근대 이전의 쭝국이란

서토 내륙 황하 하한족들을 정복 지배 군림하면 누구나 될 수 있던 추상 지리 명사였군요.

그리고 그때마다 이민족의 복식등 문화들이 강제 주입 중구난방화(현재는 본인들도 본인게 몬지 제대로 모르니 한복등 주변국에 온갖 해괴한 역사, 문화공정질)

서토국 (하)한족= (북방과 동방 이민족에 수시로 털리고 정복 당한)피지배 노예사로 점철.


[한자의 원형] 복골 및 갑골문자

https://que-sais2020.tistory.com/m/384?category=924910
굿잡스 21-10-27 01:03
   
■ 신석기 혁명, 빗살무늬 토기의 발명지. 

유라시아의 동쪽, 한반도가 가장 앞선 지역이었던 이유 

https://news.v.daum.net/v/20171015140004655?rcmd=rn&f=m

 
■ 서토보다 앞선 동아시아 최초의 고조선 금속갑옷 

http://cafe.daum.net/luck5194/MFUT/283?q=%B5%BF%BA%CF%BE%C6%20%B0%A9%BF%CA%C0%C7%20%BF%F8%C1%B6%20%B0%ED%C1%B6%BC%B1-%20%B0%ED%B1%B8%B7%C1����


■ 심양 정가와자 유적과 같은 계열인

충남 예산 나팔형 동기의 용도 복원안

"이번 전시에서 필자가 가장 오랫동안 관찰한 유물은 '나팔형 청동기'이다. 

글자 그대로 나팔 모양을 닮은 청동기인데 암석 거푸집이 아니라 밀납 원체를 사용한 제작이다. 흔히 '실납법'이 라고 한다. 이와 흡사한 청동기는 놀랍게도 만주 심양의 정가와자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정가와자 유적, 특히 3319호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조선의 왕묘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한반도의 청동기문화가 만주의 고조선 청동기에 계보가 있음을 시사한다 ㅡ정인성 교수

http://m.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5431



■ 고조선의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 동검의 상한 연대.


우가촌 상층문화와 상마석에서 얻은 4개의 교정연대값 사이에 커다란 편차를 보이지 않고 있는 까닭에

■ 우리는 비파형동검과 관련된 이들 유적의 상대연대를 기원전 16~14세기로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거꾸로 추론하여 볼 때, 그와 같은 시기추정은 이른 시기의 비파형동검 유적의 연대를 반영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될 수 있다고 본다.

만약 비파형단검을 초기 고조선의 대표유물로 본다면, 종래 기원전 10세기로 여겨왔던 그 상한연대가 더 위로 끌어올려져야 마땅하리라 생각된다

ㅡ고조선의 성립배경과 발전단계 시론(한창균)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kn&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kn_033_0010_0030&position=-1


■ 최근의 비파형 동검의 상한 연대는 기원전 10세기를 상회하는 연구 주장들이 나오고 있고

초기 청동문화는 기원전 20세기로까지 소급.

나아가 고조선 문화와도 연계된 적봉 지주산 하가점 하층문화기의 교정연대값은 2410±140BC로까지  나오고 있군요.
굿잡스 21-10-27 01:11
   
■ 서토 한족들은 몽골제국 시기에도 최하층 사고 팔리는 노예등급으로 전락.


원 조정내에 고려양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고

이후 원을 몰아낸  명조차 이런 기존 상류 문화의 고려양이 전기에도 상당히 유행.


명나라 육용의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명말청초의 만주족 청에 의한 명나라 서토인 대규모 학살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굿잡스 21-10-27 01:13
   
■ 서토 북조사를 연 북위도 고(구)려의 준식민지급.

북위가 고구려와 동맹 강화를 위해 당시 고구려 귀족 가문과 혼인을 하는데 이 문소황후의 아들이 8대 북위 선무제로 등극하군요.

이후 지지 기반이 약했던 고구려계 선무제는

자신의 외삼촌인 고조와 고현을 불러 들이고 아예 고구려인만 따로 추대하는 고려국대중정(高麗國大中正)이라는 벼슬까지 만들어 북위 조정내에 고구려파벌 붕당을 만들어 장악해버림.


북위의 권력을 쥔 고구려인   

http://blog.naver.com/csred7/80130397982������

여진(女真)의 추장은 곧 신라인인데, 완안씨(完顏氏)라 호칭하였다. 완안(完顏)은 한어(漢言)로 「왕(王)」과 같다.

ㅡ『송막기문』남송 홍호가 포로로 잡혀간 송 군주의

송환을 위해 15년간 대금의 유배생활을 보내면서 쓴 견문록.


■ 정강의 변 : 서토 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女真酋長乃新羅人 (송막기문- 남송기록)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其初酋長本新羅人" (몽골  금지(金志))     
(여진의  초기지도자는 신라인이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 (금사 (金史))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왔을 때  60세였다.)
굿잡스 21-10-27 01:14
   
■ (동북방의 거란, 말갈(여진)등과 열도의 왜(Jap)등에) 수천년 동방문명권을 구축 군림해온
우리 고조선 고구려문명권의 영향력에 대한 자각.


고(구)려(KOREA)의 토대가 되는 초기 고조선 토착재지 5부는

이후

신성한 태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점하며 천하를 지배하는 5부 행정 대도시 문명으로 발전 이후

 남북국시대에 발해 5경과 신라 5소경에 이런 발해의 5경 체계는

다시 북방의 패자가 되는 요의 5경 체계로

대금  역시 고구려계 국무총리가 송을 멸망시키고 북경에 중도 건설을 총지휘. 이후 쿠빌라이는 이런 대금이 닦아놓은 서토 강북을 기반으로 몽골 내부 분열시기에 물자를 통제하면서 대칸에 오를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되군요.(이를 바탕으로 남송 정벌)

※ 오늘날 서토국의 수도가 북경이 된 연원.


6세기 가장 선진적이라는 열도의 풍경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07&wr_id=179751&page=


Jap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

https://www.dogdrip.net/userdog/296559956



오늘날 도시 배수로와 큰 차이가 없었던 신라 서라벌의 도시 인프라.


■ 유럽 최대 도시라는 로마보다 더 컸던 세계 4대 대도시 중 하나였던 100만의 거대 신라 서라벌.

서라벌은 바둑판 형태의 정렬된 계획도시 아래

일정 블럭의 방이라는 각 구역내 공간에는 각 집안내 우물 옆에 배수로가 집밖 담장의 소배수로를 통해 다시 대배수로 연결되어 있는게 확인되군요(길도 마차가 단니는 도로와 사람이 단니는 인도가 구분)

천년의 신라 수도였던 서라벌은 남북국시대 전성기를 맞으며 지금의 수도 서울 광역시(거대 메트로 폴리탄)처럼 지속적으로 팽창(삼국시대 이미 우리는 유럽 최대 도시인 로마에 비견되는 고구려 3경, 백제 사비성, 신라 서라벌의 5개 이상의 거대 대도시 체재를 구축)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unayoon715&logNo=220882810189&proxyReferer=https:%2F%2F


서라벌 디지털 복원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2096873


발해  

당나라 산둥 등주 공격  

장문휴는 732년(인안 13) 무왕의 명령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산둥 반도에 있는 당의 국제무역항 등주를 공격해, 당의 동방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발해 무왕의 대외팽창에 위협을 느낀 동북만주의 흑수말갈이 발해와 우호관계를 단절하고 당과의 연결을 꾀하여 발해를 위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무왕은 흑수말갈의 정벌을 결정했으나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발해와 당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흑수말갈의 정벌을 중지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당으로 망명했다.당에 대한 강경책으로 돌아선 발해는 수군을 동원하여 등주를 공격 초토화시켜버리고 육지로는 요서로 밀어버림.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무왕-  

발해가 점차 강성함에 따라 흑수 역시 그 소속이 되었다.  
-당회요 말갈-  



'고려(KOREA)국왕대흠무언(高麗國王大欽茂言)'   

≪속일본기(續日本紀)≫ ㅡ남북국시대 발해 문왕(文王) 대흠무가 왜국에 보낸 국서에.


천통 인안 대흥등 독자적 연호 사용.


인도의 타지마할의 기단 크기 94m, 건물 크기 57m

발해의 상경용천부 제2궁전 기단 크기 120m, 건물 크기 93.5m(당대 서토 당나라 장안성의 최대 건물인 함원전의 11칸보다 큰 무려 19칸)





USA 캘리포니아 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discover誌“1998년 6월호「일본인의 뿌리」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켰다.”


"Jap 가타카나 기원은 신라 향찰·이두"  

히로시마대 교수  

http://blog.daum.net/damule/8881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