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도덕률과 농업에 대한 문제로 술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가했지만 술이 사라질 수는 없었죠, 마치 미국의 금주령 시대에도 술은 음으로 계속해서 애용(?)된 것처럼 조선에도 나라에서 법으로 술을 마시지 말라해도 씨알이 먹히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목 내어 놓고도 술 마시겠다는데 그걸 어찌할 방법이 있는것이 아니죠.
아무튼 술을 집에서 담가 마시기도 했지만 엄연히 술장사도 존재했습니다, 우리는 조선시대 하면 통털어 <주막>만을 이야기 하지만 사실 술 마시는 곳은 꽤나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사극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 중에 하나가 싸리나무 대문에 호롱등이 있고 그 등에는 (酒)자를 적어넣은 주막이 있죠. 이 주막이 있는 곳은 주로 장터나 광산촌, 나루터, 큰 고개 밑의 길목등이 있습니다, 장보러 나와서 한잔하고 들어가고 힘들여 높은 고개를 넘어가서 쉬는 의미로 한잔하고 힘든 일을 마치고 한잔하기 딱 적당한 위치였죠.
주막은 보통 일반 민가에 술집 등을 달고 몇가지 안주와 탁주를 판매 했습니다, 규모가 좀 큰 주막은 말이나 나귀를 맬 자리를 주기도 했고 좀 더 좋은 술을 따로 팔기도 했죠 그리고 술 이외에도 간단한 식사거리도 팔았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술도 파는 서민 식당이랄까요? 독특한 점은 주막에서 술 한잔 하고 식사한끼 하면 숙박을 위한 방은 무료로 내어 주었습니다, 물론 일인 일실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한방에 끼어 자야 했지만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나무 밑이나 헛간에서 자지 않는 것만해도 감지덕지할 일이었죠.
주막에서는 보통 주모라고 불리는 여성이 거의 모든 일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많은 주막의 경우 남자 아이를 부리기도 했는데 이 아이들을 <중노미>라고 불렀죠, 이들은 서빙을 하거나 공짜로 안주를 훔쳐먹는 사람이 있는지를 감시하거나 했습니다 그리고 외부에 나가는 심부름을 하기도 했죠, 물론 주막의 규모가 커지면 그에 따라 쓰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주막과는 다른 술집도 있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따로 넣을까 아니면 같이 붙일까 고민했습니다) 목로주점과 받침술집이 그것이죠,
받침술집은 양조장 비슷한 곳입니다, 양조장처럼 크게 술을 만들지는 못하고 개인이 집에서 보통 집보다는 좀 많이 술을 빚어 파는데 매장을 두고 술을 파는것이 아니라 개인이 술병을 가지고 가서 담아오는 형식이죠. 우리말에 "술 받아온다"라는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주전자를 들고 술집에 술을 받아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그 술을 한모금씩 마시다가 결국 집에 올때는 취해버리는 이야기는 꽤나 많이 알려져 있죠, 이런 이야기는 조선시대 부터도 있었던 것입니다.
주모 얼굴보기 힘든 내외술집.
주막도 아니고 색주가도 아니고 기생집도 아니고... 좀 독특한 술집이 바로 내외술집 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유학의 나라였습니다, 하층민들이야 크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만 양반이나 좀 배운 중인 이상의 집안이면 여성이 함부로 남성 앞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죠 당연히 술판다고 희희덕 거리며 나서는 것은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집안이 망해서 남편도 없고 일가도 없는 사람들은 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가서 얼굴 내밀고 장사를 할 수도 없고 배운 적이 없으니 갑자기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농사는 주로 남자들의 일이었죠)그래서 가진 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었죠.
일단 배운 집안이라 다 털어먹어도 살고있는 집은 어느정도 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이런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술 빚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거기다 음식 수준도 일반 주막과는 차별화되어 있었죠, 좀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친구와 담소하며 술 한잔 하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습니다, 양반이 기생집 간다는 욕을 들어먹을 일도 없고 말입니다.
이 술집은 손님이 들어오면 주인이 안주거리와 술을 준비해 상을 차려 마루에 살짝 올려 두고는 방으로 가버리죠 그러면 손님이 직접 가서 술상을 가져다가 마당의 평상 같은 곳에 올라 술을 마시는 것입니다. 큰 집이라면 이리하고 작은 집이라면 주인이 방문을 살짝 열고 그 틈으로 상을 내밀면 손님이 상을 받아 방과 좀 떨어진 아무곳이나 찾아 마시기도 했지요.
유교와 현실이 짬뽕된 상황에서 나온 조선만의 독특한 술집이었습니다만 방문객들도 나름대로 고급술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었습니다.
색주가 = 방석집
미성년자 분들이나 술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는 <방석집>이라는 어마어마한 술집이 존재합니다 방에 들어가 궤짝으로 술을 퍼다가 아가씨 끼고 흥청망청 마시는 곳이죠. 조선시대에도 이런 곳이 존재했습니다, 기방과 색주가를 혼돈하지 마세요 둘은 상당히 다른 곳입니다.
보통 큰 도시에 한두 곳씩 존재했었는데 한 주인이 영업하는 곳도 있었고 여러 주점들이 한꺼번에 모여 영업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호객행위도 있었고 교태 가득한 술집 아가씨의 웃음 소리가 들리기도 했었겠죠, 돈 좀 있고 질펀하게 놀아보고 싶어하는 한량들의 아지트였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2차 3차도 나왔었겠지만 이런 은밀한 것들이야 뭐 알 수가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기방이 있습니다, 기생이 있고 가야금 소리가 덩더쿵 하고 나고 양반들이 술잔을 들고 '허허허허' 웃으며 술마시는 그런 모습이 떠오르는 곳이 바로 기방입니다. 여기에 있는 기생들은 일반 하층민과는 비교도 할 수 없고 지적 수준 또한 당대 지식인들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식 뿐만 아니라 예능에도 능해야 하고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는 능력 또한 출중한 여성들이 존재하던 곳이었죠, 잘못 아는 분들은 기생이 몸도 판다라고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사실 기생은 몸파는 것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당시 일반인보다 자유로운 성생활이 가능했다고 해서 그것이 성을 사고 팔았다는 의미가 아니죠, 그리고 몸을 팔지 않았다고 해서 정조를 지켰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당연히 이런곳은 한번 술마시는데 드는 비용이 엄청났습니다, 색주가처럼 일반인도 들어갈만한 그런 만만한 곳이 아니었죠 기방 출입하다가 가산 탕진하고 폐인된 이야기는 흔합니다. 그런데 양반들만 들어갔을까요? 사실 법으로 양반은 이런 곳에 출입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유학의 정신을 받아 청렴해야할 양반이 기방에 출입한다는 것은 용납 못할 일이었지요. 뭐... 물론 현실은 전혀 아니올시다 였습니다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고객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바로 돈 많은 중인이나 상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출입의 제한을 받을 이유가 없었죠 또 조선시대 권력으로 돈을 번 양반들을 제외하면 가장 돈을 많이 버는 계층은 바로 중인들이었습니다. 역관으로 근무한 중인들이 조선 최대의 거부였다는 사실은 조금만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죠.
기방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철저한 계급사회 속에서 고급 문화를 접하기 위한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 곳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죠, 양반은 그런 속에서 묻어가는 모습들이었고요 ^^;
한양 가게의 절반은 술집
군칠이집은 18세기 한양 술집의 대명사였다. 한양은 매우 많은 술집이 있었고, 규모와 종류가 단일하지 않았다. 군칠이집만큼은 아니라도 수십에서 백여 개가 넘는 술독을 보유하여 술을 파는 큰 술집이 있었다. 또 규모가 그보다는 못해도 중소 규모의 술집은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특이한 상점으로 은국전(銀麯廛)이 종로의 시전 거리에 있었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조정에 역을 지는 시전의 하나로 술을 빚어 파는 이들에게 술의 원료인 누룩을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일종의 도가(都家)였다. 도가였으므로 은국전은 시전에 주는 특권을 누려서 주류 판매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특권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 누룩을 파는 중소 규모의 난전(亂廛)도 많았는데 그것을 막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규모를 가리지 않고 술집에서는 자유롭게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었다.
<운종가> 시전풍경조선 후기의 시전 풍경을 담은 풍속화로 당시 운종가 거리를 짐작할 수 있다.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양), 한국콘텐츠진흥원
수많은 종류의 술집이 서로 술맛과 음식맛으로 경쟁하면서 한양 상권에서 가장 번성한 업종의 하나였다. 몇몇 기록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해보자. 정조대 후반에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활동한 이면승(李勉昇, 1766~1835)은 술 제조의 금지에 관한 논란을 논한 「금양의(禁釀議)」에서 한양 술집 현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李勉昇, 『感恩編』, 「禁釀議」
한양의 시장과 골목이 술과 안주의 소비로 흥청망청하는 술집으로 도배된 풍경을 폭로하고 있다. 글의 성격상 과장이 얼마간 있다고 해도 실상을 크게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같은 글에서 한양성 안에 있는 술집[酒戶]이 수천 호이고, 그 술집에 종사하거나 연관되어 있는 호구(戶口)가 수만 명에 달한다고 적었다. 그 숫자는 한양성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서 10의 2에 이르는 엄청난 비중이다. 과장이 있다손 치더라도 경악할 만한 수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의 술집 - 술꾼으로 흥청망청한 18세기 서울의 술집 풍경 (18세기, 세계 도시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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