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새 잡담게시판으로 가기
(구)잡담게시판 [1] [2] [3] [4] [5] [6]
HOME > 커뮤니티 > 잡담 게시판
 
작성일 : 14-09-04 16:06
6세기 열도의 선진 풍경
 글쓴이 : 굿잡스
조회 : 5,229  

 
 
열도는 부산과 근거리의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서열도 즉 후쿠오카를 중심으
 
문명이 싹트기 시작하는데 대마도와 이끼섬을 징검다리로 고조선시대 우
 
리 선조들의 본격적 해양 개척시대가 열리면서
 
후쿠오카 일대로 농경과 청동,철기문화를 전파시키게 됩니다.
 
(열도의 주원주민인 조몬인들은 동열도를 주본거지로 에도시대까지도 수렵
 
활을 할 정도로 미개)
 
이후 우리의 본격적 삼국시대로 접어 들어가는
 
3세기에서 늦어도 7세기경까지 서열도에서는
 
고분들이 여기 저기 출현하는데 이를 고분시대로
 
부릅니다.
 
윗그림은 그중에서도  열도 고분시대에 발견되는 가장 크고 선진적?인
 
미츠데라 유적(6세기 초)임. ㅋ
 
도시취락이라고 전혀 부를 수 없는 인구 희박에 단지
 
저기 뒷쪽 고분 양식과 앞쪽에 사각형의
 
방어시설이 있는데 정치 지배자가 사는
 
굴립주식(과수원 원두막 형태임 ㅋ) 양식입니다.
 
당연히 이당시의 저런 방어 시설은 우리 가야 백제의 소규모
 
호족 집단들이 열도에 300여개가 난립 개척하든
 
시대인데 이곳에서 살다 죽으면서 나오는게 저런 고분양식들임. ㅋ
 
나머지 취락 마을의 주거 양식은 땅을 파고 움집생활을 했고 8세기까지도 이
 
게 대부분이였던게 열도의 문명 생활 수준이였고
 
우리의 근세 조선이 들어서기 직전 즉 14세기까지도 열도의 일반 서민들은
 
움집생활을 할 정도로 미개했음(이건 울나라 신석기 청동기시대나 봄직한
 
ㅋ)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굿잡스 14-09-04 16:10
   
최근에 열도의 고대사학계 권위자인 도노 하루유키 나라대 교수가 예군 묘지명을 근거로

일본이라는 명칭은 본래 백제땅을 지칭했는데 이후 백제가 멸망하고 일부 백제인들이

열도에 정착 본격적 우리나라할때 나라 헤이안 극소수(백제인 및 일부 고구려 신라인등) 귀족

시대를 열게 되면서 왜라는 단어가 부끄럽다보니 백제땅을 부르든 일본이라는 명칭을

국호로 바꾸면서 본격적 국호가 등장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일본은 원래 백제땅 일컫는 말이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144835
소로스 14-09-04 16:10
   
따지고 보면

우리선조들이 지어놓고 만들어 놓았던것들이

일본의 문화재로 둔갑되어 있는 경우가  아주 많을겁니다
     
굿잡스 14-09-04 16:13
   
ㅋ 실제 잽쪽 고고학자들이

푸념 아닌 푸념이 열도에서 고대사 관련 유적이 발굴되면 될수록

그냥 울나라가 열도를 개척, 지배한 역사를 더욱 뚜렷히 확인시키는

새삼스러운 작업이라는 소리가 어제 오늘 흘러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ㅋ

잽극우들이 열등감에 부들 부들 떨면서 조작 왜곡을 쳐하는 이유가 있죠 ㅋ
쿨쓰 14-09-04 16:12
   
선조들이 원숭이라 부른 이유가 있군요
Chaeja 14-09-04 16:15
   
그래서 일부 원숭이들이 한국인들보고 "백제랑 니들이 뭔상관?" 이라는 드립을 치죠 ㅎㅎ
나머지는 아직도 문명의 이동이 열도 => 대륙 이라고 말도안되는 헛소리를 하고있고
     
햄돌 14-09-04 17:55
   
물이 아래서 위로 흐른다는 것처럼 정말 개소리네요 ㅋ
굿잡스 14-09-04 16:21
   
참고로 이 시대를 일본시대나 일본이라는 나라로 부르는건 잘못된 시각입니다.

그냥 우리의 해양 개척 역사이면서 우리의 외치영토로 백제의 담로 지배지라고 말하는게 정확함.

이후 백제가 멸망하고 나라 헤이안 시대  이후 문을 걸어 잡구고

막부시대로 들어서면서 점차 왜국적 독자적 활동이 촉진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전국시대에도 왜국의 지배층 사이에는 조선대국관(朝鮮大國観)이라고

조선을 대국으로 그 문명을 흠모했음. 그래서 실제 조선 임금을 황제,황상으로 불렀구요.

이런 사고는 임진왜란시기에도 사야가 같은 장수가(선조에 성을 하사받은 김충선 장군)

동래성 전투 다음날 3000여명을 데리고

명분없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조선에 투항하는 항왜 세력들에게도 잘 나타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도요토미가 패하고 도쿠가와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에도막부시대에도

조선통신사를 통한 선진 문화 교류정책과 에도막부의 정치적 당위성을 위해 한해 쌀 생산량의

12퍼센트를 쏟아 부었음.
관성의법칙 14-09-04 16:21
   
그당시 한국 주거환경도 궁금합니다.
     
굿잡스 14-09-04 16:24
   
신라 서라벌 3D 복원

http://blog.naver.com/peece51/140202802531


삼국시대도 고구려 3경에 백제 위례성이나 사비성 신라 서라벌이고
 
로마 이상의 대도시급에 고려도 4경체재(개경(개성),서경(평양)
 
남경(서울),동경(경주)의 위용을 보이지만 경주 서라벌이
 
과장 없이 100만 어쩌고는 천년의 오랜 시간동안 수도로 점차 그리고 계
 
획적 설비에 따라(실제 경주일대 도시유적을 발굴하다 보면 이미 이때
 
수레나 마차가 지나단니는 도로와 인도구분 그리고 수로 시설이고 개인집 마
 
다 우물 그리고 전성기에는 서라벌 전체가 기와로 도배되고 금기와니 개인집
 
마다 슟으로 밥해먹는 기록들이 나올 만큼 번성하고 선진적 도시설계 모습과
 
주거생활을 보이는)


1400년전 해양대국 백제(Baekje)의 사비성(sabi-sung) 도시

(이 관련 유튜브 동영상이 있었는데 안되군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old9055&logNo=10147809420







왜국의 고대 주거건물들과 내부생활 모습 (동영상)

http://blog.daum.net/hwang7306/3120654



예전에 잠시 언급했지만

기와라고 우리랑 잽과는 다같은 기와가 전혀 아닙니다.

울나라는 암기와, 숫기와가 세트형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고급 기와양식이고

잽은 소위 말하는 보급형 그냥 암기와 하나의 단촐한 방식임.(이것도 당시

에도시대 대화재가 빈번해서 기와 장려 어쩌고 해도 잽 서민들에게는 꿈이였다는.)

이런 기와도 열도는 초기에는 너무 귀해서 궁성에서 조차 판개궁(板蓋宮)이라고

판자 창고같은 형태가 궁성 건물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ㅋ



한마디로 말해서 14세기 왜국의 서민 주거양식과 생활상은

그보다 천년전 백제인 일반 서민보다 열악 미개했습니다. ㅋ
          
관성의법칙 14-09-04 16:53
   
같은 시대라고 하기엔 말도 안될정도로 차이가 심하네요..

참.....서양문물이 들어올 시기의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너무 약했었던게...안타깝습니다.
               
굿잡스 14-09-04 17:06
   
고종이 근대국가인 대한제국(1897년)을 세우고 1903년에 본격적 사단급 근대

군편제가 완료되고 대규모 군동원이 가능한 징병제 전환을 논의했지만

잽은 자국의 농업잉여생산물을 쥐어짜내어 서양에서 마구 근대무기

수입에 열을 가하면서 징병제를 완료하고 영미 서포터의 대규모 차관까지

받으면서 준비하던 상황이라

1904년 러일전쟁에서 극동까지 피로에 지친 러함대를

깨면서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거죠. 그런 잽의 막대한 부채를

근대적 금융과 화폐제도가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대한제국을 통해 막대한 조세

와 인적, 물적, 자원의 악랄한 수탈을 통해서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 거죠.


조선 말기는 조선 세도 정치의 후유증도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의 경우는 서양의

군사 도발에 대해 나름 잘막았던 시기입니다(왜는 도리어 미 흑선 대포

몇방에 불평등 조약을 맺고 에도의 권위 추락과 이에 따른 국내의 고인플레

이션과 더욱 막장화 되는 경제 상황에서 들고 일어난 거죠).

왜에 비해 지켜야할 문화와 전통도 깊던 나라였고.

그러나 이런 내부적 홍역을 겪으면서 조선도 근대국가인 대한제국을 자체

수립하면서 짧은 기간 상당한 근대적 거의 모든 제도, 인프라를 구축해

나갔던.(이전에도 말했지만 조선 후기 즉 18세기에는 조선의 신분제는

이미 유명무실화 되어 1901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공노비는 이미 왕에 의해

해방된 상태였습니다.(사노비도 고종시기에 폐지). 왕조시대 군주가

알아서 이렇게 신분제를 타파한 건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경우죠.

그만큼 조선의 군주는 철종 정도 빼고는 나름 성군에 상당한 지식과

개방 개혁성까지 가진 석학들이었음)
               
굿잡스 14-09-04 17:09
   
조선 후기 이미 와해되어 버린 신분제 (통계자료)


<순조(재위 1800~1834)는 원년 1월에, "임금이 백성을 볼 때는 귀천이 없
 
고, 내외가 없으며 하나같이 적자(赤子)이다, 노(奴) 이다, 비(婢)이다 하여
 
구분하는 것은 어찌 백성을 똑같이 보는 일이겠느냐. 왕실 노비 36,974명과
 
중앙 관청 노비 29,093명을 양인이 되도록 허락하고, 승정원에 명을 내려 노
 
비안(奴婢案)을 모아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조선의 신분제 사회는 급격히 힘을 잃어 버리고 있었습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112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A1%B0%EC%84%A0+%EC%8B%A0%EB%B6%84%EC%A0%9C&sop=and
굿잡스 14-09-04 16:31
   
에도시대의 대다수 왜인들의 실제 삶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171418&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C%97%90%EB%8F%84%EC%8B%9C%EB%8C%80&sop=and


“이나리야마”에 새겨진 백제의 열도 지배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


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68467§ion=sc1§ion2


흔히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백제의 칠지도 명문에 대해 설왕설래하지만  명문이 새겨진 쇠

칼은 열도에서 칠지도 이외에도 다양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두식 한자죠. 즉 삼국시

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에만 보이는 뜻이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식 발음을 위해 차용하여

사용되는 이두식 한자 명문이 새겨진 쇠칼들이 열도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그기에는 백제가

지배한 담로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뚜렷한 흔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사카는 잽강점기 전까지 왜국에선 백제주로 표기 되었네요)
아이 14-09-04 16:36
   
하여간 신라가 문제임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가 이겼었으면....
     
굿잡스 14-09-04 16:41
   
ㅋ당시는 비록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같은 우리 고조선 민족에서 나온

세력들이라고 해도 철저히 자국 중심, 자국 이익으로 살았던 시대입니다.

단지 신라만이 아니라.(지금도 남북한 다르지 않고)

백제 역시 열도 세력을 활용해서 끊임없이

압박을 했고 신라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살아남기 위해 했던 것이죠.(가만히 앉아서 속절없이 당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후 신라는 백제, 고구려인들을 지원 당을 몰아냈고

통합과정을 만들어가면서 남북국 시대를 열었으며

신라 장보고는 동북아 해상 무역을 장악했으며 서라벌의 도시문명은

과장없는 선진적 100만에 육박하던 당시 세계 4대 대도시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정도의 나라였습니다.(실제 아랍인들은 신라를 동방의 이상향이라고 했던

기록도 있음). 그리고 이런 도시문명은

이후 중세 고려가 이어받아 4경체재로 찬란한 귀족시대를 열어가게 된

밑거름이 됩니다.
북창 14-09-04 16:56
   
신라는 수도 서라벌에 인구 100만이 사는 거대 도시가 있던 시절에...열도는 이제막...백제 유민이 주축이 된 첫왕조가 들어서고 있었죠.
jclulu 14-09-04 17:15
   
항상 굿잡스님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나와나 14-09-04 22:10
   
사실 애초에 고대 한일은 비교대상이 될 수가 없지요
마치 수메르 문명과 고대 영국을 비교하는 꼴이랄까요?
SRK1059 14-09-05 08:11
   
신라 경주의 인구 백만 이야기가 나왔던데
7세기경 세계에서 인구 백만을 넘는 도시가 세 곳이 있었답니다.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현재의 이스탄불), 그리고 신라의 서라별 (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