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즉문즉설
출처 : http://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64440&page=1&p_no=74
유럽을 여행하며 종교 전쟁에 대해 의문을 가진 한 청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지금 더블린에 여행하러 와 있습니다. 종교 전쟁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저는 지금 경주에서 출발하여 중국을 거쳐 중앙아시아를 지나 이란과 터키, 로마를 거쳐 지금 더블린에 와 있는데, 여행을 하다보니 3가지 종교를 만났습니다. 한국과 중국에서 불교를 만났고, 이란과 터키에서 이슬람을 만났고, 서유럽에서 카톨릭을 만났습니다. 종교가 사람들의 삶에 많은 도움을 주고 긍정적인 효과를 주기도 하지만, 종교를 통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종교 전쟁을 보며 우리가 어떻게 종교를 믿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종교는 자연발생적인 원시적인 종교가 있고, 깨달은 이가 삶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종교가 있습니다. 자연발생적인 종교는 기본 원리가 인과응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좋게 말하면 좋게 들리지만, 법률로 따지만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같은 얘기입니다. 나쁜 짓 하면 징벌을 당하는 겁니다. 힌두교에서 얘기하는 것도 결국 나쁜 짓 하면 나쁜 과보를 받고 좋은 일 하면 좋은 과보를 받는다, 유대교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으면 소돔과 고모라에서처럼 유황불로 지져버리고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버리고 이렇게 다 징벌을 합니다. 이것을 법으로 정한 것이 함무라비 법전의 논리예요. 이런 인과응보적 사고가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부처님이 가르치는 종교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그런 인과응보적인 것이 아니에요. 즉, 예수님을 십자가게 못 박아 죽였으면 그 사람은 당연히 인과응보적으로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했나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구약의 하나님은 징벌의 하나님이라면, 예수님 이후의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크리스트교는 원시 종교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자기 종교를 안 믿거나 하면 징벌을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징벌을 하든 질문자가 징벌을 하든 징벌을 합니다. 십자군 전쟁 같은 경우를 보면 다 보복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종교의 이름은 있지만 실제로 그 종교를 창시한 성인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등학교에서 전교에서 1등하는 아이는 서울대 의대를 가든 법대를 가든 충분히 합격하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의 어머니가 ‘우리 아이 서울대 넣어달라’고 하루에 천배씩 기도할까요? 안할까요? 안하겠지요. 그런데 우리 아이의 성적으로는 서울대 들어가기가 좀 어려운데도 서울대를 가고 싶으면 죽기 살기로 기도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만약 기도를 해서 들어갔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실력이 안 되는 아이를 넣었다는 것은 실력 되는 아이 하나를 빼고 넣어줬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부처님이나 하나님이 하는 역할이 입시 브로커 역할이잖아요. 성인으로서의 하나님과 부처님은 이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종교는 다 이런 식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종교는 원시 종교입니다 종교의 이름이 어떻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종교 간의 갈등 이런 것들은 예수님과 부처님, 마호메트와는 관계가 없는 그냥 세속적인 이해의 충돌이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세속적 이익을 종교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특히 갈등이 심한 이유는 자기만이 옳다는 믿음이 강조되는 것이 종교의 성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보통 자기가 옳다 하지만 틀릴 수가 있는데, 진리라는 이름으로 나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앙이다 보니까 종교는 서로 협력하고 타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종교 사회가 되면서 이 문제는 점점 풀리어 가지 않겠나 싶고, 종교 간의 전쟁은 과거의 문화유산이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즉 ‘원수를 사랑하라’ 는 것은 기독교 안에는 없고 오히려 세속에 있습니다. 세속은 지금 법률적으로 다 남녀 평등 실현하고, 인종 평등, 민족 평등을 실현하고 요즘은 성적 지향까지 다 개방하고 있잖아요. 신체장애자도 차별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거꾸로 종교는 아직도 신체장애가 되면 하나님의 벌이라든지 전생의 업보라든지 이렇게 설명하잖아요. 이것은 신체장애가 무슨 죄라는 얘기 아닙니까.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라든지, 성적 지향이 다른 것이 죄라든지, 그러니까 이것은 아직도 옛날의 원시적인 인간의 사고를 못 벗어난 현상입니다.
옛날에는 전쟁에서 이기면 적군 중에 부상당한 사람도 다 죽이고, 성을 점령하면 어린 애까지 다 죽였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적병이라 하더라도 공격력이 없는 부상자는 치료해주고 포로는 보호해서 나중에 송환해주고 전쟁에 상관없는 민간인은 다치게 하지 말자고 합니다. 이렇게 세속이 훨씬 더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접해 가고 있습니다. 반면 종교는 아직도 원시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 전쟁은 예수님과 부처님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냥 종교라는 이름의 세속적인 이익 충돌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종교가 무엇 때문에 거대한 탑이 필요하고 거대한 성전이 필요하겠습니까? 거대한 궁전과 성당들을 다 누가 지은 것입니까? 황제가 지었잖아요.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공인을 받으면서 황제가 바로 교회의 수장이 되었잖아요.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세속화가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종교 문제가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입니다. 이 세속적인 문제를 갖고 자꾸 종교라고 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의 종교이기 때문에 현실의 종교의 공허함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님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세에서는 신이 다 세상을 움직였잖아요. 천체의 움직임도 신이 한다고 했는데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발견되면서 신의 영역에서 벗어났죠. 모든 생명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했는데, 다윈의 ‘종의 기원’이 나오면서 창조할 필요가 없어졌잖아요. 인간의 선한 소리 악한 소리를 신의 소리 악마의 소리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프로이트에 의해서 무의식의 세계라고 다 밝혀졌잖아요. 이렇게 엄청난 기성 사회의 벽을 뚫고 새로운 세상으로 왔기 때문에 세속이 더 진리에 가깝고 진보적이 되었고, 종교가 더 기득권화되어 있고 어리석음에 빠져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부정입학이 다 없어졌잖아요. 있더라도 다 몰래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종교는 공공연히 하잖아요. 교회나 사찰 앞에서 ‘기도해서 유명대학에 들어갔다’ 선전하는데, 이건 부정입학 했다는 얘기거든요. 이것을 공공연히 하잖아요. 이런 것에 대해서 이제 우리는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 간의 전쟁이라 하지만 그냥 세상의 이념 전쟁, 즉 세속적 이익 다툼의 한 수단으로 종교가 이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또 종교 자체가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또 과거에 어떤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 살아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는 더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지금 유학생활은 괴롭게 보내고 유학생활이 끝나면 행복할거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공부할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는 자세로, 직장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한 자세로, 젊을 때가 가장 행복한 자세로 임하세요.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 희생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후회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내일 행복하기 위해서 오늘 희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되는 대로 살아라’ 이런 얘기도 아닙니다. 밥만 먹고 공부만 해도 되는 때가 인생에서 몇 년 되겠습니까? 그런 시기를 즐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부도 하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다면, 애인과 같이 공부를 하면 됩니다. 공부도 하고 술도 먹고 싶다면, 술집에서 공부 토론을 하면 됩니다. 자꾸 분리하지 마세요. 왜 우리는 연애를 하면 공부는 포기해야 하고, 술을 먹으면서 공부 얘기를 하면 안 될까요? 공부를 하는 유학생은 공부에 초점을 맞추고, 필요한 것은 곁들어서 같이 하면 됩니다. 물론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요. 그런 자세로 자기 삶을 항상 행복하게 만들어나가야지 누구도 나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떨까요? 지금 내가 욕심 부리는 것을 도와줄까요? 가난한 나라 굶어죽는 사람들을 구제할까요? 부처님이나 하나님이 계신다면 다른 곳에 할 일이 많겠지요. 나를 도와준다고 해도 “아이고, 부처님. 저는 제가 알아서 살 테니까 저 사람들 좀 도와주세요” 이런 자세가 신앙입니다. 욕심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고난에 처할 때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이렇게 말했어요.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또 예수님께서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리 속에서 자유를 얻고 행복을 얻어 나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