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고통이 있는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춥다 덥다, 높다 낮다 라는 개념과 같이 고통이라는 것도 즐거움, 쾌락 등의 상대적 개념입니다.
즐거움이나 쾌락만 있는 삶이 즐겁거나 쾌락으로 여겨질 수 있을까요? 3이라고 하는 쾌락지수가 있는데 이것을 영혼의 나이로 5천억년 지속한다고 생각 해 보세요. 지루해서 자,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럼 그 쾌락지수를 4로 올립니다. 또 5천억년이 지난다면? 영생 자체가 그런 식이라면요?
다시 쾌락지수 10에서 쾌락지수 4로 낮춘다면 3에서 4로 올라 갔을 때는 좋았지만 이제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으로 여겨지겠죠.
이 우주에 고통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자 창조주의 배려입니다. 전생에 수 많은 영겁의 세월을 쾌락도 지겹다고 한가하게 보내고 있다면 아마 지구에 태어나서 고생 좀 실컷 하다가고 싶은 생각도 들 것입니다.
불교에서 요즘, 일체의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일체개고 대신에 그 자리를 열반적정이 대신합니다. 일체의 모든 것이 열반적정이란 뜻입니다.
아들 딸에게 고통이 없는 삶만 지속 된다면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유전 2014/12/14 21:33)
[심연] [2022.09.27 오전 00:53] <승만경 中> "세존이시여, 만일 여래장이 없으면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게 여겨 구할 수 없나니, 그 까닭을 말하면, 지금 있는 6식(識)과 이 알음알이 지혜[心法智]와의 일곱 가지 법은 잠깐도 머물러 있지 못하므로 모든 괴로움을 심지 못하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게 여겨 구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전제(前際)가 없어서 일어나지 아니하고 없어지지 아니하는 법이므로 모든 괴로움을 심으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좋게 여겨 구합니다."
유전 2022.09.27. 00:54
(반야심경) 차유 고 피유 此有 故 彼有 :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다. 즉 신나이 메시지 처럼 고통이 있으니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죠.
[유전] [오전 2:07] (누가복음 2장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유전] [오전 2:17] 무색계 공사상에만 함몰된 자들이 하늘에 영광(고통 없는 열반)만 찾기를 좋아하고 땅에서의 평화를 잘 말하지 않습니다. 홀로 있는 절대계는 아예 없으며 상대계가 없으면 절대계 조차 있을 수 없습니다. 상대계가 있기 때문에 절대계가 있는 것으로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늘의 영광이 아니라 땅에서의 평화가 중요하고 땅에서의 평화가 모두 완성될 때 그 땅이 바로 하늘이 됩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으며 그래서 땅에서의 지혜가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