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이슈 게시판
 
작성일 : 21-04-06 20:46
문화산업에 퍼지는 '동북공정' 유감... '차이나머니' 의존 줄여야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2,286  



과거 중국은 동북 3성(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의 역사·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겠다며 2002년부터 5년 간 막대한 자금과 수많은 학자들을 동원해 연구작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는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 발해의 역사를 크게 왜곡해 표현했다. 이 사건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중국의 이러한 행위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김치, 비빔밥 등 음식은 물론 한복, 갓, 판소리에 이르기까지 우리 전통문화를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이른바 '문화 동북공정'으로 확대하는 모양새다. 

 

다만 '조선구마사'에 대해 무조건 반중정서라는 틀 안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주제가 사극인 만큼 철저한 고증이 필요했을 터, 허술했던 제작진에 대한 비판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는 그간 꾸준히 제기되어 온 사안이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는 이유로는 중국 자본이 이미 문화산업 전반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콘텐츠 수출에 있어 애초부터 중국 시장을 의식해 중국 자본을 유치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막대한 제작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중국 시장의 자본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콘텐츠 제작 업계의 현실이다.

 

하지만 중국이 간접광고(PPL) 등의 재정적 지원을 빌미로 자국의 역사·문화 공정에 이를 이용하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중국 자본의 의존도를 서서히 줄이면서, 한국 문화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키우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일요경제(http://www.ilyoeconomy.com)


2021.04.06 http://www.ilyoeconomy.com/news/articleView.html?idxno=54018 




2.jpg






140EEC0B4B6FD23E64.jpg








qw%20(2).jpg





ok%20(2).png






수 년 전부터 치밀하게 중국공산당에서 외국에 얼마나 많은 돈을 뿌렷나?




0003454937_007_20210114090629940.png




0003454937_002_20210114090629705.png




0003454937_001_20210114090629660.png




lkj.jpg





2527EC3754DAEA2609.jpg





ㅎㄹ.jpg





0003454937_004_20210114090629803.jpg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법원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입니다.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검군 21-04-06 22:03
   
중국의동북공정도 문제지만 저기에 동조하다 시피하는 주류 역사학자들이 더 문제...
     
스리랑 21-04-06 22:16
   
이희진박사의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 고대사> 서평

이희진박사는 자연과학을 전공하려 들어갔던 고려대학에서 인문학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제 발로 역사학을 전공하는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필 역사학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 와중에 못 볼 꼴을 많이 보게 될 고대 한일관계사 분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이병도가 키운 제자들이 대한민국 학계를 장악하고 역사학을, 기득권을 수호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키운 결과가 바로 현재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기득권 수호 투쟁이 어떻게 학계의 신진대사를 방해하고, 학자들을 패거리 집단으로 전락시키며, 저잣거리의 시정잡배만도 못한 짓을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는 파렴치한이 되고 있는지를 저자는 처참한 내부 고발자의 심정에서 진술하고 있다.


이들에게 연구 기금과 학회지 발간 및 활동비를 지원하는 관료들이 결국 이들과 야합하게 되는 과정을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 고대사> 이 책에서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가 무사안일과 출세주위에 물든 관료들의 손을 통해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선심 쓰듯 뿌려지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갈 것이다. 또 이러한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언론이다.
          
스리랑 21-04-06 22:34
   
서울대와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계셨던 김용섭교수의 회고록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책에 따르면 학과 동료 교수이기도 한 고故 한우근과 김철준 교수에게 각각 두 번씩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


“김철준 교수가 한 번은 나를 보고 웃으시며 ,‘김 선생,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애’, ‘예, 그런 것 같습니다. …’, 그 다음은 노발대발하시며, ‘이병도 선생에 대해서 무슨 글을 그렇게 써!’하시며 질책하셨다. 마치 부하 직원이나 제자를 대하듯 나무라셨다. 전자는 경고성 발언이고 후자는 절교성 발언이라 생각되었다.”(770쪽)


한우근은 여러 사람이 동석한 가운데 김 교수에게 “김 선생, 우리 이제 민족사학 그만하자.”고 했다고 회고했다. “(한 번은) 너덧 명의 중년ㆍ노년 교수가 내방하였다.


노크를 하기에 문을 열었더니, 김원룡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일제 때 경성제대에서 내가 배운 스에마쓰(末松保和) 선생님인데, 김 선생 강의를 참관코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김 선생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768쪽)


스에마쓰는 조선총독부 관리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임나일본부설을 체계화하는 등 식민주의 역사학을 제창하고 수립한 중심인물로 꼽히며, 당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인 김원룡은 경성제국대학 시절 그의 제자였다.

이런 식으로 학교 안팎에서 압력이 거세지자 “그리하여 나의 문화 학술운동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서울대학교의 관악산 이전을 계기로 나도 이 학교를 떠났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스리랑 21-04-06 22:49
   
전 단국대 윤내현 교수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날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뒤 어느 정보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우리 고대사의 내용이었다. 필자가 북한 학설을 유표하면서 학계를 혼란하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이 있어서 국장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영역을 더 넓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넓게 잡자 이것을 북한 학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함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 식민사관이 건재하게 뿌리내린 이유는 무엇인가?


일제는 조선의 얼인 조선어와 조선사를 치밀하게 통제하고 조작했다. 일제는 조선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고, 조선은 예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논리를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창조했다.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가 국사학계 태두로 서울대에 있으면서 식민사관을 정설로 굳혔다.


그가 주장하는 실증사학의 미명을 거둬내면 황국사관이다. 그들이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민족사관이 단절되면서 식민사관은 견고하게 한국사를 틀어쥐었다.(『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스리랑 21-04-06 22:52
   
최재석(1926~2016) 교수라는 분이 계셨다.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였을 때 필자를 만났다.


그분은 학문적 진실에 대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식민사학에 찌든 남한 강단사학과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던 학자였다. 최 교수는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해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많은 연구업적을 갖고 있다.


그는 자서전 ‘역경의 행운’에서 “학문하는 사람 가운데 나만큼 고통을 겪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역경이나 고통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고통’이란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비판하는 순간 젊은역사학자들은 물론 강단사학자들로부터 “사이비, 유사 역사학자”로 몰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재석 교수는 1994년 12월 제1회 한국 사회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는데, 수상 상패에는 “13권의 저서, 208편에 달하는 학술논문과 65편의 준학술논문을 저술”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1994년까지의 업적이고 그 이후에도 쉬지 않고 공부해 300여편의 논문과 30여편의 학술저서를 남겼다.


그런데 한국 사회학회에서 그를 제1회 학술상 시상자로 결정하기까지 뒷이야기가 적지 않았다. 최재석 교수에게 학술상을 주면 앞으로 수상자가 나오기 힘들다는 반대의견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술부장이던 연세대 박영신 교수가 “업적 위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해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한국 사회학회는 학자를 인정하는 최소한의 양식은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양식은 남한 강단사학계로 오는 순간 모두 사라진다.




역사관련 국책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에서 2013년에 ‘역주 일본서기 1~3권’를 냈다. 국민세금으로 만든 ‘일본서기’ 번역본인데, 연민수·김은숙·이근우 등 7명의 번역가가 모두 일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거나 수학한 경력이 있다.


이들은 1권 뒤에 559쪽~592쪽까지 무려 33쪽에 걸쳐서 빽빽한 참고문헌과 저서, 논문 등을 실었으나 최재석 교수의 이름은 없다.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나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낭인 깡패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등이 가야를 임나라고 주장하는 논문이나 책들은 빠짐없이 실으면서도

최재석 교수의 ‘고대 한일관계와 일본서기(2001)’, ‘일본서기의 사실기사와 왜곡기사(2012)’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 논문은 찾아볼 수 없다.



최재석 교수를 참고문헌 목록에서 지워버린 이유는 단 하나다.


일본극우파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진짜로’ 비판하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해서 가장 많은 논문과 저서를 쓴 학자를 투명인간 취급할 수 있는 카르텔을 가진 곳이 남한 강단사학계다.


젊은역사학자모임이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는 영원한 우리들의 스승이시다!”라고 기염을 토할 수 있는 것이다.



최재석 교수는 식민사학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구순 평생 많은 수모를 겪었다.출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스리랑 21-04-06 23:12
   
식민사관에 대한 내용이 정리된 <다물(多勿)> 147∼152 쪽

박기자 : 좋습니다. 그럼, 식민사관의 정의부터 말씀해 주세요.

 임성국 : 1981년 <다물>지 12월호에 최만주 선생이 손수 쓰신

'식민 사관이란 무엇인가'하는 권두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정의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독립을 부정하고
한국을 일제의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한국 역사를 위조했습니다.

그 위조한 역사를 한국민들에게 강제로 반복 교육함으로써
일제의 침략 정책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유도하여

한민족의 자주적인 민족성을 완전 거세하여 식민지 백성으로 길들어지도록 획책한 것이
바로 식민사관입니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성립시키는데는 꼭 필요한 구성요건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상고사(上古史)와 국조(國祖)의 부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과 만주를 지배했던 상고시대의 역사를 아예 쏙 빼버리고 국조인 단군과 그 윗대의 환웅과 환인 시대를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국 역사의 시작을 '위만 조선'과 거짓으로 꾸며낸 '한사군'에 맞춤으로써
'고조선의 건국 이념'도 '국조'도 '장구한 역사'도 없애 버릴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소위 한사군 즉 중국 한족(漢族)의 식민지였던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그 후대에 역시 거짓으로 꾸며낸
일본 통치부(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상륙했던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는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은 스스로 나라를 세운 일도 없었고, 고유문화도 없었고,
한반도는 주인없는 미개지였던 것처럼 조작하여
침략자의 한국 강점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압축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발해와 통일 신라가 양립했던
우리 민족의 남북조 시대를 대동강 이남으로만 줄여버리고,
대륙에서 흥망했던 고구려와 대진(大震)의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사에서 아예 없애 버리고,

고구려와 대진(발해)의 뒤를 이은 대금, 대청을
말갈 또는 여진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아닌 것처럼 꾸며내어
대금, 대청과 그 국가적 활동을 우리 민족의 활동사에서 제거하려는 논리로,
우리 민족사를 대륙에 기반을 둔 강대국이 아닌

대동강 이남만의 반도내의 소국의 역사로 만들려는 음모입니다.


셋째로 우리 민족은 뿌리도 없는 유랑민[이병도의 전국유이민(戰國流移民)설]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 분열을 일삼 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역사를 날조했습니다.


예컨대 삼국사는 민족 분열, 동족 상잔의 역사이고,
고려사는 기강없는 음탕한 역사이고,
조선사는 탐관오리, 사색당쟁으로 일관한 망국의 역사로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 뿌리도 임자도 없었던 근본부터가 중국, 한(漢)의 식민지였던 나라,
둘째, 반도 안에 움추린 채 기를 못폈던 약소국,
셋째, 예로부터 피정복민인 무능하고, 부패하고, 분열하고, 민족 상잔의 망국 근성을 가진 민족으로서

스스로는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이 없는 정체된 사회 속에서 살아온 미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할 능력도 없는 한갓 고깃덩어리가
열강의 침략 야욕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평화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동양 평화를 유지할 사명을 띤 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거나 식민지로 통치하는 것이 합당할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행복도 증진시킬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일제 식민사관의 골자입니다.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은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그 첫단계로 역사 정복(식민사관),
둘째로 종교 정복(민족종교 탄압 신사참배 강요),
셋째로 국어와 한글 정복(일어를 강제로 사용케하고 한글을 못 쓰게 함),
넷째로 전통 정복(창씨 개명)을 총독부의 정책으로 강행했습니다.

대략 위와 같은 식민 통치 각본의 원전이 바로 다름아닌 식민사관으로 위조된 조선사입니다.

이 가짜 조선사는 모두 6편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통일 이전을 제1편으로 하고 신라통일 시대를 제2편,고려 시대를 제3편,
 조선 시대를 제4, 5, 6편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 역사의 역점이 안팎으로 교묘한 짜임새를 보여 주고 있는데에
우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근세와 근대사의 중요성이라는 미명으로
조선 왕조사에 역점을 둔 것은
실상 반도 속에 움추려 기를 못 폈던
반도속방사관(半島屬邦史觀)을 주입시키려는 음모입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병도씨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로서
이러한 고대사 날조 작업의 주역으로 관여했던 사실은
우리 사학계가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수수께끼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사학계 현역 교수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하생들로 단단한 인맥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며
더구나 그 정예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일제의 식민 사관을 철저히 답습하였는데,

이병도의 진두 지휘하에 식민사관에 중독된 사람들을
하루 빨리 재교육시켜 진정한 민족 사학자로
재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최만주 선생의 한결같은 주장이었습니다.


박기자 : 임 선생님, 그런데 저희 세대에게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해방된 지 40년이나 되도록
그야말로 식민사학자들이 사권(史權)을 휘어잡고

독립된 대한민국 땅 안에서 그처럼 활개를 칠 수 있었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박기자 :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임성국 : 우선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민족 사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박은식, 신채호 같은 분은 이미 일제의 탄압으로 타계한 뒤였고

그 뒤를 이은 사학도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이러한 독립 투사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나라 사학계에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던 이병도나 일제가 정책적으로 식민사관의 나팔수 즉, 일제의 주구로 길러낸 친일 사학자들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민족 사학자가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중국 북경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정인보 선생이었습니다.

이병도 따위는 정인보 선생 앞에서는 인격에 눌려
제대로 氣도 못 펴고 쩔쩔매는 판이었습니다.

정인보 선생과 이병도씨는 말하자면
해방된 한국의 사학계의 양 거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총독부의 조선사 날조에 적극 가담했던 친일 사학자요,
또 한 사람은 독립투사요 철두철미한 민족 사학자였으니

두 사람의 학설은 사사건건이 대립할 수 밖에 없었죠.
이 팽팽한 대립이 그대로 어느 정도 계속되었더라면
이병도가 서울대학에서 양성한 제자들과 정인보 선생이 연세대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거의 비등한 숫자로 막상막하의 대결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정인보 선생은 6·25때 괴뢰군에게 납북되어
가시는 바람에 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육당 최남선씨가 있었지만
그분은 일제 때 일본에 부역을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에 걸려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죠.

그러니까 대항할 만한 적수가 없어지자

이병도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서울대라는 명문 대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내게 되었고
그 제자들로 구성된 학회의 회장과 한림원 원장까지 맡게 되자

한국 사학계에서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병도씨는 그 때까지도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학계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그의 승락이 없이는 대학 교수는 말할 것도 없고 전임 강사 자리 하나도 얻을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스리랑 21-04-06 23:15
   
북한은 중국 것이라는 책을 전세계에 뿌리려다 발각된 국가기관

https://youtu.be/W1L1vMo8NqE
메시짱 21-04-07 05:32
   
서양에서도 그렇고 이쯤 되면 중국이 역사왜곡을 한다고 보기보단
한국이 지난 속국의 역사를 감추기 위해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우리나라 만세 역사 왜곡교육을 시키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중국이 버젓이 조선을 중국의 일부로 표기하고 가르쳐도 항의조차 못하는게 한국정부의 현실아닌가?
매번 일본에는 역사왜곡교육한다고 발작하면서 조선을 버젓이 중국의 영토로 표시하고 가르쳐도
항의조차 못하는게 한국정부..게다가 서양에서도 그렇게 가르쳐도 항의조차 안한다. 이게나라냐?

사실 일본아니였으면 조선이 중국의 영토라고 해도 조선 사람들과 그 후손은 아무 불만이 없었겠지.
이성계부터가 쿠테타(반역)를 일으켜 고려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건국(?)한 것도 결국 새로운 강자
고려말 속국을 강요하던 원나라가 아닌 명나라의 속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첨부터 명나라에 바친 넘이니까..그래서 500년 조선(이 조선이란 이름도 명나라 황제가
선택한 이름이고)역사가 중국의 속국역사이고.. 일본이 개입해 청일전쟁에서 이겨 청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지 않았으면 영원히 중국의 속국으로 중국의 지방(연변처럼 조선명칭의 자치지방)이 된 것도 사실..

결과적으로 반만년 중국의 노예 속국에서 해방시켜준게 일본이었음. 한국인들은 그걸 모름.
모른다기보다 너무 굴욕적이고 수치스럽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사실대로 역사를 못가르침..
나라 이름조차 이성계가 못정하고 왕세자 조차 조선의 임금이 정하지 못하고 중국 황제가 정하고
건국이념조차 중국의 유교였고 조선의 선비들은 중국의 성리학으로 교육을 배우고 이게 중국의
노예국이지 자주국 조선이 절대 아니지..

지금은 한국(남한)은 일본과 미국의 지배를 거치며 기존 중국의 노예국이었던 조선과는 180도 다른 나라로
변천한 것임..
     
mymiky 21-04-07 07:02
   
별 시덥찮는 개소리 그만하고

차근차근 읽어보세요

전근대 시대 속국의 개념부터

다시 배우세요 !

"식약처  직원의 속국발언ㅡ 역사적으로도 틀렸다"

여기서, 팩트 들어갑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2308045?sid=104
          
메시짱 21-04-07 11:20
   
뭐가 시덥잡은 소리에요? 그게 엄연히 사실인데 님 링크에도 속국인거 사실이라고
인정하잖아요. 근데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속국이었다는거 자체를 인정안하려고 하죠..
왜냐하면 쪽팔리는 역사이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평소 짱dog라고 욕하던 중국의 국민보다
못한 하류 국민이 되어버리는 느낌이 드니까.. 근데 그럴 필요가 없는게 조선이 한국의
선조국인건 맞아도 지금의 한국은 조선과는 180도 다른 나라에요..조선시대 해오던 것을
승계하는 나라가 아니라 조선을 거의 부정하는 나라에요..그때는 쇄국정책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나라와 FTA를 맺고 무역개방을 하는 나라가 한국이죠..과거 조선은 이성계가
나라를 세울때부터 중국(명)의 속국으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고 나라이름 조선도
명나라 황제가 그걸 선택해서 조선이란 나라가 된거고, 조선의 세자역시 조선의 임금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가 정해주고 조선의 건국이념이 중국의 유교이고 조선 선비들이 배우는
학문이 중국의 성리학이고 모든 형식을 중국의 예법에 따라 행하면서 500년동안 중국의
한 지방처럼 살아온거에요..그리고 매년 중국 황제에게 조공하고 여자갖다바치고
(심청이가 그래서 나온 소설이구요..아버지가 봉사인데 중국에 조공물로 팔려가는 딸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는 내용, 실제로는 중국에 조공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정착해
살았다더군요.) 그런게 속국이에요..

기사에서 속국인것은 맞는데 뭐 내치와 외교는 자주국 어저고 하는데 그러니까
지금 중국 연변도 중국땅이지만 자치구로 크게 간섭안받고 지방자치하잖아요..

명에서도 땅덩어리가 엄청 크고 (그때 수단이 말밖에 더있었나요? 자동차로도 엄청난
거리인데 말로는 수십일 가야하는 거리) 조선과 말이 잘 안통하니 직접 통치하지 않고
조선임금으로 하여금 조선이란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제후로 임명해 조선을 다스리게
한거고 자치권을 줬다해도 국가중대사는 늘 명나라 황제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구조로
조선내 민란일어나면 명이나 청나라에서 군대 파견해서 진압하고 임진왜란때도
왜 명나라가 엄청난 파병을 하느냐? 바로 조선이 속국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파병하는거죠..

우리가 백날 부정해도 중국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조선을 중국의 일부지방으로 배우는데
한국에서만 그 역사가 쪽팔리니 조선을 무슨 자주국인데 약간 중국을 형님 대접해줬다는
식으로 사대했다고 미화해서 가르칠 뿐이죠..속국아니란 소리하고 사대정도 소리할려면
지금 한국/미국 정도의 동맹국 정도는 되야 합니다..군사적으로 미국의 제제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그 외는 자주적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이잖아요. 조선이란 나라는 그게 아니
였다니까요..국가이념부터 중국의 유교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중국의 예법을 따르고
장유유서 이런 사상이 왜 아직도 한국에 남아있겟어요? 전부 조선시대 중국의 유교이념에서
비롯된거고 설날이나 생일때 아직도 한국은 중국의 음력으로 세죠..일본은 중국의 음력
으로 안셉니다..지금 서양달력으로 생활하는데 왜 설날을 구정으로 세는지 이해불가에요..
이게 바로 조선시대부터 쌓여온 중국의 잔재에요..그니까 최근 한국 사극드라마에서
중국화 표현이 심해서 드라마 폐지시키고 난리펴는것도 실제 조선시대를 너무 잘 묘사하니
지금의 한국인들이 속국묘사하는데 열받아서 드라마 보이콧 하는거죠..실제 그 시대는
그 이상으로 중국화 되어 살았을텐데 지금의 한국인들은 일본과 미국지배를 거치면서
중국을 아래로 볼 정도로 자존심이 커졌기 때문에 그걸 못받아들이는거죠..

아무튼 우리끼리 백날 조선은 명,청 속국 아니다라고 주장해도 소용이 없어요..
실제 역사를 공부해보면 속국이 아니면 해서는 안될 것들을 조선시대는 당연히 하고 잇죠..
이성계도 이 사람도 조선건국했다고 교과서에서는 빨아주지만 사실 고려를 무너뜨리고
그 무너뜨린 나라를 명나라에 바친 넘이고 명에게 충성맹세한 넘입니다..충성맹세문도
인터넷 찾아보시면 나와 있으니 읽어보시구요..지금 북한을 보세요..얼마나 한심한
나라인지..조선은 북한보다 10배이상 중국의존적, 우물안개구리로 살아온 나라인데..
그 중국의존증을 깬개 그나마 일본이 개입하면서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해서
시모노새끼조약에서 청나라가 분명히 문서에 서명하잖아요..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고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한다고.. 그 말이 뭐겠습니까? 그 이전까지는
인조가 삼전도에 3번 머리를 조아리고 충성맹세한 이후로 청나라 속국으로 청나라
지배권 하에 있었다는 말이죠..그리고 그걸 일본이 깨준거고 미국처럼 몇년간 보호해주다
돌아갔으면 됐는데 조선이 너무 약하다보니 지들이 식민지 지배하면서 지금의 반일감정이
생겨버린거죠..하지만 중국 이넘들도 500년간이나 조선을 지배해온 넘들입니다..
다만,직접적으로 중국넘들이 와서 통치를 안해서 반감이 덜한것 뿐이지..국가중대사는
다 허락을 맡고 명황제가 운허하는 식이라 중국 입장에서는 조선을 굴복시킨 후
조선임금에게 조선이란 중국(명/청) 위성국을 통치하도록 맡긴셈이죠..중국의 문화와 전통
사상을 그대로 따르게 하고 국가중대사는 중국의 황제에게 허락맣게 하고..세자 책봉까지
허락맡아야 했으니 쩝..그리고 매년 조공과 여자들 바치게 하고..안따르면 군대 보내서
조지고..매우매우 굴욕적으로 500년을 살아왔고 거기에 반기를 들고 탈아입구 발전된
일본의 힘을 빌려 중국의 지배하에서 벗어나자고 반란을 일으킨게 갑신정변이고 이 마저도
명성황후 민비의 친청 의존증에 의해 실패해 결국 민비가 정치를 개판으로 해서 조선말에
민란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결국 동학농민군이 민비 죽일려고 들고 일어나자 또 청나라
군대에게 진압요청했다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군이 입성하면서 일본이 철수안하고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에 승리하면서 청나라의 조선지재권을 확실히 없애고 이후 일본이
식민지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죠..저는 솔직히 조선이 일본에 식민지화된 것은 수치이긴
하지만 500년 아니 5000년 중국의 노예 속국으로 사는것보단 오히려 일본에 식민지화되고
또 일본이 과욕부려 미국이 개입하면서 미군정 시대를 거쳐 남조선이 대한민국으로
완전히 탈바꿈 독립자주국이 된 것이 오히려 결과적으로 나았다고 봅니다..
만약 일본이 개입안해서 청일전쟁이 안벌어지고 계속 조선이 중국의 속국상태에
있었다면 결국 지금 조선한반도는 중국의 한 지방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거죠..

조선은 절대 외부세력 개입없이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중국의 세계관에서
못벗어나는 한심한 우물안개구리 상태였으니까요..절대로 다른 나라의 개입없이는
중국의 지배권하에서 못벗어났다고 봅니다...물론 조선이 일본식민지화 되었을때도
외부(미국)의 개입없이는 절대 독립될 수 없었고 그냥 나라가 없어졌겠죠..
결과적으로 일본이 개입해 조선을 중국에서 해방시켜주었고 지들이 먹었지만 더 큰
욕심(아시아 대일본제국 수립)을 부리다 미국의 잠자는 콧떨까지 건드려서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고 결과적으로 조선이 해방되고 남조선이 대한민국이라는 독립
자주국이 되었으니 아픔과 치욕은 있었지만 지금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더 좋은
결과였다고 봅니다.. 해방후 냉전으로 남북이 갈린 것은 결국 우리가 약하고 김일성과
같은 악독한 인물을 막지못한 우리 책임이라 볼 수 있구요..
               
mymiky 21-04-07 11:33
   
1) 중국은 예로부터 땅주인이 허구헌날 바뀌던 나라

단지, 대륙의 주인이  누가 되던지?  큰 나라 옆에 있다보니

중국과 척을 아예 두고 살순 없음

2) 지금은  가짜상품으로 유명하나

과거 중국제품은 명품들이 많고 물자가 풍부한 나라여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국과 무역을 하고싶어 했고

우리도 마찬가지

3) 중국이 무역을 허가하는 조건 중 하나ㅡ 중국을 상국으로 인정할것
(중국 특유의 중화론ㅡ 중국이 세상의 중심)

4) 우리가 중국을 동네 대장으로  인정한 건 사실임ㅡ 종주국

5) 그렇다해도  그건 우리 국익을 위한 것이였다는 점을 명백히 알아야 함

6) 중국의 문물을 들여오는 것 또한 당시엔 그것이 선진 기술이였기 때문이지
중국측이 강요한게 아님

일본 역시 중국에 견수사 견당사 파견했다는걸 알길 바람

7) 책봉이란? 중국이 정해주는게 아님

내치의 일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알아서 함

단지 사신이 오고가며 중국측에 알려주는 일임
 티비나 인터넷이 없었으니  직접 사신들이 오고 가던게 당연하던 시절

8) 타국과의 외교에 있어서도, 중국의 간섭을 안 받음

9)  19세기가 되어서 서구의 학문이 들어오고,  만국공법이란 국제법 개념이 들어온 뒤에  동아시아 조공번제 제도가  깨어짐

10) 일본이  조선을 자주국이라 한 것은, 중국의 간섭을 완전히 배재한 뒤에

조선을 완전히 접수하고 싶어서임

정작 중국과 관계에 있어ㅡ 수천년간 독립국이였던 조선은 한순간에

일본 식민지로 전락 ㅡ 나라 자체가 완전히 사라짐
                    
mymiky 21-04-07 11:44
   
조선말기 청나라를 불러 들인것도

청은 파병일이 끝나면 ,  귀국이 당연했기 때문임ㅡ(애네는 조선에 눌러 살지 않음)


반면, 일본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 경복궁 점령해서  왕과 왕비 볼모로 잡고
희안한 짓을 다함

일본에서 출발전에 이미 조선에 가면 ㅡ장기적으로 조선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짜서 들어온 부대임 ㅡ 아예 용산에 부대 기지까지 세우고

엉덩이 붙이고 절대 안 나감;;;;  그게 일본군
                         
mymiky 21-04-07 11:50
   
정작 님이 까는 

중국 대 조선의 관계는

그 당시 기준으론 ㅡ  전혀 이상할게 없는 외국 대 외국임

좀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일지언정 ㅡ (자기 구역은 알아서 개인 플레이 ~하는 관계)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시대가 들어온 이후 ㅡ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한국역사에선...  오히려 자율성이 대폭 억제되던 시기임!!
mymiky 21-04-07 12:00
   
그리고 조선을 자치구? 라는 식으로 말하는데ㅡㅡ;;  뭐래니??

청나라의 티벳/ 위구르/몽골은

청나라 영토가 맞고ㅡ 애네들은  이번원에서 관리함

반면,  조선은 명-청시대  예부에서 관리ㅡ 예부는 지금의 외교부를 뜻함

자국의 자치구를 외교부에서 담당하는 그런.. 미친 나라는 세상에 없음

명청국 시절ㅡ 예부에선 (조선)이나 (일본 ) 똑같이 [외국]으로 대우함

 류큐 태국 베트남 미얀마 등등~~ 중국과 왕래하는 여러 서양 국가들

 전부 예부가 담당함

조선 518년 동안 멀쩡하게 엄연히 독립 국가로  있었던 나라를??

자치구라니??  참 기가 찬다 ㅋㅋㅋ

대체???

님은 조선을 평소에 뭐라고 생각하길래??

계속 개소리를 씁니까??  나는 그 점이 더 궁금합니다

남한테 역사공부 잘하니 못 하니 운운 하지말고ㅡ  그전에

님이나  역사공부 똑바로 받으세요!!

중국은 과거 소련의 속국이였고

일본은 미국의 속국 또는 패전국인데

누가 누굴 까고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