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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30 18:51
박정희의 전화 "내가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글쓴이 : 호연
조회 : 2,349  


'따르릉'

"예, 마산유족회입니더." "지는 부산기지사령관 박정희라 캅니더." "그런데예?" "내도 유족인데,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마산유족회의 노현섭은 자유노련 소속 부두노조 위원장이었다. 유족회로서는 군인이, 더군다나 고위 장성이 관심을 갖고 식사를 하자고 하니 반가운 일이었다.


야누스의 얼굴을 한 박정희

노현섭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족회 임원들은 박정희를 같은 유족이자 한 식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나 순진한 생각임이 밝혀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이틀 후인 노현섭은 영장도 없이 202방첩대에 다짜고짜 연행됐다. 가석방될 때까지 1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박정희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박정희는 4.19 혁명 이후에는 민주화세력이 대세라고 판단하고 '피학살자유족회'에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후에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는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제1의 국시로 '반공(反共)'을 내걸었다. 그런 연유로 피학살자유족회 임원들을 반국가행위로 전부 구속해 사형부터 7년까지 골고루 선고했다.


동생은 트럭에서 뛰어내리고, 형은 괭이바다서 수장

"면사무소로 부역하러 나오시오"라는 전갈을 받은 노상도는 삽과 소쿠리를 들고 면사무소로 갔다. 하지만 면사무소에는 구산지서 경찰들이 대기시켜 놓은 트럭만 있었다. 아무래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럭이 길모퉁이를 돌 때였다. 트럭에서 뛰어내린 노현섭은 죽기 살기로 뛰었다. 트럭에 같이 탔던 노상도는 동생의 탈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집안에 한 명은 살아남아야 했다.

1~2주일간 형무소에서 진행된 분류작업 이후 전차상륙함(LST)에 실려 괭이바다에서 수장된 마산시 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재소자들은 모두 1681명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기겁할 일이 발생했다.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중에는 여성이 50명이었다. 이들을 심사하던 CLC 대원 4~5명이 이들을 강.간했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 47명은 석방됐지만 완강히 거부한 3명은 형무소 인근에서 사살되었다.

노현섭의 형 노상도는 1950년 8월 18일 마산지구계엄사령부고등군법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후 괭이바다에서 수장되었다. 동생은 트럭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았지만, 형은 괭이바다에서 학살된 것이다.


일본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한 형제

형 노상도는 와세다대를, 동생 노현섭은 주오대학에 다녔다. 노상도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노현섭은 귀국 후 마산부청(馬山府廳)에 근무하면서 아나키스트 운동에 몸 담았다.


아버지는 전쟁 때 수장... 아들도 간첩 누명

"끽" 지프차에서 내린 헌병들이 노상도의 아들 노치영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와 이러십니꺼?" "너를 간첩죄로 체포한다."

노치영은 마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했지만 신원조회에 걸려 불합격 처리되었다. 그가 간첩으로 내몰린 것은 아버지 노상도 사건과 무관할 수 없었다

아들의 무죄에 이어 아버지 노상도 역시 무죄를 선고받았다. 6.25 때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 무죄라는 것이다. 2020년 2월 14일 창원지법 마산지원의 재심에서였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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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 20-11-30 19:13
   
부산 일화는 군수사령부 시절인 듯
안알려줌 20-12-01 01:00
   
단지 반대편이란 이름표가 씌여진 이유로

비무장인 사람 목숨 함부로 다룬다는게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