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잉글랜드 100, 조선 134, 중국(강소성, 절강성) 191.
중국전체의 평균 총요소생산성은 191 이하일 것이나 이 역시 잉글랜드보다 高.
◇ 1인당 GDP 비교(조선 vs. 중국)
1820년 1인당 GDP - 중국: 600달러, 조선: 600달러
┃중국의 1인당 GDP 추이
- 인구의 비약적 증가로 인해 1500년부터 320년간 600달러 수준.
- 1870년 530달러로 추락.
- 1920~30년대 550달러대에서 등락을 반복.
┃조선의 1인당 GDP 추이
- 1870년 604달러로 반등
- 1911년 777달러(아시아 2위)
조선의 생활수준은 16세기말부터 상승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1724~1800)에 정점을 기록한 후 하락.
- 16~17세기에는 중국보다 낮을 수 있으나 18세기 중국을 추월.
- 19세기(1820년)에는 다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
◇ 조선의 교육복지
┃세종치세(재위 1418~50) 이후 18세기까지 지방향교, 사학(四學), 성균관 등 모든 유생들에게 무상교육, 무상숙식, 학비지급, 학전(學田)지급, 면세 및 요역면제.
-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논어」의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원칙에 따른 것.
1910~2005년 사이 실질임금, 농업인구와 제조업 취업자수, 도시화율 등의 통계를 함께 견줘 보면, 남한에서 루이스 전환점은 1960년대 중엽께 나타났다. 1차산업 비중의 감소를 경제발전 척도로 본 클라크의 산업구조, 중공업 비중으로 경제성장을 분석한 호프만의 공업구조, 엥겔계수 등의 지표들 역시 1960년대 앞뒤로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고 한다.
60년대 앞뒤로 이런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허 교수는 “해방과 함께 ‘식민지적 경제구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식민지적 경제구조란 소수의 일본인이 생산수단인 경지, 인적·물적 자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조를 말한다. 이런 구조 아래에서 조선인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점차 배제되어 소작농이나 임금노동자로 전환됐고, 민족·학력 차별로 인한 식민지적 고용구조 탓에 임금노동자 가운데에서도 최저변을 형성하는데 그쳤다.>>
해방은 이런 구조를 뒤바꾼 획기적인 일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교육은 양적으로 폭발적으로 팽창했고, 농지개혁은 일제강점기 자본주의적 외형 아래에서 오히려 확대 강화된 전근대적 소작제도를 일소해 농업혁명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이런 획기적 변화는 그 뒤 공업혁명의 토대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뤄진 변화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으며, “조선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정치적 독립을 이루게 된 것이 모든 변화의 전제조건”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조선과 같은 먼 극동의 나라에서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도 책이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우리의 자존심마저 겸연쩍게 만든다. 조선 사회에서 문맹자들은 심한 천대를 받기 때문에 글을 배우려는 애착이 강하다. 프랑스에서도 조선에서와 같이 문맹자들을 가혹하게 멸시한다면, 경멸을 받게 될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 프랑스 해군 장교 주베, 『파란 눈에 비친 하얀 조선』,
우리나라는 이미 당시 서구권에선 귀족조차 글을 제대로 쓰고 읽기 벅찰때 귀족뿐 아니라 서민을 위한
세계 최초의 문무겸비 교육기관을 시작으로 중세 고려도 이런 문화를 이어받아 조선 후기로 가면서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은 2만개 이상으로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 교육령을 반포 기존 제도와 서구식을 결합 본격적 근대적 의무교육의 변화 발전의 초석이 되었군요.
그리고 조선시대 서당교육을 보면 단순히 암기식 위주가 아니라 오늘날 서구의 논술시험과 다르지 않는 바탕이 되는 자율 에세이등에 개인 맞춤과 도덕 교육도 겸비.
이런 바탕에서 오늘날 능력위주의 공무원시험같은 과거제에서 당시의 국제 질서나 현안에 대한 고난이도의 심도 깊은 통찰력과 사고 철학까지 묻는 논술형 문제들이 출제되군요.
<유럽의 바칼로레아, 공무원 시험등 인재 선발은 동북아 과거제의 영향>>
그는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의 근대화에 성공한 지역은 서부 유럽과 북미, 동아시아에 불과하다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극서(極西)와 극동(極東)을 묶어 근대화 과정을 논한다.
우선 서양에서 꽃핀 자유와 평등 개념, 자유시장, 공무원 임용고시, 관료제 등 근대화의 이념적 아이콘은 거의 모두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역으로 서구의 근대성은 유교를 발전시킨 동아시아에 이식됐고, 중·동부 유럽이나 중남미보다 큰 열매를 맺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극동의 구 유교국가들은 '준비된 근대국가' 또는 '낮은 단계의 근대국가'였다"면서 "극동과 극서는 시차를 두고 서로를 번갈아 깨워서 높은 근대화를 향해 함께 진보했다"고 역설한다.
국뽕만 가득해서 무능했던 일제시대를 식민사관이네 뭐네 스스로 위로하면 그게 도움이되나??
국민들속에 영웅들이있고 혼은 살아있어도 사대부와 정부가 말아먹었으니 무능하지..
무능했던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정신이 필요하지 무조건 국뽕만 내세우면 그게 무슨 도움이되나??
현제든 미래든 잘못된점은 똑바로 인지하고 지금처럼 해쳐나가는 정신이 필요하지 오로지 내가 제일이다라는 어리석은 망상은 나라를 병들게한다 저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