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이 비밀해제하고 넘겨준 구소련외교문서
김일성의 남침
김일성은 50년 2월4일 스티코프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낸 긴급 암호전문에서 남반부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기존 7개 보병사단 외에 3개 사단의 병력 증강이 필요하므로 이에 소요되는 무기와 탄약 등 군수물자를 공급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닷새 후인 2월9일 김일성에게 전문을 보내 「성공이 전면적으로 보장되는 조건에서 귀하의 남침 제의에 동의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북한이 요청한 3개 사단 증강을 위한 지시는 내려졌다고 통보했다
김일성 남침음모 49년1월∼50년6월 평양∼모스크바 교신내용
◎국방대학원 김철범교수 소문서 공개/“미철군후 남한 북침” 거짓정보 4차례 타전/김,“옹진반도 기습점령해 전선 1백20㎞ 줄이자”/김,49년8월 북침조작정보 거짓 드러나자 「삼척해방구」 건설 등 남침 다시 제의
〈49·4·17〉비신스키외상, “6월북침” 북한첩보 접수
〈49·5·4〉스티코프 “38선에 남한군 3만 집결” 보고
〈49·7·14〉소대사관 “이승만이 이달에 선제공격할 것”
〈49·9·12〉김일성 “38선 충돌에 의하면 남한군 취약”
〈50·1·30〉스탈린 “지나친 모험말라” 김일성에 전문
〈50·3·20〉「남북통일」등 김스탈린 회담 의제논의
〈50·5·15〉김,모택동과 회담전 통일3단계계획제시
◎“김일성 6월30일경 남침”/개전일자 결국 5일 앞당긴 사실 입증/“중국 동지들 마침내 파병결심…” 회신/「수정주의학자 북침설」 뒤엎을 결정적 문건
「김일성은 6월30일경에 남침공격을 개시하려 하고 있다. 공격개시를 늦추는 것은 남한에서 북한의 의도를 탐지해 그들의 군대를 증강할 우려가 있고 7월이면 장마가 시작돼 공격을 9월로 연기해야 되는데 이는 매우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이는 6·25가 개전되기 직전 구 소련의 주북한 대사 스티코프가 50년 5월30일자로 스탈린에게 보낸 비밀전문 내용이다. 이 전문은 스탈린 외에도 몰로토프 말렌코프 베리야 비신스키 등 당시 소련의 관계각료 9명을 공동수신인으로 하고 있다. 이 전문은 당초 북한정권이 6·25의 개전일자를 6월30일로 잡았다가 소련측의 주도로 5일 앞당겼다는 사실을 드러낸 증거다.
「평양주재 소련대사에게.
다음 사항을 김일성에게 전해주기 바람.
많은 주저와 여러 잠정적 결정끝에 중국의 동지들이 마침내 병력을 파견,지원키로 한다는 최종결심을 하였음. 본인은 이 최종적이면서 또한 조선에 유리한 결정이 내려진 것을 기쁘게 생각함.
중국군을 위한 필요 장비들은 소련으로부터 제공될 것임. 귀하의 성공을 기원함. 1950.10.14. 핀시」.
「핀시」란 당시 아시아지역에 공산혁명을 수출하고 있던 스탈린의 암호명이다. 그의 암호명은 이 두개의 비밀전문을 포함,6·25 관련문서들을 발굴한 러시아의 전사역구가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국가문서관리위원장(예비역 대장)이 지난 92년 7월 밝힌 바 있다. 이 암호명 전문은 스탈린이 직접 친필로 작성,평양주재 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김일성에게 보내 중군국의 참전결정을 알린 것이다.
6·25가 북한과 소련 및 중국 등 당시 한반도 주변 공산세력의 「조선 적화전쟁」임을 입증하는 이같은 증거자료는 지난 92년 7월27일 본보의 정전협정 39주년 특별취재팀에 의해 보도된바 있다(당시 7월27일부터 31일까지 본보 특집시리즈).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중군국의 참전을 알리는 전문을 보내기에 앞서 중국 공산당은 10월9일 주은래 외교부장을 모스크바로 급거 파견한다. 그러나 주은래가 찾는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없었다. 스탈린은 남부 휴양지 크림반도에 가 짐짓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다시 크림반도에 날아간 주는 스탈린을 면담한다.
『원래 협의했던대로 중국은 조선전쟁에 지상군을 참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소련의 공군지원은 언제부터 이루어지는가』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의 적극개입과 유엔군 참전 등으로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의 양상을 띠면서 전세가 공산군에 불리하게 전개되자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스탈린은 주에게 준비가 안됐다는 이유로 원래 합의했던 소련공군의 지원을 거절했다. 주는 이에따라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중국의 조선전쟁 개입도 재고해야 할 것』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모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회의에서 이미 결정한 일(50년 10월2일 모택동 주덕 유소기 주은래 등 참석)이라며 소련공군의 지원없이도 중국지상군은 조선전쟁에 참전하겠다는 사실을 통보하라고 지시한다. 소련공군은 그로부터 한참후 위장복장으로 참전한다. 이같은 중국군의 6·25 참전결정 과정은 중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역사적인 「당사자료집」 제36호(89년 10월 출간)에 게재돼 있다.
지난 21일부터 모스크바 국영 TV방송이 볼코고노프 위원장 주관아래 다큐멘터리로 공개하고 있는 북한의 6·25 남침사료는 한미에 의한 북침설을 일축하는 증거들이다. 이 자료들이 발굴되기 이전에는 북한정권의 정치선전과 수정주의 학자들의 「북침설」을 제대로 잠재우지 못했었다.
그런데 구 소련이 와해된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이던 볼코고노프 장군이 모스크바 정부문서고에서 발굴해낸 이 비밀문서들은 북침설을 제거해버리기에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