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급민들과 노예들은 성안 거주 불가능 밤에는 성 밖으로 나가야하는 시스템,
성 밖에서 출퇴근 하는 시스템(남아공처럼)
얼마나 호화로웠냐면 숯꾼이 따로 있어 성밖에 숯가마에서 숲을 구워서
각 양반가에 매일 공급함 주방 연료를 연기가 많이 나는 나무가 아닌 숯을 썼음
나머지 식자재도 모두 호화로웠다함
동감합니다. 한국사에서 국력을 따지면 여러 민족이 많이 섞여있던 발해를 제외하면 고려 > 통일신라 > 조선 이라 생각합니다. KOREA라는 이름을 퍼트릴 정도로 무역도 전세계급으로 했고 당시 희대의 사기캐 몽고제국에 묻혀서 과소평가되었을 뿐이지 고려 군사력도 세계적으로 강한편이였죠. 실제로 몽고제국에 무력하게 쓸려나가던 다른 나라에 비해 고려는 끈질기게 버텨내다 자치권을 보장받았었구요.
제가 중학시절 그러니까 일제의 식민사관 잔제가 많았을때였지만 당시 저희 담임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길
신라는 당시에 멀리 아라비아나 폐르시아와도 교역을 했었고 수도인 경주는 가구수가 20만호가 넘었었고 밥짓는 시간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았는데 모두들 숯을 써서 취사를 할 정도로 엄청난 부와 문명을 자랑했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아라비아쪽이나 다른 세계 여려나라 사람들이 신라에 귀화해서 살기를 원할정도였다고도 배웠었구요
지금으로치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된거랑 비슷한 거라 보시면 될듯합니다
2000년이 아니라 1400여년전 이예요 황룡사 목탑은 자장의 건의로 선덕여왕이 지었어요. 600년정도에 살았으니 (정확한 연도는 기억 안나지만.) 600년이면 엄청난 차이고요. 경주에 대한 기록과 발굴한 결과 방(현대의 도시 블록)을 추정했을때 100만명정도 살았답니다.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과 같이 세계 4대 도시였어요. 윗님이 한양과 비교하는데 조선 전성기 시절 한양은 30만명 살았어요. 일제 시대 들어와서도 70만명이었습니다. 페르시아등지에서의 기록으로도 신라가 황금의 나라라 기록되고 모두가 가고싶어 하는 나라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신라는 실크로지 종착지이자 국제적 도시였어요.
경주는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온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중에서도 제일 많이 나오는게 기와와 토기 파편입니다
이게 궁궐이나 절터만 그런게 아니라 일반 서민들이 주거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오는 유적이 기와와 토기 파편임
그만큼 기와와 토기는 신라 시대 서민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던 물건들이라 할수 있고요
그리고 경주 금장리에는 기와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기와가마터 유적도 있습니다
서라벌에서 기와는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는 이야기임
삼국시대 신라 서라벌은 고구려 3경과 백제 사비성(열도에 아스카 문명 건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래급으로 취급되었지
이미 세계사적으로는 상당한 대도시 규모와 문명 수준을 구가하고 있었군요(이후 남북국시대 고구려인과 백제를 흡수하면서 서라벌은 더욱 팽창 전성기를 구가. 이후 중세 고려는 5,60만의 거대 개경을 수도로 동급의 서경(평양)과 전쟁 없이 흡수한 동경(서라벌) 및 남경(지금의 서울)의 4개의 거대 도시와 기타 중소 도시의 위용을 보임)
이미 삼국시대 우리 고구려 동방문명권은 유럽 최대 도시라는 로마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5대의 거대 도시 문명을 구축하군요.
우리쪽 고구려나 신라등과 지속 언급 얽혀 있는 것도
(실위 후대 몽골등도 고구려 휘하 부용세력)
유럽으로 치면 천년 로마제국의 역사와 영향력에 바탕한 주변 봉신 부족 세력들이 이후 국가를 세워도(부족 개념이던 폴란드의 본격 왕국개념의 틀이 되는 피아스트 왕조도 10세기에서야 등장) 그 역사의 직간접적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들 동북방의 거란, 말갈(여진)등과 열도의 왜 역시
수천년 동방문명권을 구축 군림해온
우리 고조선 고구려문명권의 영향력 때문임을
우리 역사에 대해 스스로 자각할 필요가 새삼 있을 것이군요.
고구려의 토대가 되는 초기 토착재지 5부(선대 고조선)는 이후 신성한 태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점하며 천하를 지배하는 5부 행정 대도시 문명으로 발전 이후
발해 5경과 신라 5소경에 이런 발해의 5경 체계는 다시 북방의 패자가 되는 요의 5경 체계로 금 역시 고구려계 국무총리가 송을 멸망시키고 북경에 중도 건설을 총지휘. 이후 쿠빌라이는 이런 요,금이 닦아놓은 강북을 기반으로 몽골 내부 분열시기에 물자를 통제하면서 대칸에 오를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됩니다.(이를 바탕으로 남송 정벌)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2000년 전이라는 건 과장. 1300~1200년 전 정도가 맞을 듯.
백제, 고구려 멸망 후 신라가 추가로 얻은 영토에서 오는 모든 재화가 서라벌로 모였을 테니 경주 귀족들이 사치스러워지는 건 당연함.
백제 왕실과 백제 귀족이 가져갈 재화를 신라가 가져가니 풍족하기 이를 데가 없었을 듯.
당시 100만명이 살었던 도시로 전세계로 따져도 손에 꽂힘
아랍 지도에도 나오고 동쪽 황금의 나라 지팡구도 일본이 아닌 신라였을 것. 당시 일본은 귀족도 비루했음. 일본 사극중에 헤이안 시대 철저히 고증한 사극 보면 귀족도 남루한 옷차림에 평민은 훈도시 차고 다닐정도 지금 일본 국보도 다 우리가 주거나 만들어 준것들 식민사관으로 우리역사를 너무 낮게봉
신라는 전성기 시가지가 외곽으로 지속적으로 팽창(도시의 주요 시설물인 사찰등이 외곽으로 확장등)
전성기 17만 9천여 호에 달했군요.그외 바둑판 형태의 계획도시로(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사비성등도 계획도시) 마차가 지나가는 도로와 인도 구분, 배수시설 및 각 골목마다 출입문이 있어 주소로 얼마든지 이곳 저곳을 쉽게 확인 가능에 금으로 도금한 집들까지 30여채가 존재)
서라벌의 경우에는... 삼한일통 이후 전성기를 지나면서 도시가 급성장한 것은 확실하구요.
저 서라벌 복원 모형은 대략 8~9세기 헌강왕(임금님귀는 당나귀귀의 주인공)
즉 서라벌이 정점을 찍고 이제 막 하향곡선을 타기 시작할 딱 그 시점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 면적이 좁은데 거기에 어떻게 백만명 인구가 살 수 있냐 하는 분이 있는데
전성기 서라벌은 주변에 위성도시(?) 처럼 사이즈 자체가 엄청나게 확장됩니다.
요즘 개념으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매트로폴리탄 내지는 위성도시를 거느린 수도 정도로 보시면 되겠네요.
증거가 있냐고요?
최근의 고고학 결과가 그렇습니다.
서라벌 중심부 말고 주변에 서라벌 6부 지역 모두 도심급의 밀집도를 보이는게요.
그래서 그 권역을 다 합치면 충분히 백만명 수용하고도 널널합니다.
그리고 위의 모형이 구라(?)라고 하시는 분이 계신데, 구라는 아닙니다.
건물배치, 건물들의 사이즈 등은 전부 발굴결과 데이타를 그대로 적용한건데요.
다만 잔디밭 조경이 저렇게 깨끗하게 되어 있었겠냐, 기와건물 양식을 어떻게 전부 재구성하는게 가능하냐 등등의 비판이 있을수는 있다고 인정은 합니다만... 그럼 모형 만들때 다 무너져가는 건물들로 모형을 만들라는 이야기를 할 수 는 없지요.
건물 양식에 관해서는, 시대별로 양식의 변천이나 구조들이 다 밝혀져 있으므로 큰 오류는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다만 각 건물들이 몇 층짜리 건물이었냐 하는 부분은, 불확실한 부분들이 아직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라 건축물들이 조선말기 처럼 거의 전부 단층이지는 않고 복층 이상의 건물이 많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됩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1) 기술적인 문제가 없었다(신라 건축기술이 열악했다는 정신나간 사람은 없겠죠)
(2) 건축재료 조달 문제가 없었다(신라 때만 해도 거대한 삼림에서 목재 조달이 가능했음)
(3) 각종 문헌 기록들로 뒷받침 된다.
(4) 신라는 온돌이 일반적이지 않았다(온돌이 전국적으로 일반화된 것은 소빙하기의 추위가 엄습한 때인 17세기 이후)
(4) 고고학적으로 복층 건축물들이 많았음이 증명된다.
추가적으로 전성기 서라벌에 금으로 장식된 건물들이 매우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금입택)
비가 오면 우산 없어도 즐비한 기와건물들의 처마로만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는 기록도 사실이고요. (삼국유사 등)
뭐 기타등등.
참고로 고려시대 개경 인구는 전성기 기준 대략 40~60만 보더군요.
조선의 한양은 인구 20~25만 정도 되는 도시입니다.
고구려 평양의 경우에는 전성기 인구 20만 정도로 보는 논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안학궁 같은 걸 보면 건물 하나 사이즈가 동시대 당나라 궁궐 제일 큰 건물보다 더 큼)
우리가 조선 말기 퇴락한 상태만 너무 머릿속에 이미지화 하고 있다 보니 고대도시에 대해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황룡사 9층 목탑을 보면... 80미터 이상 고층 목조 건축물인데, 이 건물이 고려시대 몽골군이 불태울 때 까지 거의 200년을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크다고들 하는 일본의 거대 목탑들, 중국 요나라의 거대 목탑들 대부분 수십년 못 버티고 벼락맞고 불나고 지진 못 버티고 하면서 다 무너집니다.
내구성에 차이가 있었던 면이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