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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27 11:52
문제의 2천년전 한반도 모습.jpg
 글쓴이 : 우유크림행
조회 : 9,273  

Screenshot-2020-10-27-at-11.49.52fa2b31d91cfa730c.jpg



는 신라의 수도
2000년전 고대국가가 21세기 대도시에 견줄만큼 
미친듯이 잘 살았다는것에 갑을논박이 있었나봅니다 ㄷㄷㄷ

이게 사실이라면 진짜 신라가 당시 선진국이긴 했을듯 ㄷㄷ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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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난늑대 20-10-27 11:53
   
갑론을박 없을텐데..
깍기감자 20-10-27 11:53
   
잘 살았쥬. 조선시대 처럼 유교국가가 아니었구 상업도 성행했으니까
     
저개바라 20-10-28 06:05
   
하급민들과 노예들은 성안 거주 불가능 밤에는 성 밖으로 나가야하는 시스템,
성 밖에서 출퇴근 하는 시스템(남아공처럼)
얼마나 호화로웠냐면 숯꾼이 따로 있어 성밖에 숯가마에서 숲을 구워서
각 양반가에 매일 공급함 주방 연료를 연기가 많이 나는 나무가 아닌 숯을 썼음
나머지 식자재도 모두 호화로웠다함
나만의선택 20-10-27 11:57
   
조선시대보다 더 잘살았을걸요?
치즈랑 20-10-27 11:58
   
그들의 생활사를 본다면 저 정도는 껌이지...
칼까마귀 20-10-27 11:58
   
삼국 중 가장 못 살았죠.
사금 때문에 가야 보다는 부자
오늘비와 20-10-27 11:58
   
우왕 +_+
노원남자 20-10-27 12:00
   
저정도수준은 아무래도 통일신라이후에 나올모습같은데요.
박삿갓 20-10-27 12:02
   
삼국시대땐 별로이긴 했는데 통일신라는 확실히 엄청 잘살았죠.. 교역도 활발히 해서 경제적으로도 강했고 군사력도 중국한테 선빵쳐서 이길정도이니 통일신라 당시에는 세계에서 손에 꼽는 강국이긴 했습니다.
굿보이007 20-10-27 12:02
   
이 정도는 돼야 일본의 열등의식이 지독했는지 이해가 가네요.  그리고 아마 고려시대가 더 화려했을걸요.  아랍이랑도 교류해서 장신구도 화려했구
     
박삿갓 20-10-27 12:26
   
동감합니다.  한국사에서 국력을 따지면 여러 민족이 많이 섞여있던 발해를 제외하면 고려 > 통일신라 > 조선 이라 생각합니다.  KOREA라는 이름을 퍼트릴 정도로 무역도 전세계급으로 했고 당시 희대의 사기캐 몽고제국에 묻혀서 과소평가되었을 뿐이지 고려 군사력도 세계적으로 강한편이였죠. 실제로 몽고제국에 무력하게 쓸려나가던 다른 나라에 비해 고려는 끈질기게 버텨내다 자치권을 보장받았었구요.
          
김잘생 20-10-28 15:46
   
그러니 박정희빠 목사들, 타이어뱅크 사장이 말하는 5천년동안 가난하다가
박정희가 이만큼 살게해줬다는 개소리가 듣기 짜증나는거죠~
     
재미있는 20-10-28 08:40
   
실제 아랍에서 벽란도에 상인이 온 것은 딱 3번입니다.
고려 역사 전체에서 3번이요.
산골대왕 20-10-27 12:03
   
제가 중학시절 그러니까 일제의 식민사관 잔제가 많았을때였지만 당시 저희 담임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길
신라는 당시에 멀리 아라비아나 폐르시아와도 교역을 했었고 수도인 경주는 가구수가 20만호가 넘었었고 밥짓는 시간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았는데 모두들 숯을 써서 취사를 할 정도로 엄청난 부와 문명을 자랑했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아라비아쪽이나 다른 세계 여려나라 사람들이 신라에 귀화해서 살기를 원할정도였다고도 배웠었구요
지금으로치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된거랑 비슷한 거라 보시면 될듯합니다
     
모르겠수 20-10-27 13:50
   
그래서 신현준이....
북창 20-10-27 12:03
   
조선시대 한양도 저정도 했습니다.
     
박삿갓 20-10-27 17:48
   
조선시대가 훨씬 인류가 발전한 시대인것을 감안해야죠.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차이가 700년인데 지금부터 700년전이면 고려시대 말기였습니다.
sangun92 20-10-27 12:04
   
2,000 년 전이 아니라, 1,500 여년(?) 전인 6세기 당시의 모습.
내일을위해 20-10-27 12:04
   
신라의 멸망 원인이 사치라는 얘기가 있어요. 로마처럼. 여러 얘기보면 위 그림이 타당하다 생각들어요.  물론 신라전체가 아니라 귀족들의 동네인 서라벌이겠지만요.
충남넘 20-10-27 12:11
   
2000년이 아니라 1400여년전 이예요 황룡사 목탑은 자장의 건의로 선덕여왕이 지었어요. 600년정도에 살았으니 (정확한 연도는 기억 안나지만.) 600년이면 엄청난 차이고요. 경주에 대한 기록과 발굴한 결과 방(현대의 도시 블록)을 추정했을때 100만명정도 살았답니다.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과 같이 세계 4대 도시였어요. 윗님이 한양과 비교하는데 조선 전성기 시절 한양은 30만명 살았어요. 일제 시대 들어와서도 70만명이었습니다. 페르시아등지에서의 기록으로도 신라가 황금의 나라라 기록되고 모두가 가고싶어 하는 나라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신라는 실크로지 종착지이자 국제적 도시였어요.
moim 20-10-27 12:13
   
초가집이 아니고 전부 기와집?
무슨 중동 재벌도 아니고 말이안됨
     
턀챔피언 20-10-27 13:09
   
한 나라의 수돈데 왜 말이안됨?
직접 살아봤나
     
팬더롤링어… 20-10-27 13:09
   
기왓집이 많아서 비오면 처마 밑으로만 다녀도 비를 맞지 않는다 했습니다..
     
뱃살마왕 20-10-28 00:20
   
말이 됩니다
     
수호랑 20-10-28 09:32
   
경주는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온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중에서도 제일 많이 나오는게 기와와 토기 파편입니다
이게 궁궐이나 절터만 그런게 아니라 일반 서민들이 주거지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오는 유적이 기와와 토기 파편임
그만큼 기와와 토기는 신라 시대 서민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던 물건들이라 할수 있고요
그리고 경주 금장리에는 기와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기와가마터 유적도 있습니다
서라벌에서 기와는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는 이야기임
니에루 20-10-27 12:19
   
통일 신라 이후에 한반도의 재화가 다 경주로 모이니 번화할수 밖에요. 삼국시대만해도 서로 치고박고 싸우느라 별거 없었을듯
     
굿잡스 20-10-27 12:34
   
삼국시대 신라 서라벌은  고구려 3경과 백제 사비성(열도에 아스카 문명 건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래급으로 취급되었지

이미 세계사적으로는 상당한 대도시 규모와 문명 수준을 구가하고 있었군요(이후 남북국시대 고구려인과 백제를 흡수하면서 서라벌은 더욱 팽창 전성기를 구가. 이후 중세 고려는 5,60만의 거대 개경을 수도로 동급의 서경(평양)과 전쟁 없이 흡수한 동경(서라벌) 및 남경(지금의 서울)의 4개의 거대 도시와 기타 중소 도시의 위용을 보임)

이미 삼국시대 우리 고구려 동방문명권은 유럽 최대 도시라는 로마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5대의 거대 도시 문명을 구축하군요.

고대 영국 론디니움(런던)과 고(구)려(KOREA) 동방문명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5&wr_id=833564
          
니에루 20-10-27 17:07
   
아니.. 발제글 신라에 대해서 얘기한거 아니었나요..? ㅠ 삼국시대만해도 이리저리 치여서 "신라"가 별거 없었다는 말입니다. 고구려 백제가 별게 아닌게 아니라요~
     
굿잡스 20-10-27 12:40
   
남북국시대 발해 이후 등장하는 북방의 패자 거란의 요나

이후 발해후예 부흥국 세력과 신라계 황제 결합의 대금등이

우리쪽 고구려나 신라등과 지속 언급 얽혀 있는 것도
(실위 후대 몽골등도 고구려 휘하 부용세력)

유럽으로 치면 천년 로마제국의 역사와 영향력에 바탕한 주변 봉신 부족 세력들이 이후 국가를 세워도(부족 개념이던 폴란드의 본격 왕국개념의 틀이 되는 피아스트 왕조도 10세기에서야 등장) 그 역사의 직간접적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들 동북방의 거란, 말갈(여진)등과 열도의 왜 역시
수천년 동방문명권을 구축 군림해온
우리 고조선 고구려문명권의 영향력 때문임을
우리 역사에 대해 스스로 자각할 필요가 새삼 있을 것이군요.

고구려의 토대가 되는 초기 토착재지 5부(선대 고조선)는 이후 신성한 태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점하며 천하를 지배하는 5부 행정  대도시 문명으로 발전 이후

 발해 5경과 신라 5소경에 이런 발해의 5경 체계는 다시 북방의 패자가 되는 요의 5경 체계로 금  역시 고구려계 국무총리가 송을 멸망시키고 북경에 중도 건설을 총지휘. 이후 쿠빌라이는 이런 요,금이 닦아놓은 강북을 기반으로 몽골 내부 분열시기에 물자를 통제하면서 대칸에 오를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됩니다.(이를 바탕으로 남송 정벌)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http://news.donga.com/3/all/20140313/61666261/1

정강의 변 : 서토 송이 신라계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턀챔피언 20-10-27 13:09
   
별거 없었다뇨 ㅋ
          
니에루 20-10-27 17:09
   
통일신라보다 상대적으로 삼국시대 신라가 별거 없었단 얘기입니다.
대당 20-10-27 12:56
   
오......
닥생 20-10-27 13:34
   
2000년 전이라는 건 과장. 1300~1200년 전 정도가 맞을 듯.
백제, 고구려 멸망 후 신라가 추가로 얻은 영토에서 오는 모든 재화가 서라벌로 모였을 테니 경주 귀족들이 사치스러워지는 건 당연함.
백제 왕실과 백제 귀족이 가져갈 재화를 신라가 가져가니 풍족하기 이를 데가 없었을 듯.
9one 20-10-27 14:33
   
당시 100만명이  살었던 도시로 전세계로 따져도 손에 꽂힘
아랍 지도에도 나오고  동쪽  황금의 나라  지팡구도  일본이 아닌  신라였을 것.  당시 일본은 귀족도 비루했음.  일본 사극중에  헤이안 시대 철저히 고증한 사극 보면 귀족도 남루한 옷차림에 평민은 훈도시 차고 다닐정도 지금 일본 국보도 다  우리가 주거나  만들어 준것들 식민사관으로 우리역사를 너무 낮게봉
우왕 20-10-28 00:04
   
이집트 피라미드 시기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함
비안테스 20-10-28 00:05
   
통일 신라시대의 경주는 세계 3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거로 압니다.
ashuie 20-10-28 00:56
   
경주나 개경이면 당대 세계최고의 호화로운 대도시가 맞을거에요
진짜 한국사 향락의 끝판왕이 서라벌의 진골들이었죠.
성골 멸망후의 이들이야말로 진짜배기...
워해머 20-10-28 00:59
   
일단 2000년 전이 아닐뿐더러 당연히 시각적으로 과장됐죠. 애초에 당대 건축물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함. 물론 신라는 경주에 모든 것이 집중된 나라였기에 저 CG 사진 만큼은 아니어도 번성하긴 했을 듯.
로마전쟁 20-10-28 03:00
   
번성했죠

남아있는 유물중에 가장 놀라운게 지금봐도 이뻐보이는 유리그릇들이랑 유리잔들

그시대에 그걸 썻다는게.. 직접 만들진 않았지만 저기 멀리 유리그릇을 만드는 나라와 교역했고 그걸 많이 사용했으니 유물로까지 남아있는거겠죠

잘먹고 잘 살았으니 그 당시엔 분명히 사치스러운 물건이었을 유리그릇을 사용하고 했겠죠
재미있는 20-10-28 08:41
   
저걸 진짜 믿는 사람 왜이리 많아...

저 건물 양식부터 중국과 일본 고대건물 양식을 한옥식으로 배치한 짝퉁이라고 말이 많은 건데.

서라벌이 번화하긴 했겠지만,

당시 기준으로 번화한 거지 현대인이 봐도 우와하게 저렇진 않죠.

지중해 무역을 한손에 쥐고 황금으로 거래하던 17세기 베네치아나 이스탄불도 저 정돈 아닌데.

저걸 믿네...

그 사료라는 것도 분석하면 날림인게, 지금 경주 면적으로 계산해도 인구 대비 면적이 안 나와요...

요약하면, 번화한 것은 맞지만, 저 정돈 아니다.

물론, 기와집과 대로가 뚫린 상류층 구간이 있긴 있었을 겁니다.

도시 전체가 저런 것은 솔찍히 국뽕이고요.

역사적으로 저런 도시는 존재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어요.

당장 21세기 서울도 도시 전체가 강남 같진 않은데.
아차산의별 20-10-28 10:57
   
윗 사진들은
국뽕인지  신라뽕인지  모르지만

전혀  아니라고봅니다
그냥  상상의  그림을  그린것을
역사속 사실처럼 받아드리는것은  아니죠

저 당시에  무슨 잔디가  정원에깔려있고 ... 
ㅎㅎ
도데체 
상상으로  만들어진것을
역사속  사실로 받아드리는건
무슨경우인가요  ?
굿잡스 20-10-28 11:36
   
신라 서라벌 도시의 위용(기록상으로 과장 없이 거의 백만에 육박함)

 
http://cafe.daum.net/hanryulove/IwYk/407397?q=%BD%C5%B6%F3%20%BC%AD%B6%F3%B9%FA&re=1

신라는 전성기 시가지가 외곽으로 지속적으로 팽창(도시의 주요 시설물인 사찰등이 외곽으로 확장등)

전성기 17만 9천여 호에 달했군요.그외 바둑판 형태의 계획도시로(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사비성등도 계획도시) 마차가 지나가는 도로와 인도 구분, 배수시설 및 각 골목마다 출입문이 있어 주소로 얼마든지 이곳 저곳을 쉽게 확인 가능에 금으로 도금한 집들까지 30여채가 존재)

해양대국 백제 이후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했던게 천년 신국(神國) 신라.


남한산성에서 세계 최대 신라 기와 무더기 출토.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unesco114&logNo=110024350409&proxyReferer=https:%2F%2Fm.search.daum.net%2Fsearch%3Fw%3Dtot%26nil_mtopsearch%3Dbtn%26DA%3DYZR%26q%3D%25EC%258B%25A0%25EB%259D%25BC%2B%25EC%2584%25B8%25EA%25B3%2584%2B%25EC%25B5%259C%25EB%258C%2580%2B%25EA%25B8%25B0%25EC%2599%2580


'황룡사 짝퉁이 아니다'..산골 폐사지 황용사터에서 금동제 유물 20여점 쏟아졌다

https://news.v.daum.net/v/20201021191513198


고려 왕건도 서라벌 동궁 수세식 변기 썼다.

https://news.v.daum.net/v/20171002202348200
굿잡스 20-10-28 12:05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마끄디시는 966년에 지은 저서《창세와 역사서》에서 신라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요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중국의 동쪽에 한 나라(신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곳(신라)을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정착하여 다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한 바 심지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쇠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며 식사 때에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http://m.blog.daum.net/islamforyou/99?category=702458
     
merong 20-10-28 13:33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데...
50년 가까이 지나고 나서야 이미 망한 신라 얘기를 쓴거군요.
          
굿잡스 20-10-28 14:25
   
기본 역사서나 서적은 당대 기록들을 모아 후대에 편찬되는게 전혀 특별하지는 않군요.
굿잡스 20-10-28 12:23
   
중세 고려의 화려한  귀족 문화 역시

삼국시대 해양대국 백제의 바톤을 이어받은

천년 신국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에 의해

동아시아에서 신라 네트워크를 구축. 이런 가운데 도자기 기술까지 전파되면서

고려비색 천하제일이라는 화려한 고려 청자와 여러 발달한 문화를 더욱 꽃피우게 되군요.

당시 이런 황금에 비견되던 고급 도자기의 하이테크 기술은 고려와 송 이외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고

옆 왜 뿐 아니라 중동등도 이런 광택에 단단하고 투명한 비색의 아름다운 청자는 워낙 귀해서 깨어지면 구멍을 뚫어 철사등으로 연결해서 재사용할 정도 였지만

우리 고려는 청기와나 내부에 타일 장식으로 도배할 정도였군요.
지아시아 20-10-28 14:35
   
이건 좀 할말이 많은데... 여튼 신라는 정상적인 국가는 아니였음 서라벌 먹여살릴려고 전 신라영토를 쥐어짬
     
굿잡스 20-10-28 14:57
   
신라는 5소경이라는 특별 지방 행정구역을 설치 하군요( 강원도에는 북원소경, 전라도에는 남원소경 김해는 금관소경등을 두어

삼국시대 이후 흡수한 가야 백제 고구려인등에 대한 분산 융합과 점차 지방의 중심도시로 성장)
마시마로5 20-10-28 16:18
   
여몽전쟁, 왜란호란, 경술국치.. 외세의 침략에 의해 천년간 하향곡선타다 6.25전쟁으로 바닥찍고 다시 천년상승을 하려는 중이라고 믿고싶네요. 국방력 앞으로 더 키운다니 안심.
아이하라 20-10-28 16:47
   
역사 배울떄 통일신라말기 가보면 사치를 금하는 명을 내리기도 할 정도면 흥청망청 백성들 쥐어잤겠죠
아차산의별 20-10-28 18:34
   
저 그림은
1500년전 신라 모습이 아니라

2020년  컴퓨터속  상상의  그림일뿐입니다
굿잡스 20-10-28 19:49
   
성중의 사찰이 민가보다 더 많았으며, 그 중에도 크고 웅장하며 높고 특출한 전각은
지금까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당시의 존숭함이 지극하였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연복사탑 중창기(演福寺塔重創記, 1393년)-

 

십천교(十川橋)를 지나 연복사(演福寺)에 이르니 절 가운데 5층 누각이 높이 솟아

주위의 성문을 누르듯이 서 있었다. 누각의 벽면과 모서리에 채색 그림이 그려져 있는 참으로 웅장한 건물이었다.

-유송도록(遊松都錄, 1477년)-


대개 성곽을 쌓을 때 높은 산을 베고 있다. 가끔 언덕이나 산기슭을 나와,

또한 구불구불 둘러 있는 것이 보인다. 큰 것이 날아갈 듯 치첩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우뚝하게 표관이 웅장하다.


환취(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누각)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 총수(산 이름)는 구름이 이어졌다.

보산(관<關> 이름)에는 서기가 날아오르고, 금암(관<關> 이름)에는 시내가 통과한다.


[개성은]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은] 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 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명(明)의 동월(董越)이 1488년의 조선을 보고 1490년에 쓴 조선부[朝鮮賦]-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년)의 일본사(Historia de Japam)-

※운산금광등 세계적 금광등이 있었지만 당시는 무분별한 채광을 자제시킴.


경주 서라벌에 대한 여러 기록들

https://m.cafe.daum.net/baemilytory/91cd/35004?q=
굿잡스 20-10-28 20:20
   
윗 사진은 디지털 복원에 의해 정확한 묘사는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저런 천년 사직 신라의 수도 서라벌의 규모와

바둑판의 계획도시나 화려한 문화 생활 수준, 대형 건축물에 다층 구조, 즐비한 기와집 묘사등은  결코 근거없는  단순한 상상은 전혀 아님을 분명히 인식 자각할 필요가 있군요.


위에 올린 중세 고려 말 조선 전기의 기록을 보면 번창했던 신라의 화려한 도시를 이은 중세 고려를 통해 그리고 서라벌의 여러 관련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적을 통해  어느 정도 당대에 가깝게 유추할 수가 있군요.


조선도 전기와 그리고 임진 이후 소빙기가 본격화 온돌이 대중화되는 후기와는 건축의 다층 선호도가 달라지군요

(종서를 불러들여 보고 말하기를, “내가 풍질(風疾)을 얻은 까닭을 경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그때가 바로 한창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한낮이 되어 잠시 2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더니..."

 -조선왕조실록 세종 13년(1431년)-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에 관해서 근정전이 단층이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의 근정전을 그린 그림도 2층.근정전 앞에 좌우 협문도 2층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도 모두 2층)


그리고 중세 고려와 조선의 도시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조선은 불교를 배척 유교를 정치 이념화 하다보니

중세 이전의 도시 시가지에서 흔히 보던 대형 사찰이나 랜드마크 격인 고층 탑들이 점차 사라지고 산으로 밀려나게 됩니다(물론 개성의 연복사등은 이성계 시절 재건)

유럽도 성당이 주요 랜드마크로 자리했듯 고대 도시는 이런 행정이나 종교 시설을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달 외세의 침입을 막기 용이한 성곽을 두르게 되는 형태를 보이군요.

중세 고려 이전 남북국 시대 신라등의 도시는 이런 대형 가람이 도시의 중요 시설로 랜드마크인 거대 탑들이  도시의 특별하지 않던 모습에 이미 대형 건축물도 상당했군요.

여기에 중세 이전에는 귀족등은 수도등 대도시 중심으로 밀집되어 살았던 도시 성격이나

근세 조선은 북촌등  한양에 사대부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기본 낙향해서 향촌 자치의 분산된 도시 성격으로 과밀도가 이전과는 다른 형태를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열도에 아스카 문명을 건설하는등
해양 대국 백제 이후 신라가 동북아 해상무역을 장악 당나라 산둥등에 신라방을 형성했다는게 몬 의미인지 아직 잘 이해를 못하는 이들이 있군요.

조선시대 정도전이 여차하면 명에 요동정벌의 강경 모드로 1년에 3번 조공 즉 공무역 어쩌고 그것도 육로로 하던 제한된 방식이 아니라

아예 신라방이라는건 청말기 서구의 조계지처럼 신라인의 자치구역이 허용되어 직접 신라인들이 항시 언제든 인적 물적 교역을 그것도 육로보다 운송 방식이나  속도에서 더 좋은 해상무역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며

그것도 해상왕 장보고시대에는 이런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던게 신라이군요(중세 고려를 창건한 왕건도 해상무역으로 부를 쌓은 집안) 즉 이당시 신라의 국제무역을 통한 재화 물류는 조선시대와는 궤를 달리.

그리고 장단점이 있지만 지향점이 달랐던 농본 중심의 조선에 비해

상공업이 융성했던 신라 고려는

도시의 규모나 성격 인구 밀집도 역시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군요(즉 조선시대 한양의 모습보다 이전 남북국시대 신라나 중세 고려의 도시 규모나 화려함이 더 한게 과장된 묘사가 아님)
떡국 20-10-28 21:09
   
서라벌의 경우에는...  삼한일통 이후 전성기를 지나면서 도시가 급성장한 것은 확실하구요.
저 서라벌 복원 모형은 대략 8~9세기 헌강왕(임금님귀는 당나귀귀의 주인공)
즉 서라벌이 정점을 찍고 이제 막 하향곡선을 타기 시작할 딱 그 시점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 면적이 좁은데 거기에 어떻게 백만명 인구가 살 수 있냐 하는 분이 있는데
전성기 서라벌은 주변에 위성도시(?) 처럼 사이즈 자체가 엄청나게 확장됩니다.
요즘 개념으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매트로폴리탄 내지는 위성도시를 거느린 수도 정도로 보시면 되겠네요.
증거가 있냐고요?
최근의 고고학 결과가 그렇습니다.
서라벌 중심부 말고 주변에 서라벌 6부 지역 모두 도심급의 밀집도를 보이는게요.
그래서 그 권역을 다 합치면 충분히 백만명 수용하고도 널널합니다.

그리고 위의 모형이 구라(?)라고 하시는 분이 계신데, 구라는 아닙니다.
건물배치, 건물들의 사이즈 등은 전부 발굴결과 데이타를 그대로 적용한건데요.
다만 잔디밭 조경이 저렇게 깨끗하게 되어 있었겠냐, 기와건물 양식을 어떻게 전부 재구성하는게 가능하냐 등등의 비판이 있을수는 있다고 인정은 합니다만...  그럼 모형 만들때 다 무너져가는 건물들로 모형을 만들라는 이야기를 할 수 는 없지요.
건물 양식에 관해서는, 시대별로 양식의 변천이나 구조들이 다 밝혀져 있으므로 큰 오류는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다만 각 건물들이 몇 층짜리 건물이었냐 하는 부분은, 불확실한 부분들이 아직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라 건축물들이 조선말기 처럼 거의 전부 단층이지는 않고 복층 이상의 건물이 많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됩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1) 기술적인 문제가 없었다(신라 건축기술이 열악했다는 정신나간 사람은 없겠죠) 
(2) 건축재료 조달 문제가 없었다(신라 때만 해도 거대한 삼림에서 목재 조달이 가능했음) 
(3) 각종 문헌 기록들로 뒷받침 된다.
(4) 신라는 온돌이 일반적이지 않았다(온돌이 전국적으로 일반화된 것은 소빙하기의 추위가 엄습한 때인 17세기 이후)
(4) 고고학적으로 복층 건축물들이 많았음이 증명된다.

추가적으로 전성기 서라벌에 금으로 장식된 건물들이 매우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금입택)
비가 오면 우산 없어도 즐비한 기와건물들의 처마로만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는 기록도 사실이고요. (삼국유사 등)
뭐 기타등등.

참고로 고려시대 개경 인구는 전성기 기준 대략 40~60만 보더군요.
조선의 한양은 인구 20~25만 정도 되는 도시입니다.
고구려 평양의 경우에는 전성기 인구 20만 정도로 보는 논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안학궁 같은 걸 보면 건물 하나 사이즈가 동시대 당나라 궁궐 제일 큰 건물보다 더 큼)

우리가 조선 말기 퇴락한 상태만 너무 머릿속에 이미지화 하고 있다 보니 고대도시에 대해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황룡사 9층 목탑을 보면...  80미터 이상 고층 목조 건축물인데, 이 건물이 고려시대 몽골군이 불태울 때 까지 거의 200년을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크다고들 하는 일본의 거대 목탑들, 중국 요나라의 거대 목탑들 대부분 수십년 못 버티고 벼락맞고 불나고 지진 못 버티고 하면서 다 무너집니다.
내구성에 차이가 있었던 면이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