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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06 07:29
재외동포 현황 (독립국가연합 중심)
 글쓴이 : 러키가이
조회 : 2,026  


내용

교포(僑胞) 또는 해외교포(海外僑胞)·해외동포(海外同胞) 등이라고 한다. 종전에는 일반적으로 교포라 하였다.

해외교포란 한반도 밖의, 바다 건너의 교포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재외교포란 재일교포·재미교포 등의 재외를 종합한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중국의 화교(華僑)에 대해 한인교포를 한교(韓僑) 또는 조교(朝僑)라 하였다. 한교는 한국인교포를 말하고 조교는 조선인교포를 말한다. 우리나라 행정부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재외동포이다. 재외동포란 외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혈통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재외동포는 다시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재외국민(在外國民)이고 하나는 한국계 외국인(韓國系 外國人)이다. 재외국민이란 한국적을 갖고 외국에 거주하거나 영주권을 갖고 있는 자를 말하고 한국계 외국인이란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을 말한다. 최근 학계와 언론계에서 한민족을 강조하여 해외한민족, 재외한인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교포 분포현황

1995년 1월 1일 외무부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대한민국 인구가 4,485만 명, 북한 인구가 2,295만 명, 재외교포가 522만 명으로 교포는 전체 인구의 7.2%를 점한다.

재외교포를 지역별로 집계하면 중국에 194만398명, 미국에 180만1684명, 일본에 69만6811명, 독립국가연합에 56만1145명, 중남미에 9만34명, 아시아·태평양지역에 8만6711명, 캐나다에 7만3032명, 유럽에 6만6086명, 중동에 9,356명, 아프리카에 3,316명 등이다.

이러한 교포수는 중국의 화교, 이스라엘의 해외유태인, 그리고 이탈리아 해외교포 550만 다음으로 많으며 우리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교포를 많이 가진 나라가 되었다.


생활양상

교포의 생활은 각국에 이주한 시기와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무엇보다 거주 국의 법적제도와 주민들의 태도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다른 환경에 거주하면서도 한인들에겐 공통된 특성이 있다. 이를 보기 위하여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며 이주한 역사의 순서에 따라 독립국가연합, 중국, 일본, 미국, 중남미, 유럽 순으로 그곳 교포들의 생활을 살펴본다.

(1) 독립국가연합 교포

1995년 1월 1일 현재 독립국가연합 내에는 46만1145명의 교포가 거주하고 있다. 멀리 벨라루시아나 우크라이나에도 교포가 있으나 보다 많은 인구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그리고 러시아연방에 거주한다. 우즈베키스탄에는 22만336명, 카자흐스탄에 10만3525명, 그리고 러시아연방에 10만8325명이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주한 초기의 한인들은 농민들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토를 마련한 한인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이것을 빼앗기고 소작인이 되거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농지를 개간해야 했다. 소작인이 되었다하여 편안한 것은 아니다. 한인들은 토지세, 인두세 이외에도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세금,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은 세금을 내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인이 러시아의 국적을 얻으려면 러시아정교(正敎)의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를 받으려면 교리문답을 배워야 하며 교리문답을 배우려면 러시아어를 알아야 했다. 따라서 학력이 없는 농민들에게 러시아 국적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이 증가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한인을 세 종류로 나누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사람, 러시아 국적을 취득치 않은 사람, 그리고 잠시 후 귀국할 사람으로 나뉘었다. 한인들은 귀화한 사람을 ‘원호(元戶)’ 그리고 귀화하지 않은 사람을 ‘여호(余戶)’라 불렀다. 러시아의 국적을 취득하면 토지의 소유가 가능하여 국적을 취득치 못한 사람과는 다른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보다 당시 러시아 극동지구의 총독 여하에 따라 한인들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한인에게 호의를 갖는 그로데코프 같은 총독이 부임하면 여호라도 대우를 받았고, 운테르베르겔 총독처럼 한인에 대해 비우호적인 총독이 부임하면 원호라도 심한 고생을 하였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우국지사들이 중국의 북간도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주를 한다. 이것은 농민의 이주와 달리 망명이민이라 할 수 있다. 연해주에 망명한 우국지사들은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도왔다. 1910년 6월 한인 대표들은 모임을 갖고 13도의군을 조직하고 고종의 러시아 파천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일합병이 알려지자 한인 대표들은 신한촌에 모여 한국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8,624명이 서명을 했으며, 이것을 미국 국무장관 앞으로 발송을 하였다. 또한 특공대를 조직하여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려다 실패하였다.

한인들은 권업회를 조직하여 장기전을 도모하고 애국심의 함양과 선전을 위해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의병활동은 러시아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당시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기회 있을 때마다 러시아에 압력을 가하여 한인들의 활동을 저지하였던 것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원동(遠東)지역은 구제정 러시아군인, 첵코군, 백군, 홍군 등이 혼합되어 혼잡을 이루었고 설상가상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4대 강국이 간섭을 하여 이른바 시베리아전쟁이 시작되었다.

1917년 연해주에 상륙한 일본군은 다른 연합국 부대가 철수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1922년까지 머물렀다. 한인들은 이때 일본군에 대항하는 러시아 유격대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병영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원동지역 중요 도시를 공격하였고 한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을 공격하였다. 이것을 ‘신한촌사건’ 또는 ‘4월 참사’라고도 한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가두에서 수백 명을 사살하였고 가택수색으로 수천 명을 체포하였으며 공공건물을 방화하는 등 신한촌을 초토화하고 물러갔다.

1921년 6월, 러시아의 자유시(自由市)에서 있었던 사건은 한국인 의병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산발적으로 항일전쟁을 하던 의병부대들이 정비를 가다듬고 새로운 편성을 위하여 자유시에 모였다.

이것을 기회로 러시아군은 일본의 권유로 한인 부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한인부대를 포위하고 한인 부대간의 갈등을 기회로 한인부대를 향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한인 의병 700여 명이 사망하고 1,000여 명이 부상한다. 이에 한인부대들은 서둘러 만주로 돌아가고 말았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한인들도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1917년 3월 크라스노야르시크에서 전로한인총회(全露韓人總會)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원호와 여호의 대립이 있어 결국 총회는 둘로 나뉘어 한 무리는 다음 해 하바로브스크에서 모임을 갖고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후일 고려공산당으로 발전하였다.

1922년 일본군이 러시아 원동지역에서 철수하자 러시아는 이곳을 소비에트화하며 집단농장 건설을 추진한다. 한인들은 이에 적극 협력하여 원동지구 건설에 노력한다. 그러나 한인들은 또다시 무서운 시련을 경험하였다. 1937년 중국에서 중일전쟁을 발발하고 유럽에도 전운이 감돌자 스탈린은 연해주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1937년 9월 추수가 끝난 한인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가축을 싣는 화차에 실어 한 달 여의 시베리아 횡단 끝에 중앙아시아에 하차시켰다. 추위에 시달리며 가는 도중 노약자와 어린이가 죽었다. 특히 하차한 곳에서 많이 죽어 2세 이하의 어린이는 다 죽었다고 한다.

하차한 곳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이며 이 곳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우며 강우량이 적어 유목민에게나 적합한 곳이다. 한인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더지와 같이 땅굴을 파고 겨울을 지냈다.

다음해 봄 한인들은 강을 찾아 운하를 파고 논을 만들어 가져간 벼를 심었다. 대륙성기후라 일조량이 많고 물만 있으면 벼농사에는 좋은 조건이다. 한인들은 첫해 농사에 성공하였고, 계속 벼농사에 성공하여 강제이주 3년 후에 원상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한인들이 재배한 쌀이 이웃 한민족은 물론 유럽의 소련에까지 확대되어 ‘한인’하면 쌀, 쌀하면 ‘한인’을 연상하게 되었다.

강제이주를 당한 다음해 농사에는 성공하였으나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강제이주를 명령한 스탈린은 다시 한인을 적성민족으로 간주하여 한국어를 소련의 소수민족언어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어 학교를 폐쇄하였으며 한국어를 가르치던 교사를 해임하거나 다른 과목을 가르치게 하였다.

한인들은 자기가 거주하는 공화국 이외의 지역으로 여행할 수 없었으며, 군대에도 갈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빨리 모국어를 잃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은 모두 농장에 배치되어 농업에 종사했는데 성실하여 많은 노동영웅을 배출했다.

이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김병화와 황만금이다. 김병화는 북극성농장에 배치되어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여 노동영웅 칭호를 두 개나 받았으며, 그가 사망한 뒤 그 농장을 ‘김병화농장’이라 개칭하게 되고 다쉬켄트 한 거리를 ‘김병화거리’라 명명하게 되었다. 황만금이 이끈 농장은 ‘포리토젤’농장으로 이곳은 전 소련에서 관광공사에 등록된 유일한 농장이 되었다.

관광공사에 등록된 농장이란 외국인에게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는 뜻이며 소련 내에 있는 3만 여 개의 집단농장에서 포리토젤농장만이 등록된 것이다.

스탈린에 의하여 한국어가 소련의 소수민족언어에서 제외되고 탄압을 받았을 때 카자흐공화국 서기장은 당시 카자흐공화국에 이주한 한국계 신문인 ≪레닌기치≫(후에 ≪고려일보≫가 됨)를 계속 간행하게 하였고 한인들의 극장을 계속 보호하였다.

이것으로 ≪레닌기치≫는 구소련에 있는 유일한 한국어판 신문으로 살아남았고 카자흐스탄 수도인 알마타에 있는 ‘조선극장’은 유일한 한국어 사용 극단으로 남아 지방공연을 하면서 한 맺힌 한인들을 위로하는 유일한 집단이 되었다.

소련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이후 열심히 일을 하여 타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열이 높아 자기를 희생하면서 2세, 3세들을 교육시켰다.

그 결과 한인 2세, 3세들은 화이트칼라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이 와해되고 독립국가연합이 설립되면서 모두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공화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국어를 선포하여 우즈벡 공화국에서는 우즈벡어가, 카자흐스탄에서는 카자흐어가 국어가 되었고 이때까지 사용하던 러시아어는 외국어, 국제어가 된 것이다.

화이트칼라직에 종사하는 한인들은 공용어인 우즈벡어 또는 카자흐어를 몰라 결국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형편에 놓였다. 이들은 현재 중앙아시아를 떠나 조상들이 살던 연해주로 재이주를 하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재소한인들은 도시마다 고려인협회를 조직하고 고려인문화센터를 설립하여 한국어학습과 한국전통문화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각 도시의 고려인협회는 다시 공화국의 고려인협회 그리고 이들을 망라한 독립국가연합의 고려인협회를 갖고 있다.

이들 고려인협회가 친한적인 성격이 강하자 북한은 서둘러 통일촉진위원회(약칭 아소크)를 조직하여 고려인협회를 견제하고 사람을 모아 북한관광을 시키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사할린에는 4만 여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사할린 남부가 일본의 영토였던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징용당한 사람들이다. 그 당시 광산 등에서 근무하다 광복이 되자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고 이곳에 있던 일본인들만 철수하고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곳에 남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인 처를 가진 한인 남자들이 일본으로 철수하여 사할린에 남아있는 한인들의 귀환을 위하여 노력하고 사할린에 남은 사람들도 소련의 국적 또는 북한의 국적을 거부하면서 한국으로 귀환하기만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들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러시아는 한국과의 국교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한국정부는 이들은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모두에게 버림받고 억울한 세월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정세가 호전되었고 일본의 변호사와 국회의원들이 활동하는 가운데 1988년 이후 러시아와 한국이 수교를 시작하면서 원한에 사무친 사할린 억류 한인들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2세, 3세는 도시로 진출하여 지식인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주로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거나 타지에 살아도 중앙아시아를 고향으로 생각하여 명절이나 연휴에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친척집을 찾아간다.

중앙아시아에 뿌리 내린 한인들은 두 가지 면에서 특성을 가졌다. 하나는 교포들이 갖는 민족문화의 보존과 자부심이고 다른 하나는 전 독립국가연합에서 모범적인 소수민족이 된 것이다. 이곳의 교포들도 다른 곳의 한인과 같이 이웃한 유목민을 무시하고 대전통(大傳統)인 러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는데 주력하여 왔다.

따라서 이웃한 문화와 섞이지 않고 한국적인 전통을 많이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인은 역경을 성실로서 극복하려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유감없이 발휘한 곳이 재독립국가연합의 교포들이다. 이들은 말하자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127개 민족 가운데 모범적인 소수민족이다.


한인 교포들의 특성

한인교포들은 이주 시기와 방향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구한말과 일제 초기의 한인들은 주로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 만주로 이주하였고, 현재는 이들의 3세, 4세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에 노동자로 이주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강제로 동원되어 갔다. 이들은 현재 2세, 3세가 지배적이다.

광복 후 1960년대의 교포들은 남북미대륙과 유럽 등 서구문화권으로 이주하여 문화적 충격을 크게 받으며 적응의 어려움을 경험하였고, 이들은 1세가 지배적이다.

교포들이 어느 나라에 이주하든 모두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시련을 경험하고 고생하였으며, 특히 국권을 상실하였을 때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비록 이주의 시기와 장소가 서로 다를지라도 그들이 경험한 시련은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인의 특성을 발휘하여 모두 거주국의 모범적 소수민족이 되었다. 한인들은 위기와 악조건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자녀교육에 헌신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 결과 다음 세대의 사회상승률이 높아진다. 이래서 한인을 ‘아시아의 유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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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키가이 19-04-06 07:29
   
노원남자 19-04-06 07:36
   
오늘날에와선 그냥..검은머리외국인일뿐..
뿔늑대 19-04-06 08:30
   
화교와 달리 존중 받죠
송곳니 19-04-06 09:07
   
어째 옛날 조선족 에게 했던 여론몰이와 비슷해서리.. 90~20년대에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라면서 별에별 여론 운동을 했었죠 그당시 정부지원과 민간인 지원이 상당했고

근데 지금그런 것들이 퇴색되고 심지어 앙금만 남았습니다

뭘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쓴지는 이해합니다만 그게 재외동포 4세까지 확대의 당위성을 주기에는
부족하죠(이번 정부가 확대했으니 이거 책임지겠죠. 생각해보니 이런부분은 지금까지 책임지는 인간들이 없었네요 ㅎㅎ) 그들이 그정도로 민족의식이 있다면 한국에 와서 국적 취득의 노력을 했겠죠..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운 짐들이 점점 많아지는 지 원.. 옛날에 이중국적자들 참 부러워 했죠
여러가지로 선택권이 있고,,,
와후 19-04-06 10:48
   
문제는 세금을 쓰는거고 국민들과 역차별이겠죠.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식으로 하는지 궁금하네요.
왜 자꾸 갈등요소를 만드는지 모르겠네요. 조선족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갈등이 벌어지면 또 국민들
배려심 부족으로 그 탓을 돌리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