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때문에 어렵게 사는 농민들을 구제하고자 30만평에 이르는 땅을 간척하게 하고 간척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어럽게 일구어 낸 땅들은 고리대와 노름을 통해 부자들에게 넘어가고 말았고, 이를 보며 분통이 터진 지정환 신부는 '다시는 한국인들의 (경제적인) 삶에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4년 척박한 산골 동네인 임실군에 위치한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그는 다시 가난으로 불쌍한 삶을 사는 농민들을 대면하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조금만 개입할 생각으로 풀밭이 많은 임실에서 자라기 쉬울 산양을 길러 산양유를 생산하였으나 당시 한국에서 낯설었던 산양유가 잘 팔리지 않고 남은 것이 버려지게 되자, 그 젖으로 치즈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신부 본인은 어려서부터 치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곧 이를 더 크게 벌여 군민들의 삶을 돕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벨기에의 부모님으로부터 2,000달러를 받아 허름한 치즈 공장을 세웠다. 지정환 신부의 아버지는 아들이 치즈 산업을 위해 돈을 지원해달라고 하자 "치즈를 싫어하는 네가 무슨 치즈를 만든다는 거냐?"하고 황당해했다.
하지만 치즈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3년이 지나도 성과가 나오지 않자, 프랑스와 이탈리아 견학까지 가서 기술을 배워와서 1969년에 비로소 치즈 생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치즈 산업체에서는 산업 기밀이라며 기술을 알려주는 걸 꺼렸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탈리아 공산당 당대표 비서로 일한 젊은이가 노트에 기술을 적어서 신부에게 주었다고 한다. # 3달만에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보니, 그동안 같이 치즈 생산 작업을 했던 청년들이 계속 된 실패에 좌절하고 신부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1명만 남고 다 떠나버려서 다시 불러모았다고 한다. 제대로 된 치즈 공장 하나 없던 시절에 임실 치즈는 서울의 특급 호텔에 납품될 정도로 유통망을 넓혀갔다. 후에 지 신부는 이 치즈 공장의 운영권, 소유권을 모두 주민협동조합에 넘겼다.
선종 이틀 후인 4월 15일 정부에서는 영양 공급이 부족했던 어려운 시기에 선진국에서 젖소를 수입해 국민에게 제공하는 등 한국 치즈 산업을 태생시켜 임실을 치즈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몇년전 임실에 있는 산양유 목장에 갔다가 저 신부님에 대해 알게 된건데 역사책에 나와도 될 인물이라고 생각들었었는데 방송에서도 소개 되었었군요.
가끔 가생이에서 인종차별과 식민지 당시때의 만행으로 벨기에를 욕하지만 한국전쟁때 파병과 특히 한국 치즈산업을 만들어준 저 신부님 때문에 욕할 수가 없음.
암튼 산양유는 애기때 먹던 엄마 젖 맛과 비슷한데 특히 번식철때 그 맛이 더 난다고 하네요.
그래서 아기들에게는 우유보다 좋아 가격이 비쌈. 문제는 아이들이나 성인들 입맛에는 안 맞아 젖소우유를 섞어 팔고 있는게 산양우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