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담으로 전쟁 발발 전에는 이런 저런 단체들을 반강제로 통합하여
[13] 만든 대한청년단의 단장을 맡기도 하였다. 대한청년단은 총재를 이승만으로 추대했고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고 선언문에 썼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경악한
채병덕이 국방장관 공관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에 채병덕은 가회동에 살고 있던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신성모의 소재를 물었는데, 이때 신동우 중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채병덕은 신동우를 불러 신성모의 집으로 안내하게 한 다음 신성모에게 직접 상황을 보고했다. 그때가 아침 7시였는데 신성모는 일요일에 북한군이 공격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전 10시 30분, 신성모는 이승만을 찾아가서 북한군이 이미 1시간 전에 개성을 함락시키고 탱크를 앞세워 춘천을 공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승만이 놀라서 "국군에는 탱크를 막을 수단이 없지 않은가?"하고 혼잣말을 하자 신성모는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란 말을 되풀이하며 이승만을 안심시켰다.
결국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전황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해 놓고
서울을 몰래 빠져나갔다. 2011년 9월 4일 한국 현대사 증언 TV자서전에서 등장한 퇴역 육군중장
채명신 장군에 의하면, 신성모가 전황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경도 안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태를 만들어놓고 대정부 겸 대국민사기극을 벌이게 된다. 육군이 38선 부근에서 분전하면서 북진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중요한 건, 불리했던 전세를
이승만에게만 보고했다는 것이고, 그걸 들은 이승만은 27일
대전으로 튀어버렸다.
그리고 남하 저지책이랍시고 내놓은 게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폭파(!), 철교와 대교는 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폭파되어야하긴 했으나, 신성모가 너무 빨리 폭파한 탓에 국군의 후퇴에 악영향을 주는 문제를 야기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해서 신성모가 까인다. 그리고 그 책임을 육군
공병감
최창식 공병대령과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에게 다 떠넘겼다... 채병덕 장군은 온갖 욕을 먹은 결과 보직해임 후 하동 방면 전선에서 전사했고, 최창식 대령은
단지 신성모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전비행죄(敵前非行罪)로 총살당했다.
자세한 내용한강철교와 한강대교 폭파로 서울시민들이 제대로 피난을 가지 못했고 심지어 다수의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부요인들과 김규식 등의 저명인사들도 제대로 피난을 가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저명인사들이 납북되거나 적 치하에서 학살당했고 가장 군사적으로 중요한 서부전선의 한국 육군 사단들이 와해되어 버렸다.
[14] 훗날
김홍일 장군이 지휘하면서 버티던 한강방어선에서 소집되어 투입한 한국 육군의 낙오병력은 한강교 폭파 전 기존의 전선에 배치된 병력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장비는 거의 모든 중화기를 상실해서 개인장비만 간신히 갖춘 상황이었는데, 이는 북한 쪽에서 대규모 포로를 잡았다고 선전하는 형태의 전과를 만들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정도만 해도 당연히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사안이지만, 비슷한 병폐를 저지른 채병덕 장군이 패전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
[15]에 비해 현직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삽질은 어디가지 않아서 1951년에 일어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합리화하였다는
대한민국 국회의 비판을 받았고, 곧이어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자 착복금 중 일부가 이승만 정치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신성모가 사건 배후로 지목되었다. 이 사건에서 신성모는 제일 먼저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이었는데, 국방부장관이라는 직위에 따른 책임도 있었지만,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신성모가 단장으로 이끌었던 대한청년단 단원들로 충원되었기 때문이다.
[16] 하지만 후안무치하게도 사건 수사를 방해하면서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하였다. 예를 들자면 국민방위군사령관과 부사령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거나, 그들을 재판하는 군사재판장마저 자기 친구로 임명하여 봐주게 했다거나 등. 하지만 수만 명의 청년을 굶겨죽인 것에 비해 형량이 너무 낮게 나와
[17]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부장관직에서 사임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기붕이 임명되었다. 문제는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사위를 살려보려고 했는지 당시 여론은 "사위
김윤근을 신성모가 빼돌릴 것이다."라는 소문이 쫙 퍼져있어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이 직접 이례적으로 군사법원 판결과정을 마이크와 스피커를 연결하여 그대로 공개를 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공개처형을 실시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