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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4-06 17:16
(독일방송 편집) 독일이 유독 한국에 친근함을 갖는 이유.jpg.txt
 글쓴이 : 러키가이
조회 : 10,526  


충격 스키타이(흉노/훈족/신라시조) 역사/독일ZDF방송 + 미국교수 한반도출발 결론


 

충격 스키타이(흉노/훈족/신라시조) 역사 / 독일ZDF방송 미국교수 한반도출발 결론

===본문중에서===

.....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에서 독일 연출가인 옌스
페터 베렌트와 미국의 코넬 대학 교수인 아이케 슈미트 박사가 훈족을 집중
적으로 추적하면서

한반도 남단인 목곽적석 신라고분군에서 발굴되는 많은
유물을 검토한후 내린 결론은 훈족이 아시아 최동쪽인 한반도에서 출발 했
을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

....





서기 370년 바람과 같이 유럽 다뉴강(현 항가리) 초원에 진출한 훈족(흉노)에 대한
배경은 아직까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그이유는 그들이 정확하게 어느민족이며

아시아 어느지점에서 출발해서 유럽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연구는 아시아 지역에서 거의 전무한 상태 였고 훈족에 대한 연구는 유럽인
들이 300 여년전 시작해 훈족이 흉노라는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고조선...멸망시기와 즈음해서...훈족이 발생했다)



유럽에 진출한 훈족에 대한 기록은 로마인들이 많이 남겼으며 그기록중에서 훈족은
네모진 얼굴에 광대뼈가 툭튀어나오고 납작한 코, 옆으로 가늘게 죽찟어진 눈, 이마에
편두를한 작달막한 사람들로 로마인들에게 혐오감을 주었든 이들은 분명 아리
안족인 백인과는 거리가먼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에 살든 몽골계 유목민족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있다.



이들은 유럽과 중근동을 지배하든 대제국 로마와 싸워 그들을 괴롭히며 로마로
부터 조공을 받아내면서 활동영역을 서유럽까지 넓혀 갔다. 이들과 끝임없는 전쟁
을 치루며 조공으로 국력을 잃은 서로마는 끝내 침입해온 게르만족에게 힘없이 멸망했다.



로마의 어린이도 훈족이 온다면 울음울 그치게 할 정도로 전쟁터에 나가서
살아서 움직은 모든 사람과 동물을 죽이는 잔인 하기가 이루 말 할수 없는 그들이
유럽으로 출발한 근원지를 추적한 다큐가 독일과 미국에서 두편 제작되였다.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에서 독일 연출가인 옌스
페터 베렌트와 미국의 코넬 대학 교수인 아이케 슈미트 박사가 훈족을 집중
적으로 추적하면서 한반도 남단인 목곽적석 신라고분군에서 발굴되는 많은
유물을 검토한후 내린 결론은 훈족이 아시아 최동쪽인 한반도에서 출발 했
을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에서 제작된 훈족 다큐 Atilla, The king of Babarian 은 메모해둔 자료가
없어져 다큐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잊어버렷지만 기억에 남은 그들은
중국과 미국의 역사 학자들이었다.



두편의 다큐를 비교해 보면,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는 철저하게 유물
고증으로 훈족의 출발지가 한반도 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증을 해가면서
밝힌 반면,



1997년 방영된 미국에서 제작한 훈족 다큐는 첫번째 화면에 한반도
지도가 나오면서 붉은 화살표가 한반도에서 만주 벌판으로 뻗어올라 가며 훈족
의 출발지를 한반도 본토로  기정 사실화 하면서 훈족은 한반도 깁숙한 본토에서
출발했다는 설명이 이어지는 티비 화면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다큐는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다큐를 본후 훈족의 자료를 찾아 오늘 이
시간까지 책과 인터넷에서 훈족의 자료를 수집하는 계기가 되였다.



신라와 한반도에 정착한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진출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피상적인 스키타이 민족
에대한 정보 보다는  이들에 대한 폭넓은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지 않고는
이해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스키타이민족에 관한 역사자료를 시작으로 유럽으
로 이주한 흉노의 발자취를 그들이 남긴 유물을 비교해 가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1,  스키타이 민족과 역사



스키타이 병사들은 죽은 적병의 두피를 벗겨 양손으로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서 필요할때 마다 수건처럼 사용했다. 그들 사이에서 두피를 많이 가진자가 존경을 받고 두피조각을 여러개 꾀매서 큰 두피수건을 만들기도했다. 적병의 머리를 잘라 두개골 윘쪽부분 안쪽을 금판으로 입히고 가죽으로 밖을 씨워 컵으로 사용했다. 집안에 수많은 두개골을 금장식품과 함께 진열해서 찾아오는 손님에게 집주인은 자신의 용맹을 과시했다.



스키타이민족의 신화는 제우스의(Zeus) 아들 타기타우스(Targitaus)가 그들의 조상이라고 전해져오지만, 문자가 없는 그들의 역사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우리가 알고있는 독특한 스키타이 양식의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알려졌다. 멜유코바(A.I.Melukiova) 는 스키타이 인들이 기원전 2천년부터 기원전 7세기 사이에 몇차례에 걸처서 볼가강-우랄 초원을 거처서 흑해연안까지 진출했다고 추정하고있다.



스키타이인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7세기에 앗씨리아와 키메르인(Cimerians)에 대항한 동맹국으로 알려져있고, 그결과 키메르인들은 살든영토를 잃고 스키타이인들에게 남쪽으로 쫓겨갔다. 기원전 674년 스키타이 파타투아왕은(Partatua)아씨라아 공주와 결혼으로 아씨라와 동맹관계를 굳히며 그들과 함께 카스피해의 메도스(Medos)지역을 정복했다. 메도스인들은 후에 스키타이인들을 서아시아지역에서 격퇴해 이들은 다시 폰티악(Pontiac) 초원으로쫏겨났다.



스키타이민족이 어느인종에 기원을 두고있는지, 그들의 문화를 추적한 결과 그들의 문화는 인도북부[현북부 파키스탄 스르브나야(Srubnaya)]지방과 연계 되였다는 사실과 해르도투스가 남긴 스키타이인의 언어 기록중 'pata" 죽이다, 'spou' 눈,arima' 하나, 'oior' 남자 등이 남아있어  언어학자들은 스키타이인들이 사용한 언어를  인도-유럽어 어군 이전의 고대 언어로 분류하고 있어 이들의 출발지가 어디인지를 거의 정확하게 규명 할 수 있다.



말과 스키타이인은 불가분의 관계가있다. 이들은 말을 타기 위해서 바지를 고안해 입은 최초의 인류라는 기록을 남겼으며(유럽인의 시각), 이들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말을 길들여 타고 다닌 민족으로 추정되며, 말등에 안장없이 천을 깔고 달리는 말위에서 등자도 없이 몸의 중심을 잡으며 전투를 벌이는 광경은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유럽과 중동에서 말을 전투에 사용할 수있는 말타는 기술을 전파시킨 민족은 스키타인들이며 유럽과 중동제국에서 말탄 사람이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등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훈족이 유럽에서 몰락한 6세기 부터였다. 6세기 이전 영화에서 등자가 있는 말을 타고 유럽인들이 싸우는 장면은 역사를 무시하는 허구라는 사실을 알수있다.



스키타이민족과 전쟁을 한 다리우스 대왕이 관찰한  일화는 스키타이인의 한 단면을 볼수 있는 장면이다. 한참 전쟁을 하는 중, 스키타이 병사들은 전쟁터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 토기를 가끔씩 훔처보기 시작하다가 스키타이 병사들은 잽싸게  전쟁터를 벗어나 토끼사냥을 했다.다리우스대왕이 스키타이 전사들의 행위를 이해 할 수 없는것 처럼, 현대문명인인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도 스키타이인들의 그런 행위는 이해 하기가 힘들다.



이들이 남부 소련지방과 알타이 지역에 남긴 수많은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이들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며  초원에서  활동적으로 살았든 이들이 남긴 짐승을 대상으로한 예술과 말에 대한 사랑을 알수있게 되였다. 야만족으로 무시했든 특이한 이민족에게서 문명인인 우리는 바지와 승마기술을 전수 받았다.



BC 514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7십만의 대군으로 다뉴브강을 건너 소련의 초원으로 진격해 스키타이 정복길에 나섰다. 이를 맞은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작전을 사용하며 페르시아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면서 계속 후퇴하는 이들에게 다리우스대왕이 전투를 독촉하자 이들은 이렇게 회답했다, 우리가 후퇴를 하며 전투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평화시의 평상적인 생활 방식을  따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집과 재산이 있는 마을도 없고 또 경작할 농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런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전쟁으로 모두 잃을 것이라는  공포에 대왕의 군대와 대항해 싸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잃을것이 없는 우리는 대왕의 군대와 전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치만, 대왕이 우리와 진정 한판의 전투를 즉시 하고 십으시다면 우리조상들의 무덤을 한번 건드려 보십시요, 그때 대왕은 우리가 싸울지 않싸울지를 알게 되실것입니다.



다리우스대왕에게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생각해보니 스키타이인과 전쟁으로 적에게서 얻을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점령할 도시도, 건물도, 약탈할 아무것도 없었고 그곳에는 끝없이 넓은 지평선만 보이는 초원밖에 없었다. 다리우스대왕은 철군외에 다른 선댁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철군하는 대왕의 군대에 스키타이군대는 다뉴브강까지 따라 가면서 대왕을 괴롭혔다. 그일이 있은후 다리우스 대왕은 다시는 다뉴브강을 건너 북쪽 초원으로 스키타이 정벌을 포기해 결국 승리는 스키타이인들에게로 돌아갔다.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는 자는 망하고, 초원에서 끝없이 이동하는 자가 승리 한다는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의 믿음은 스키타이민족에서 유래한 말이 틀림 없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부터 3세기까지 스키타이민족은 흑해초원 북쪽부터  흑해, 돈강(Azov해로 흘러 들어가는 러시아 중부의 강)동쪽 부터 서쪽 다뉴부강까지 차지했다. 스키타이 부족중 최고의 위치는 지배층에 속하는 부족이며, 다음이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부족, 최하위층이 농경생활을 하는 부족으로 이들은 지배부족과 유목민의 지배를 받았다.(사진 융성기의 스키타이 영역, 노란색)



스키타이민족의 융성기는 기원전 4세기~3세기초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발전에 최전성기였다. 수많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들이 정치 경제 상업의 중심지인 흑해연안 카맨스코 고로다스케 (Kamenskoe Gorodishche) 지역에 정책해 살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인 기원원 339년 스키타이왕 아테아스(Athesas)는 스키타이 제부족을 통합해서 영토를 확장해 트레시안(Tracian)국경인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아태아스왕은 나이 90에 마케도니아의 필립공(Philip, 그리스의 정복자 알랙산더 대왕의 부친)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스키타이 왕국은 그의 죽음에도 부강한 국가 형태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3세기 말 서쪽으로 부터 처들어오는 켈트(Celt)족과  트레시안(Tracian)족, 동쪽에서 처들어오는 사마시안(Samathians)족에게 밀려 스키타이인들은 이들에게 흡수되며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다.



2, 스키타이 민족의 생활과 풍습



스키타이인의 가족구성은 1부 다처제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들이
모계사회였다고 보고 있으나 고고학자들이 남부소련 지방에서 발굴한 그들의 묘는 그리스
인들의 주장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은
몇명의 처를 거느리며 사후에는 그의 형제나 아들이 그의 처를 소유 할 수 있었다.



스키타이 여자들은 별다은 권한없이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며 사는 존재에 불과했다. 스키타
이인의 이웃인 사마시안(Smartian) 여자들이 말을 타며,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활동적인 생활과  비교해 볼때 스키타이인 여자들은 마차를 이용해서
자식들과 함께 이동을 하는 정도의 능동적인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있다.



물고기와 야생의 짐승이 풍부한 이들에게 양식은 항상 풍부했다.이들의 기본식품으로는
현재도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중요한 식품인  발효한 말우유, 치즈, 파 마늘 콩등이 이들의
주식이었다.



해르도투스가 본 스키타이인들은 열정적인 모습으로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수염을 기른 얼굴에 깁숙하게 패인 눈에 검은 눈동자와 바림결치는 긴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필자주1,위사진 설명에서 말탄 사람이 아랍인이라고 했으나 그는 해르도투스가 설명한 스키타이인이다.



앉아있는 사람은 여성이 아닌 남장한 무당(한국의 남자박수 무당)을 만나고 있는 장면이다.



말에 달려있는 곡옥은 신라의 곡옥과 같은 형태로 다산을 뜻하며 그리스에서 스키타이인들이

몽골초원에서 유목민에게 전해진 스키타이 문화가 신라경주 까지 전파되였음을 알수있다.



말타고 있는 사람이 스키타이인이라는 확증은 그가 입고 있는 하의가 바지여서 알타이지방

까지 진출한 스키타인이라고 고증할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스키타이인들이 세계

최초로 말을타기 위해서 바지를 고안해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필자주2, 왼쪽은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무용수들이 입은 바지는 스키타이 문화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른쪽 고구려 각저총 씨름도에 등장한 인물에서 보이는 수염기른 인물은 이랍인이라고

설명되고 있으나 필자의 생각은 스키타이민족이 고구려까지 진출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1947년 2천년전의 스키타이인 묘지에서 발굴된 그들의 시신에서 굽이 달린 부드러운
장화와 함께 이들이 문신을 한사실도 밝혀졌다. 그들의 신앙은 무속신앙으로 미신을
믿으며 귀신을 쫏는 부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귀신을 쫏아내고 길흉을 점치는 무당은
특별한 집안에서 배출되며 최고의 무속인은 에나리스(enarees) 라고 불려진 남자 무
당이다. 남자와 여자의 중간 즉 반남밤녀로 불려진 이남자 무당은 여자의 목소리를
내며 항상 여자 옷을 입고 생활했다.



스키타이인들은 왕이 사망햇을때 시위적인 애도의 슬픈행위는 장기긴 계속되였다. 모
든부족이 모여 40일동안 장례의식은 거대하게 치러지며, 슬픔을 표시했다. 왕의 직계
가족들은 머리를 몽땅 자르거나, 귀와 앞이마나 코와 팔에 칼로 그어 상처를 내어
슬픔을 표시했다. 왕의 장례식때 그가 생전에 애용하든 무기와 모든 집기를 함께
묻은후 장례를 주관하는 집단은 왕의 처중에서 한사람과, 술시중인, 하인과 전령을
목졸라 죽이고 그가 생전에 애용하든 말을 죽여 왕의 주위에 함께 묻었다. 무덤은
적석목곽분으로 60 휘트 높이로 봉분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왕의 장례식이  끝난것이 아니다. 왕이 죽은지 일년후에 왕을 가까이서
모시던  최고 50여명의 젊은사람들을 목졸라죽여 왕의 무덤 주위에 뭍어 사후왕의
시중을 들게 했다.



헤르도투수가 기록에 남기지 않은 부분은 스키타이 전사들이 남긴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예술품들이 있다. 기원전 6세기경 스키타이 인들은 동물을 주제로
자연적인 모티프의 장신구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스키타이인들이 선호하는
동물은 첫째 사슴을 시작으로 말, 야생염소, 산돼지, 곰, 늑대, 고양이과 짐승,
독수리 물고기등이었다.



스키타이인의 문화는 기원전 1,000 년전에 이미 중국의 북쪽 유목민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지난 2백년간, 알타이 파직과  중앙아시아 남부시베리아에서 스키타이 고분의
발굴로  부장품이 출토되면서 스키타이민족의 예술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중에서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수많은 금으로
제작된 장신구이다.



스키타이인들이 번성기에 알타이지방까지 진출해서 황금광이 많았든 그지역에
서 황금을 채굴해 사용했을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알타이 지방에서 금의
산출이 많았기 때문이다.



금으로 만든 혁대와 장식품 및 수많은 금장신구, 금관 같은 장식품은 스키타이
문화가 한반도 남단까지 영향을 미처 스키타이 문화가 꽃을 피웠다는 사실은
신라의 문화가 이들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1세기 경에 제작된 아프가니스탄

황금의 계곡에서 발굴된 금관



               신라금관



신라금관과 아프가니스탄 금관은 스키타이문화의

산물이다. 지구상에서 면류관이 아닌 금관을 제작한

국가는 한국과 아프가니스탄 두나라 외에 없다.



참고1.헤르도투수( Herodotus )

헤르도투스(c.480-c.429).인류최초의 그리스 사가로 많은 사서를 남겻슴.

참고2 다리우스(Darius III) 페르시아 대왕

BC 331년, 그리스의 정복자 알랙산대 대왕과 가구가멜라(Gaugamela) 대전에서
침패한후 그의 일족에 의해서 피살됨. 그의 죽음으로 2세기 동안 고대세계에서
강국으로 군림했든 페르시아 왕국은 종말을 맞았다.



디오도루스 (Diodorus)

이태리 반도 남단섬 시실리 출생의 그리스 사가,40여권의 저서를 남긴그는 알랙산
드리아에 거주 한것으로 추정되며 카이사르(씨이저) 의 친구로 알려짐,



3, 훈(흉노)가 서유럽으로 이동한 이유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이동을 하게된 직접적인 원인은 중앙아시아와 극동
지방에 있었든 천재 지변이었다. 4 세기 초엽부터 5년간 기온이 1도가 내려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에게 생명과도 같은 풀과 농작물이 냉해로 자라지가 않았
기때문이다.



유목민인 훈(흉노)족은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해 만주를 거처 중앙아시아 초원을
따라 한반도 깊숙한 본토로 부터  대이동을 시작해 만주를 거처 초원을 따라
북상해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미국에서 제작한 Atilla, The King of the Babarian 에서
훈족(흉노)의 대이동이 한반도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확인하기 위해서
방영한 케이불 방송인 The Learning Channel 방송국에 편지로 문의를 했으나
Discovery 방송과 통합 되였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통합한 Dicocery 방송에 편지로
문의 하자 두방송국이 통합된후 수천개의 다큐중 찾기기 힘들다는 통보를 받아
아직도 그다큐 제작에 관여한 학자들에게 문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제작한 훈족(흉노) 다큐와 달리 독일방송에서 제작한 훈족추적 다큐
역사의 비밀 제작에 참여한  베린토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고증으로 한반도 남단 가야 지방에서 출토된 청동솟 유물과 훈족(흉노)
가 서쪽으로 이동하며 거처간 지역에서 발굴된 훈족(흉노)의 청동솟에 그근거를 두고
있다.



1924년 경주 노동동 금령총에서 발굴된 국보인 기마인물상(국보 91호)에서 말잔
등에 실려있는 청동솟 처럼 훈족(흉노)도 말잔등에 청동솟을 싣고 다녔다. 청동솟
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한국의 머리 장식에 서도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들었다.
훈족의 이동로에서 동복은 30여개가 발견 되였고  높이가 50-60 cm 무게는
50kg 이 넘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청동솟은 훈족의 이동경로 외에는
동복은 발견되지 않는 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스키타이 문명전-포스터 11.jpg



경주고분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은 전형적인 유목민의

차림이다. 삼각모와 말잔등에 실려있는 동복(청동솟)은

훈(흉노)의 동복과 같은 형태다.



기마인물은 편두를 했다고 보고 있으며,미스테리 처럼

남아있는 금관의 직경이 작은이유는 신라왕들이 편두를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설들력이 있다.



기마인물상의 발이 등자를 사용하고 있다. 훈족이 사용하

든 등자와 같은 형태의 등자는 유럽인들에게는

신병기였다. 등자는 훈족이 유럽을 유린할 수있는 가장강력한

무기였다.



동복은 유목민의 상징적인 유물로 스키타이 식과 흉노식 두가지 형태가 있다.
흉노의 동복이 스키타이식과 구별되는 것은 몽골계 유목민이 스키타이민족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독자적인 형태의 동복으로 발전시켜 장식이 거의 없는 스키타이식 동복과
달리 화려한 문양이 있고 손잡이의 형태가 다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동복은 북한과 중국 길림지역에서 발견되였고 북부중국 초원과
내몽고 오르도스지방, 남부소련, 헝가리등지에서 발견되고있다.



남부 깁숙한 한국의 경주고분과 김해의 가야고분인 대성동에서 발견되는 흉노식 동복은

북방계인 흉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유물이다.



청동솟의 용도는  유목민 족장들이 사용하든 용기로 제례의식에 사용하는 고기를
삶을때 쓰는 용기다. 국보인 말탄 기마인물이 말잔등에 동복을 싣고 있어 그 주인
공은 족장의 지위에 있는 실제 피장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기마인물상이 쓰고 있는
삼각모자와 복식은 전형적인 유목민이 사용하는 것이며 말안장과 등자는 훈족이
사용하든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훈족은 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등자를 사용했다. 등자는 말탄 사람이 마상에서
몸의 중심을 잡을수 있게 가죽이나 신발주머니 처럼 만들어 말안장에 연결시켰다.
훈족이 말타고 활을 쏘며 공격해오는 모습은 유럽인들에게 경이적이고 두려운
모습으로 보인것은 훈족이 등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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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그림 링크가 몇개 소실?되서 참고 자료 덧붙임
 

스키타이 문명전-포스터 1.jpg

 

사진: 전시회 포스터

스키타이를 우리나라 문화의 원류(源流)로 인식

 

스키타이 문명전-포스터 2.jpg

저 관()은 신라 금관과 연결되는, 대단히 흥미 있는 유물이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은 알타이 파지릭 고분과 우리 신라밖에 없다


스키타이

스키타이 인()들이 과연 누구인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그 인종적 계통은 분명하지 않다.


전사의 혁대

 

구리로 만든 스키타이 전사의 입상이 있었다.

 

스키타이 문명전-포스터 5.jpg

전사(戰士)가 허리에 차고 있는 혁대에 관심이 갔다.

또한 출토 된 혁대 부분을 가지고 복원한 것과 그 모형을 놔 두었다.

스키타이 문명전-포스터 6.jpg

스키타이 문명전-포스터 7.jpg

스키타이 문명전-포스터 8.jpg

바로 신라 금제 요대(腰帶)의 형태적 원형 아닌가?

사진: 황남대총 북분에서 나온 황금 요대.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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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ivery 20-04-06 17:17
   
독일인의 한국 호감도가 높지 않던데...
Arang 20-04-06 17:17
   
요약해줘유...
     
폭발1초전 20-04-07 00:44
   
독일이 님 먼 동생뻘 이래요~OK!!
라이라이라 20-04-06 17:18
   
제목 금시초문
반가사유상 20-04-06 17:18
   
헝가리는 지들 역사교육에 훈족에 대해 따로 배울 정도로
훈족은 헝가리가 진퉁인걸로 아는데
그래서 헝가리 애들이 우리보고 친근하다고 그랬음
     
패닉호랭이 20-04-06 17:23
   
우리도 사실상 훈족이죠
          
싸만코홀릭 20-04-06 17:41
   
정확하게는 신라족이 훈족과 관련있을 가능성이 많죠
               
원형 20-04-07 02:00
   
신라 김씨
BlackGoM.. 20-04-06 17:19
   
다 읽다가 퇴근 하겠네요
요약좀
긴양말 20-04-06 17:19
   
길다..
보미왔니 20-04-06 17:21
   
세줄 요약 모르시나요~~~
오늘비와 20-04-06 17:21
   
하...읽다내림..
요새 렄이님 안되겠음..
진실의 방으로.. ㄷㄷㄷ
홀로장군 20-04-06 17:25
   
뭔 X소리야~
운드르 20-04-06 17:25
   
‘현재를 지배하는 자(者) 과거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현재를 지배하려면 반드시 과거를 지배해야 한다’
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렇게 바꾸면 논리적으로 틀립니다.
첫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경우, 이를 바꾸면
'과거를 지배하려면 현재를 지배하라' 정도가 맞습니다.
만년방문자 20-04-06 17:27
   
호랑이 담배피던시절에 서유럽을 뽀사버린 흉노,훈족은 한국의 조상인지도 모른다 까불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
     
러키가이 20-04-06 17:29
   
ㅋㅋ 거의 비슷한 의미임 ㅋㅋ
     
한식짱좋아 20-04-07 07:59
   
요약 잘하셨네욬ㅋㅋㅋ
키르 20-04-06 17:27
   
엥?
식후산책 20-04-06 17:27
   
뭔 소리인가요?
헝가리면 그렇다고 하겠지만 .....
러키가이 20-04-06 17:28
   
-_- 줄였는데도;;; 기네유;;; 방송내용이 절라 길어유;;;

사실 글이 길어서~~~후반도 짤려서 ;;; 그림으로 대체 했는데도;;;
쉿뜨 20-04-06 17:28
   
미치겠네 ㅋㅋㅋㅋㅋ
flowerday 20-04-06 17:30
   
재밋다..
후후후훗 20-04-06 17:31
   
"몽골계 아시아 유목인"  얼마나 광범위 한데....
지금은 중국이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했으니 중국이 형제의 나라... 끝.
섬린 20-04-06 17:36
   
우리나라 역사는 언젠가는 재조명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죠
게다짝 족발 때국 북한 등에서

사료가 유실 혹은 은폐 날조 폐기등으로
인해서 앞으로 미래세대가 짊어져야 할
필수과제이기도 하죠..

좋은자료 글정리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뱃살마왕 20-04-06 17:46
   
단숨에 읽어 버렸네요 좋은 글 정말 잘읽고 갑니다
꿈결 20-04-06 17:48
   
요약
스키타이족의 문화를 훈족이 계승했다. 훈족과 한국 경주에서 나온 유물이 똑같다. 훈족이 한국에서 부터 출발해서 유럽으로 왔다.
ㅇ유ㅇ 20-04-06 17:54
   
정성대단!
너만바라바 20-04-06 18:10
   
첨 듣는 말인디요;;
모르겠수 20-04-06 18:15
   
독일은 한국 잘 모를텐데?
피터팬이얌 20-04-07 00:09
   
그래서~~~  그쪽도 좀 무표정 하게 다니던데.
감독 20-04-07 00:29
   
재밌게 읽다가... 너무 길어서 포기 ㅎㅎ
세임 20-04-07 00:36
   
유럽에서 가장 한국인 싫어하는 나라가 독일임...
     
슬로모 20-04-07 00:44
   
ㅇㅇ 독일이 한국 젤 싫어하고 프랑스가 젤 호감높음.
     
폭발1초전 20-04-07 00:53
   
원래 배 다른 형제 하고는 사이가 서먹함.
          
ㄴㅇㅀ 20-04-07 07:55
   
뭔 배다른 형제까지 ..
호갱 20-04-07 03:07
   
걍 유전자 검사하면 바로 나올텐데 ㅋ
주장이고 자시고도 필요없음 근래엔
좋은 20-04-07 03:42
   
지역 미상에 장소에 초기 신라와 망한 진나라 유민들이 합쳐졌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그 진나라가 한족이 아닌 흉노 즉 훈족이 뿌리엿고 훈족의 전형적인 문물과 제도를 그대로 이어간게 신라였음..거기에 타민족도 합쳐진 부족 연맹을 바탕으로한 다민족 국가체제하에 지배층이 훈족계열이엇다 보여짐..
ashuie 20-04-07 05:16
   
게르만이랑 훈족이 상관이 있었나..
하나는 로마로의 침략자고 하나는 내부반란자 였던걸로 기억하는데.
하얀그림자 20-04-07 06:19
   
아주 오래 전 코벨박사가  쓴것 신문에 연재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와 싸우던 스타이족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수세기 후  신라에서 그 문명의 흔적이 나타난것을
의문이라이라했죠
스키타이족은 이란계 백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훈족은  그 스키타이의 후손과 몽고로이드의  짬뽕집단이죠
천마총의 천마는 몽골 조랑말이 아니라 아프카니스탄북부,,,,
즉 아라비아 종마의 고향에서 온 말입니다
스키타이의 금세공은 너무나 유명해서 로마와의 교역도 이루어졌죠
특징중 하나는 금에다가 옥을 박아넣었다는겁니다
금은 기마민족의 특징이고 옥은 농경민족의 특징이죠
신라왕관은 그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신라 일부 왕들은 스키타이의 특징인 편두를 했습니다
그리고 벼슬이름도    그쪽 계통입니다
김유신의 벼슬이름이  대각간(후에 태대각간이라는 칭호를 받았음)이었는데
대는 한자의 크다라는 뜻이고
각간은 가칸 즉 칸이라는 말입니다
징기스칸의 칸과 같은 우두머리라는  뜻이죠
신라가 처음부터 그쪽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고(박석김 3성이 돌아가면서 왕위에 오를 때)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는 시기 그 어떤 문화적 정치적 접변이  선비족을 통해  유입(스키타이)된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ㄴㅇㅀ 20-04-07 07:54
   
무슨 독일이 한국에 친근감을 느낀다니.. 일뽕방송같은 느낌의 제목이네요
포도맨 20-04-07 08:11
   
혹시 환국이라고 아시나요?
센타우리인 20-04-07 09:42
   
환단고기를 아시나요?
warning 20-04-07 10:11
   
길지만 대략 이해
촐라롱콘 20-04-07 11:20
   
신라의 흉노 또는 스키타이 기원설은 오늘날 타 지역인들이 영남인들을 조롱하는 근거로도 활용되는데....^^

신라에 적석목곽분을 비롯하여 무덤에서 북방식 부장품들이 나타나는 시기는 4세기 무렵이고 대체로

내물왕 시기를 전후하여 김씨왕권이 집권할 무렵과 어느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데.....

스키타이는 아무리 존속기간을 오래 잡더라도 기원전에 이미 여러 나라의 기록에서 사라졌으니

스키타이(기원전까지 존속)와 신라(북방식 묘제와 부장품은 4세기 이후)는 최소 400년 이상의 시차가 발생하므로

스키타이와 신라를 다이렉트로 연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

스키타이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흉노 또는 좀 더 후대의 선비족이라면 신라 김씨왕조와 연결고리가 발생했을

개연성은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지만.....
토왜참살 20-04-07 12:58
   
넘 길어 패스
새로나온 20-04-07 13:49
   
길긴 기네요~^^
좋은 20-04-07 20:38
   
에초에 게르만에 원류인 아리아족에 고향인 아프간이 나오는데 그 아프간에 역사 자체가 그리스 인도 몽골족등 역대 여러 문화들이 뒤석여서 이루어진 시대에 따라 주도권이 변화되어 나온 지역이면서 그 주변 이란 이라크등까지 폭널게 세력권이 퍼져나간 지역임..다만 현대에 영국이 주도가된 불교를 포함한 몽골족등 아시아 문명권의 파괴 작업과 더불어 백인 위주의 철저히 왜곡 조작된 역사까지 이어진 현실이라 보이고 우리를 포함한 북방의 역사 자체가 다민족간 연합체로 이어진 혼혈의 역사 그 자체였다는 ㅋ
수염차 20-04-07 23:09
   
오류임.....
우리는 동이족의 일부입니다.....공자한국인설이 아니라....우리가 속한 동이족에 공자가 포함된것이죠

고조선은 흉노의 왼팔이라 불렷습니다.....흉노 세력중 가장 강한 집단이 고조선이엇죠
우리 한민족은 흉노의 일부분인것이죠.....
오늘날 한민족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농경민족이지만....
그전의 한민족은 만주벌판을 호령하는 기마민족이엇죠....물론 농경도 같이하는....

고구려(고려)가 지배하던 수백년간 흑수말갈등은....고구려의 직접지배를 거부하고 떨어져지냇죠....
이들과 고구려가 많이 충돌햇고....강대한 고구려와 전쟁시 미끼로 사용하던 부대가  그대로 도주하여
오늘날의 해안도로...7번국도....그당시에도 동쪽 해안도로가 잇엇답니다...
그 해안도로를 타고 남하하여....경주를 급습 왕위를 찬탈하죠..
그때부터 신라의 지배층은 흉노가 된겁니다....이들은 민족의식이 기존 한민족은 고구려 백제에비해 떨어졋고
그렇기에 고구려 백제를 당과 협잡해서 멸망시킨것이죠....

흉노족은 신라에서 출발한게 아니라....말갈족....거란족.....선비족...오한족....몽골족등....다양한 유목기마민족의 총칭이고....이들이 한나라의 토벌에 쫏겨...서쪽으로 이동한것이죠....
결국 서구문명은 한나라한테 추방당한 흉노족한테 철저하게 굴복한것이고....
서구문명은 이것을 말하는것이 부끄러운것이죠.....

그러나....동아시아인에게 패배한 흉노족이 서구한테 이겻다고.....동아시아문명이 서구문명보다 강하다는건 아닙니다.....흉노족은 이동과정중...더 많은 전략전술을 습득해서 더욱더 강해졋을 가능성이 존재하니까요....
서구는 부끄러워할 필요없는것이죠
불짬뽕 20-04-08 00:12
   
환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