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시골 청년 인상의 더스틴 니퍼트지만 마운드에서는 강한 모습으로 6경기에서 4승 무패에 평균자책점 2.04의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민기자닷컴 |
미국은 참 넓은 나라입니다. 캘리포니아 주만 해도 넓이가 대한민국의 4배 정도 됩니다. 그러다보니 뉴욕이나 로스 엔젤레스 같은 ‘메가 도시’도 있는 반면에 정말 작은 시골 마을도 많습니다. 두산 베어스의 더스틴 니퍼트는 빌스빌이라는 아주 작을 시골 마을 출신입니다. 그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 MLB 팀에 드래프트된 선수입니다. 그리고 쌍둥이 동생도 MLB 드래프트된 특이한 이력도 있습니다. 작년에 텍사스 레인저스 소속으로 포스트 시즌 마운드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순박하고 예의 바른 시골 청년의 분위기를 풍기는 니퍼트의 야구 인생을 들어봅니다.
-1981년생인데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나 자랐나.
▶아니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갈 때까지 오하이오 주의 작은 마을 빌스빌에서 살았다. 정말 작은 도시다. 아마 지금 내가 사는 아파트 건물 한 채의 인구 정도 산다 싶을 정도로 작은 타운이다. (웃음)
-웨스트버지니아의 윌링에서 자란 것이 아닌가.
▶아, 거기 병원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큰 병원이 없었다. 그래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웨스트버지니아 주 윌링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병원이 없을 정도로 작다는 말인가?
▶그렇다. (웃음) 아주 아주 작은 타운이다. 우리 농장에서 보면 이웃집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시골 마을이다. (웃음) 인구는 총 500명이 조금 넘는 정도였고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동창이 20명에 불과했다.
-전형적인 농장 지대인가보다.
▶그렇다. 내 부모님은 아직도 내가 자란 그 집에서 남동생과 함께 사신다. 여동생도 근처에 살고 있다. 쌍둥이 동생은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또 다른 작은 마을에 산다.
-쌍둥이 동생도 프로 야구 선수였다는데.
▶(프로에서는)같은 팀에서 뛴 적은 없고 나는 2002년, 동생은 2003년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드래프트됐다. 그러나 스프링 캠프 때는 항상 같은 집에서 살았고 늘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데릭이다.
-똑같이 생겼나.
▶만약 여기 내 대신 앉아 있다고 해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일란성 쌍둥이로 진짜 똑같이 생겼다.
-데릭도 여전히 야구를 하나.
▶아니, 은퇴했다, 내가 텍사스로 트레이드되던 해에. 어깨, 팔꿈치, 무릎 등 수술을 5번이나 받았다. 데릭은 고등학교 때와 대학에서는 투수를 조금 하기도 했지만 주로 유격수와 1루수, 외야수를 했다. 상당히 좋은 타자였다. 그러나 프로에 가서는 완전히 투수로 전업했는데 좋은 성적을 올리기는 했지만 몸에 무리가 갔던 것 같다. 4년간 5번의 수술을 받았고 야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남동생도 야구를 하나?
▶올해 15세인데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한다. 우리가 다녔던 같은 학교다. 지금은 내야수를 하는데 키는 우리보다 작다. 그러나 우리도 고3때인가 쑥 컸기 때문에 동생도 더 크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다. (웃음)
-부모님도 다 크신가?
▶그렇지는 않다. 어머니는 1미터60 정도이고 아버지는 1미터84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1미터92이시고 삼촌 중에도 1미터90되는 분이 있다. 그러나 나와 데릭처럼 2미터가 넘는 친척은 없다. (웃음)
-야구는 언제부터 했나.
▶내 기억이 허락하는 한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야구를 했다. 걷기 시작할 수 있을 때부터 공과 배트를 가지고 놀았고, 어려서부터 농구와 풋볼 등 모든 스포츠를 즐기던 사진이 지금도 집의 벽에 잔뜩 걸려있다. 농장에서 자라 사냥과 낚시도 많이 하고 늘 밖에서 놀았다. 집에 비디오 게임도 있기는 했지만 늘 스포츠를 하거나 자연에서 놀았다. 리틀리그부터 팀에서 야구를 했고 지금까지 하고 있다.
-야구보다는 농구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웃음)
▶고등학교때는 농구팀에서 뛰었다. 데릭이 농구는 나보다 훨씬 잘 했다. 오하이오 주 고등학교 한 경기 블록슛 기록도 세웠다. 17개인가 20개의 블록슛을 했었다.
-고교 졸업 후 프로 야구에 드래프트되지는 않았다.
▶그 작은 도시까지 야구 선수를 보러 오는 스카우트는 없었다. (웃음) 졸업하고 오하이오 밸리 컬리지라는 작은 기독교 대학에서 야구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2학년 이 끝난 여름에 LA 다저스 트라이아웃이 웨스트버지니아 대학(WVU)에서 있다고 해서 거기에 참가했었다. 갔더니 정말 수 백 명이 왔더라. 그런데 그 대학 감독님이 내가 던지는 것을 보더니 전학을 오면 야구부에서 던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2001년 가을 학기에 전학을 갔고 2002년에 애리조나가 드래프트했다.
-우연히 전학을 했고 프로에 간 계기가 된 것이네.
▶그렇다. 함께 야구하던 선배가 다저스 트라이아웃을 간다며 함께 가겠냐고 해서 갔다가 그렇게 됐다. WVU는 훨씬 큰 학교였기 때문에 프로 스카우트가 나를 볼 기회가 훨씬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에 다니던 학교는 학생이 1천명 정도였는데 WVU 2만3천명이 다니는 1부 리그 대학이었다. 처음에 가니까 너무 크고 학생도 많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 때 야구 성적이 상당히 좋았나보다.
▶성적은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꽤 잘했다. 그러나 우리 마을에서는 MLB에 트래프트된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고 모두 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다른 취미나 직업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학에 가서도 상당히 좋은 성적을 냈고, 나는 반드시 메이저리거가 되겠다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야구를 하는 것이 제일 행복했으니까.
-이제는 그 마을에서 빅리그 선수가 나왔네.
▶그렇다. (웃음) 나와 함께 트라이아웃 했던 선배 안소니 보너가 같은 해에 볼티모어에 드래프트됐고, 동생이 다음 해에 드래프트됐으니 그 마을에서 3명이 MLB에 드래프트됐다. 빅리그에 간 것은 내가 유일했다.
-2002년에 드래프트된 후에 순조롭게 성장했다. 3년만에 더블A까지 올라갔는데.
▶그러다가 2004년 여름에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했다. 그리고 2005년 여름 다시 더블A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처음 빅리그에 호출됐다. 피츠버그와 원정에서 빅리그 데뷔전을 했고 홈에서 콜로라도 로키스 경기에 두 번째로 나섰는데 둘 다 승패가 없었다. 그리고 내 첫 승리 경기가 9월 23일인가 LA 다저스가 상대였는데 최희섭과 대결한 기억이 난다. 5회까지 안타는 하나만 맞았지만 볼넷을 4개인가 주고 투구수가 많아져 5회 마치고 교체됐다. 그러나 빅리그 첫 승리를 거둔 경기였다.
-최희섭과의 대결도 기억나나.
▶물론이다. 두 번 맞섰는데 체격이 워낙 커서 위협적인 상대였다. 내 기억으로는 한 번은 볼넷을 내주고 한 번은 삼진을 잡은 것 같은데 100% 확실하지는 않다. 볼넷은 분명히 기억난다. (웃음)
-다음 해에는 빅리그에서 거의 뛰지 못했다.
▶2006년 스프링 캠프에서 꽤 잘 던졌는데 애리조나는 이미 선발 로테이션은 짜여 있었다. 시즌 중에 두 번인가 올라가 선발로 나섰지만 잘 던지지 못했다. 당시 빅리그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타자들이 트리플A보다 강했지만 나도 충분히 그들을 상대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환경에 압도당해 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트리플A에서는 13승8패였습니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worldbaseball&ctg=issue&issue_id=96&mod=read&issue_item_id=7621&office_id=151&article_id=0000002578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