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5-04-11 20:40
[일본] 송서에 나타난 왜5왕과 백제왕, 그리고 고구려의 관계의 진실.
 글쓴이 : Centurion
조회 : 8,224  

413 동진 (265년 ~ 420년) 義熙 9 미상, 양서의 찬, 諸夷伝 왜왕이 조공을 보내옴 진서, 安帝紀,
421 송 (420년 ~ 479년) 永初 2 찬이 송에 조공을 보내옴. 무제가 "멀리서 온 정성이 크므로, 제수(除授)를 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함 송서, 倭国伝
425 元嘉 2 왜왕 찬 사마 조달(曺達)을 사신으로 보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침 송서, 倭国伝
430 元嘉 7 1월에 왜왕이 조공을 보내옴 송서, 文帝紀

438 元嘉 15 왜왕 찬이 죽고 그의 동생 진이 계승하여 스스로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이라 자칭하며 정식으로 임명해주기를 요청함. 하지만, 진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문제는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이라는 관직만을 제수함. 문제는 왜왕 진의 신하들에겐 平西(평서)征虜(정로)冠軍(관군)輔國(보국)將軍(장군)이라는 관직을 정식으로 임명해 달라는 요청을 허락함 송서, 文帝紀와 倭国伝

443 元嘉 20 왜왕 제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므로,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으로 삼음 송서, 倭国伝
451 元嘉 28 왜왕 제가 安東將軍(안동장군)과 더불어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에도 임명됨. 7월에 아울러 23인의 신하들도 군(軍)과 군(郡)을 제수함 송서, 文帝紀와 倭国伝

462 大明 6 3월 왜왕 제의 왕자 흥을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에 임명함 송서, 孝武帝紀와 倭国伝

477 昇明 1 11월에 왜왕이 조공을 보내옴
왜왕 흥이 죽고 그의 동생 무가 위를 이음. 무는 스스로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七國諸軍事(7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이라 자칭함 송서, 順帝紀와 倭国伝
478 昇明 2 무가 스스로 開府儀(개부의)同三司(동삼사)라는 문관1품 관직을 임시로 제수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적당히 가수(假授)한 관직을 정식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함. 순제가 무를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王(왜왕)에 제수함
[*]왜왕 무가 요청한 관직중에서 백제가 빠진 것은, 이미 425년 문제가 백제 19대 왕인 구이신왕에게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百濟諸軍事(백제제군사)鎭東大將軍(진동대장군)百濟王(백제왕)이라고 관직을 제수하였기 때문에 무의 요청중 일부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송서, 順帝紀와 倭国伝
479 남제 (479년 ~ 502년) 建元 1 고제가 왜왕 무를 鎮東大將軍(진동대장군)으로 승격시킴 제서, 倭国伝
502 양 (502년 ~ 557년) 天監 1 4월 무제가 왜왕 무를 征東大將軍(정동대장군)으로 승격시킴

일본 역사책과의 비교[편집]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왜왕의 이름들은 일본서기의 천황의 이름들과 매우 달라 어느 천황이 어느 왜왕인지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이나리야마의 칼과 에다 후나야마 칼의 금석문을 근거로 왜 무왕이 유라쿠(웅략) 천황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나머지 왕들에 대해서는 중국 사기의 기록을 어림잡아 다른 천황에 비정하고 있다.
찬(贊) : 닌토쿠 천황 혹은 리추 천황
진(珍) : 한제이 천황 혹은 닌토쿠 천황
제(濟) : 인교 천황
흥(興) : 안코 천황
무(武) : 유랴쿠 천황

일부 학자들은 이들 왕이 5세기경 야마토 조정(현재의 일왕가의 조정)이 아닌 다른 왕조의 지배자들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 왕조들은 현재 일왕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

조공 기록[편집]

찬(贊)[편집]
晉安帝時,有倭王贊 遣使 朝貢。[1]
진 안제때, 왜왕 찬이 사신을 보내 조공함
高祖永初二年,詔曰:「倭贊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2]
고조 영초2년, 조서에 이르길 : 왜찬이 만리먼길에서 (송에) 조공을 보내옴. (송나라 무제가) "멀리서 온 정성이 크므로, 마땅히 제수(除授)를 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함
太祖元嘉二年,贊又 遣司馬曹達 奉表 獻方物[2]
태조 원가2년, 왜왕 찬이 또 사마 조달(曺達)을 사신으로 보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침

진(珍)[편집]
贊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왜왕 찬이 죽고 그의 동생 진이 계승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스스로 칭하길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이라 함.
表求除正,詔除安東將軍、倭國王。
정식으로 임명해주기를 요청함. 하지만, 진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송나라 문제는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이라는 관직만을 제수함.
珍又求除正 倭隋等 十三人 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號,詔並聽。[2]
송나라 문제는 왜수(倭隋)등 13인에게 平西(평서)征虜(정로)冠軍(관군)輔國(보국)將軍(장군)이라는 관직을 정식으로 임명해 달라는 요청을 허락함

제(濟)[편집]
二十年,倭國王濟 遣使 奉獻,復以爲安東將軍、倭國王。[2]
20년, 왜국왕 제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므로,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으로 삼음
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並除所上 二十三人軍、郡。[2]
28년, 왜왕 제가 安東將軍(안동장군)과 더불어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에도 임명됨. 아울러 23인의 신하들도 군(軍)과 군(郡)을 제수함

흥(興)[편집]
濟死,世子興 遣使貢獻。[2]
왜왕 제가 죽고, 세자 흥이 사신을 보내 조공함.
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籓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2]
세조 대명6년 조서에 이르길 : 왜왕세자흥 역시 安東將軍(안동장군)倭國王(왜국왕)에 임명함

무(武)[편집]
興死,弟武立,自稱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2]
왜왕 흥이 죽고 그의 동생 무가 위를 이음. 무는 스스로 칭하길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七國諸軍事(7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라 함
順帝升明二年,遣使上表曰:「封國偏遠,作籓於外,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
순제 승명 2년, 사신을 파견하여 왜왕 무가 표문을 올리기를 신의 나라는 구석지고 먼 곳에 봉 받아 밖의 번신이 되었습니다. 옛 조상 때부터 몸소 갑옷을 입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편히 쉬지 못하였습니다.
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於歲。
동쪽으로 모인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중이 66국을 복속시키고, 바다 건너 북으로 95국을 평정하여 왕도가 무륵익어 태평하고, 땅은 서울에서 멀리까지 넓혔으며, 해마다 세공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遙百濟,裝治船舫,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선대를 이어 나라를 평안하게 통솔하고 있으며, 천극으로 가는 길은 백제를 통해 가야하기에 배를 타고 가야합니다.
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늘 일이 막히고 거슬리는 바람에 어진 풍속을 잃고 있사오니,
雖曰進路,或通或不。
비록 나아갈 길은 있지만 그 길이 혹은 통하기도 하고 혹은 통하지 않기도 합니다.
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
신의 죽은 아비 제는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천자에게 자주 문안드리지 못함을 분통히 여겼으며, 활을 당기는 백만의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싶었으나, 갑자기 아비와 형을 잃어, 이루려는 공이 흙 한 삼태기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居在諒暗,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
신은 양암(빈소)에 거처하였기에,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과 싸우지 못했습니다.
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병기를 연마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부형들의 뜻을 펴보고자 하옵는데, 의롭고 용맹스러운 군사들이, 문무를 가릴 것 없이, 공을 나타내려 합니다. 눈앞에 흰 칼날이 번쩍이는 다급함이 있더라도, 또다시 되돌아다볼 필요는 없사옵니다.
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
만일 황제의 덕을 입는다면, 이 강한 적을 꺾어 없애고, 어려운 무리들을 이기시어 조용하게 하시면 전대의 공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鹹各假授,以勸忠節。」
삼가 스스로 임시로 개부의동삼사의와 그 나머지 모두에게도 관작의 제수를 원하였다.」
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鹹各假授,以勸忠節。」
무가 스스로 開府儀(개부의)同三司(동삼사)라는 문관1품 관직을 임시로 제수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적당히 가수(假授)한 관직을 정식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함.
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2]
순제가 무를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王(왜왕)에 제수함

建元元年,進新除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號爲鎮東大將軍。[3]
齊建元中,除武 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1]
고제가 왜왕 무를 鎮東大將軍(진동대장군)으로 승격시킴
梁武帝即位,進武 號征東大將軍。[1]
무제가 왜왕 무를 征東大將軍(정동대장군)으로 승격시킴
順帝升明二年,遣使上表曰:「封國偏遠,作籓於外,自昔祖禰,躬擐甲胄,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於歲。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遙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雖曰進路,或通或不。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居在諒暗,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鹹各假授,以勸忠節。」詔除武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


왜왕 무(무령왕)가 송나라에 보낸 외교서신 내용.

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늘 일이 막히고 거슬리는 바람에 어진 풍속을 잃고 있사오니,

雖曰進路,或通或不。
비록 나아갈 길은 있지만 그 길이 혹은 통하기도 하고 혹은 통하지 않기도 합니다.

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
신의 죽은 아비 제는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천자에게 자주 문안드리지 못함을 분통히 여겼으며,
활을 당기는 백만의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싶었으나, 
갑자기 아비와 형을 잃어, 이루려는 공이 흙 한 삼태기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居在諒暗,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
신은 양암(빈소)에 거처하였기에,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과 싸우지 못했습니다.

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병기를 연마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부형들의 뜻을 펴보고자 하옵는데, 의롭고 용맹스러운 군사들이, 문무를 가릴 것 없이, 공을 나타내려 합니다. 눈앞에 흰 칼날이 번쩍이는 다급함이 있더라도, 또다시 되돌아다볼 필요는 없사옵니다.

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
만일 황제의 덕을 입는다면, 이 강한 적을 꺾어 없애고, 어려운 무리들을 이기시어 조용하게 하시면 전대의 공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13대 근초고왕(346~375)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 시킴 
                                  아직기, 왕인을 일본에 보내어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를 쓰게함
14대 근수구왕(375~384) 근초고왕의 맏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데 공이 많음
15대 침류왕(384~385)  근구수왕의 아들. 불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함
16대 진사왕(385~392)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위해 출정하다가 병사함
17대 아신왕(392~405)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 패함. 
18대 전지왕(405~420)  아신왕의 아들
19대 구이신왕(420~427) 전지왕의 맏아들
20대 비유왕(427∼454)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함
21대 개로왕(455~475)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
22대 문주왕(475~477)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 옮기고 국방에 힘씀
23대 삼근왕(477~479)  문주왕의 맏아들
24대 동성왕(479~501)  삼근왕의 동생 신라와 혼인동맹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25대 무령왕(501~523)  동성왕의 둘째아들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신장하여 국제적 지위를 강화함
26대 성왕(523~554)  무령왕의 아들 도읍지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함
27대 위덕왕(554~598)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함

[출처] 백제왕계보|작성자 판타스틱

*********************************************************************************************************

현 일본 천황가의 개조, 개로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39> 개로왕을 위한 만사(輓詞)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57564


1.서기 413년 왜왕 찬(讚): 사신기록(晉書 안제기) 
2.서기 421년 왜왕 찬(讚) : 유송(劉宋) 무제 안동장군왜국왕 제수(宋書) 
3.서기 425년 왜왕 찬(讚): 유송 문제에게 사신과 공물(송서) 
4.서기 430년 왜왕 찬(讚): 왜왕 공물(송서) 

5.서기 438년 왜왕 진(珍): 왜왕 찬이 죽고 동생 진(珍)이 즉위하여 공물을 바치고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 진한 모한6국 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을 칭하다. 왜왕에게 안동장군왜국왕을 제수(송서)

6.서기 443년 왜왕 제(濟): 제가 공물을 보내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됨(송서) 
7.서기 451년 왜왕 제(濟): 제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 제군사 겸 안동장군 제수(송서) 
8.서기 460년 왜왕 제(濟): 공물기록(송서) 

9.서기 462년 왜왕 흥(興): 제의 왕자 흥(興)을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송서) 

10.서기 477년 왜왕 무(武): 왜왕 흥(興)이 죽고 그의 동생 무(武)가 즉위하여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 가라 진한 모한7국 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을 자칭(송서)

11.서기 478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으로 임명(송서) 
12.서기 479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진동대장군으로 임명(濟書) 
13.서기 502년 왜왕 무(武): 왜왕 무를 정동장군으로 추증. 정동대장군의 오기인 듯 함(梁書)

지금까지 우리는 상기 5명 가운데 3명의 이름을 이미 거론하였다. 

무(武)는 백제 무령왕이 일본에서 왜무왕이었고, 
곤지왕이 왜흥왕, 
개로왕이 일본에서 왜제왕으로 군림하였다. 

중국에서 받은 왜왕의 작위가 왜백제신라임나가라 진한 모한6국 제군사왜국왕으로 왜가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을 보고 일본이 백제신라에 대하여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면서도 백제의 왕자들이 일본을 통치하다가 백제왕으로 부임했던 것은 모르쇄로 일관한다.

찬(讚)과 진(珍)은 좀 설명이 필요하지만 진은 광개토왕의 왕자 고진이며 
5세기의 한 때 잠시 일본을 정복하여 고구려의 지배하에 두었다. 

닌토쿠 천황은 전사했고 고진이 잉교(允恭)천황이 된다. 
중국사서에는 찬이 죽자 동생 진이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었지만 
동생이 아니라 적국 고구려에게 나라가 점령된 것이다. .

http://kmaritime.org/blog/show/49

*(아직 이쪽은 알아보지 않아서 잘모르겠습니다만.. 대략.. 왜왕이 백제왕보다 끗발이 역전되는 시기란게 보입니다. 백제왕은 진동장군, 왜왕은 안동장군인데.. 백제왕이 품계가 더 높았지만, 왜왕이 백제 제군사와 진동장군, 정동장군 직위를 요구하며 떼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상 이 시기의 백제 본토왕은 고구려한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할만큼 풍전등화의 위태위태한 상황이었기에 차라리 바다건너 왜 열도의 분국 왕이 팔자가 나았으리라 보여집니다.)


송서에 왜5왕이 책봉을 받은 시기는 대략.. 고구려 장수왕 재위기간입니다. 
송서에 나타난 왜5왕 시기(413~502년), 고구려 장수왕(412~491) 

재밌게도.. 그 바로 전 시기가 광개토대왕에 의해 백제가 망하다시피한 시절이었고..
왜와 가야도 빈사상태로 넉다운 된 시기였다는 점이죠. 
그 후 백제가 찌그러지고, 한강이남의 백제,신라,가야 모두 고구려 영향권에 있던 시기였죠. 

왜왕은 송나라에 조공을 바쳐가며, 
왜,신라,백제,임라,가라,진한,모한 등의 6국, 7국 제군사를 자칭하는데.. 

이 시기는 북연이 송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에 저항하다, 
송나라 지원군의 장군 왕백구가 고구려에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던 438년 무렵입니다.. 

왜는 이때다 싶어, 고구려랑 사이가 틀어진 틈을 이용해 송나라에 무리한 책봉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틈틈히 고구려를 씹어대며, 송나라의 지원과 공격을 요청하지요.

http://ko.wikipedia.org/wiki/%EC%99%9C5%EC%99%95 

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늘 일이 막히고 거슬리는 바람에 어진 풍속을 잃고 있사오니, 
臣亡考濟實忿寇仇,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 
신의 죽은 아비 제는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천자에게 자주 문안드리지 못함을 분통히 여겼으며, 활을 당기는 백만의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싶었으나, 갑자기 아비와 형을 잃어, 이루려는 공이 흙 한 삼태기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 
만일 황제의 덕을 입는다면, 이 강한 적을 꺾어 없애고, 어려운 무리들을 이기시어 조용하게 하시면 전대의 공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 

재밌게도.. 왜왕이 고구려에 대한 원한이 아주 심하게 드러나며, 
아주 열심히 자신의 책봉을 최대한 많이 받고자 애를 씁니다. 

하지만, 처음엔 그런 요청이 송나라에 의해 씹히기도 했으나.. 
열심히 조공을 바쳐가며 매달려서인지 결국 원하는 책봉을 따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저 표문의 내용에서도 나타나듯이.. 
송나라에 최대한 의지해 고구려를 견제하려는 발버둥이었던것이죠. 

자..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아마도 백제는 고구려한테 와장창 깨진 시절이었고, 

왜 열도는 고구려의 군대가 딱히 건너갔다고 보기 어려운데.. 
왜왕들이 고구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한반도 남부세력의 맹주라는 명목상의 지위를 확보하려 애쓰죠. 

근데, 당시 백제는 거의 고구려한테 툭하면 얻어터지고 망하는 수준의 약소국이었습니다. 
고로, 왜 열도의 백제 분국이 오히려 안정적인 시기였다 이거죠. 

그래서 왜왕의 직위를 가진 백제왕이 한반도의 위태로운 백제 본국을 대신해.. 
필사적으로 고구려를 까고, 디스하면서 송나라한테 우리를 한반도의 맹주로 인정해달라, 
그리고 고구려 좀 같이 공격해달라, 잘보이려 애쓰며 연합하려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엄연히 고구려가 자주 침략하고 집어삼키려 했던 나라는 왜가 아니라, 백제였거든요. 
근데, 왜왕이 백제왕에 빙의된것처럼 고구려의 침략을 논하고 있다는 것이죠. 
(근데, 왜 5왕 중 진은 고구려왕자 고진이라는 썰도 있고, 그래서 고구려가 왜열도를 정복했다는 썰도 있더군요)

한마디로 왜(백제 분국)왕이 고구려에 줘터지던 허약한 본국 백제왕보다 
오히려 한끗발 높았던 시절의 상황을 나타낸 장면이랄까요.. 

이걸 일본 학자들이 필사적으로 한반도는 왜의 영향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위태위태했던 백제 본국도 결국 신라와의 결혼동맹이나, 
왜 분국의 지원과 송나라와의 관계강화등으로 필사적으로 버텨서 
훗날 나제동맹을 통해 고구려 세력을 극복할 수 있게 되지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핫초코님 15-04-11 22:17
   
재미있는 해석이네요...........
그런데 호태왕 비문 대로라면...왜는 고구려에 구원이 많기는 합니다......
비문 해석을 어찌하던 간에... 왜가 한반도 남부와 신라를 침략했었던 것 같고요.....
광개토대왕이 박살을 내지요... 왜가 스스로 칭하기를 임나..가라..모한..진한의 우두머리라고 하니..
임나..가라..모한..진한은.. 고구려에게 초토화되다시피하죠.....

백제는 좀 문제가 다릅니다.. 호태왕 비문에서도 백제는 국호를 쓰지 않고.. 반드시..백잔...또는 잔이라고
표기를 하는데요.. 증오와 경멸의 표현이죠.. 우리가 북괴라고 쓰는 것처럼.. 국가로 인정 안하고..
잔당으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일본서기에서는 신라를 국호로 표기하지 않고...자주 번국..번이라고
씁니다.. 국가가 아니라..지네 속방이라는 의미죠..

여하튼... 호태왕비문에서도 왜가 백잔과 신라를 침략해서...태왕께서 직접 친정했다하면서..
주로 싸움은.. 침략 당한..백잔과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더 중요하죠...
호태왕 비문에 따르면 이 백잔놈들은 결국 왜와 화합하고 통하여 더불어 살자고 맹세까지 합니다...
신공황후 전설에서는 백제에게 그냥 주었다...머..기타등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서로 지들 유리하게
쓴거고..그냥... 동맹을 맺었다고 보면 됩니다..

이때부터.. 호태왕 비문은 백잔과 왜를 혼용하여 쓰기 시작합니다... 신라에 왜가 침략해서 성안에
왜인들이 가득찼는데... 정작 싸움질은...백잔과 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도 왜가 배를 타고서 대방을 침략합니다.. 호태왕은 가볍게 작살을 냅니다.. 그런데..또 싸움질은
백잔과 하고 있지요....
이 시기까지 백제와 왜는 동맹국 정도로 보는 타당할 겁니다... 왜도 고구려와 나름 열씸히 싸웠고...
싸울 때마다 대파 당했으며.. 구원과 적개심이 쌓일만큼 쌓인 시기죠..

고대국가 성립기 이전에는 영토 국가 개념이 모호할 때이므로.. 삼한국과 왜가 혼재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요... 고구려..백제가 한반도에 정착하고..신라가 독립적인 국가로 완성 된 이후...
왜는 한반도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고..백제의 분국이라기 보다는 그냥.. 대륙에서 쫓겨난 세력들 정도
일 겁니다.. 백제왕을 참칭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으나.. 단 한번도 인정을 받지 못했고...
신라왕을 참칭하려는 시도는 얼마간 성공하기는 하지만.. 신라가 워낙 작은 나라였고.. 고구려와 백제에
막혀.. 중원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지.. 신라에 왜의 영향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왜가 신라를 공식 문서에 까지 번국이라고 칭하며 경멸과 증오를 표현하진 않았을 겁니다.

왜신라변진한왕을 요구했던 것은 오래된 옛날 옛적에.. 백제와 고구려 같은 애들이 없었던 시절에..
한반도 남부 해안 지역에도 왜가 살았던 시절이 있었는데..그 시절이 그립다.. 정도라고 봅니다..
그리고.. 왜란 명칭 자체가... 일본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해안가 세력을 의미합니다...
왜가 백제왕을 참칭하려고 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양국의 관계가 그다지 긴밀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Centurion 15-04-12 03:19
   
백제라 안부르고 백잔이라 부르는게 딱 맞아떨어지지요.

백제 잔당.. 이미 백제는 거의 고구려의 대군에 언제든 짓밟혀 왕이 죽을 수 있는 상황으로..
고구려의 미약한 신하국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지만, 왜 열도에 건너간 백제 잔당은 그런 눈치밥을
덜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님의 글에서도 백잔과 왜과 혼용되고 있으며,
단순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깨진 원한을 넘어..
자기들의 영역이 침범당하고 있음을 하소연하고 있죠.

사실상, 근초고왕-근구수왕 때의 전성기 백제를 생각해보면..
이미 한반도 남부와 왜 열도를 다 장악했다고 볼 수 있는 시기일 것입니다.

간단히 서양의 사례를 예로 들자면,
스페인 왕이 오스트리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는 시기가 있었죠.
소위 혈연과 왕위계승 문제로 벌어지는 동군연합 같은 상태인데..

백제와 왜 왕가는 일본천황가 스스로도 백제의 모계혈통을 인정하는 수준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백제의 전성기에 즈음하여, 급도로 백제화되어 가지요.
(일본 서기에선 이 부분에서 백제 이야기가 쏟아지듯 나온다고 하더군요.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하던 시절부터 백제의 군사력은 북방에서의 여유를 갖고 일본 열도에서도 도래계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며 왜왕가를 차지했다고 봐야 될거 같습니다)

이때부터 왜왕은 백제왕을 하기 전에 거치는 분국왕..
예로 들면.. 영국왕이 되기전에 왕세자가 갖는 웨일즈 왕자 작위와 비슷한 위치가 됩니다.
이미 이쪽에 대해선 제가 링크한 프레시안의 기사처럼 연구가 이뤄져 잇죠.

왜왕 무는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복귀하기 전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구요.

이미 선대의 백제 개로왕이 송나라에 고구려를 비난하며 원군을 요청하다 발각되어
장수왕에게 참살당하는 수준의 상태였으니, 백제 왕위를 이어가야될 무령왕 입장에선..
고구려는 공포와 패닉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차라리 왜국왕 상태로 백제왕 책봉을 받는게 낫다 싶었겠지요.

사실 님도 조심스럽게 최대한 보수적으로 적고 있지만, 백잔과 왜의 혼용이라던가.
왜왕이 6국, 7국 제군사 책봉을 원한다거나, 이런 논리적으로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단지 왜와 백잔이 동맹국이라는 상태로 설명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고구려와 맞장뜨던 백제가 사실상 망하다시피했는데,
고구려에 복종하지 않는 백제 부흥군 격인  백잔세력이 왜와 별개로 존재했다고 보긴 어렵죠.
영토도 없고, 백성도 없는 망명정부가 고구려에서 백제 잔당이라 불리며 왜와 혼용되긴 어렵구요.
(고구려 입장에서도 한반도에 영토도 없는 백제잔당, 백제부흥군을 비문에 남겨가며 지칭할 이유가 없지요)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 역시 최소 백제 영토에 남아있던 성들이었듯이..
단순 망명정부나 패잔병 세력이 아니라, 왜 열도를 접수한 백제 잔당이라고 봐야 될것입니다.

여기서 6국, 7국의 작위를 요청한 것은..
사실상 이것이 고구려를 제외한 한반도 남부와 왜 열도를 아우르는 하나의 남조의 권역을 모두 인정받겠다는 소리였고..
이 것을 고구려 왕자 고진(왜왕 진)의 시절에 이미 타이틀을 확보했다가, 훗날 백제계 왜왕들 역시 자연스럽게 요구했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아니면 이게 근초고왕-근구수왕 때 사실상 백제의 세력권 전체를 인정받으려는 시도일 수도 있구요.)
사실상 이때의 한반도 남부는 그냥 고구려에 흡수되지 않고 숨만 붙어있던 번국 수준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왜왕이 자국의 영역을 침범당하고, 약탈당한 일로 송나라에 하소연하고 있는 대목은..
빠뜨려서는 안될 부분입니다.

이건 백제(-왜) 연합왕국의 영국의 United Kingdom(잉글랜드-웨일즈-스코틀랜드)처럼
United 백제(백제 연합왕국)를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왜열도의 백잔 세력이 자기 영역이 짓밟힌 것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단순히 왜가 잘나갔던 옛 추억에 젖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참칭을 요구한게 아니라고 봅니다.

님이 말씀하고 있는 그 여러 불분명하고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가
백제의 왜 열도 접수와 백제 본국-왜 분국으로 정리하면 말끔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백제왕 참칭 같은것도.. 단순한 욕심보다는.. 백제왕이 사실상 고구려 신하로 떨어진 상태에서,
고구려에 저항하는 백제 잔당세력의 우두머리였던 백제왕족인 왜왕이
아예 이 백제 분국인 왜를 몰락한 본국 이상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것입니다.

아마, 송나라에선 이런 왜의 의도가 납득이 안갔다가, 나중에 고구려와 충돌하게 되고..
지속적인 외교로 이해가 갔던 것이겠죠..

한마디로 말해서,
이 시대는 고구려 - 백제 잔당(왜 열도를 접수한)의 남북조 시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왜왕 무가 어느 정도 그런 노력에 결실을 맺어 백제는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고,
나제동맹으로 고구려의 신하국 상태를 벗어나 한반도 백제가 다시 재기할 수 있게 되지요.
이후의 왜왕들도 백제왕이 되기전의 작위 성격을 띄면서 운영되었구요.

무령왕 본인도 왜왕 무에서 백제 무령왕으로 본토에 복귀하게 되었고,
백제의 중흥왕으로 존중받는 왕이기도 하죠..

다음에 여유가 되면,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알바고고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핫초코님 15-04-12 03:41
   
상상력이 비어있는 역사를 맞추기도 하지요.....^>^
백잔의 의미는 백제 잔당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부여 잔당..또는 고구려 잔당이라는 의미입니다.
원래는 십제였다가.. 백제가 되었는데..아시다시피..소서노가 온조...비류(비류는 일단 다른 곳으로 갔다 온 것이 지금은 통설이지만)와 고주몽네서 토꼈잖아요..
고구려가 백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근본 원인은 남편과 아비를 부정한 패륜반역 잔당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백가구의 잔당들...이라는 의미로 백잔이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북괴를 국가로 인정 안해서..북조선이라는 말을 안쓰고.. 북괴..북한이라고 쓰는 것과 같아요
     
디노 15-04-12 19:03
   
위에 두 분이 백잔을 백제 잔당 등 백제에 대한 멸칭이라고 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 항복을 했는데, 멸시 할 이유가 없어요...
항복하기 전에야 악의 축이든 괴뢰든 온갖 악평을 할 수 있지만 항복한 이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민간에서야 여전히 멸시를 할지 몰라도,,,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들이 천년을 가라고 돌에 새긴 글에는 항복한 나라에 대해
멸칭을 사용하지 않죠...

잔은 한자사전에 보면 나머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백제는 왜국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력의 절반이 바다 건너 가 버리는 바람에
국력이 약해 지게 됩니다.
고구려에 우세하던 군사력도 병력의 절반 이상이 분산되어 왜로 가는 바람에
고구려에 밀리기 되었죠...
백제가 일본을 정벌한 이후에는 백성들이 대거 건너갑니다.
아신왕 기록에 보면
인구가 쇄감할 정도로 많은 백성들이 신라고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신라가 아니라 가야, 그리고 왜로 건너가게 됩니다.
궁월군의 120현민
아지사주의 17현민 등, 거의 몇 십 만명에 이르는 백성들이 건너가고
남은 나머지 백제를 일컬어
광개토대왕 비문에 백잔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왜가 신라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광개토대왕은 왜가 신라를 공격했다고 한 게 아니라
왜인만기국경, 즉 왜인들이 국경에 가득찼다고 했습니다.
당시 광개토대왕비문은 왜군, 왜적, 왜인 등 정확히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당시 신라가 위협적으로 여겼던 건
왜군이 아니라 왜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들은 광개토대왕이 보낸 병사들을 보자 싸울 생각도 않고 도망가 버리죠...
병사가 아니라 백성들이라는 증겁니다.
이들이 바로 아신왕조의 인구가 쇄감할 정도로 대거 신라로 도망갔다고 되어 있는 그 백성들입니다.

배를 타고 왜로 가려고 모여 있던 사람들을 보고 신라가 놀랐던 것이죠...
백제가 일본을 정벌해 왜에 자신의 담로왕을 두자,
백성들이 그리로 갔던 것이지요...
꼬마러브 15-04-12 01:31
   
북한 학자인 김석형같은 경우는 왜가 백제를 침략했다는 내용이라든지.. 고구려를 침략했다는 내용이라든지.. 당시 정황상 말이 안되는 기록들을 침략당했다는 백제나 고구려를 한반도계 이주민이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생성된 작은 소국으로 보는데.. 이것도 어느정도 타당하다 생각합니다.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844
1076 [몽골] 고려출신인 기황후가 어떻게 원나라 황후자리까지 … (18) purenature 10-14 7025
1075 [대만] 아시안게임 실격가지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라는 사… (4) 객관적참좋… 11-19 7027
1074 [대만] 우리는 대만 물건 삽시다. (26) ㅁㅁ 11-21 7027
1073 현 한반도 정세에 대한 조선족 반응 (13) 몽시리 11-30 7030
1072 [기타] 우리나라 여권이 인기있는 이유 (8) 바나나맛우… 04-26 7031
1071 [일본] 제국주의 시대 일본 영토 크기 (15) 미신타파 06-02 7032
1070 [기타] 이런식으로 운영할 바에는 ..... (21) 가오리 02-08 7033
1069 [베트남] 베트남 전통의상 변천사.JPG (8) 소유자™ 08-21 7033
1068 [대만] 친구한테 들은 대만인들의 친중,친일,반중,반일 성향 (3) 소를하라 10-22 7039
1067 한국학자들이 한글공정을 기뻐한다고? 왜? (12) 휘투라 총… 05-12 7040
1066 [기타] 스페인 무적함대 조선 함대 (21) shrekandy 09-14 7042
1065 [북한] 북한 여자도 한류에 빠져 ,북한남자가 남한남자처럼 … (18) 정상인임 11-13 7051
1064 [기타] 한국보다 인구가 많고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 (14) 심청이 03-15 7053
1063 [기타] 선진국이면서도 선진국이 아닌 한국 (34) 아자아자 02-14 7055
1062 [기타] 토번국 [티베트제국] (8) 대은하제국 11-08 7058
1061 중국이 붕괴, 분열될 수 밖에 없는 이유 (10) 휘투라 총… 06-14 7060
1060 [기타] 중국 시조황제(黃帝)는 홍산인 (22) gagengi 01-13 7060
1059 일본의 마지막 쇼군! (3) 휘투라 총… 05-07 7061
1058 [기타] 왕건이 당나라 황실의 후손인가요? (22) 대은하제국 06-24 7064
1057 [통일] 현재 동아일보에서 고구려 칼럼 연재 중 (7) 만수사랑 02-04 7065
1056 [몽골] 몽골기사vs유럽기사 (13) 한시우 11-27 7066
1055 [대만] 난 공산당이 싫어요! (7) 머지? 11-19 7067
1054 [중국] 가우리빵쯔와 빵쯔 (16) NeverDieShin 12-02 7075
1053 [홍콩] 홍콩 지하철에서 음식먹는 중국인과 싸우는 동영상 (22) 굿잡스 01-22 7078
1052 짱깨들이 한국을 동남아니 어쩌니 해대는 이유 (23) 화교박멸 06-17 7086
1051 [기타] 먀오족과 고구려는 같은 민족 (10) 치우비 06-14 7086
1050 [일본] 일본고대사를 한국사로 편입하자니 (140) 니르 12-23 7086
 <  691  692  693  694  695  696  697  698  699  7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