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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4-05 16:56
[기타] 황하문명의 주역은 한족이 아니다.
 글쓴이 : Centurion
조회 : 7,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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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적 문제제기] 黃河문명의 주역은 漢族이 아니다?

글 : 崔恩亨 前 연합뉴스 부국장 

 

⊙ 黃河문명 외에 長江·遼東에서 古代문명 발견되면서 중국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 요구
⊙ 商(殷)문명은 夷族이 건설, 周는 西戎에 가까워
⊙ 周나라가 商을 멸망시킨 후, 자신의 뿌리 왜곡
⊙ 夷族은 화하족과 동화되거나 동쪽으로 이동, 일부는 계속 황허의 중하류에 거주
⊙ 傅斯年의 ‘夷夏東西說’ 이후, 易華의 ‘夷夏先後說’, 葉文憲의 ‘新夷夏東西說’ 등 夷華관계에 대한
다양한 주장 등장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hIe&articleno=8764684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306100058&ctcd=F&cpage=1

(월간 조선)

청동기시대를 연 商나라
  
  황허문명을 일궈 낸 대표적인 왕조는 상(商·殷)나라인데, 이 왕조를 검토하면 이 같은 사실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상나라 때를 ‘대표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왕조 때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甲骨文)이 발명돼 중국의 역사시대가 열렸으며 제기(祭器)와 농기구, 무기 등 정밀한 청동(靑銅)기구가 널리 제작 사용됐기 때문이다.
  
  세계 각처에 나름대로 문명의 발상지가 산재해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문명이 될 수 있는 기준인 청동기의 사용과 독자적인 글자의 발명, 국가의 성립 등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문명은 드물다. 중국에서 이에 합당한 시기가 상왕조 때인 것이다.
  
 각종 고대 문헌에 따르면 상나라는 이족인 자리(子履·湯王)가 세웠다. 20세기 이후 발굴된 갑골문이나 제기 등 유물에서도 이 왕조를 세운 민족은 이족임이 증명됐으며, 현재 이에 대한 반론은 거의 없다. 이는 황허문명의 가장 핵심적인 시기에 중원의 주인은 이족이라는 것을 말한다.
  
華夏의 의미
  
  주는 중국 서북쪽에서 세력을 얻은 주족이 상왕조의 제후국(諸侯國)이 되었다가 상을 무너뜨리고 중원의 패권(覇權)을 쥐게 됐다. 주왕조는 상왕조의 제후들을 몰아내고 이를 대부분 주족으로 대체했다. 이 제후국들이 자칭 제화(諸華), 제하(諸夏) 등이라고 하면서 오늘날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화하(華夏)라는 말이 나왔다.
  
  주족이 자신들을 제화나 제하로 부른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상의 전(前) 왕조인 하왕조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하왕조를 설립한 우(禹)를 자신들과 같은 서북쪽 출신 민족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제왕세기(帝王世紀》 등은 우를 ‘서강이인(西羌夷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제 주족과 우가 동족(同族)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족은 스스로를 하왕조와 같은 민족인 화하족이라고 자처하면서 황허문명을 화하족의 것으로 정의해 왔다.
  
 그럼 주족은 어떤 민족이며 하를 계승한 동족이라는 주장이 맞는 걸까?
  
(중략)

이들 기록이 맞다면 단보는 후직의 15대손이고 주 무왕은 후직의 18대손이 된다. 그러나 후직에서 주 무왕 때까지의 기간은 하왕조, 상왕조를 거친 1000년이 넘는 세월인데 18대에 불과하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무왕에서 후직까지와 같은 기간 하·상왕조의 임금은 45명이며 800년이 채 안 되는 주왕조가 41대임을 감안할 때 18대는 300~400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주나라가 화하족을 주장하는 이유는  하나라 우왕이 서쪽에서 온 강족 이민족으로.. 
주나라와 동족으로 보았기 때문인데.. 헌데.. 1천년 세월을 18대로 끝내는데.. 
족보조작을 했는지 당최 말이 안되는 수준...

(중략)

傅斯年의 ‘夷夏東西說’

《夷夏東西說》을 주장한 푸쓰녠

 이족이 황허문명의 주역 중 하나임을 사실상 인정한 첫 논문은 중국학자 푸쓰녠(傅斯年・1896~1950)이 1933년 발표한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이다.

 푸쓰녠은 베이징(北京)대학 총장대리와 타이완대학 총장 등을 역임한 중국의 저명한 사학자로 그는 이 논문에서 중국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중국 동쪽에 거주했던 이족과 서쪽에 거주했던 하족에 의한 것임을 주장했다.

 그는 “은상(銀商)과 서주시기 지금의 산둥성과 허난(河南)성 동부, 장쑤(江蘇)성 북부, 안후이(安徽)성 북쪽, 허베이(河北)성 해안, 랴오둥(遼東)과 조선(朝鮮)의 양안(兩岸)에 거주하던 태호와 소호, 제(濟)와 서(徐)부족, 풍(風) 잉(盈), 언(偃) 성씨 등이 모두 이(夷)다”며 “이족이 중원 서쪽에 거주하던 하족과 수차 투쟁하고 융합하면서 중국의 문명을 열었다”고 밝혔다.

 그는 중국의 지형을 크게 동평원구(東平原區)와 서고지계(西高地系)로 나누고 경제적·문화적 발전 여건이 좋은 동평원구에서 이(夷)와 은(殷)이 성립되고, 지형상 무력이 강한(싸움이 잦았던) 서고지계에서 하(夏)와 주(周)가 성립되어 이하(夷夏) 간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음을 주장했다.

 그는 또 상(商)을 고조선과 같은 계통으로 보았으며 고구려 등의 고대 한반도까지를 고대 동이족의 범주에 넣었고 상이 망한 후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향한 것을 ‘선왕이 살던 곳을 좇은 것(從先王居)이라고 판단해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임금이 되고 개화시켰다는 중국사학계의 정설도 부인했다.

 푸쓰녠이 이 같은 주장을 한 근거는 무엇일까?

 그가 논문을 발표한 시점은 대대적인 고대유적지 발굴을 시행하면서 중국 한자의 원형이 이족이 세운 상나라 때 만들어진 문자이고 중원의 선주민이 이족임을 증명하는 유물이 속속 밝혀지는 시기였다.

 특히 그의 논문이 발표되기 5년 전인 1928년에 상나라의 19대 왕 반경(盤庚)에서 마지막 왕인 제신(帝辛·紂王) 때까지(BC 1324~1065) 상의 도읍이었던 은(殷)에서 대량 발굴된 유물에는 세계 고고학상 최대 발굴의 하나인 갑골문이 포함돼 있었다.

 夷夏先後說의 등장

 은허로 불리는 이 유적지는 왕궁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1200m²의 집터와 유적지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700여 개의 땅굴에서 3만여 조각의 갑골문이 나왔다. 60여 명이나 순장된 큰 묘도 발견되었다.

 또 황허 상류를 중심으로 ‘양소문화’(BC 5000~BC 2000)가, 황허 중·하류에서 ‘용산문화’(BC 3000~BC 1500)가 발굴되었는데 푸쓰녠은 양소문화는 화하, 용산문화는 동이의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이 계속되면서 ‘양소문화’ 상층에서 ‘용산문화’가 발견되면서 이 같은 가설은 부정돼 현재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하동서설>은 문명의 주역이 화하족만이라는 통설을 뒤엎는 일대 사건으로 하-주 중심의 정통 역사관을 비판하고 주변 세력으로 간주되던 이(夷)의 존재와 역할을 새롭게 제기해 황허문명 중심론에서 다원주의적 중국문명론으로 옮겨 가는 현실을 처음으로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 중국의 역사, 신화, 고고학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에도 <이하동서설>을 잇는 논문이 속속 발표됐는데 이화(易華·中國社科院民族學與人類學所 硏究員)의 <이하선후설(夷夏先後說)>과 예원셴(葉文憲·蘇州科技學院 교수)의 <신이하동서설(新夷夏東西說)> 등이 그것이다.

 <이하선후설>은 ‘역사와 전설 등으로 하왕조 이전 동아시아는 이족(夷族)과 만족(蠻族)의 땅이었다. 우(禹)는 동이와 서이 가운데 하왕조를 세웠다. 고고학 발굴과 연구로 하왕조 이전은 유목과 농경의 구분이 아직 없었으며 이족이 동아시아 신석기 정주농경문화를 창조했다. 하족은 청동기 유목문화를 들여와 이와 하가 결합해 중국역사를 창조해 독특한 동아시아문화전통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夷夏先後說> 2012.2 民族出版社 부록 ‘靑銅時代世界體系中的中國’)

 <신이하동서설>은 ‘동이는 산둥지역을 중심으로 대문구문화나 용산문화 등으로 찬란한 문명을 일궜다. 이후 하왕조 때 지금의 기노예완지구(冀魯豫皖地區)의 서쪽은 하족이, 동남북은 동이족(동쪽은 東夷, 북쪽은 商族, 남쪽은 淮夷)이 거주했는데 하족은 회이(淮夷)와 혼인연맹 관계였고 동이와 상족은 밀접한 관계였다. 이족과 화하족은 대립적 관계를 지속하다가 화하족이 대거 동쪽으로 진입해 동이족은 축출되거나 화하족과 융합돼 동이문화는 소멸하게 됐다’는 것이다.(蘇州科技學院 발행 《中國史硏究》 2002년 3기 ‘新夷夏東西說’)

 기로예완(冀魯豫皖)은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허난(河南), 안후이(安徽) 등 중국 4개성의 간칭(簡稱)이다.

 <이하선후설>에 따르면 중국문명은 선주민인 이족이 먼저 이룩하고 후에 청동기를 가지고 진입한 하족과 함께 뒤를 이었다. <신이하동서설>은 이족이 선주민이지만 이족과 화하족이 동과 서에서 서로 다투고 융합하면서 중원문명을 이뤘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 논리의 공통점은 문명의 주역이 화하족만의 것이 아니라 이족과 화하족 공동의 산물이라는 것으로 전환,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장 핵심적인 문자발명과 청동기 사용, 고대국가 성립 등을 이룬 상족과 이족에 대한 기여 가중치를 주지 않은 평가에 그쳐 화하족 우선의 편향성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중국의 인터넷 <위키백과>에 동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해 놓고 있다.

 ‘동이문화는 진(秦)나라 이전 중국의 가장 오래된 문명의 하나다. 동이문명은 많은 방면에 중원문명과 쌍벽을 이뤘다. 동이인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활과 화살, 예제(禮制)와 금속을 발명, 사용한 민족이다’

 이 글은 이족이 문자, 예법, 금속 등을 발명한 민족이라고 하면서도 중원민족은 아니라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황허문명은 황허 중·하류 중국 중원에서 발생한 문명인데 이족의 문명이 중원과 관계가 없다면 과연 중원문명은 무엇을 발명한 문명이란 말인가? 그리고 문자나 예법, 금속을 발명한 찬란한 이족문명의 이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윗글은 짧지만 현재 중국인들의 역사 편견을 단편적으로나마 확실히 보여준다. 편향적인 시각은 문장의 이율배반성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한 것 같다. 




자세한 전문 내용은 블로그에 들어가 읽어보시길...
애시당초 주나라 자체도 화하족이라고 했는데.. 하나라 후예가 아닐 뿐더러.. 거기서부터 구라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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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게임 15-04-05 18:33
   
중국인들이 보는 동이는 묘족(동남아 몽족)이고
우리나라 환빠님들도 묘족과 우리가 본래 같은 갈래에서 나왔다는 식으로 정리 중인 듯 합니다만...

근데, 묘족과 우리가 같은 민족이면 언어나 기타 문화에서 강한 동질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지?
같은 치우 자손이라고 우기는 정도로 동족이 되진 않을 텐데...
     
정헌대부 15-04-05 23:00
   
현재로서 공손헌원과 치우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중국쪽 기록(책이름이 기억이 안나네요.)과 논란이 있는 환단고기 2자기 뿐인 걸로 알고 있어요.

중국 기록상으로 보면 문제가 있는게
지금의 북경 근처 유웅국 사람인 공손헌원이 살던 시절에는 사이가 존재하지 않았지요.
남만족은 중국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때이고, 동이/북적/서융은 같은 동족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동이족 중 묘족 족장 치우와 공손헌원이 전투를 했다는게 말이 될까요?
공손헌원 때는 동이가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시기상으로 말이 안되는 기록이죠.

공손헌원이 살던 시절에는 사이가 없었고,
공손헌원이 죽고 한참 뒤에 생긴 동이 중 묘족 족장 치우와 싸움을 했다.
공손헌원이 살아 있을 때는 치우가 존재하지 않았고, 묘족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동이가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묘족 족장 치우가 살아 있을 때는 공손헌원은 이미 죽은 사람이죠.
공손헌원과 동이족 묘족 족장 치우가 싸웠다니 말이 된다고 보시나요?

환단고기의 진위 여부 및 배달국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자오지 환웅으로 적혀 있는 환단고기의 치우는 묘족 족장이 아니라 배달국의 환웅으로 그려 있죠.
중국쪽 기록보다 자오지 환웅과 공손헌원의 생존시기가 더 현실성이 있죠.

진위여부를 떠나 내용만 놓고 봐서(어차피 중국쪽 기록도 오류이거나 거짓이지만...)
공손헌원과의 생존시기상 오류가 있는 묘족 족장 치우를 믿을까요?
생존시기상 현실성이 있는 자오지 환웅을 믿을까요?

환단고기과 내용 비교를 안하더라도 치우가 묘족 족장이라는 중국쪽 기록은 안믿는게 나을 겁니다.
     
Centurion 15-04-06 00:23
   
중국정부와 중국 역사학계가
스스로 요서 홍산문명이 중국문명의 발원지라고 하고,
황제헌원이 동이족이라고 하는 마당에 이걸 부정하나요?

이족이 황허문명의 주역 중 하나임을 사실상 인정한 첫 논문은
중국학자 푸쓰녠(傅斯年・1896~1950)이 1933년 발표한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이다.

(1933년 발표에 주목)

 푸쓰녠은 베이징(北京)대학 총장대리와 타이완대학 총장 등을 역임한 중국의 저명한 사학자로 그는 이 논문에서 중국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중국 동쪽에 거주했던 이족과 서쪽에 거주했던 하족에 의한 것임을 주장했다.

 그는 “은상(銀商)과 서주시기 지금의 산둥성과 허난(河南)성 동부, 장쑤(江蘇)성 북부, 안후이(安徽)성 북쪽, 허베이(河北)성 해안, 랴오둥(遼東)과 조선(朝鮮)의 양안(兩岸)에 거주하던 태호와 소호, 제(濟)와 서(徐)부족, 풍(風) 잉(盈), 언(偃) 성씨 등이 모두 이(夷)다”며 “이족이 중원 서쪽에 거주하던 하족과 수차 투쟁하고 융합하면서 중국의 문명을 열었다”고 밝혔다.

글을 읽지 않으셨던 모양인데..

“은상(銀商)과 서주시기 지금의 산둥성과 허난(河南)성 동부, 장쑤(江蘇)성 북부, 안후이(安徽)성 북쪽, 허베이(河北)성 해안, 랴오둥(遼東)과 조선(朝鮮)의 양안(兩岸)에 거주하던 태호와 소호, 제(濟)와 서(徐)부족, 풍(風) 잉(盈), 언(偃) 성씨 등이 모두 이(夷)다”

이 대목에서 라오둥과 조선에 주목하시길..
없는 사람이 지어낸 글도 아니고, 베이징 대학 총장대리이자,타이완 총장이었던 실존학자가 고고학적 발견이 쏟아지던 시기에 남긴 이론입니다.

환빠가 나올 대목이 아니죠. 환단고기를 인용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굳이 묘족이나 치우를 언급하는 이야기도 아니구요.
     
햄돌 15-04-06 13:43
   
제대로 된 근거를 가져오세요 ^^

역사얘기만 하면 환빠거리는것도 병입니다.

정신차리세요
커피는발암 15-04-05 20:32
   
동이족은 만주지역의 홍산문화 사람들이 남하한 민족으로 우리민족의 역사입니다.
은나라를 한국사로 편입해서 홍산문화 이래 모든 역사를 한국사로 편입해야합니다.
이쉬타르 15-04-05 21:23
   
상, 서주이후  춘추 시대 까지는 동이족에다가는 우리 조상을 넣지는 않았죠..중토 북동지역(요서요동) 종족 표시에는 그냥 맥,숙신등으로만 불럿죠..
동이 거주 란게 산뚱성 그 이하부텀니다
     
Centurion 15-04-06 00:31
   
“은상(銀商)과 서주시기 지금의 산둥성과 허난(河南)성 동부, 장쑤(江蘇)성 북부, 안후이(安徽)성 북쪽, 허베이(河北)성 해안,
랴오둥(遼東)과 조선(朝鮮)의 양안(兩岸)에 거주하던 태호와 소호, 제(濟)와 서(徐)부족, 풍(風) 잉(盈), 언(偃) 성씨 등이 모두 이(夷)다”

이 대목에서 라오둥과 조선에 주목하시길..
없는 사람이 지어낸 글도 아니고, 베이징 대학 총장대리이자,타이완 총장이었던 실존학자가 고고학적 발견이 쏟아지던 시기에 남긴 이론입니다.

계속 중국정부는 동이족이 중국 문명의 발원이고,
요서홍산문명을 동이족의 뿌리라 믿고 있는데, 이쉬타르님은 이 쪽을 아니라고 하시네요.

요서홍산문명지역의 남하와 영향을 중국 자체에서 인정하는데, 왜 계속 이걸 부정하시는지?
물론 여기에는 대만역사학계와 의도는 꼬였지만 중국 역사학계가 동참하고 있죠.
          
이쉬타르 15-04-06 00:37
   
요서 요동 거주 종족은 동이,,라고 안하고 맥(이맥 만맥 북맥 맥이등),내지는 숙신으로 부르는 지명이 대부분이란검니다...사료를 보면 대체로 그렇단거지요
          
이쉬타르 15-04-06 00:40
   
혹 Centurion님이 기억을 못하실것 같은데.. 상을 건설을 하고 요하에서 내려온 종족을 학자들은 상족으로 부르던데... 이전에 이 문제에서  동이족 라고 하질 말고 우리조상 즉 발조선족(예맥족)으로 부르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본인 입니다
          
이쉬타르 15-04-06 00:42
   
그래서 당시 시대를 보건데 요서 요동에는 고조선이 들어서 있으므로 ,,이 2개국은 같은 종족으로 남북조로서 규정해야 하고 흔히 발해-신라를 남북조로 불리고 하므로 상- 고조선이 1차 남북조..이렇게 부르고 해야 할것이죠
               
Centurion 15-04-06 01:38
   
흠~ 그런가요?
근데.. 아마도 이쉬타르님이 상대하신 토론상대는 제가 아닌듯 합니다.
제가 댓글을 못봤었는지 몰라도..

그리고, 결국 이쉬타르님께서도 고조선-상족을 남북조로 보신다 이거네요.
결국 동족이란 소리 아닌가요?
이쉬타르 15-04-05 21:25
   
묘만하고 동이는 분명히 구분을 해서 ..같다고 보기는 힘들죠
     
Centurion 15-04-06 00:37
   
그리고 이 학자나 다른 학자들도 동이와 묘만은 따로 구별 중이지요.

아리아인의 민족대이동이 기원전 1500년경에 일어났는데..
그 무렵에 일어난 상나라, 주나라 교체기에서의
중국에서 요서홍산문명의 남하의 영향을 왜 인정안하시는지?
엄연히 주나라 세력도 서쪽에서 만만찮은 거리를 이동해 상나라를 멸망시켰는데요.

그리고 동부에서 살다 남쪽으로 밀려난 묘족과 남쪽의 만족은 엄연히 차이가 있는걸로 알구요.
     
이쉬타르 15-04-06 00:46
   
요서 홍산 문명(하가점 하층부터)을 학계 일부에서는 고조선으로 보자고 하는데 아직 학계전부는 아니걸로 암니다 ..하가점 하층 문화 건설자를 고조선으로 밀고 나가도 된다고 보며 ,,그래야 만이 이 상족이 기반이 사라지고 우리직계 조상의 일파가  이 상나라 건설자가 됨니다
꼬마러브 15-04-05 21:56
   
여씨춘추 -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
태평환우 - 순(舜)임금은 동이지인(東夷之人)
서경 - 은(상)나라의 주왕은 그 수가 억조에 달하는 동이족의 지도자이다.
주역 - 만물이 시작되는 곳은 간방인 동북방이고 끝맺는 곳도 간방이다 등등...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황하문명의 주류는 동이족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하문명인이 고대 중국인 형성하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은 유전학이나 고고학적으로도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건 중국에서도 여러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이죠.. 문제는 고대우리민족의 주류가 그 때의동이족이 맞느냐는 거겠죠..
     
Centurion 15-04-06 01:24
   
여수기란 인물이 있습니다.
환단고기 같은 위서의심을 받는 서적에 나오기만 하는 인물이 아니라.
조선왕조에서 편찬한 책인데..

단군시대의 예족 군장 여수기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여수기

한자 余守己

예국군장(濊國君長)

집필자 남동신

생몰년 미상. 단군시대의 예국군장(濊國君長).
 
9명의 아들이 여러 군을 나누어 다스려 백성들에게 공이 있고,
백성들이 따르자 서씨(徐氏) 성을 하사받았다.
 
[참고문헌]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384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의 상고로부터 대한 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문물ㆍ제도를 분류하여 정리한 책. 정조 6년(1782)에 이만운에게 명하여 ≪동국문헌비고≫를 보충한 것을, 광무 7년(1903)에 박용대(朴容大) 등 30여 명의 문사에게 명하여 이를 다시 증보하여 제계(帝系), 문빙(文聘), 예문(藝文)의 3항을 더하였다. 융희 2년(1908)에 간행되었다. 250권 50책.

한국에 이천서씨(利川徐氏)는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 군장 여수기[餘守己] 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임하필기라는 조선시대 책에도 이 서씨의 유래에 대해 나온다고 하는군요.

즉, 이 여수기의 후예인 서씨가 바로 중국 서주의 유래가 되는 서나라 언왕인데요.
우리가 흔히 보는 삼국지의 그 도겸과 유비가 주자사로 있던 서주 지역..(하비성)
그 전의 초한지 시대 항우의 수도가 있던 팽성이 바로 이 서주 지역이죠.

그 서언왕이 상나라 멸망 후 주나라 세력에 대항해,
구이족의 수십개 국의 조공을 받고 사실상 주나라와 중국을 양분하게 되죠.

「그 후에 서이(徐夷)가 참람되어 왕호(王號)를 칭하며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서쪽으로 황하(黃河)의 상류(上流)에까지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 세력이 한창 떨침을 두려워하여 동방 제후(諸侯)를 분리시켜
서언왕(徐偃王)에게 명(命)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언왕(偃王)은 황지(潢池) 동쪽에 살았는데 국토(國土)가 500리였으며,
인의(仁義)를 행하니 육로(陸路)로 와서 조회(朝會)하는 나라가 36국(國)이나 되었다.

목왕(穆王)이 후(後)에 적기(赤驥)·녹이(騄耳) 등의 말을 얻어서
조부(造父)로 하여금 그 말을 몰고 초(楚)나라에 알려서 서국(徐國)을 치게 하니,
[조부(造父)는] 하룻만에 [초(楚)나라에] 도착하였다.

이에 초문왕(楚文王)이 대병(大兵)을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망시켰다.
언왕(偃王)이 어질기만 하고 권도(權道)가 없어서 차마 그 백성을 데리고 싸우지 못하였으므로 패(敗)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났는데, 따라간 백성이 만명(萬名)이나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다. - 후한서 동이열전 '서'

이 서언왕의 출생설화는 거의 고구려 동명성왕 설화와 빼다 박았는데..
이게 더 오래됐으니 이 쪽이 더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건 서부에서 내려온 화하족 계열쪽에선 안나타나는 난생신화죠.
요런 난생신화는 고구려와 신라, 가야 등 우리 민족의 전매특허니까요.

서언왕이 상나라의 멸망 이후 구이족의 구심점이 되어 화하족의 주나라와 대립한 것은
역사적기록에도 나와있습니다. 이 서언왕이 그저 낯선 이민족이었다면 그렇게 큰 지지를
얻기 힘들었겠죠.

태평환우기같은 외사서에서는 서언왕이 이후에도 주나라를 몇 번 더 침공했으며,
이때 다른 동이족의 무리인 구이(九夷)들의 반발을 사서 서나라가 구이의 역공을 당하자,
같은 겨레끼리 싸울 수 없다는 이유로 언왕이 스스로 구이에게 반격을 포기하고 살해당했다고 전하지만,
(서나라와 구이족가 동족임을 표현하고 있는데,
 마치 항우가 회하전투에서 자신의 배신한 부하를 보고 싸우지 않고 자결하여 공을 세우게 해준 것을 보는 듯 하네요)
태평환우기에서 말하는 서언왕과 후한서에 나오는 서언왕이 같은 인물이라면
고조선을 다룬 다른 사서나 중국의 당대사서에서 말하는 기록이 맞지 않게 되므로,
서나라를 세운 언왕 이후의 임금들도 언왕이라는 이름을 세습한 것일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태평환우기

중국 송나라 시대의 지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지이다. 총 200권, 목록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송나라의 악사가 편찬하였다. 979년 송이 천하를 통일한 후 그 영역과 그들이 외이(外夷), 즉 오랑캐라고 부르고 있는 주변의 민족을 설명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각 부(府)·주(州)의 연혁, 현의 수, 호수(戶數), 생산물과 그 지방 인물의 성씨·약전(略傳)·산천·명승고적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지나치게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던 당의 《정원십도록(貞元十道錄)》,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 등을 보완하고 있으며, 오대(五代)에 개정된 지명을 알 수 있게 설명하고 있는 점도 역사연구에 많은 도움을 준다.

또한, 소실되어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 서적의 내용도 많이 인용하고 있다. 육조(六朝)나 당의 유풍을 계승하면서도 송대 문화의 특색까지도 잘 나타내고 있다. 현행본에는 건륭(乾隆)·가경(嘉慶)·광서(光緖) 등의 간행본이 있는데, 모두 8권이 결여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평환우기 [太平寰宇記] (두산백과)
Windrider 15-04-06 22:24
   
식민사관에 감염되면 환까가 됩니다. 무서운 병이죠.
인류제국 17-09-12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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