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기원전 3세기 말 흉노(匈奴)의 묵특(冒頓·재위 기원전 209∼174년) 선우(單于·흉노에서 군주 또는 추장을 높여 부르던 칭호)는 초원의 유목집단을 통일해 몽골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한나라 고조가 흉노와의 싸움에서 패한 뒤 화친을 맺고 조공을 바칠 정도로 강대했지만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등 중국 사서(史書)에 묘사된 흉노의 이미지는 집도 없이 추운 북부의 광활한 사막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식량을 찾아 떠도는 유목민(목동)에 불과했다.
그러나 몽골과 인접한 러시아 부랴트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 인근의 이볼가 성지 유적 등 20세기 이후 발굴된 흉노의 유적들은 중국 사서를 바탕으로 한 이해가 잘못됐음을 보여준다.
흉노는 다민족으로 이뤄진 유목제국이었으며 성벽과 해자를 갖춘 주거시설과 함께 농경에 종사한 정착민도 상당수 존재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크라딘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 역사·고고학·민족학 연구소 선임연구원(교수)은 지난 27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열린 ‘동아시아 고대문화 속의 흉노’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에서 흉노 제국 내 정착 취락지였던 이볼가 성지의 발굴성과를 발표했다. 중앙아시아학회(회장 이주형 서울대 교수)와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소장 송명희)가 공동 개최한 이번 학술대회에는 크라딘 연구원 등 한·중·일·몽골·러시아 등 5개국 8명의 흉노 전문가들이 참석해 흉노 고고학의 최신 성과를 발표해 관심을 끌었다.
크라딘 연구원에 따르면, 지금까지 러시아에서 알려진 흉노 시대 성채와 취락 유적은 약 20개. 이 가운데 기원전 1∼서기 1세기 이볼가 유적은 전체 주거지의 10분의 1과 같은 시기 매장유구 216기가 조사됐다. 우선 크라딘 연구원은 성채 내에서 출토된 동물 뼈 중 개(29%)와 돼지(15%)가 주를 이루며 북한 동북부 지역에서 옥저인들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칸(kan)’ 시설(=한국의 온돌)이 널리 사용된 점 등을 들어 취락민 중 일부가 극동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삽과 도끼, 쟁기날 등 농기구 제작 기술은 중국과 명백히 관련된 것이며 한자가 새겨진 유물도 다량으로 발견됐다. 고분군 출토 인골과 매장 의례를 조사한 결과 이볼가 성지의 거주민은 ▲흉노인과 ▲토착민 ▲망명 혹은 전쟁포로로 구성된 중국인으로 크게 구분됐으며 서로 다른 지위를 가진 4∼5개의 집단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됐다. 주거지 조사 결과 이볼가 유적 전체의 인구는 2500∼3000명으로 추산되며 셀렝게 강이 녹는 5∼9월 대다수가 농경에 종사해 수확한 농작물을 인근 유목집단에게까지 공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B B 다시-발로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울란우데) 선임연구원(교수)은 ‘자바이칼 지역 흉노연구 현황’이란 주제 발표를 통해, 포로의 지위를 갖는 중국의 농민 또는 탈영병들이 요새화된 취락을 건설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에 의심을 제기하고 흉노에 고유의 정착전통이 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주장한 견해를 소개했다.
세르게이 S 미나예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물질문화사 연구소 선임연구원(교수)은 이날 지난 1997∼2005년 발굴한 자바이칼 지역 차람 계곡의 서기 1세기 전반 흉노 귀족 고분군 발굴 결과를 국내에 처음 공개했다. 차람 계곡의 고분 가운데서도 직경 30m, 깊이 15m에 이르는 7호 고분은 흉노 선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지난 5년간 발굴한 결과 파손한 뒤 매장한 한경(漢鏡)과 중국제 마차, 유아의 두개골로 만든 인형, 글자가 새겨진 칠기편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7호 무덤 동·서쪽에 한 줄당 5기씩 두 줄로 정렬된 순장묘에서는 살해돼 순장된 인골들이 확인됐다.
이번 학술대회는 강인욱 부경대 교수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수행중인 흉노 연구 프로젝트의 하나로 기획됐다. 이날 강 교수는 ‘흉노와 동아시아’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중국 사서에 의존한 문헌 연구 및 몽골과 러시아에서 행해지는 북흉노 중심 고고학 연구의 한계, 그리고 현존하는 흉노 고분의 연대인 기원전 1세기 중반∼서기 1세기대로 수렴되는 시기적 편중성의 문제 등을 지적했다. 그는 “현재의 고고학 자료로는 흉노가 본격적으로 발흥하는 기원전 4∼2세기대를 설명할 수 없다”며 “한국식 동과(銅戈) 1점과 다양한 흉노 계통의 금장식 등이 출토된 기원전 3세기 전반 전국시대 연나라 왕족 무덤인 신좡터우(辛庄頭) 30호묘 등을 통해 흉노와 고조선, 나아가 동아시아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http://blog.daum.net/excaliver/16468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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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지난달 30일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과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소장 송명희)가 공동으로 개최한 국제학술심포지엄 ‘흉노와 그 동쪽의
이웃들’에서 흉노에 대한 15년의 다양한 연구 성과가 발표됐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야만적이고 미개한 부족으로 인식돼 왔던 흉노가 실제로는 고대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심에 있었다.
(중략)
특히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현재까지 발견된 흉노 귀족무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골모드Ⅱ유적의 발굴성과가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골모드Ⅱ유적은 지난 2005년부터 5년간 프랑스와 몽골 조사단이 공동 발굴했다. 2011년 몽골 조사단이 단독으로 발굴해 그
전모가 드러난 바 있다.
당시 발굴을 이끌었던 몽골 울란바타르대 에르데네 바타르 교수는 ‘골모드Ⅱ유적의 발굴성과와 흉노 귀족무덤의
실체’를 생생히 전했다.
골모드Ⅱ유적은 몽골 아르항가이 아이막 운두르-올란 솜 하뇌박 지역 발가슨 탈에 위치해 있다. 흉노
귀족무덤이다. 흉노 무덤에 대한 조사는 1955~56년 사이 몽골 최초의 고고학자인 도르지수렌에 의해 발견되면서 시작됐으나 마무리되지는 못했다.
이후 2001년 골모드Ⅱ유적에서 188기의 귀족무덤이 확인됐고, 이 무덤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거울 및 철제류 등이
발견됐다.
흉노문화의 분석을 역사언어학적으로 접근한 인디애나대 앤드류 쉬머넥 교수는 “흉노에서 갈라져 나온 선비언어 분석을 통해
초기 선비 몽골어 사용자들이 현재의 내몽골남동부 거주자들로 고구려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부경대 강인욱 교수는 흉노의 성터에서 발견된 온돌을 매개로 흉노와 한국 고대문화와의 관계를 규명했다. 그는 “흉노 온돌과 고구려 온돌이
유사하다. 이볼가 성지의 두 개의 온돌 달린 주거지가 연달아 붙어있는 형태를 한반도 노남리(과거 고구려 영토)에서도 볼 수 있으며, ㄱ자형으로
온돌을 돌리는 주거지 구조도 흡사하다”고 설명했다.
또 “북흉노가 도입한 온돌의 사용은 초원지대에서는 유지되기 힘든 것으로, 집단
해체 이후에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며 “온돌이 도입된 경로는 초기 고구려의 발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근 흉노 역사는 유라시아 고고학연구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매년 10여 개 나라가 몽골지역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125348
요약:
1. 흉노족 내부에서 성곽을 쌓고 농경을 행하는 일부 무리가 있었다.
(어떤 기사에선 이 무리를 일찍이 끌려와 부용세력이 된 선비족으로 추정)
2. 옥저에서 발명한 걸로 알려진 온돌이 흉노지역에서도 사용되었다.
3.내몽골의 동남부 만주 요서지방에서 흉노에 끌려온 동호족,
즉, 초기 선비족 언어에서 고구려어와의 유사성이 발견되었다.(미국 인디애나대 앤드류 쉬머넥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