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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22 11:44
[일본]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망한 4가지 원인
 글쓴이 : world
조회 : 10,026  

첫번째로 가장 큰 이유.


일본 본토로 부터 보급이 끊겼다.


임진 왜란 발발 직전 일본은 전쟁에 관해서는 유럽에서 소수의 원정군이 와도 지지않는다고 자신 할만큼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게다가 유럽과의 무역에 있어서 암흑기에 빠져있던 조선과는 달리 활발하게 유럽의 선진 문물을 홍수처럼 받아 들이고 있던 만큼 일종의 우월감에도 젖어있는 상태다.


유럽의 선진문물을 모방해 대량 생산한 조총 부터 다양한 물품들이 산처럼 쌓인 항구를 배경으로,

끝없이 사각형 대형으로 정렬한 일본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금방이라도 명 나라를 정복한것 같은 카타르시스를 맛 봤을테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조총과 유럽을 모방한 물품 그리고 식량들은  조선에 상륙하지도 못하고 대부분이 조선 함대에 의해 바다 속으로 가라 앉았다. 전쟁 기간 내내.


다급해진건 조선 반도로 건너간 일본 원정군이었다.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물품과 식량 공급이 끊겨 버렸기 때문이다.


 담백한 입맛과 일본 현지에서 생산하는 식량에 익숙해져 있는 일본 병사들이 뒤늦게 조선 현지에서 식량을 공급받아야 하는 처지가 돼 버렸다.


가장 쉬운 방법은 물론 약탈.

하지만 처음엔 효과가 좋아도 나중엔 다 도망가 버리기 때문에 결국은 전투에만 동원돼도 모자랄 병사들을 차출해 농사를 직접 지어야 한다.


일본 본토에서 농사를 전담할 농민들이나 노예 계급을 데려오려고 해도 조선 수군에 막혀 전혀 들어 올수 없다.


게다가 중세 시대는 일본군이 아무리 조총등 유럽의 선진 문물을 모방한 물품들로 무장했다 해도,

 대나무를 자르면 창이 돼고, 급하면 쇳덩이나 돌을 던져도 일단은 화살과 같은 효과를 낼수는 있는 만큼 무기 공급이 쉬운 시대였다.


즉 낮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숨어 있다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에는 일본군 주둔지 주변을 어슬렁 대면서,

 요즘말로 하면 재빨리 테러를 하고 달아나는걸 반복하는 농민출신 게릴라들이 후방을 교란하면서,


식량도 자체적으로 농사를지어 해결해야하고, 각지에서 빈발하는 게릴라들과의 소규모 전투에도 병사들을 내 보내야 하고,


일본군 점령지 바로 옆에는 조선군과 명나라 군이 대군을 이끌고 반복적으로 침공과 후퇴를 하는 만큼 대부분의 병사들이 농사를 지을 틈도 없이 상시 대기하고 있는 상태.


즉 도저히 식량을 공급받을 상황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굶주릴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 버린다.


일본이 자랑하던 물품들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조선에서는 일본이 가진 물품을 생산할 만한 시설도 장비도 기술자들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유럽과 무역을 해본 경험이 없어 유럽을 모방한 일본의 물품을 생산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고갈돼가는 조총탄때문에 급한대로 조선군의 무기고에서 꺼내온 다양한 형태의 총통와 대포를 써먹으려 해도,


문제는 일본군은 사용해본적 없는 형태의 총포기 때문에, 전술부터 사용법까지 모든 것을 다시 연구해야 하는데 전시 상황에서 언제 그럴 여유가 있을까?


결국은 자신들의 물품과 무기들은 일본 본토에서 공급 받아야 하는데, 조선 수군때문에 공급이 끊긴 상태라는 것이다.


총탄이 바닥나 조총도 쏠수 없고, 식량이 바닥나 굶주리는 일본 병사들이,

보급이 활발한 조명 연합군과 각지에서 활약하는 농민병들이 휘두르는 칼에 난자당해  죽어갈뿐이었다.


두번째로 당시 일본은 왕이 없었다.


모두가 왕이다. 머리가 똑똑하고 부하들과 영민들을 잘 대해주는 영웅 적 기질만 있으면 개나 소나 왕이 될수 있는 시대였다.


나름 단단한 작은 성과 주변 몇 키로 정도의 영지를 확보한 영주부터 강원도 크기만한 영토를 확보한 다이묘까지 수백에서 수천이 넘는 소국들이 난립하는 시대였다.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했다하지만,


실상은 수천이 넘는 영주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고, 돈과 명예를 보장해 주는 방식으로 영주들과 다이묘를 설득해 자기를 지지하게 하는데에 불과했다.


반면 조선이나 명 나라 심지어 유럽만해도 왕이나 왕실에 대한 충성은 절대적이다.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왕이 곧 국가라는 인식으로 목숨 바쳐 지키는것이 애국이던 시대다.  


조선의 왕이라고 자칭하던 선조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의병장들이나 장군들.


심지어는 조선의 구세주로 여겨지던 이순신 장군마저 처형했거나 처형하려던 암울한 분위기에서도,


 모두가 기꺼이 처형장에서 죽거나 백의 종군하면서 까지 본인들이 직접 새로운 나라를 건국해보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세번째로 일본 장군들과 영주들이 전쟁에 소극 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에 대한 가치관도 다르다.


당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 군대에겐 조선이나 명나라처럼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고, 그 중심에 왕실이라는 구심점이 없었다.


사실상 몇천에서 몇만 정도의 병사들을 보유한 작은 왕들의 동맹군이다.  


일본 본토에선 히데요시가 아무리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이래 저래 명령하고는 있지만,


괜히 무리해서 적극적으로 전장에 나갔다가 자신이 확보한 병사들을 모두 잃으면?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룩해온 영토와 야망이 모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고 만다.


 어떡하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도 안되는 명령을 피해서 자신이 확보한 병사들을 온전히 최대한 유지해 일본 본토로 복귀하려는 생각뿐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이제껏 해왔고 그렇게 살아왔던 대로 최대한 빠르게 북상해 조선의 수도를 함락하려 한것이라고 본다.


수도를 함락해 조선의 왕을 인질로 잡거나 처형하면, 또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 들여 스스로 xx하기만 하면, 


분명히 조선 각지에서 조선 왕의 공포 통치에 눌려 지배받던 지역 호족들을 설득해 자신들의 일본 식 동맹체제로 끌어 들이기만 하면 조선 전쟁은 끝날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왠걸? 수도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영지와 운명을 함께해야 할 조선 왕이 국경지대로 도망가 버리지 않나?


또 이미 조선 각지를 통치하는  구심점인 한양이 함락됬는데도 여전히 거의 모든 지역의 호족들이 무기와 사병을 끌어 모아 전쟁을 계속 이어가지를 않나?


조선이나 명 나라를 자신들처럼 작은 영주들의 동맹으로 바라본 일본 영주들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현실에 혼란과 패닉에 빠져 아무것도 할수 없는 상황이 돼렸다.


일본군의 가장 바깥에서부터 조명 연합군의 대군에 무너져 간다는 정찰병들의 보고에도 일본 영주들은 한 자리에 모인 상태에서...


이제 어쩌지?

 어이..당신 생각은 어때?

 뭐 좋은 방법 없어?

 나보고 죽으라고? 당신이나 가봐!

 나 돌아가고 싶은데, 누구 같이 갈 사람 없어?  

야야. 내 병사들 다 죽겠다. 나 좀 도와줘.

등등...


백년 천년... 부산등 몇 군데에서 농성하면서 회의만 하고,


히데요시의 독촉에 시달려 소극적으로 전투 좀 깔짝대고는 다시 농성하면서 또 회의만 하는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으로 돌아선 일본 병사들과 영주들이다.


 임진왜란 초기, 모래성처럼 무너졌던 조선군의 상당수를 재 정비하고 조총의 사용법부터 전술,


그리고 일본군에 대항하는 전법이나 일본 식 전술등을 전수해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승전을 이어가던 김충선 장군이 대표적이었다.


본명은 사야가. 뛰어난 조총 전술로 전국시대 말기에 큰 활약을 했던 명장.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족들을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 조선 원정에 참전한 그는 부산 상륙 직후 현지민들이 잔인하게 약탈당하는 걸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한다.


그리고 비록 유럽식 문물을 모방해 큰 발전은 했지만,


긴 전국 시대로 야만적이었던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문화와 문물 그리고 평화로움을 접한 사야가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일본은  영웅적인 개인에 사람들이 모여드는게 익숙한 만큼,

조선 선조처럼 말도 안되는 처형에도 아무 말 없이 충성을 하는 조선의 명장들과는 달리 히데요시에게 충성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조선을 선택한 사야가는 자신이 데려온 병사들과 자신의 설득으로 조선을 선택한 일본 영주 및 병사들을 데리고 조선군 주둔지로 향했다.


사야가의 귀순 이후에도 조선 각지에서 개별 적으로 백기 투항하는 일본 병사와 소규모 병사들을 데리고 귀순하는 영주들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순 신 장군조차 휘하에 조선으로 돌아선 일본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고, 전쟁 기간 내내 이들로 구성됀 부대가 일본군을 격파하는데 큰 활약을 했다고 전해진다.


만약 조선 조정이나 현지 군 지휘관등이 조선으로 돌아서는 일본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잔인하고 냉정하게 대했다면?


어차피 전세가 기울어가긴 했지만, 전쟁이 끝나는 시점이 더 길어지진 않았을까 싶다. 


최악의 경우는 우선은 전쟁에서 이긴 다음 생각해보자는 식으로,

 기존의 영주들과 사야가를 포함해서 이미 마음이 일본을 떠난 영주들이 일치 단결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일부 조선 영토를 조선과 갈라 먹는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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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정대 15-03-22 14:04
   
첫번째 근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거 아닙니까? 왜군의 보급은 일본에서 부산으로 원활하게 이루어졌죠. 조선에 상륙하지도 못하다뇨? 이순신 장군의 해군이 남해안에서 전승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부산과 왜 사이에 이루어지는 보급선을 공격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부산에 공급된 물자를 전방의 왜군에게 수송하는게 남해안에선 이순신장군에게 막히고, 육로는 의병들의 게릴라전과 도로망의 허술로 보급에 애로를 겪었던거죠.
개떡 15-03-22 14:44
   
일본의 최대 실수는 전라도 지방을 전부 점령하지 않은채 바로 한성으로 진군했다는 거죠.
당시 일본은 왕을 잡으면 조선이 항복할거라고 믿었지만 선조가 수도를 버리고 도망가자 멘붕에 빠집니다. 일본에서는 군주가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죠. 일본군은 선조를 쫓아 계속 북진하지만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이면서 조선수군의 본거지가 있는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상태로 무리하게 진군하니 당연히 보급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요...
거기에 일본에서는 각지방의 영주들끼리 전쟁하더라도 주민들은 신경쓰지도 않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왜놈이 자신의 논밭이나 재산을 빼앗는다고 생각했고 거기에 유교 성리학의 충효사상에 충실했던 선비 등의 양반들이 백성들을 이끌어 의병을 일으킨 것도 한몫 했죠.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일본군은 군량의 전부를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 군량들이 조선수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도착한다고해도 쉴세없이 게릴라전을 해오는 의병들을 토벌하는데 일부를 써버리니 전방으로 보낼 물자가 턱없이 부족해지는겁니다.

제대로된 중앙집권도 없이 봉건체제에 묶여 오랫동안 내전을 벗어나지 못했던 일본과 강력한 왕권의 지배아래에서 비교적 평화로웠던 조선의 사고방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고, 일본은 이러한 것을 깨닫지를 못했죠.
     
뭐꼬이떡밥 15-03-22 17:39
   
다이묘도 본성 버리고 도망가는 경우 있어요.
선대때 쓰던 거성을 빼앗기면 다른 성으로 거성을 옮기죠.
Centurion 15-03-22 15:18
   
윗분 말씀대로 부산포까지의 보급은 전혀 문제없이 잘됐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함대가 부산포를 공략해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긴 했는데..
일본군들이 아예 바다를 포기하고, 높은 곳에 조선군에서 노획한 대포를 배치해 반격했습니다.

자연히 높은 지역의 대포가 사거리가 길어질 수 밖에 없고,
이런 상황에서 전투에서 전투에서 용맹하게 거북선을 이끌던 정운 장군이 전사하죠.

그 이후로 일본군은 남해안에 쭉~ 왜성을 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포를 배치해 지나가는 조선수군을 요격할 태세를 갖추죠.
요즘으로 치면 북한군이나 중국군처럼 미국에 비해 해군이 딸리니까,
지대함 미사일, 해안포 박아놓고 승부보려는거랑 똑같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이게 골머리가 아파서 쉽게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정유재란 때 부산으로 다시 건너오는 가토 군을 요격하지 않았다고 조정으로 압송되죠.

그리고 그 뒤를 원균이 차지하게 되는데, 원균조차도 큰소리 칠 땐 언제고..
10만 대군으로 육상에서 왜성들을 공략하지 않으면 자기도 못 진격한다고 말을 바꿉니다.
그래서 권율 장군한테 곤장을 맞게되죠.

그리고, 이때까지 조선수군은 거의 승승장구해왔고 병력도 거의 2만 정도에, 규모도 200여척에 달했는데..
원균의 지휘하에 나아가다가, 오랫동안 상륙도 못하고, 지치고 피곤해진데다.. 지상으로 물을 구하러 올라가서..
왜군에게 공격하고, 부산에 있던 왜군 함대 1천여척의 기습 공격을 받아 궤멸되고 맙니다.

이순신 장군이 왜 한산도에서 나아가지 않고 대기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참고로 본래 조선수군은 세종 무렵에 900여척 이상으로 거의 1천척 규모였습니다.
 고려 말기 최영장군이 왜구에 대항하려고 모병한 군대가 20만에 건조하려던 배도 2000척이었구요. 
 물론 좀 만들던 와중에 어떤 장수의 섣부른 출전으로 수백척을 말아먹고,
 나중에 정지 장군과 최무선이 50여척의 함대로 왜구 500척 함대를 새로운 전술과 화약무기로 이기게 되죠.)

그리고, 윗분 말씀대로.. 육로 수송의 문제가 컸습니다.
일본군들은 의병의 기습 때문에 적어도 이동할 때, 마치 기차역처럼..
각 성과 각 성을 연결하는 루트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동 시 최소 병력이 300명 단위입니다.

게다가 육상 수송 혹은 현지조달에만 의존해야했는데...
육로 수송은 일단 도로 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고, 무슨 고개, 무슨 고개해서 산길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수레를 끌려고 해도 사람이 끌던, 소나 말이 끌건.. 많이 실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비포장도로 다녀보시면 알겠지만.. 비오면 진흙창으로 변해 답이 없죠.. 
거기에 만약 수풀까지 무성하면.. 정글마냥 지나가기도 힘들어집니다.
최소한 사람의 발길로 이어진 주요 도로라면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조선의 도로가 외국군대의 진로를 늦추기 위해 최대한 황폐화된 채 방치된 건 사실이죠.

그래서 손자병법에도 적군에게서 쌀 1 섬을 뺏으면, 적군의 20석을 뺏는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수송하기 위해 들이는 행정적인 노력과 수송인력, 호위병들이 먹는 쌀, 말과 소가 먹는 건초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한 소모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쌀 1섬 보내려면 그만큼 많은 물자가 따로 소모가 됩니다.

그래서 해상수송이 반드시 필요했죠. 배 한척에 수백석의 쌀을 너끈히 실어 나르는데..
제해권만 확보되고 안전하면, 이만큼 효율적인 방법도 없거든요.
근데 이순신 함대로 인해, 이게 막힙니다. 일본 수군이 거제도 쪽에서 서쪽으로 한발짝도 못나아가죠.

그러니, 한양에 도착한 일본의 대부분의 육군이 먹을 쌀이 없었던거죠.
이 병력이 먹어치울 쌀을 최소한으로 잡아도 1년에 한 10~20만석은 필요할텐데 말이죠..

그래서 현지조달로 세금을 뜯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백성=쌀 생산량이라.. 나중에 영지로 나눠주면..
데리고 살 백성들이라 크게 도륙은 안내고 넘어갔지만, 당장 배가 고프니, 쌀을 수탈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금을 못내면, 목을 쳐버리죠. 이러니.. 조선전역에서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의병들이 육로수송마저 방해하게 되니.. 한양의 일본군들이 더욱 쫄쫄 굶게 되지요.

부산포에 아무리 일본에서 온 보급물자가 쌓여도, 전방에는 공급이 안되니.. 결국.. 보급란과 병력손실, 소모를
견디지 못하고 행주대첩 패배 이후 철수해 보급 잘되는 남해안에 성을 쌓고 수비로 전환하게 됮이요.

조선도 조선나름대로 일본군 때문에 농사를 못지어서 질병과 기아가 만연했고..
명나라군조차도 식량 문제로 곤란을 겪어 약탈을 벌이고 난리를 쳤죠.
그래서 명나라에서 대략 100만석의 쌀을 보내오는데..
이걸 조선에서 유근이라는 관리가 50척에 옮겨싣고 한양으로 보내게 됩니다.
배 1척에 2만석 X 160kg 잡으면 대략 곡물의 양이 대략 3200톤인데..
뭐 한방에 실어나를 수 있었는지.. 여러번에 실어나른건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http://pdf.dema.mil.kr/pdf/pdfData/2014/20141120/B201411201201.pdf
     
디노 15-03-22 16:52
   
왜놈들이 쌀을 수탈해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건 잘못된 내용이네요.

왜놈이 침략한 게 4월 13일이었고,
9일 후인 4월 22일에 곽재우 의병이 처음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이틀 전에 의병을 일으킨 유팽로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유팽로는 왜놈이 침략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의병을 일으키려고 고향 전라도로 내려오다가 왜군에 투항하기 위해
가고 있던 한 무리의 백성을 발견하고 그건 옳지않다고 의병이 되어 나라를 지키자고
하여 그들과 함께 첫 의병을 꾸리게 됩니다.

곽재우 등 의병 중에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들이 많은데,,,
이는 남명의 사상이 성리학을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현실적용을 더 중시하는 때문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의병들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왜놈들의 수탈 때문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로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죠.

선비들은 처음부터 백성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꾸린 게 아니라 시작은 대부분 가노들을 데리고 의병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사대부나 양반들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노비들을 데리고 있었어요.
유성룡만 해도 돌아가실 때 장자에게 노비 98명을 물려줍니다. 장자한테만 그 정도니 전체 노비의 수는 훨씬 더 많았죠...
유성룡보다 더 크게 농사를 짓던 양반들은 대부분 수백명씩의 노비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초기에 이처럼 빠르게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노비들을 데리고 참전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일반 백성들도 참여해 의병의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죠...
          
Centurion 15-03-22 20:05
   
님 말씀도 맞는 말입니다만..
임진왜란 때 의병을 주도하고 거병한 인물들이
대부분 지방에 내려와있던 전현직 관료들이나 지방의 향반, 지주층이었죠.
평민들과는 조선조정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다른 조선왕조의 수혜를 받는 특권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 평민들은 조세 납부와 노역, 병역 의무를 가득 짊어지고,
의무마저 면제인 양반이나 지주층의 수탈에 이중으로 달달 볶이는 신세였죠.

요즘도 우리나라 살만하다는 사람과 HELL이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체로 전자는 정말 살만한 중산층 이상이고, HELL이라 부르짖는 사람들은 서민층이 많죠.

일단 곽재우 장군의 거병은 상당히 빠른게 맞긴 하지만.
5월3일 한양이 함락되고, 5월 24일 고바야카와의 전라도 침공군이 서부경남으로 진출하면서..
정암진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임진왜란 극초기에 보면, 동부경남권과 대구경북권은 일본군의 침공루트가 되어 큰 타격을 입었고,
관군들이 도망치는 추태도 많이 보였습니다. 한양에서 내려온 이일이 병력 소집도 하기전에 고을 수령들이 나몰라라 도망치는 케이스도 많았고,
동래성 전투에서 양산군수와 그 휘하병력이 전멸해 일본군이 거의 무혈입성하는 케이스도 생기기도 합니다.
대체로 이 침공루트에 해당되는 지역에선 의병 궐기가 당장 일어나기 힘들었죠.
그래서 의병들이 이 침공루트와 일본 점령지에서 살짝 벗어난 지역에서 많이 생기게 되는데..
이 때 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이 대체로 앞서 말했듯 지방 유생들, 향반들, 전직관료등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관군들을 재규합하는 형태의 의병들도 많았고, 지방 관청에서도 이들에게 무기, 식량을 지원하고,
나중에는 벼슬도 내려서 준-관군화시키게 됩니다. 어차피 병농일치 체제라 의병에 가담안해도, 관군으로 징집될 사람들도 많았구요.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의병들을 해산해 고향에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조선에 애국적인 양반, 유생, 지주, 토호들과 달리...
(이 사람들에겐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조선왕조의 교체나 외세의 지배가 재앙일 수 밖에 없죠)
일본군에 협력하는  평민들 케이스도 있었고, 무정부상태가 되자 노비대장을 불태우고 환호하던 그런 천민들도 있었죠.
대표적인게 임해군, 순화군을 잡아다 가토 기요마사한테 받친 반민 국경인 케이스..  게다가, 가토 군이 여진족을 공격하자,
일본군에 참여해서 같이 여진족을 공격했다는 케이스도 있습니다.(여진족의 약탈행위에 대한 증오심이 컸다고 하는군요)

고려 말기 왜구들 중에도 이런 반민들이 많이 있었죠.

그래도 대충.. 소심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점령지 농민들은...
그닥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그다지 봉기할 의도가 없는 케이스도 많았습니다.
어떤 경우엔.. 조명연합군이 머물며 쌀이니 뭐니 수탈을 한다고
'일본군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리 힘들게 만드냐'며~ 일본군의 도착을 기다리는 좀 어이없는 케이스도 있었구요..

막상 자기 식구가 일본군 칼에 죽거나, 기껏 추수한 식량이 송두리째 뺏겨야
분노심에 의병이 되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소리죠..

이건 요즘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보수니 정치에 무관심이니 하는 사람들도, 담배값 올리고, 물가 오르고, 취업난 심해지면 정부 물어뜯기 바쁘죠.
예나 지금이나 그냥 각종 의무나 짊어지는 백성들 중에는 애국심이라는 덕목보다..
누가 더 날 힘들게 하는가? 누가 날 더 편하게 하는가?의 기준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일본군의 수탈이 민심이반을 일으켜, 조선 농민들의 의병항쟁을 가속화시킨 부분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 봅니다.

한참 후긴 하지만... 훗날 동학농민군과 유생들이 주도하던 항일의병들 간의 관계도 그닥 좋지 않았습니다.
유생들이 주도하던 항일의병들은 애국심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지만..
동학농민군은 조선왕조를 개혁의 대상으로 보았고, 막상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청,일 양군까지 동원하는 모습에
일찌감치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었으며, 동학 농민군이 양반 의병들한테도 공격을 받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쪽은 혁명군 성격이고, 한쪽은 왕당파 군대의 성격이니 그럴 수 밖에 없죠..

그렇기에 일본군대가 조선 백성의 민심을 잃는건 의병이든 관군이든 병력동원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북창 15-03-22 19:16
   
일본 사람인가...읽기 불펀해서 중단했는데...
일단, 유럽 선진 문물?? 16 세기는 동양이 서양보다 모자란게 없을 뿐만 아니라...오히려 산업과 실용과학면에서 더 발전했었음.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난건 정복이 실현 가능해서가 아니라...내부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  우월의식???ㅋㅋㅋ
예나 지금이나 우월의식은 문화의 높고 낮음에 좌우되지...군사 많다고 생기는게 아님. 이건 상식임.
그외 부분은 안 읽음.
     
mymiky 15-03-23 00:48
   
히데요시가 말년에 전국통일해서 자기 힘을 너무 과대망상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실제로, 히데요시는 조선뿐만이 아니라, 조선, 대만, 필리핀, 인도에까지
일본에 입조하란 국서를 보냈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 나라들도 {얜 뭐임?-.- 관심종자인가? ㅋㅋㅋ} 하면서 다 씹었음.

어쨎든, 히데요시 자뻑으로 보면, 본인은 실제로 자기가 슈퍼맨인듯 생각했음.
일본에서도 모두가 찬성하는건 아니였고{ 관백전하 제발쫌--;;}
이렇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던건 사실임.

근데, 윗분말씀대로 내부불만도 있을테고, 뭔가 콩고물 떨어질길 기대한 사람도 있을테고
관백이 워낙 극성이라 떠밀려진 부분도 있을테고,, 뭐 여러가지 이유로 왜란이 일어남.

우월의식이 뭔 병맛이긴 모르겠지만..왜란전문 역사가 인터뷰를 봤는데,
 
당시 일본은 자기들이 무척 큰 나라라고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자기들이 변방의 섬나라고 작다는 개념은 근대에 와서 서양한테 얻어맞으면서
깨달은 개념이고,

당대의 일본의 입장에선 
60개국(쿠니)를 통일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류쿠나 대만이나 필리핀이나 조선을
오랑캐라고 보고, 속국이라고 생각했다나?  (뭔가 중화사상을 자기식으로 변용한듯?)
 
중국이 큰 나라인데, 일본은 중국보다는 작다치더라도 거의 그에 대등한?
뭐 이런 개념이 있었던 모양임.

거기다, 삼한을 정벌했다는 무슨 히미코? 맞나.. 뭐 그런 전설같은 이야기도 있고

하여튼, 우리는 일본이 변방이라 지들끼리 우물안 개구리들이 복작거리며 살다보니
맛이 갔다고 생각하는데ㅋㅋㅋ 뭐.. 영 틀린말은 아니지만

당시, 상대방의 입장에서  뭐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상당히 흥미있는 내용이였습니다.

중간에서 고니시나 반전파들이 국서조작으로,
서로간에 오해를 깊어지게 한 이유도 있구요.

우린 걍,
통일축하 통신사
- 그쪽에선 일본에 입조해온 항복사절

명나라에 조공받치려 가는 길 좀 보호해달라
- 우리가 명나라 치는데 니들도 같이 가세~

조선이 얘네 뭐임? -.- 맛간 ㅅㄲ들 ㅋㅋㅋ
어라? 저것들이 우릴 배신했네, 배신자들에겐 죽음뿐~

이래저래 오해와 편견과 오만과 독선이 마주친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뭐 이래저래..
     
alskla9 15-03-23 03:36
   
16세기면 유럽은 르네상스, 신대륙개척, 종교개혁 일어난시긴데..
실용과학도 17세기 명청이 교체되면서 그제서야 실학이 발달된거고
동서양 역전은 대충 15~16세기 사이인듯함
     
알라바바 15-03-26 10:44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면 서양 동양은 과학이나 기술에서 비교가 안됐었음.

그건 서양이 대단한게 아니라 걔네들이 바바리안이었을때 로마와 그리스의 유산을 얻었기 때문임.
          
알라바바 15-03-26 10:49
   
르네상스도 갑자기 개혁이 일어난게 아님. 원래 유럽의 흑역사시대에서도 동로마 비잔틴제국이라는 걸출한 제국이 살아있었고 그들은 여전히 고도의 문명과 기술을 유지하고 있었음.....
 그런데 오스만투르크에 비잔틴제국이 멸망하게되자 국가잃은 로마인들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대량으로 이민가서 이탈리아에 문화충격에 가까운 변화를 일으킨게 르네상스임.
mymiky 15-03-23 00:26
   
왜란때 일본군 전부가 다 조총부대는 아닙니다.
왜란때 조총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에서 총이 사용된 의의는 있는데

일본군도 대부분은 칼, 화살, 창이 주력무기였고, 조총부대로 편성된 부대는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조선인들은 개국이래 안정된 분위기에서 탱자탱자 안일하게 지내다보니, 처음 본 무기였고, 그 살상력과 특히나 총기 특유의 천둥치는 소리에 무척 놀랐죠.
근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일본 투항군들이나 포로들에게 조총기술 습득해서
조선군들도 총기 생산에 들어갑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화약 자체개발해서 쓴 나라답게 많은 화포들이 있었고, 소형화된 총통같은 것도 있었죠. 비천진천뢰같은 폭탄류도 있었구요.

일본이 유럽에서 조총기술은 받아들이긴 했는데, 대포도 변변찮은게 없어서
몽땅 유럽이나 중국에서 수입해썼고, 알다시피 왜군들 배는 조선판옥선과 달리 자체에 화포실어서 날리면
배자체가 약해서 충격으로 부서지곤 했다는건 유명하죠.  그래서 대포 한두개밖에 못 실었고, 그조차 공중에 줄을 메달아 쌌다는 코메디같은 짓을 했죠;
전략설계 15-03-23 08:14
   
임란이 일어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히데요리가 어렸다"에 1표 던집니다.

이에야쓰도 잡지 못하고 일본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히데요시가
조선을 뺏으면 머하고 명을 뺏으면 머할까요.
겉으로는 조선, 명을 정복한다고 호탕하게 명령을 내리지만,
이 사람이 호탕한 것으로 출세한 사람이 아니라 잔머리로 출세한 사람이라..

전국시대 막바지에 영주들 전투기술이나 군사력은 "피크"에 오른 상태에서..
말년에 "히데요리"에 대한 집착이 대단해..
일본내엔 적이 없어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수 없는 영주들에
나가서 새로운 적을 상대하며 힘을 소진하라는 것이죠.

"히데요리"가 장성할 때까지.. 그렇게 시간을 벌려고 했던 것입니다.
잔머리 굴리던 사람이라..
자신은 늙고.. 자식은 어리고.. 영주들은 이에야쓰부터 호락호락하지 않고..
가문이 안 좋아서 쇼군이 되어 바로 새로운 막부를 열 명분도 그렇고..

주군 노부나가도 통일을 못 보고 모리와 전쟁중에 횡사했는데..
히데요시는 생각도 못한 통일을 해버리고..
일본 전체를 이끌만한 지도력이나 어떤 비전을 준비하지 못한 채, 덥석 통일이 되니..
어중간한 상황에서 아는 것은 전쟁뿐이라..
영주들 힘을 소진시키는 것 외에는 딱히 득이 없는 이해못할 무리수를 택했다고 봐집니다.

조선을 뺏는다고 해도.. 10만은 주둔을 시켜야 유지가 되는데..
일본이 그걸 할 능력이 안되고..
이에야쓰야~ 전쟁 벌이지 않고도 영주 힘빼는 방법을 아는 사람인 반면에..
히데요시도 이에야쓰보다 빨리 죽은게 죄지..
급작스런 통일에 다이묘에 쏠린 군사력을 분출하는 방식으로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죠..

임란때 보급에 있어서..
일본군이 이전의 한반도 침략군과 달리 보병이었기에..
똑같은 10킬로 이동시키더라도 군대가 느리기 때문에 많이 먹어대기 마련입니다.

본진과 떨어져 자체보급으로 200-300킬로 달려 내려오던 초원 기병이 아닙니다.
조총이 있어 대단한 군대로 착각할 수 있지만, 태생부터 기동에 한계를 갖고 있는 보병이었습다.

하지만, 전력에 다소 우위가 있음에도..
전쟁의 태반을 바닷가 성에서 허송세월을 보낸 것은..
본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통일은 했다지만 이에야쓰쪽 힘은 커지고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인 반면,
늙은 히데요시와 나이 어린 자식..
이런 불안정한 일본내정을 내정을 바라보는 한반도의 다이묘들이
"자신의 군대 보존"을 제1과제로 삼았다고 봐지네요.

2세구도가 불안한 히데요시가 좀 더 냉철하고 현명했다면..
호조를 몰락시키고 이에야쓰에 150만에서 250만으로 너무 퍼줬단 느낌이 듭니다.
이게 결국 히데요리에 저항할만한 반란군 주력을 스스로 만들어준 것이고..

자신이 오래살 건강이 아니라면..
호조를 칠 때 그 기세로.. 승부수를 띄어서
이에야쓰의 영지를 100만이나 그 이하로 과감히 줄였어야 했고.
미츠나리같은 충복을 알아보고 100만석 정도로 반란을 진압할만한
친위세력의 구심점이 되도록 세력을 만들어줬어야 합니다.
히데요시는 보면 친위세력을 쬐금쬐금하게 만들었는데.
이것도 무서웠나 모릅니다.

이에야쓰를 크게 키워놨다면 최소 이에야쓰에 맞설 자기쪽 누군가를 꼽아서 키웠어야 했습니다.
조무래기들은 위기시 지 살길 찾아 흩어지기 마련입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히데요시가 이 정도 머리썼다면 원숭이가 아닌 천재였겠죠.

현실적으로 처가쪽 사람인 가등청정도 넘어가는 판에 누가 충성할 지 누가 배신할 지
눈앞에서도 구분하기는 어려웠겠지만.
Centurion 15-03-23 14:20
   
여기에 노영구 국방대학교 교수의 발표 내용을 보니 이렇게 나와있네요..

철포를 이용한 가장 대표적인 전투로 알려진 장소합전(1573) 직후인 1575년 상삼겸신의 「군역장」에 의하면 39인의 家中의 武將이 거느린 군사 5,514명 중 장창병은 3,609명, 철포병(철포지) 321명, 기수(대소기지) 368명, 기병 566명, 그리고 각종 잡병(수명) 650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당시 전체 군사에서 철포병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6%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 장창병은 65%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기병의 비중도 10% 이상임을 고려한다면 16세기 후반 일본의 전술이 철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임진왜란 초 일본군의 편성과 전술 양상은 전쟁에 참전하였던 일본군의 구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 직후에 일어난 조선과의 제1차 전쟁(임진왜란) 당시 풍신수길이 고교종무, 고교통호 형제에게 부과한 군역 내용을 보면 총 인원 3,000명 중에서 전투원은 1,400명으로서 구체적으로 보사, 기사가 각각 150명, 철포족경이 200명, 궁족경이 100명, 창족경이 500명 등이었다. 따라서 철포의 비중은 궁의 2배 정도로서 이전보다 상당히 증가하고 전체 전투원 중에서 14% 이상이었다.

(고교종무는 입화종무를 말하는 듯 하고, 고교통호는 입화종무의 본명이며, 고교직차(본명=고교통증)가 입화종무의 친동생인데.. 교수가 실수했나봅니다. 입화종무는 2500명, 고교직차는 800명으로 적혀있네요.)

그런데 조선과의 제2차 전쟁(정유재란) 시기 같은 형제에게 부과된 군역에서는 궁병과 철포병의 비율이 1 : 3.8로 철포의 비중이 2배 가까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5~6년의 짧은 시기 동안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철포의 비중은 계속하여 급격히 높아져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 일본의 패권을 놓고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북 지방 대명인 이달정종가 보낸 3천 군사 중에서 기병 420명 등을 제외한 보병 전투원 2,300명 중 철포兵이 1,200명에 달하여 전체의 절반을 상회하였다

http://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32546


총 인원 3,000명 중에서 전투원은 1,400명으로서 구체적으로 보사, 기사가 각각 150명,
철포족경이 200명, 궁족경이 100명, 창족경이 500명 등이었다.
따라서 철포의 비중은 궁의 2배 정도로서 이전보다 상당히 증가하고 전체 전투원 중에서 14% 이상이었다.

즉, 백분율로 환산하면..
전투병 1400명 중 사무라이 기병 150(10%),  사무라이 보병150명(10%), 창병 500명(35%), 조총병 200명(14%), 궁병 100(7%)
전체 병력 3000명 중 사무라이 기병 150(5%), 사무라이 보병150명(5%), 창병 500명(16.7%), 조총병 200명(6.7%), 궁병100(3.3%)
전체병력 3000명 중 전투병력은 1400(46.7%)

고니시 유키나가의 경우 평양성 전투에서 18,700명의 병력 중 2천명의 조총병을 모란봉에 배치했다던데...
노영구 교수의 계산에 따르자면, 전투병 8732명 중 2000명이면 22%가 조총병이네요.
그런데 만약 18,700명이 전원 전투병이라면 10%정도 되구요.
     
알라바바 15-03-26 10:57
   
그냥 단순히 우리나라가 일본창병에 발린것임. 인간의 경쟁속에서 성장하는데 그당시 조선은 너무 태평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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