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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19 23:06
[기타] 후한서 동이열전
 글쓴이 : Centurion
조회 : 5,176  

후한서 85권 동이열전 목차

 서 徐國
 부여
 읍루
 고구려
 옥저
 예
 한
 왜
 논찬 (=일종의 종합 논평)


동이열전 -서 (徐國)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그 의미는]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夷)는]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 이(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풍이(風夷)· 양이(陽夷)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도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하였다.

옛날 요(堯)임금이 희중(羲仲)을 우이(嵎夷)에 살도록 명(命)하면서 ‘양곡(暘谷)’이라 하였으니 그곳은 대체로 해가 돋는 곳이다

하후씨(夏后氏)의 태강(太康)이 덕(德)을 잃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반(叛)하기 시작하였다. 소강(少康) 이후부터는 대대로 왕화(王化)에 감복되어 왕실(王室)에 복종하고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치게 되었다. 걸(桀)이 포악해지니 제이(諸夷)가 내지(內地)에 침입(侵入)하여 왔는데, 은(殷)의 탕왕(湯王)이 혁명(革命)하고 [난 뒤] 이들을 정벌하여 평정하였다. 중정(仲丁) 때에 이르러 남이(藍夷)가 침입하였다. 이로부터 복종하고 배반하기를 3백여년간 계속하였다. 무을(武乙)에 이르러 [은(殷)이] 쇠약(衰弱)해지자, 동이(東夷)가 점차 강성해져서 드디어 회수(淮水)와 대산(岱山)으로 나뉘어 옮겨오더니 점차 중토(中土)에까지 뻗어와 살게 되었다.

[주(周)]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紂)를 멸망시킴에 이르러 숙신(肅愼)이 와서 석노(石砮)와 고시(楛矢)를 바쳤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周)나라를 배반하고 이적(夷狄)을 초유(招誘)하였는데, 주공(周公)이 이들을 정벌함으로서 동이(東夷)가 드디어 평정되었다. 강왕(康王) 때에 숙신(肅愼)이 다시 왔다. 

그 후에 서이(徐夷)가 참람되어 왕호(王號)를 칭하며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서쪽으로 황하(黃河)의 상류(上流)에까지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 세력이 한창 떨침을 두려워하여 동방 제후(諸侯)를 분리시켜 서언왕(徐偃王)에게 명(命)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언왕(偃王)은 황지(潢池) 동쪽에 살았는데 국토(國土)가 500리였으며, 인의(仁義)를 행하니 육로(陸路)로 와서 조회(朝會)하는 나라가 36국(國)이나 되었다. 목왕(穆王)이 후(後)에 적기(赤驥)·녹이(騄耳) 등의 말을 얻어서 조부(造父)로 하여금 그 말을 몰고 초(楚)나라에 알려서 서국(徐國)을 치게 하니, [조부(造父)는] 하룻만에 [초(楚)나라에] 도착하였다. 이에 초문왕(楚文王)이 대병(大兵)을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망시켰다. 언왕(偃王)이 어질기만 하고 권도(權道)가 없어서 차마 그 백성을 데리고 싸우지 못하였으므로 패(敗)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났는데, 따라간 백성이 만명(萬名)이나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다. 

여왕(厲王)이 무도(無道)하자, 회이(淮夷)가 쳐들어 왔다. 왕(王)이 괵중(虢仲)에게 명(命)하여 정벌(征伐)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선왕(宣王)이 다시 소공(召公)에게 정벌하도록 명하여 그들을 평정하였다. 

유왕(幽王) 대(代)에 이르러 [왕실(王室)이] 음란해지자 사이(四夷)가 번갈아 침범하여 왔는데, 제환공(齊桓公)이 패업(霸業)을 닦고서 물리쳤다. 초영왕(楚靈王)이 신(申)에서 회맹(會盟)할 적에는 그들도 회맹에 참여하였다. 그 뒤 월(越)이 낭사(琅邪)로 옮기고 나서 그들과 함께 전쟁을 일으켜, 마침내 중국(中國)의 여러 나라들을 능멸하고 작은 나라들을 침략(侵略)하여 멸망시켰다.

진(秦)나라가 육귝(六國)을 합병한 후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지방의 이(夷)를 모두 분산시켜 진(秦)의 백성으로 만들었다. 진섭(陳涉)이 기병(起兵)하여 진(秦)의 천하(天下)가 허물어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으로 피난하여 와서 그 나라의 왕(王)이 되었다. 백년 쯤 지나서 무제(武帝)가 그를 멸망시키니 이에 동이(東夷)가 처음으로 상경(上京)에 통(通)하게 되었다. 

왕망(王莽)이 위(位)를 찬탈하여 황제가 되자, 맥인(貊人)이 변경에 쳐들어와서 노략질하였다. 건무(建武: A.D.25~55; 高句麗 大武神王 8~太祖王 3) 초에는 [동이(東夷)가] 다시 와서 조공하였다. 이때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의 위세가 북방(北方)을 떨게하고 명성(名聲)이 해외(海外)에까지 진동하니, 이에 예(濊)· 맥(貊)· 왜(倭)· 한(韓) 등이 만리(萬里) 밖에서 조공하였다. 그리하여 장제(章帝)· 화제(和帝) 시대 이후로 사절이 왕래하다가 영초(永初) 연간(A.D.107~113; 高句麗 太祖王 55~61)에 [국내 정치가] 다난(多難)하게 되자, 드디어 중국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으며, 환제(桓帝)·영제(靈帝)가 실정(失政)하여 국내가 어지럽게 되자 이런 일이 점점 잦아지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중흥(中興)한 뒤로부터 사이(四夷)의 빈공(賓貢)이 때에 따라 어기거나 빈(叛)함은 있었으나, 사자(使者)와 통역(通譯)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풍속과 풍토(風)土를 대략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이(東夷)는 거의 모두 토착민(土着民)으로서,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관(冠)으로는 고깔(변-弁)을 쓰고 비단옷을 입으며, 그릇은 조두(俎豆)를 사용하였으니, 이른바 중국이 예(禮)를 잃으면 사이(四夷)에게서 구했던 것이다. 보통 만(蠻)· 이(夷)· 융(戎)· 적(狄)을 통틀어 사이(四夷)라고 부르는 것은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을 모두 제후(諸侯)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동이열전 -부여

부여국(夫餘國)은 현도(玄菟)의 북쪽 천리(千里) 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高句驪)와, 동쪽은 읍루(挹婁)와, 서쪽은 선비(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이천리(二千里)이며, 본래 예(濊)[족(族)]의 땅이다. 

처음에 북이(北夷)의 색리국(索離國) 왕(王)이 출타중에 그의 시녀(侍女)가 후(後)[궁(宮)]에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 왕(王)이 돌아와서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侍女)가 말하기를,“지난번 하늘에 크기가 달걀만한 기(氣)가 있어 저에게로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대로 임신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왕(王)이 그녀를 [옥에] 가두었는데, 그 뒤에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왕(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옮겼으나 말도 역시 그와 같이 해주었다.왕(王)이 그 아이를 신이(神異)하게 생각하여 그 어머니가 거두어 기르도록 허락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東明)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王)이 그의 용맹함을 꺼리어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동명(東明)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사수(掩㴲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동명(東明)은 그걸 밟고 물을 건너서 부여(夫餘)에 도착하여 왕(王)이 되었다. 

[부여(夫餘)는] 동이(東夷) 지역 중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 곳으로 토질은 오곡(五穀)이 자라기에 알맞다. 명마(名馬)와 적옥(赤玉)과 담비(초,貂)· 삵괭이(놜,豽)가 생산되며, 큰 구슬의 크기는 마치 대추(산조,酸棗)와 같다. 목책(木栅)을 둥글게 쌓아 성(城)을 만들고 궁실(宮室)과 창고(倉庫)와 감옥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쳐들어 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활·화살·칼·창으로 병기(兵器)를 삼았으며 육축(六畜)의 이름으로 관명(官名)을 지어 마가(馬加)·우가(牛加)·구가(狗加) 등이 있으며, 그 나라의 읍락(邑落)은 모두 제가(諸加)에 소속되었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 데는 조두(俎豆)를 사용하며, 회합(會合)시에는 배작(拜爵)·세작(洗爵)의 예(禮)가 있고 출입(出入)시에는 읍양(揖讓)의 예(禮)가 있다. 납월(臘月)에 지내는 제천행사(祭天行事)에는 연일 크게 모여서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는 형옥(刑獄)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 준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때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가지고 길흉(吉·凶)을 점친다. 밤낮없이 길에 사람이 다니며, 노래하기를 좋아하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 풍속은 형벌이 엄하고 각박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은 그 집사람을 모두 적몰하여 노비(奴婢)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로 변상해야 되고,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면 모두 죽이는데, 투기하는 여자를 더욱 미워하여 죽인 뒤 다시 산 위에다 시체를 버려둔다.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아내로 삼고, 죽어 [장사지낼 적에는] 곽(椁)은 사용하지만 관(棺)은 쓰지 않는다. 사람을 죽여 순장(殉葬)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명 가량이나 된다. 그 나라 왕(王)의 장사에는 옥갑(玉匣)을 사용하므로, 한(漢)나라 조정에서는 언제나 옥갑(玉匣)을 미리 현도군(玄菟郡)에 갖다 두어, 왕(王)이 죽으면 그 옥갑(玉匣)을 취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건무(建武) 연간(25~56)에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와서 조헌(朝獻) 하고 입현(入見)하였다. 25년(49)에 부여왕(夫餘王)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므로, 광무제(光武帝)가 후하게 보답(報答)하니 이에 사절이 해마다 왕래하였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111)에, 부여왕(夫餘王)이 처음으로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7~8천(千)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노략질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으나, 그 뒤에 다시 귀부(歸附)하였다. 

영녕(永寧) 원년(元年)(120)에, 사자(嗣子)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궁궐에 나아와서 조공(朝貢)을 바치므로 천자(天子)가 위구태(尉仇台)에게 인수(印綬)와 금채(金綵)를 하사(下賜)하였다. 

순제(順帝) 영화(永和) 원년(元年)(136)에, 그 왕(王)이 경사(京師)에 와서 조회하므로, 제(帝)는 황문고취(黃門鼓吹)와 각저희(角抵戲)를 하게 하여 [관람시켜] 보내었다. 

환제(桓帝) 연희(延熹) 4년(161)에,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고 공물(貢物)을 바쳤다. 

영강(永康) 원년(元年)(167)에, 왕(王) 부태(夫台)가 2만여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노략질하므로,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쳐서 깨뜨리고 천여명의 머리를 베었다.

영제(靈帝) 희평(熹平) 3년(174)에 이르러 다시 표장(表章)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부여(夫餘)는 본래 현도(玄菟)에 예속되었으나 헌제(獻帝) 때에 그 나라의 왕(王)이 요동(遼東)에 예속되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동이열전 -읍루

읍루(挹婁)는 옛 숙신(肅愼)의 [지역에 있는] 나라이다. 부여(夫餘)에서 동북쪽으로 천여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北沃沮)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들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서로 다르다. 오곡(五穀)과 마포(麻布)가 있으며, 적옥(赤玉)과 좋은 담비가 산출된다.

군장(君長)은 없고, 그 읍락(邑落)마다 각각 대인(大人)이 있다. 그들은 산림(山林) 속에서 거주하는데, 그 지방 기후가 매우 추워서 항상 굴속에서 산다. 굴의 깊이가 깊은 것을 귀하게 여겨서, 대가(大家)는 아홉 계단을 내려가야 [그 바닥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깊다.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알몸에다 한 자 정도의 베조각으로 앞뒤만 가리고 다닌다. 그 사람들은 더러운 냄새가 나고 불결한데, 집 한가운데에 변소를 만들어 놓고 둥그렇게 모여 산다.

한대(漢代) 이래로 부여에 신속(臣屬)되었다. 그들 종족의 숫자는 비록 적지만 매우 용감하고 힘이 세며, 험한 산중에 산다. 활을 잘 쏘아서 사람의 눈을 쏘아 꿰뚫을 수 있다. 활의 길이는 4자(척,尺)정도나 되는데 그 힘이 쇠뇌(노,弩)와 같다. 화살대는 고(楛)를 쓰는데 그 길이는 한 자 여덟 치나 된다. 청석(靑石)으로 화살촉을 만들고, 촉에는 모두 독약을 바르므로 사람이 맞으면 즉사한다. 배를 잘 타고 노략질을 좋아하므로 이웃 나라들이 꺼리고 걱정거리로 여겼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동이(東夷)나 부여(夫餘)는 음식을 먹을 때 거의 모두 조두(俎豆)를 사용하지만, 오직 읍루(挹婁)만은 법도(法度)가 없으니 [동이(東夷) 중에서] 가장 기강이 없다

동이열전 -고구려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夫餘)와 접경(接境)하여 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사방 2천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산다.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힘껏 농사를 지어도 자급(自給)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그 습속(習俗)에 음식을 아낀다. 그러나 궁실(宮室)은 잘 지어 치장한다.

동이(東夷)들이 서로 전(傳)하여 오기를 [고구려(高句驪)는] 부여(夫餘)의 별종(別種)이라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法則)이 [부여와] 많이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적에 한 쪽 다리는 펴서 끌며,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치듯 빨리 간다.

모두 다섯 [부(部)]족(族)이 있으니,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이다. 본래는 소노부(消奴部)에서 왕(王)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뒤에는 계루부(桂婁部)에서 왕위(王位)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설치한 관계(官階)에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대가(古鄒大加)· 주부(主簿)·우태(優台)·사자(使者)·조의(帛衣)·선인(先人)이 있다.

[한(漢)] 무제(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만들어서현도(玄菟)에 속하게 하였으며, 북(고,鼓)과 관악기(管樂器)와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

그 풍속은 음란하고, 모두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밤에는 남녀가 떼지어 노래를 부른다. 귀신(鬼神)· 사직(社稷)· 영성(零星)에 제사지내기를 좋아하며,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큰 모임이 있으니 그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신(禭神)이라 부르며, 또한 10월에 [그 신(神)을] 맞이하여 제사지낸다.

그들의 공공 모임에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金)과 은(銀)으로 장식한다. 대가(大加)와 주부(主簿)는 모두 책(幘)을 쓰는데 [중국(中國)의] 관책(冠幘)과 같기는 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변,弁)과 같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서 평의(評議)하여 곧 사형에 처하고 그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奴婢)로 삼는다.

혼인에 있어서는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한 뒤에야 남자의 집으로 돌아온다. [결혼 후] 곧 장례에 쓸 물건들을 조금씩 준비한다. [장례를 치름에 있어서는] 금과 은 및 재물을 모두 써 후장(厚葬)을 하며, 돌을 쌓아(적석,積石)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기력(氣力)이 있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모두 복속(服屬)시켰다.

구려(句驪)는 일명(一名) 맥(貊)이라 부른다. 별종(別種)이 있는데, 소수(小水)에 의지하여 사는 까닭에 이를 소수맥(小水貊)이라 부른다. 좋은 활이 생산되니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
 
왕망(王莽) 초(初)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흉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王莽)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嚴尤)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왕(高句驪王)의 칭호를 고쳐서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은 더욱 심하여졌다.

건무(建武) 8년(A.D.32; 高句麗 大武神王 15)에 고구려(高句驪)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광무제(光武帝)가 그 왕호(王號)를 회복해 주었다. [건무(建武)] 23년(A.D.47; 高句麗 閔中王 4) 겨울에 구려(句驪)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 대승(戴升)등 만여명이 낙랑(樂浪)에 투항하였다. [건무(建武)] 25년(A.D.49; 高句麗 慕本王 2) 봄에 구려(句驪)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遼東太守) 제융(祭肜)이 은의(恩義)와 신의(信義)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그 뒤 구려왕(句驪王) 궁(宮)이 태어나면서부터 곧 눈을 뜨고 사람을 쳐다보니, 국인(國人)들이 미워하였다. 장성함에 용맹(勇猛)스럽고 건장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

화제(和帝) 원흥(元興) 원년(元年)(A.D.105; 高句麗 太祖王 53) 봄에, [고구려인이] 다시 요동(遼東)을 침입하여 여섯 현(縣)을 노략질하므로, 태수(太守) 경기(耿夔)가 격파하고 그 우두머리를 참살(斬殺)하였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A.D.111; 高句麗 太祖王 59)에 궁(宮)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예속되기를 구(求)하였다. 원초(元初) 5년(A.D.118; 高句麗 太祖王 66)에는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玄菟)를 침략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건광(建光) 원년(元年)(A.D.121; 高句麗 太祖王 69) 봄에,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과 현도태수(玄菟太守) 요광(姚光)과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거사-渠師)를 붙잡아서 목베고 병마(兵馬)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궁(宮)은 이에 사자(嗣子) 수성(遂成)에게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요광(姚光)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遂成)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니 요광(姚光) 등은 이를 믿었다. 수성(遂成)은 이 틈을 타 험요지(險要地)를 점거하여 [요광(姚光) 등의] 대군(大軍)을 막고는 몰래 3천여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玄菟)와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성곽(城郭)을 불태우고 2천여명을 살상(殺傷)하였다. 이에 [후한(後漢)은] 광양(廣陽)·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탁군(涿郡)· [요동(遼東)]속국(屬國)에서 3천여명의 기마병을 출동시켜 함께 [요광(姚光) 등을] 구원케 하였으나, 맥인(貊人)이 벌써 돌아가버렸다.

여름에 다시 요동(遼東)의 선비(鮮卑)[족(族)] 8천여명과 함께 요대(遼隊)[현(縣)]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蔡諷) 등이 신창(新昌)[현(縣)]에서 추격하다가 전사(戰死)하였다. 공조(功曹)인 경모(耿耗)와 병조연(兵曹掾)인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인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蔡諷)을 가리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사람이 백여명이나 되었다.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馬韓)· 예맥(濊貊)의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를 포위하였다. 부여왕(夫餘王)이 그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2만여명을 거느리고 [유(幽)]주(州)·[현도(玄菟)]군(郡)과 함께 힘을 합하여 [궁(宮)을] 쳐서 깨뜨리고 5백여명을 참수하였다.

이 해에 궁(宮)이 죽고, 아들 수성(遂成)이 왕이 되었다. 요광(姚光)이 상서(上書)하여, 그들의 초상을 틈타 군대를 출동시켜 공격하고자 하니, [후한(後漢)의 조정에서] 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가(可)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궁(宮)이 생전에 악독하여 요광(姚光)이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그가 죽은 것을 이용하여 치는 것은 의리(義理)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절(使節)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지난날의 죄(罪)를 꾸짖고는 그 죄를 용서해 주어 이후 그들이 선(善)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안제(安帝)는 그 의견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遂成)이 한(漢)나라의 포로(捕虜)를 송환(送還)하고 현도(玄菟)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수성(遂成) 등이 포악 무도하므로 목을 베어 젓을 담아서 백성에게 보임이 마땅할지나, 다행히 용서함을 얻어 죄(罪)를 빌며 항복을 청하는도다. [그러나] 선비(鮮卑)· 예맥(濊貊)이 해마다 노략질하여 백성을 잡아가 그 수가 수천명이나 되었는데 [이제] 겨우 수십명만을 보내니, 교화(敎化)를 받을려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지금 이후로는 [후한(後漢)의] 현관(縣官)들과 싸우지 말 것이며, 스스로 귀순(歸順)하여 포로를 돌려보내면 [그 숫자만큼] 모두 속전(贖錢)을 지불하되, 한 사람당 비단 40필(匹)을 주고 어린이는 어른의 반을 주겠다.” 하였다.

수성(遂成)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王)이 되었다. 그 뒤로 예맥(濊貊: 고구려)이 복속(服屬)하니 동쪽 변방에 사건이 줄어들었다.

순제(順帝) 양가(陽嘉) 원년(元年)(A.D.132; 高句麗 太祖王 80)에 현도군(玄菟郡)에 둔전(屯田) 육부(六部)를 설치하였다. 질제(質帝)· 환제(桓帝)의 시대에 다시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妻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건녕(建寧) 이년(二年)(A.D.169; 高句麗 新大王 5)에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이 [고구려(高句驪)를] 토벌하여 수백명을 죽이니, 백고(伯固)가 항복하여 현도(玄菟)에 예속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동이열전 -옥저

옥저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은 읍루(挹婁)· 부여(夫餘)와,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하여 있다. 그 지형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면적은] 사방 천리의 절반 쯤 된다. 

토질(土質)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五穀)이 잘 자라고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읍(邑)과 촌락에는 우두머리(장수,長帥)가 있다. 사람들의 성질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창을 잘 다루며 보전(步戰)을 잘한다. 언어(言語)·음식(飮食)·거처(居處)·의복(衣服)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그들은 장사지낼 적에는 큰 나무 곽(椁)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장(丈)이나 되며 한쪽끝 부분을 열어 놓아 문을 닫는다. 사람이 죽게 되면 시체는 우선 임시로 매장하여 가죽과 살을 모두 썩게 하고, 뒤에 뼈만 추려 곽(椁)속에 안치한다. 온 집식구의 유골을 모두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며,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목상(木像)을 새기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한다.

[한(漢)]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서 옥저(沃沮) 땅으로 현도군(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沃沮)를 현(縣)으로 고쳐 낙랑(樂浪)[군(郡)]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하였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에 이르러서는 도위(都尉)의 관직을 없앴다. 이후부터는 그들의 우두머리(거수,渠帥)를 봉(封)하여 옥저후(沃沮侯)로 삼았다. 

그 나라는 지역이 좁고 작은데다가 큰 나라의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지역의 대인(大人)을 뽑아 사자(使者)로 삼아서 읍락(邑落)을 [토착 거수渠帥와] 함께 다스리게 하였으며, 조세(租稅)로서 초포(貂布)· 어염(魚鹽) 및 여타 해산물을 징수하고, 미녀(美女)를 뽑아 그 종이나 첩(妾)으로 삼았다.

또 북옥저(北沃沮)가 있으니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南沃沮)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남옥저(南沃沮)와 같으며, 읍루(挹婁)의 남쪽 경계와 접해 있다. 

읍루(挹婁)사람들이 배를 타고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바위 굴 속에 숨어 살다가 겨울에 [얼음이 얼어서]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야 산을 내려와 읍락(邑落)에서 산다. 그 나라의 노인(老人)이 이야기하기를, 

“일찍이 바다 가운데에서 베옷을 한 벌 주웠는데, 그 모양은 마치 중(中)[국(國)]인(人)의 옷과 같고 두 소매의 길이는 3장(丈)이나 되었다.” 

하며, 또 이르기를,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부서진 배를 타고 오는 것을 보았는데, 이마 가운데에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말을 해 보았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한다.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바다 가운데에 여인국(女人國)이 있는데 남자는 하나도 없다.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로는 ‘그 나라에는 신정(神井)이 있는데 여자들이 그 신정을 엿보면 곧 자식을 낳는다’고 하였다.” 


동이열전 -예

예(濊)는 북쪽으로는 고구려(高句驪)· 옥저(沃沮)와,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옛] 조선(朝鮮)의 지역이다.

일찍이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는 [조선(朝鮮)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양잠하는 법을 가르쳤다. 또 팔조(八條)의 교(敎)를 제정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아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부인(婦人)들은 정절(貞節)을 지키며 음식은 변두(籩豆)를 사용하여 먹었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조선후(朝鮮侯) 준(準)에 이르러 스스로 왕(王)이라 칭하였다. 한초(漢初)의 대혼란기에 연(燕)·제(齊)·조(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준(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조선(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우거(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원삭(元朔) 원년(B.C.128)에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구(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 하였다. 원봉(元封) 3년(B.C.108)에 이르러서는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菟)·진번(眞番)의 사군(四郡)을 두었다. 소제(昭帝) 원시(始元) 5년(B.C.82)에는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현도는 다시 [고(高)]구려(句驪)로 옮겼으며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의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은 모두 낙랑에 예속되었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시 [대(大)]령(領)의 동쪽 7현(縣)을 떼어 낙랑군에 속한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예(濊)가 한(漢)에] 복속된 후부터 풍속이 점점 나빠짐에 따라, 법령도 점차 늘어나 60여조(條)나 되었다. [후한(後漢)] 건무(建武) 6년(B.C.30; 高句麗 大武神王 13)에 [동부(東部)]도위(都尉)의 관직을 폐지하고, [대(大)]령(領) 동쪽의 지역을 포기한 뒤, 그 지방의 우두머리(거수,渠帥)들을 봉해 현후(縣侯)로 삼으니, 세시(歲時)마다 모두 와서 조하(朝賀)하였다.

[예(濊)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그들의 관직으로는 후(侯)와 읍군(邑君)과 삼로(三老)가 있다. [예(濊)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건실하며 욕심이 적어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남녀 모두 곡령(曲領)을 입는다. 그 풍속은 산천(山川)을 중요시하여 산천마다 각 읍락(邑落)의 경계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동성(同姓)간에는 혼인하지 않는다. 꺼리고 금하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곧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마,麻)을 심고 누에를 기르며 길쌈을 할 줄 안다.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흉풍을 미리 안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神)으로 여겨 제사지낸다.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벌로 생구(生口)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책화(責禍)’라고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보전(步戰)에 능숙하며, 길이가 3장(丈)이나 되는 창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한다. 낙랑(樂浪)의 단궁(檀弓)이 그 지방에서 산출(産出)된다. 또한 무늬있는 표범이 있고 과하마(果下馬)가 있으며, 바다에는 반어(班魚)가 나는데 사절(使節)이 
올 적에 빠짐없이 헌상(獻上)한다.

동이열전 -한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국(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 남쪽은 왜(倭)와 접(接)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接)하여 있다. 변진(弁辰)은 진한(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倭)와 접(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 백제(伯濟)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萬餘戶), 작은 나라는 수천가(數千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한족(韓族)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王)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三韓) 지역의 왕(王)으로 군림하는데, [삼한(三韓)의] 제국왕(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큰 밤이 산출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는 5척(尺)이나 된다.

읍락(邑落)에 잡거(雜居)하며 역시 성곽(城郭)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 부분에 있다. 궤배(跪拜)할 줄을 알지 못하며, 장유(長幼)의 차례와 남녀(男女)의 분별 따위의 예가 없다.

금(金)· 보화· 비단· 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우(牛)·마(馬)를 탈 줄을 모르고, 오직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감(勇敢)하여 젊은이들 중 축실(築室)하는 데서 일하는 사람은 매번 밧줄로 등의 가죽을 꿰어 큰 나무를 매어 달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것을] 건장하다고 한다.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지어 노래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를 끝내고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국읍(國邑)에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재하는데[그 사람을]‘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소도(蘇塗)를 만들어 거기다가 큰 나무를 세우고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마한(馬韓)의] 남쪽 경계는 왜(倭)에 가까우므로 문신(文身)한 사람도 있다.

진한(辰韓)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秦)나라에서 망명(亡命)한 사람들로서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그들은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부르며, 궁(弓)은 고(孤)라 하고, 적(賊)은 구(寇)라 하며,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라 하여, 진(秦)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부른다.

성책(城栅)과 가옥(家屋)이 있다. 모든 작은 읍(邑)에는 각각 거수(渠帥)가 있으니, 강대한 자를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은 읍차(邑借)가 있다. 토질이 비옥하여 5곡이 잘 자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비단과 베를 짠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며 혼인은 예의에 맞게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은 길을 양보한다.

그 나라에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예(濊)·왜(倭)·마한(馬韓)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모든 무역에 있어서 철(鐵)을 화폐로 사용한다.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고 비파뜯기를 좋아한다.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납작하게 되도록 하려고 모두 돌로 눌러 놓는다.

변진(弁辰) 사람들은 진한(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진한(辰韓)과]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변진(弁辰)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고 형법은 엄격하다. 변진은 왜국(倭國)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문신(文身)한 사람이 상당히 있다.

과거에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準)의 후손(後孫)이 절멸(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自立)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

건무(建武) 20년(A.D.44; 百濟 多婁王 17) 에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소마시(蘇馬諟)를 봉(封)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朝謁)하도록 하였다. 영제(靈帝)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모두 강성해져 [한(漢)나라의] 군현(郡縣)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한(韓)으로 도망하여 유입(流入)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한의 서쪽 바다의 섬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고 머리를 깎으며, 가죽 옷을 입는데 상의(上衣)만 입고 하의(下衣)는 입지 않는다.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한(韓)의 국중(國中)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동이열전 -왜

왜(倭)는 한(韓)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고, [이들은]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무릇 100여 나라[國]이다.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킨 후에 사역(使驛)을 이용하여 한(漢)과 통한 것이 30여 개 나라[國]이다. [이] 나라들의 [수장(首長)]은 모두 왕(王)을 칭하였는데, 대대로 왕통(王統)이 이어졌다. 그 대왜왕(大倭王)은 야마대국(邪馬臺國)에 있다. 낙랑군(樂浪郡)의 변경에서 그 나라는 만 2천 리 떨어져 있고, 그 나라의 서북방에 있는 구야한국(拘邪韓國)에서는 7천여 리 떨어져 있다. 그 땅은 대략 회계[군](會稽) 동야[현](東冶縣)의 동쪽에 있고, 주애[군](朱崖郡) 및 담이[군](儋耳郡)과 서로 가깝다. 따라서 그들의 법속(法俗)은 같은 것이 많다.

땅은 벼, 모시[麻紵] 그리고 양잠에 적합하며 [왜인들은] 천을 짜는 법과 실 잣는 법을 알아서 좋은 비단[縑]과 베를 만들었으며, 백주(白珠)와 푸른 옥이 산출되고 산에는 붉은 흙[丹土]이 난다. 기후가 온난하여 겨울과 여름에 채소[菜茹]가 생산된다. [그러나] 소, 말, 호랑이, 표범, 양 그리고 까치는 없다. 무기로는 창, 방패, 나무로 된 활, 대나무로 된 화살이 있고, 뼈로 화살촉[鏃]을 만들기도 한다. 

남자는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文身)을 하는데, 왼쪽과 오른쪽, 크고 작음에 따라서 존비(尊卑)의 차이를 구별한다. 그들 남자의 옷은 모두 가로의 폭이 넓은 천을 묶어서 서로 이었다. 여인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거나 말아서 뒤로 묶었는데, 옷은 홑이불과 같고 머리를 넣어서 입는다. 붉은 가루를 몸에 바르는데, 중국에서 분(粉)을 쓰는 것과 같다. [이 나라에는] 성책(城柵)과 옥실(屋室)이 있다. 부모와 형제는 거처하는 곳을 달리 하지만, 단 한 곳에 모일 때에는 남녀의 차별은 없다. 마시고 먹을 때 맨손으로 하지만, [음식을 담는 것은] 대나무와 나무로 만든 그릇을 이용한다. 풍속은 모두 맨발로 다니고, 양 무릎은 꿇고 허리를 낮추는 것[蹲踞]으로 공경을 나타낸다. [이]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술을 즐긴다. 대부분이 장수(壽考)하여, 1백여 세가 된 자도 대단히 많다. [이] 나라에는 여자가 많아서, 대인(大人)은 모두 4~5명의 처를 두고 있고, 그 나머지 남자들도 [처를] 2명 혹은 3명 두고 있다. [그러나] 여인들은 간음(姦淫)을 하지 않고 투기(妬忌)도 하지 않는다. 또 풍속이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다투고 소송(訴訟)하는 일이 적다. 범법자는 그 처와 자식들을 몰수하고, [좌가] 무거운 자는 그 가문의 사람들이나 일족을 족멸(族滅)한다. 사람이 죽으면 10여 일 동안 매장하지 않고, 그 집안사람[家人]들은 곡을 하며 울고, [죽은 사람에게] 술과 음식을 바치지 않으며, [그들의] ‘등류(等類)’는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논다. 뼈를 불로 지져서 점복(占卜)을 치는데, 그것으로써 길흉(吉凶)을 결정한다.

사행[行]이 바다를 건너서 [중국으로] 올 때에는 한 사람에게 머리를 빗거나 목욕하지 못하도록 하고, 고기[肉]를 먹거나 여자와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를] ‘지최(持衰)’라고 하였다. 만약 [여행] 도중에 좋은 일과 이로운 일이 있으면, 재물을 가지고 그에게 보답한다. 만약 질병이 생기거나 재해를 만나면, 지최(持衰)가 삼가하지 않았다고 여겨서 곧 함께 그를 죽였다.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57)에 왜(倭)의 노국(奴國)이 공물(貢物)을 바치고 조하(朝賀)하였는데, 사인(使人)은 대부(大夫)를 자칭하였다. [노국은] 왜국(倭國)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이다. 광무제는 [노국(奴國) 사자에게] 인수(印綬)를 하사하였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원년(107)에 왜(倭)의 국왕(國王) 수승(帥升) 등이 생구(生口) 160인을 바치고 황제에게 알현하기를 원하였다.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치세에 왜국(倭國)에서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서로 공격하고 치니 오랫동안 군주(君主)가 없었다. 이름이 비미호(卑彌呼)라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었지만 시집을 가지 않고 귀신의 도[鬼神道]를 섬기면서 괴이한 술수[妖]로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그녀를] 공동으로 세워[共立] 왕으로 삼았다. [그녀의] 시비(侍婢)는 천여 인이었지만, [그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적었다. 단, [그녀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한 남자가 있어서 [그녀의] 말을 전하였다. [그녀의] 거처(居處)인 궁실(宮室), 누관(樓觀)69) 그리고 성책(城柵)을 [병사들이] 병기(兵器)를 가지고 수위(守衛)하였다. 법속(法俗)이 엄준(嚴峻)하였다.

여왕국(女王國)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나아가면 구노국(拘奴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의 사람들은) 비록 모두 왜종(倭種)이지만, 여왕에게 신속(臣屬)되지 않았다. 여왕국에서 남쪽으로 4천여 리를 가면 주유국(朱儒國)에 이르는데, [이 나라] 사람들의 키는 3~4척(尺)이다. 주유[국]에서 동남쪽으로 배를 타고 1년을 가면 나국(裸國)과 흑치국(黑齒國)에 이르는데, 사역(使驛)이 전하는 곳은 여기에서 끝이 난다.

회계(會稽)의 바다 바깥에 동제인(東鯷人)이 있는데, [이들은] 나뉘어져서 20여 나라를 이루었다. 또 이주(夷洲) 및 단주(澶洲)가 있다. 전해 내려온 말에 “진시황(秦始皇)이 방사(方士) 서복(徐福)을 시켜서 남녀 아이들[童]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서 봉래(蓬萊)의 신선(神仙)을 찾게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서복은 [뜻을 이루지 못한 죄를 물어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이 주(洲)들에 머무르게 되었으며, 그들은 대대로 이어져서 수만 가(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인민이 때로는 회계(會稽)에 와서 교역하기도 하였다. 회계 동야현(東冶縣) 사람 중에 바다에 들어가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단주(澶洲)에 도착한 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있는 곳이 대단히 멀어서, 왕래할 수가 없다


동이열전 -논찬

논(論)한다.

옛날 기자(箕子)가 쇠망하는 은(殷)나라의 운수를 피하여 조선(朝鮮) 땅에 피난하였다. 처음엔 그 나라의 풍속이 알려진 바 없었으나, 팔조(八條)의 법(法)을 시행하여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게 하니, 마침내 그 읍락(邑落)에 음란한 행동과 도둑이 없어져서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악하고 나쁜 풍습을 바꾸고 너그럽고 간략한 법을 이루어 수백년 동안 행하여졌다.

그러므로 동이(東夷)의 전체가 유근(柔謹)으로 풍화(風化)되어 삼방(三方)의 풍속과는 다르게 되었으니, 진실로 정교(政敎)가 창달되면 도의(道義)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중니(仲尼)가 분연히 구이(九夷)에 가서 살으려 하였더니 어떤 이가 그곳은 더러운 곳이 아닌가 하므로, 공자(孔子)가 ‘군자(君子)가 살고 있으니 어찌 그곳이 더럽겠는가’ 한 것도 특히 그런 까닭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 뒤 드디어 [중국과] 통상을 하게 되고 점차 상국(上國)과 교역하더니,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그들의 풍속을 어지럽히자, 이에 [그들도] 따라서 나빠지게 되었다. 노자(老子)는 ‘법령(法令)이 불어날수록 도적이 많아진다’고 하였다. 기자(箕子)가 법조문을 간략하게 하고 신의(信義)로 다스린 따위는 성현(聖賢)의 법(法)을 만든 근본취지를 얻었다 하겠다.

찬(贊)한다.

우이(嵎夷)에 살게 하니 곧 양곡(暘谷)이라 한다. 산(山)과 바다에 사는 것을 아홉 종족으로 구분지었다. 진(秦)나라 말년에 정치가 혼란해지자 연(燕)나라 사람들이 [이 땅에] 피난하여, 중국의 풍속을 어지럽히고 [동이(東夷)의] 풍속까지 나빠지게 하더니, 드디어 한(漢)나라와 통하게 되었다. 아득하고 멀리서 통역하자니 복속도 하고 배반도 하는구나. 

출처: http://rexhistoria.net/index.php?mid=history_LaterHan&page=2&document_srl=70977
작성자 :코렐솔라 님 (원본글 출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동북아 역사재단)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동북아 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http://contents.nahf.or.kr/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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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위하늘 15-03-23 16:53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실제 내용은 처음  보내요.
일부 내용은 국사책에서 보았던 것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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