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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13 20:13
[기타] 비미호(히미코)여왕과 임나일본부에 대한 잡상
 글쓴이 : 꼬마러브
조회 : 6,851  

임나.png

임나의 위치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

1. 경상남도 설(현 강단사학계 통설)

2. 대마도설

3. 북규슈설

4. 히로시마,오카야마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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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선비동이전 왜전 -中-

본래 그 나라는 남자가 왕이 되어 7~80년을 지낸 뒤에 왜국에 난이 일어나 여러 해 동안 서로 공벌하니 이에 함께 여자 한명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녀의 이름은 비미호(卑彌呼)라 하는데, 귀도를 행하여 뭇 사람들을 능히 미혹하고 나이가 이미 많으나 남편은 없고 남동생이 있어 치국을 보좌하였다. 왕이 된 이래로 그녀를 본 사람이 적었고 여자종 천명에게 시중들게 하며 오직 남자 한 명이 있어 음식을 공급하고 (비미호의) 말을 전하면서 출입하였다. 거처하는 궁실에는 누관(누각), 성책을 엄히 설치하였고 늘 병기를 지니고 수위하는 자가 있었다


위 기록에 따르면 원래 왜국은 남자가 다스리는 나라였는데 큰 난이 일어나 서로 싸우다 비미호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당시 여러 소국들로 나뉘어져 있었던 고대 일본열도를 비미호라는 여자가 통일을 한 것이죠. 비미호는 일본 최초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어로는 히미코라고 합니다. 비미호에 관환 기록은 동이전 뿐만 아니라 우리측 기록인 삼국사기에도 나타납니다.

삼국사기 -中-

20년(서기 173) 여름 5월,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使


위는 아달라이사금 20년조의 기록으로 비미호여왕이 중국측 기록 뿐만 아니라 우리측 기록에도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이상한 점은 정작 일본측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는 비미호라는 왕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아마 비미호가 일본왕의 조상이 아니였기 떄문인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일왕이 고대부터 만세일계로 쭉 이어져 왔다는 일본인들의 의식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 자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욱 더 이상한 점은 위지동이전 한(韓)조에 나옵니다.

오환선비동이전 한(韓)조 中


馬韓의 諸國으로는]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占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등 모두 5십여國이 있다. 큰 나라는 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數千家로서 總 10餘萬戶이다.


위에 굵게 칠한 부분이 문제가 되는 부분입니다. 마한의 소국들 중에서는 비미국(彌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기한 점은 비미호의 비미(彌)와 비미국의 비미(彌)가 서로 음과 뜻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왜그럴까요? 당시에는 여성들에 대해 기록할 때 그 여성의 성씨나 가문 혹은 태어난 나라의 이름으로 기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웅녀가 있겠네요.

즉 추론하자면 마한의 여러 소국들 중 하나였던 비미국이 정치적 변동(아마 백제의 침략이 주된 원인이라 생각함)으로 인하여 일본열도로 이주하였고 이주한 도래인 출신들 중 하나가 바로 비미호(히미코)여왕이라는 것이죠. 이는 일본열도 분국설의 근거가 됩니다..

일본열도 분국설이라... 다음 임나 일본부로 넘어가겠습니다.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왜가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 등과 전쟁을 하거나 사신이 오갔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임나는 가야라는 것이 현 강단사학계 통설.. 즉 고대에 왜는 한반도에 진출하여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과 전쟁이나 사신교류 등의 접촉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특히 임나에는 왜의 관리가 파견된 기록이 보이므로 왜가 가야를 지배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임나일본부설은 60년대에 북한의 김형석부터 시작해서 쭉 제기되어 왔습니다. 특히 김형석은 고대조일관계사를 발표해 일본서기에 왜와 전쟁을 했거나 사신 왕래를 했다고 기록된 부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는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에 있었던 나라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반도에 있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사람들이 왜(倭)열도로 이주하여 그곳에 나라를 세우고 자신들의 조국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일본서기의 내용 대부분은 왜와 이들의 관계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였습니다. 
이 나라들은 일본열도에 세워진 우리민족의 분국으로써 고대에 우리가 오히려 일본열도를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김형석 이후 남한 학계에서는 일본서기는 원래 백제의 역사인데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로 변조한 것으로서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에 설치했던 기구였다는 주장이 있었는가 하면 임나일본부가 대마도, 북규슈에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부 일본학자들은 슬그머니 그들의 원래 주장(임나일본부는 왜가 가야를 지배했던 기구)을 변형하여 임나일본부는 왜가 가야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가 아니라 가야와 통상을 하거나 외교통로로 이용하기 위해 가야에 설치해 놓은 기구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 주장은 우리 학자들 가운데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만 그 성격을 달리 규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정작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사용되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임나와 가야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한반도에 있었던 가야가 멸망한 뒤까지도 왜는 계속 임나와 교류를 가지었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한반도의 가야는 서기 56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는데 일본서기에는 그 후 서기646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임나와 사신 왕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는 임나의 북쪽에 바다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야가 있었던 경상남도 북쪽에는 바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임나와 가야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이죠. 애초에 아직 나라도 제대로 못세우고 제대로된 철기도 없던 놈들이 바다를 건너 우수한 철기를 사용하고 있던 한반도남부를 지배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임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바로 일본열도에 있었습니다. 일본열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계 지명들과 신찬성씨록에 써진 일본 명문가 가운데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 출신이 많다는 점이 근거가 됩니다. 또한 일본열도에서 발견되는 한반도 남부와 같은계통의 고고학적 유물도 근거가 됩니다.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출토된 무문토기

수혜기라 불리는 이 질그릇은 서기 5세기 초반에 속하는 것으로써 가야의 질그릇으로부터 일본의 특징을 지닌 질그릇으로 변화되어 가는 초기의 것인데 아직도 가야 질그릇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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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신조 15-03-13 21:50
   
설득력이 있네요...근데 한가지 궁금한점이 광개토대왕비문에

(영락)1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로,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했다, 신라의 농성을 공략하니 왜구는 위축되어 궤멸됐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만보면 한반도 땅끝에 임나가라의 종발성이 있는것처럼 보이는데...
님의 주자에 따르면 그 당시 고구려군이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까지 갔다는 얘긴데 어떻게봐야할까요.
     
디노 15-03-13 22:22
   
종발성이 성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죠. '종(뒤쫓아) 발성(성을 빼앗다)라는 주장입니다.
뒤에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였다...라는 글과 자연스럽게 연결 되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수만 명의 왜군이 고구려군을 보자마자 전투도 하지 않고 경주에서 임나가라까지 도망간 점이 이상한 일이죠...
광개토대왕비문에는 당시의 기록을 "왜인 만기국경이라고 했죠." 왜군이나 왜적이 아닌 왜인 만기국경 즉, 일반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누구나면
백제 아신왕 8년조에 백성들이 전쟁과 기근을 피해 인구가 쇠감할 정도로 대거 신라도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인구가 쇠감할 정도면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신라로 갔다는 것인데,
훗날 가야가 신라로 병합된 뒤에 기록되어진 것이라 신라로 갔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는 가야로 가서 일본으로 건너가던 백성들이었어요...
이 시기 일본서기 응신기에는 백제 궁월군이 120현민을 데리고 이주해 왔다고 되어 있어요...
1현에 천명씩이라 잡아도 대략 12만 명의 인원이니 기록들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죠...

그리고 이후의 백제를 가리켜 광개토대왕 비문은 백잔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백제를 멸시해서 백잔이라고 한다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해 신민이 되었는데, 멸시하는 언어를 사용해 기록에 남길  이유가 없어요.
잔은 나머지라는 뜻입니다.
일본으로 대거 건너가고 남은 나머지 백제라는 뜻이죠...

임라가라는 대가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광개토대왕비문, 삼국사기, 송서 등에는 임라가라 혹으 임나가량이라고 나오고
일본 기록에만 임나와 가라를 따로 떼서 사용하고 있지요.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자신은 본래 임나가량 사람으로 이름이 우두라고
말하고 있는데, 일본의 기록에도 임나가 소나갈질지를 사신으로 보냈다는 등
임나는 소와 관련이 많습니다. 대가야는 우두천왕으로도 유명하죠.
왜놈들의 주장처럼 일본부 이런 것은 아니고요...
디노 15-03-13 23:01
   
신공과 히미코는 별개의 인물입니다.
신공과 히미코, 열여 사이에는 150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일본서기 기록자들이 신공과 히미코 혹은 일여와 같은 인물인것처럼 몰아가려 했죠.

더우기 그가 일본을 통일한 왕이라는 것은 터무니 없는 말입니다.
위지왜인전 첫머리에 "왜에 있느 30국이 중국을 왕래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30여개국이 중국을 왕래하고 있으니 당연히 통일국가는 아니죠.
그리고 히미코를 가리켜 왜왕이라 칭하고는 있지만 그에 관한 행적은 주로 왜의 공물과 그에 대한 중국의 회사품에 관한 기록들입니다.
즉 교역을 위주로 한 기록들이라이라는 겁니다.
비미호 이후에 중국과의 교역이 중단되는 것을 보면 비미호를 중심으로 교역을 해나가던 연합체가 분열된 것을 알수 있죠.
비미호는 대외 교역관계를 위해 세워진 인물입니다.

일본서기가 기록되어질 당시 일본은 신라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는데,
응신왕의 생모인 신공이 신라 호족의 딸이라는 반감을 없애기 위해 히미코와 일체시키고, 신라를 공격하고 삼한을 정벌했다는 내용을 집어 넣은 것으로 추증됩니다.
     
꼬마러브 15-03-13 23:14
   
님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신공왕후가 실제인물이였는지는 확신이 서질 않네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14대 왕인 주우아이가 죽었다는 200년대부터 15대 왕인 오오진이 즉위할 때까지 장장 70여년에 달하는 공백기간을 신공왕후가 섭정을 하며 채우고 있습니다..즉 신공왕후는 동이전에 등장하는 왜 여왕 비미호라는 존재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조한 가공의 인물로 보는 것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일본 학자들 역시 야마토왕국의 시작을 15대왕이라고 하는 호무다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디노 15-03-13 23:45
   
신공기 초기의 연도를 조작한 건 역사 공백을 메우고 백제에 정벌당한 기록을 지우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조작을 하려면 응신을 해야지 왜 굳이 그의 어머니를 가공의 인물로 만들겠습니까?
일본의 초기 왕들은 역사를 길게하려고 가공으로 만들었지만 응신의 생모이고, 중애왕의 부인인 신공은 가공으로 만들 이유가 없어요. 더구나 신라 호족의 딸을 왜 가공으로 만들겠어요.
야마토왕국의 시작은 16대 인덕왕부터 제대로된 시작이에요...
호무다도 응신이 아니라 실제는 인덕왕의 이름이에요. 인덕은 대초료라고 나와있지만
백제의 왕자였던 인덕이 호무다에요...
왕인이 건너가서 일본의 행적을 보면 응신과 관련된 건 없고, 거의 대부분 인덕과 관련되어 있어요. 인덕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기록도 있고,
그의 사후에 무덤도 인덕의 궁 뒤쪽에 마련될 정도였지요...
인덕이 백제왕자이며, 태양의 자손이라는 호무다입니다.
피라미드보다 크다는 거대한 무덤 전방후원분의 주인이지요...
아직도 15-03-16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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