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해군의 함대가 한강의 수심을 측정하면서 강화도와 본토 사이의 수로인 손돌목에 접근하여 오자, 강화도의 조선군이 경고 포격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남북전쟁 참전자인 당시 함장들 중 한 사람이 남북전쟁 때도 이렇게 맹렬한 포화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치열한 화망사격으로, 공식 역사는 이 사건을 손돌목 포격사건이라고 부른다. 400문에 달하는 양측 화포가 불을 뿜었으나, 피해는 미군 부상 1, 조선군 전사 1명에 불과했다. 서로 그냥 맹목적으로 쏴댄 후 미군이 먼저 물러난 것으로 결말지어졌기 때문이다.[5]
참전했던 미 해병대 대위의 편지에는 "그들의 포는 매우 조잡하오. 통나무로 된 포가 얹혀 밧줄로 묶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미리 정해진 지점 외로는 사격을 할 수 없다고 하오. 그래서 우리 배들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에야 포격을 했소. 커다란 포환이 날아왔는데 배에는 전혀 맞지도 않았소. 단지 총통이라고 불리우는 소형화기에서 발사된 조잡한 탄환 두어 개가 적중했다고 하오. 그 총통이라는 것은 두 명이 어깨에 걸쳐메고 화승으로 발사하는 것이라고 하오. 단지 세 명의 우리 병사가 맞았는데 가벼운 부상이라고 하오. 최신의 무기로 무장한 우리들에게 그들이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 수 있을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미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미군 기함 콜로라도호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군 함선에 승선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으며, 미군이 제너럴셔먼호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지자 살해되었다고 대답하였다. 미국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광성보 전투에서 보복을 가하기로 결심하였다.
6월 10일 아침, 대구경 포로 강화된 모노카시와 팔로스가 접근해 포격을 퍼부어 초지진의 화포들을 무력화시키는 동안, 미군 상륙부대는 22척의 보트와 기정을 타고 강화도 해안에 상륙해. 651명의 수병과 해병에 7문의 12파운드까지 포함된 대규모의 상륙군이었지.
포격 지원 때문에 조선군은 상륙중인 미군을 견제할 수 없었지만 뻘밭 때문에 미군은 죽을고생을 했다고 해. 특히나 무거운 포를 상륙시키느라 신발과 양말과 바지가 진흙덩이가 되었다고 함. 프랑스와 다르게 용의주도한 군사행동이었고 상륙시킨 이 포들은 전투 내내 큰 역할을 하게 돼.
초지진을 지키던 초지첨사 이렴은 일단 초지진을 버리고 퇴각해.
덕분에 빈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이를 해병대 보루라고 명명하고 숙영지를 설치해. 강화성을 점령하고 강화도를 다 차지한 정복자라도 된 양 노략질을 했던 프랑스군과 달리, 미군은 초지진에 배치된 조선군의 소형 포들은 바다로 던져 버리고(몇 년 전에 뻘밭에 붙혀있던 총통이 발견됐지), 무거워서 그게 불가능한 대형포들은 점화구에 못을 박아 사용하지 못하게 해. 그리고 노획 물자들을 소각처리하고 초지진을 조선군이 다시 점령하더라도 사용하지 못하게 일정부분 파괴했다고도 해.
미군은 명확한 작전목표를 가지고 행동했어. 강화도를 점령해 조선정부를 압박하겠다는 허황된 생각(은 프랑스군이 했던 생각)은 하지 않고, 처음 통고대로 해협에 위치한 3개 포대, 즉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의 점령과 파괴만을 타겟으로 효율적으로 행동하지. 해안을 따라 포함들이 이동하면서 포격으로 엄호하고, 상륙시킨 야포들을 고지대에 배치하여 조선군의 기습을 차단해. 실제로 병인양요때 기습을 통해 승리했던 조선군은 단 한번도 기습을 성공시키지 못해.
조선은 병력을 집중하기 위해 중간에 놓인 요새인 덕진진을 포기해. 6월 11일 덕진진을 점거한 미군은 초지진에서 처럼 조선군의 화기와 군수물자들을 파기하고 이를 포트 모노카시라고 명명하고 광성보 제압을 위해 진군해.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조선군은 무작정 요새를 지킨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요새 밖으로 나와 진격중인 미군을 기습공격했다고 해. 특히 광성보에는 어영청 소속의 정예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과 소수의 기병들로 행군중인 미군의 측면을 공격했으며, 상당수의 병력을 길 주변에 매복시켜 기습공격을 시도해. 하지만 고지대를 제압한 미군에 의해 의도를 파악당하고 분쇄당하게 되지. 기습이 실패하는 바람에 광성보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조선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 심지어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대부분 요새 밖에서 발생했다는 말도 있는데 난 그 정도는 아닐거라 생각중.
어쨌든 광성보에 도착한 미군은 무작정 공격하는 대신 포위망을 구성해. 진격중인 미국에 대한 기습공격이 실패해 병력을 많이 잃고 요새에 틀어박힌 조선군은 200~300명 가량으로 추정돼. 그에 비해 포위망을 구성중인 미군 지상군+포격으로 지원중인 함대를 포함하면 거의 1천명에 가까운 미군을 상대해야 했던거지(이건 생각도 못했는데 미국 입장에서 그렇게 봤더라).
전근대적 군대가 근대 군대를 상대할 때 유일하게 우위에 설 수 있는건 숫자야. 보통 제국주의 열강 상대로 자기 땅에서 싸우니까 뽑자마자 산지직송으로 보낼 수 있어서 그런것도 있고 전근대 국가에서 알보병은 거의 돈이 들지 않으니까. 문수산성 전투는 조선군이 꽤 큰 피해를 입히고 선전했지만 결국 화력에 밀려 후퇴했고, 정족산성 전투는 조선군 숫자가 거의 3배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지. 그런데 미국은 빠른 공격(지금 상륙한지 이틀째)과 정확한 거점타격, 철저한 포위로 그 가능성을 막아버린거지.
USS 모노카시
상륙군이 운용한 12파운드 곡사포,
산 위나 고지에 배치해서, 조선군의 기습을 차단하고, 광성보를 포격해 미군의 진격을 돕기도 합니다.
해안까지 접근한 USS 모노카시와 고지에 배치된 7문의 12파운드포의 십자포화가 광성보에 쏟아지기 시작하고, 요새의 서쪽과 남쪽을 포위한 상륙부대가 소총사격을 가하며 접근해. 광성보는 해협을 지키기 위한 해안포대이기 때문에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서쪽과 남쪽을 막으면 육지와 완전히 격리되는 위치야. 당시 미군 병사의 수기에 따르면 근대 전쟁의 개념이 없던 조선군은 엄폐를 할 줄 몰랐다고 해. 전근대 머스켓은 엄폐를 하기보다 밀집해서 정확하게 장전해서 많이 쏘는게 중요했으니까. 훨씬 정확한 최신식 소총의 탄막을 그냥 몸으로 떼우면서 싸웠던거지. 그리고 제압사격이 충분히 이루어 졌다고 생각한 미군은, 돌격을 시작해.
휴 맥키 중위의 중대를 선봉으로 미군이 돌격하자 조선군의 반격이 있었으나 화승총이 장전되기 전에 미군이 광성보 외벽에 도달했고, 비탈진 벽을 기어오르는 미군과 이를 막기 위한 조선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 돼. 손쉽게 장전할 수 있는 롤링블럭식 소총의 근거리 화력을 장전할 틈도 없이 돌과 흙을 던지며 저항했다는 조선군이 이길 수 있을리가 없지. 총은 사격무기이기 때문에 근접무기인 칼이나 창이 일단 붙기만 하면 유리할 것 같지만, 그건 일본만화에서나 그렇고 장전이 간편한 근대식 소총이 근접전에서도 압도적으로 유리해.
미군은 총검술을 가르칠 때 '백병전에서는 총알 가진 놈이 이긴다'고 가르친다고 할 정도야. 미군은 삽시간에 성벽을 넘고 요새 안으로 진격해. 이때 선봉에 섰던 맥키 중위는 아군이 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저돌적으로 돌격했고, 처음으로 요새 안으로 뛰어 든 모양인데, 다리에 총상을 입은 상태로 옆구리를 조선군에 찔려서 전사했다고 해.
(맥키대위는 약혼녀가 바람났다는 편지를 읽고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다 죽음을 당합니다)
격렬한 전투는 모든 조선군이 전사하거나, 바다에 뛰어들거나, 부상을 입은 순간 조선군의 완패로 끝났어. 불과 15분만에 끝났지. 이 때 수습된 조선군 부상병은 20여명으로 알고 있는데, 미군이 철수할 때 석방한 포로의 숫자는 9명라고도 하고 14명이라고도 해. 아마 나머지는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어 치료 중 사망했던 것으로 생각돼.
광성보 전투의 지휘관인 어재연과 휘하 장병들이 이름을 남긴 일심선(一心扇)
(이미 적의 무기와 병력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다들 죽음을 각오하고 남긴 부채라 합니다)
광성보 전투의 의의는, 조선군이 도망치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사냥당하던 짐승처럼 도살된 전투가 아니라는 점이야. 미 해사 박물관에는 신미양요의 노획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 부채가 하나 있어. 이 부채에는 지휘관인 진무중군 어재연 이하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고 해. 이는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이 자신들의 최후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의지로 목숨을 바쳐 싸웠다는 증거야. 무기체계와 전술의 차이에 병력 숫자까지 부족해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기는 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항복하지 않았어.
(243명 사망, 100명은 강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스스로 찔러 xx, 포로 20명)
이게 국사 교과서에 '어재연의 분전'이라고 여섯자로 나오는 광성보 전투의 전말이야.
미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목표지점(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을 모두 점령하고 파괴하긴 했지만 상황은 그리 긍정적으로 돌아가지 않았어. 광성보 전투에 참가한 미군 상륙부대는 극심한 전투 피로에 시달린 것 같아. 승리에서 오는 쾌감보다, 악착같이 저항하던 조선군이 남긴 잔상이 부담과 공포로 다가온거지. 게다가 습기 찬 여름에 강행군과 전투를 반복하여 육체적인 피로도 겹쳤기 때문에, 결국 상륙부대는 광성보의 노획물자들을 파기한 후 첫 상륙지에서 가까운 초지진으로 후퇴해 거기서 밤을 보내게 돼.
미군이 초지진으로 퇴각한 날 밤, 원래 초지진을 수비하다가 퇴각했던 초지첨사 이렴의 병력이 미군 숙영지를 야습해. 야습은 실패로 끝나고 조선군은 다소 피해를 입고 퇴각하긴 했지만, 광성보 수비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겁 없이 야습을 감행하는 조선군의 강력한 의지에 미군의 멘탈은 한계에 도달해. 잘못하면 프랑스군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는거지.
내가 열강의 전근대국가 공격을 'XX대 수시'로 예로 든건, 성공하면 당연한거고 실패하면 답도 없다는 뜻으로 쓴 표현이야. 압도적인 근대 장비로 무장한 미군이 전근대 군대를 이기는건 당연한거고, 지면 개망신이지. 특히 원정군 입장에선 100번 이기다가 한번 크게 지면 끝이야. 결국 '서울까지 진격해서 야만인들에게 교훈을 알려줘라'던 로저스 제독의 호언장담은 '무력을 통한 임무수행은 어려워보인다'는 본국에의 보고서로 변하게 돼.
다음 날 미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하고 함대로 돌아가지만, 계속해서 조선측과 교섭하려 노력해. 하지만 프랑스가 그랬듯 괜히 건드려서 조선만 빡치게 만들어 놓은 마당에 교섭이 될 리가 없지. 교섭을 포기한 미 함대가 귀환하면서, 신미양요는 끝나게 돼.
여담으로 당시 미국이 포로 송환을 조건으로 회담을 계속 요구하자, 조선측은 '포로 필요없다'고 강경하게 맞섰다고 하지만 정작 포로가 풀려나자 구휼을 베풀면서 맞이했다고 해.
민주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승리로 대서특필하긴 하지만 '전투에서 이겼으나 전쟁에서 졌다. 대체 이 전투에서 미국이 얻은 것이 무엇이냐!' 는 역공또한 받지. '흑선효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성공적이었던 페리 제독의 일본 개항에 기반한 포함외교에 대한 반성론도 나오고... 150년 전에 의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으니 솔직히 대단한것 같다. 당시 적절한 논평 한 줄이 미국 정계 반응을 잘 보여주는것 같아.
"평화를 전하기엔 너무 크고,
전쟁을 이기기에는 너무 작은 군대를 파견했다"
어쨌든 개욕먹고 좌천된 프랑스의 경우와 달리 로저스 제독은 미해군 연구소장으로 영전되어 얼마 후 사망하고, 로우 공사는 나중에 주지사까지 출세했다고 하는데 동명이인이 많아서 확실하진 않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전사한 3명은 그 유명한 메달 오브 아너를 받음.
한편 대원군은 병인양요와 달리 압도적인 군사적 패배에 충격을 받고 조선군 사망자 규모를 53명으로 축소 발표해. 일련의 서양 오랑캐의 내습을 '난'이 아니라 '요'로 격하시킨 것도 그 일환이야. 외부 오랑캐에 의한 전란이 아니라 소요사태 정도로 치부하기로 한거지. 물론 이건 국내 안정을 위한 정신승리라고 해석할 수 있고, 대원군의 외세배격은 더 심해지지. 그리고 조선의 반미경향이 심해지는데, 덕분에 개항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서 영 재미를 보지 못해. 유력자들이나 외교관들이 '신미년에 쳐들어온 나라'로 여기며 싫어했다고 하지.
듀버네이 교수의 논평은 서양인의 시각으로 신미양요를 보는 굉장히 귀중한 자료인데, 미국은 정말 시기적으로 운도 없었고, 무력으로 겁을 주면 조선이 문을 열 거라고 성급하게 생각했다고 평가하고 있어.
또한 광성보 전투를 미국의 알라모 전투와 비교하기도 해. 알라모는 텍사스 공화국이 아직 독립국가이던 시절에 약 200명의 텍사스 민병대가 1800명의 멕시코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전멸한 사건으로, 미국의 텍사스 개입의 시작점이 되는 사건이야. 하지만 알라모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이 나오고 심지어 아동극 소재가 되기도 하는데 비해 광성보 전투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지.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훌륭하게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을 다시는 볼수없을 것이다."
- 슐레이 대령
"남북전쟁 때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 블레이크 중령
"조선군은 창,칼로 우리에게 끝까지 대항했다.
그것마저 없는 자들은 우리에게 흙을 뿌렸다.
비록 우리가 이긴 전투지만 이것을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전투는 미해군 역사상 최초의 실패이다."
- 종군수기
한 운요호는 조선 동해안으로 북상, 영흥만(永興灣)까지 순항하면서 무력적 시위를 벌였다. 남해안과 동해안을 탐측, 시위한 뒤 운요호는 1875년 9월 20일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하였다.
이노우에 이하 수십 명의 해병은 담수(淡水) 보급의 명목으로 보트에 분승, 해로를 탐측하면서 초지진(草芝鎭)으로 침입하였다.
강화해협(鹽江 또는 京江)을 방어하던 조선수비병은 정당방위로 침입해오는 일본의 보트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노우에는 모함인 운요호로 철수하며, 초지진에 맹렬한 보복포격을 가하였다.
오후에는 제물포 대안의 영종진(永宗鎭)에 보복공격을 단행하였다. 일본군 수병 22명이 영종도에 상륙작전을 펼쳐 일대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화력이 약한 노후한 병기를 가진 조선수비병은 근대식 대포와 소총을 휴대한 일본을 대적할 수 없었다.
결국 첨사 이민덕(李敏德)이 이끄는 400∼500명의 조선수비병은 패주·분산하고 말았다. 전투에서 일본 측은 경상자 2명뿐이었다. 일본군은 조선대포 36문, 화승총 130여 자루 등을 약탈하고, 영종진에 대한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한 뒤 철수하였다.
좋은 자료 올려주셨네요...
미국은 신미양요를 일으키기 전에 프랑스에 공문을 보내 함께 조선을 치자고 제의하죠...
하지만 이미 쓴 맛을 본 프랑스가 거절해 혼자 참전하게 됩니다.
한데 미국의 군사편제를 곁눈으로 보고 배운 왜놈들이
신미양요 때 자신들도 참전하게 끼워달라고 깝죽댔지만 미국이 거절했죠.
신미양요는 미국이 남북전쟁 이후 해외에 나가 싸운 첫 전쟁이었고, 남북전쟁으로 달련된 실전경험과 선진무기 등으로 구식 무기를 지니고 있던 조선군으로선 벅찬 상대였죠...
미국이 전쟁 빌미로 내 건 제너럴셔먼호는 원래 미국 배가 아니고 잡다한 나라들이 엮여 있는 국제 해적선이었죠.
선주가 영국인이고, 선장만 미국인이었을 거에요. 선원들도 중국인과 필리핀인들이 대부분이었어요. 통상을 하러 왔다면서도 물품 명목을 보여달라고 하니 보여주지 않았는데, 이들은 아마도 왕릉을 도굴하러 온 국제도굴꾼들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베르트의 경우처럼 말이죠...
당시 청나라 외교가에 조선왕릉 안에 금은 보화가 가득하다는 소문이 파다해 도굴꾼들이 군침을 많이 삼키고 있던 때였거든요.
이들 미군의 길잡이 노릇을 한 인물이 프랑스 때와 마찬가지로 리델신부였죠.
당시 신부들 중에 믿음이 부족한 협잡군들도 많았어요.
그리고 그게 수병(Sailors as Infantry in the US Navy)은 맞긴 맞는데,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배에서 갑판, 기관, 화기 운용하는 수병이 아니고, 그런 요원들 빼고도,
상륙 임무에 써먹는 해군 보병(Naval Infantry, Landing Force, Landing party=육전대)이 존재했단 소리.
Up until the 1970s, competency as naval infantry—sailors performing as infantry, and sometimes providing land based artillery support—was an integral part of the Navy’s operations and mission.
1970년대까지 해군 보병(naval infantry=육전대=해군 보병)들은 해군의 작전 임무에 보병과 육상포대 활동으로써 중요한 지원을 했다.
Sailors performed as infantry a lot: at least 66 landings and operations ashore on distant stations during the 19th century; 136 instances in the Caribbean and Central America during the first three decades of the 20th century; numerous times on China Station and elsewhere. Using sailors as infantry ashore was what the Navy’s primarily did during the Seminole Wars and the War with Mexico. It was the Navy’s most valuable contribution during the Philippine Insurrection. Operations ranged from election security, pacification, peacekeeping, land convoy escort, protection of roads and railroads, occupation, and guard duty to large-scale major combat operations against regular Army forces.
Following the Naval Academy’s founding in 1845, infantry tactics were an integral part of the curriculum being required in both the First and Second Class years.9 The Bureau of Ordnance and Hydrography published a manual of exercises for small arms and field artillery in 1852 that was used at the Academy.10 Specialized landing party ordnance was developed.
Commander John Dahlgren’s 1850 model 12-pounder boat howitzer, which was capable of being rigged on a field carriage, “was considered the best boat gun of its day in the world.”11 Dahlgren later, while commanding the South Atlantic Blockading Squadron during the Civil War, ordered that boat artillery and sailor infantry be “landed occasionally for practice.”12
1845년 해군사관학교에서 보병전술은 필수교육과정이었고, 해군 보병은 1812년 전쟁, 세미뇰 전쟁, 멕시코 전쟁, 남북전쟁, 미-스페인 전쟁 등에서 꾸준히 운영되었고, 19세기 동안 66회의 상륙,
20세기엔 카리브해와 중앙아메리카에 136회, 중국 등에서도 여러 차례 활약.
Practical Drills and Training
On the waterfront, unlike earlier years when formal coordinated infantry training was rare, the Navy began to conduct landing drills and maneuver ashore. The North Atlantic Squadron conducted a large-scale landing at Key West in March 1874.
In this exercise involving 2,700 men, a naval brigade consisting of five battalions of sailors as infantry and one of artillery maneuvered ashore.14 Navy training and education reformer Rear Admiral Stephen B. Luce conducted the first ever “no notice” amphibious landing while temporarily commanding the North Atlantic Squadron during August 1884. A brigade consisting of two infantry battalions (one composed of sailors) artillery and supporting elements landed at Gardiner’s Island, New York.15
5개대대 1개 여단 2700명의 해군 보병(sailors as infantry=보병으로써의 수병 ) 훈련
"Each ship and squadron will have a permanently organized landing force composed of infantry and artillery….”
“ The section, consisting of one officer, two petty officers, and sixteen men, is the unit of organization. All sections are drilled both as infantry and artillery.”30
각 군함와 스쿼드론(대대?)들은 영구적으로 보병과 화포로 구성된 상륙부대(landing force)을 구성할 것.
In 1905 “Instructions for Infantry and Artillery, United States Navy” was superceded by “The Landing-Force and Small Arms Instructions.” This manual went through various editions before the US entered World War I.31 All editions required maintenance of permanent organized landing forces. By 1907, tactics to cope with street fighting and riots were included as a part of the instruction/manual alongside conventional operations.32 In1918 the Landing-Force Manual, United States Navy was promulgated. The 1918 edition was a major revision with much more information on tactics, conduct of fire, and field fortifications. This document, went through various editions until 1950 when it as superceded by the “Landing Party Manual”33
'상륙부대와 소형무기 지침'은 1905년 '보병과 포병에 관한 미 해군의 지침'으로 대체,1950년 상륙자(Landing Force) 메뉴얼로 계속 바뀌어감.
An Era of Sailors Performing As Infantry
Although ships’ landing parties were permanently organized, the Spanish-American War provided little opportunity for their employment. Subsequently the Philippine Insurrection (1899-1903) involved numerous instances of the use of bluejacket landing parties ashore. Historian Vernon Williams claims “the most important role played [by the Navy during the Philippines Insurrection] was that of conducting land operations.”34
필리핀 반란에서도 활약.
The Caribbean, Mexico, and Central America provided the backdrop for extensive use of bluejackets ashore in almost every conceivable type of infantry activity. In this region, there were at least 136 instances of individual groups of bluejackets operating ashore as infantry (from squad to brigade level) between 1901 and May 1929.35 Operations ranged from election security, pacification, peacekeeping, land convoy escort, protection of roads and railroads, occupation, and guard duty to large-scale major combat operations against regular Army forces. Ships landing parties or multiple landing parties organized into battalions, regiments, or brigades conducted almost all of this activity. Some of it—notably the “Bluejacket Expeditionary Battalion” sent to Nicaragua in 1928—was, however, conducted by units organized in the U.S. and then sent overseas.36
카리브해,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에서는 더욱 광범위한 범위의 활동을 함.
“Bluejacket Expeditionary Battalion” 블루자켓 원정 대대
The largest operation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20th century involved the occupation of Vera Cruz Mexico in 1914. A seaman brigade of some 2,500 bluejackets conducted the landing and infantry assault alongside a 1,300 man marine brigade.37 Vera Cruz highlighted two problems associated with naval infantry: tactics and sustainability. The Mexicans, using machine guns, repulsed the assault by the Second Seaman Regiment on the Mexican Navy Academy when the regiment, used the massed infantry tactics of 1891 and earlier. The bluejackets quickly had to adopt improvised small unit tactics to cope with the street fighting.
20세기 초 2500명의 수병여단이 1300명의 해병여단과 더불어 베라크루즈에서 활약.
(1914년 멕시코혁명 중 미 해군에 의한 베라크루즈 점령)
출처:
Sailors as Infantry in the US Navy
Patrick H. Roth (Captain, US Navy, Ret.)
Burke, Virginia, October 2005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