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 : 조선군 집계 지휘관 어재연 장군 외 조선측이 확인한 전사자 53명, 부상자 10명/ 미군측 집계 사살전과는 243명. 익사 100여명, 포로 18명. 조선군이 파견한 총병력 규모 기록과 대조할 때, 미군의 집계는 투입 병력과 비교할 때 오차가 거의 없다, 초지진, 덕진진 및 광성보 시설 함락 및 조직적인 파괴와 요새 중장비 전량 노획 및 파괴, 수자기 약탈
USS 콜로라도(Colorado) : 1856년 6월 Norfolk Naval Yard에서 진수, 1858년 3월 현역 배치 비장갑 목조, 스크루추진 프리깃함 동급함 없음 함정 전장 263ft, 전폭 52.6ft 배수량 4772t 최고속도 9kt 무장 10인치 전장식 활강포 2문, 9인치 전장식 활강포 28문, 8인치 전장식 활강포 14문
USS 알래스카(Alaska) : 1868년 10월 Norfolk Naval Yard에서 진수,1869년 10월 현역 배치 비장갑 목조, 스크루추진 슬루프함 알래스카급 네임쉽 함정 전장 250ft, 전폭 38ft 배수량 2394t 최고속도 12kt 무장 5.3인치 전장식 강선포 1문, 11인치 전장식 활강포 1문, 8인치 전장식 활강포 6문 USS 베니시아(Benicia) : 1868년 8월 Portsmouth Naval Yard에서 USS 앨고머(Algoma)로 명명 및 진수, 1869년 3월 베니시아로 재명명, 1869년 10월 현역배치 비장갑 목조, 스크루추진 슬루프함 알래스카급 2번함 함정 전장 250ft, 전폭 38ft, 배수량 2394t 최고속도 12kt 무장 5.3인치 전장식 강선포 1문, 3.7인치 전장식 강선포 2문, 11인치 전장식 활강포 1문, 9인치 전장식 활강포 10문
USS 모노카시(Monocacy) : 1864년 12월 Denmead사 조선소에서 진수, 1866년 ???월 현역배치 비장갑 목조, 외륜포함 모혼고(Mohongo)급 포함 3번함 함정 전장 255ft, 전폭 35ft, 배수량 1370t 최고속도 11~12kt 무장 6.4인치 전장식 강선포 2문 9인치 전장식 활강포 4문, 4인치 전장식 강선곡사포 2문, 24파운드 활강곡사포 2문
At 10:00 a.m. on June 10, the assault on the forts began. The landing forces consisted of about 650 men (over 500 sailors and 100+ Marines). In this fight, the US had .50 caliber Remington rolling block carbines, the Marines had muzzleloading Springfield muskets and Navy Plymouths; the Koreans had matchlocks. They landed at Ch’oji Fortress, which the Americans called Marine Redoubt, with no opposition; they camped nearby overnight. The next morning, they finished destroying the fort, dumping or spiking cannons and then moved on, with Marines traveling ahead as skirmishers.
(1871년) 6월10일(이하 양력) 오전10시 초지진에 대한 상륙돌격이 개시되었고 상륙군은 650여명으로 (500명이상의 해군보병 및 100명 이상의 해병대) 구성. 미군 주력은 0.50구경 레밍턴 카빈으로 무장했고 해병대는 전장식(前裝式)들인 스프링필드와 네이비 플리머스 보총을 사용(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해병대 천시..?)하였으며 조선군은 화승총을 사용. 별다른 저항없이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은 '해병대 보루'(Marine Redoubt)라고 명명한 후 주변에서 숙영. 다음날인 6월11일 아침, 상륙부대는 전날부터 실시한 초지진에 대한 사용거부(진지파괴 및 장약소각)와 화포 폐기를 끝내고 나서 해병대를 척후로 내세우고 이동을 개시.
The Korean forces banded together as guerilla units but, armed with only matchlocks, and being kept in check by US artillery (12-pdr. howitzers on field carriages), they could not get within effective firing range. The US troops moved on toward the next objective, Dǒkjin Fortress (Fort Monocacy).
조선군은 소부대(불명)별로 연계된 유격전을 시도하였으나 미군의 12파운드 야전 견인곡사포 포대(7문 양륙 -원정 미 아시아함대 사령관 John rodgers’s report)에 포착되어 조선군의 유격대가 휴대한 화승총의 유효사거리까지 접근하지 못함. 미 상륙군은 다음 목표인 덕진진(포트 모노케시라고 명명)까지 북쪽을 향해 전진.
(12파운드 곡사포 7문 육지 배치)
The Korean forces had, likewise, abandoned the second fortress, choosing to mass together farther north. The Marines quickly dismantled this fortress, too. Like the past fortress, they dumped and spiked cannon, burned stores, etc. Next, they went onward toward their main objective, a small fortress attached to Kwangsungbo (광성보), called Sondolmok Dondae (손돌목돈대). The Americans originally referred to it as the citadel, but later renamed it Fort McKee, in honor of the Navy lieutenant killed in the fighting there. The Korean forces had regrouped there, en masse. Along the way, some Korean units tried to flank the US forces; they were checked, again, by strategic placement of artillery on two hills nearby the Citadel.
조선군은 이 두번째 진지를 포기하고 더 북쪽에서 밀집방어를 선택한 것으로 여겨짐. 미군은 초지진에서와 마찬가지로 진지 사용거부 및 화포 폐기와 비축품 소각 등을 실시한 후, 주요목표인 광성보의 부속돈대(손돌목돈대)를 향해 이동. 미군은 초기에 광성보를 ‘요새’로 호칭했으나 뒤에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미 해군 대위의 이름을 따서 포트 ‘맥키’라고 명명. 조선군은 광성보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하였고 일부 부대 [광성보 편제의 어영군(御營軍, 어영청소속 보군1초(步軍1哨: 보병 1개중대))과 별무사(別武士: 기병)들을 지칭 -고종실록] 는 미군의 접근로를 따라 매복하여 접근하는 미 상륙군의 측면공격을 시도하였으나 광성보 인근 야산 언덕 두 군데에 배치한 미군 야전포병대에 또다시 포착되어 공격이 무위로 돌아감.
Artillery, both from the ground forces and also from the USS Monocacy, offshore, pounded the citadel and the hill directly west of it, in preparation for an assault by US forces. The US forces, made up of nine companies of sailors and one company of Marines, grouped on the facing hill, keeping cover and firing at any defender who showed himself.
미군의 돌격을 지원하기 위해서, 상륙군에 지원된 야포들(12파운드 야전곡사포 7문)과 해안쪽 모노케시함의 함포들의 이중십자포격이 광성보와 고지 서측면에 공격준비사격으로 실시됨. [*원정함대 5척의 전함 중 Monocacy함(60파운드포 2문, 8인치포 4문) 외에도 Palos함( 24파운드 곡사포 4문, 24파운드 강선곡사포 2문)과 원정함대에 동반했던 화력미상의 소형증기선 19척중 4척이 참가]. 해군보병 9개중대 및 해병 1개 중대로 구성된 미군은 광성보 전면의 고지 위에 공격진형을 구성하고 엄폐한 상태에서 조선군 수비대 [어재연장군의 직할대, 당시 조선군 병력배치 형태는 병인양요때와 마찬가지로 전 병력을 집결하여 결전을 벌이기보다 문수,정족산성과 각 진,보 등에 분산 배치되어 거점방어 형태로 지연전을 펼치며 기회를 틈타 수시로 유격전을 벌이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것으로 추정되며 광성보 내 실제 방어병력은 미군 병력에 비해 1/2 ~ 1/3 수준이었던 것으로 판단됨] 를 향해 사격을 실시.
When a signal was given, firing stopped and the US forces charged toward the Citadel, with Lieutenant Hugh McKee in the lead. The Koreans fired as fast as they could, but the US forces gained ground before they could reload; the Koreans ended up throwing rocks at the attackers. Lieutenant McKee was the first in the citadel, with a sword in one hand and a revolver in the other. He was shot in the groin and speared in the side by Koreans inside. After him came Commander Schley, who shot and killed the Korean who speared Lieutenant McKee. An interesting anecdote about Lieutenant McKee was a story that might shed a little light on why he raced ahead of everyone in the charge on the citadel.
돌격명령이 떨어지자 포격이 중지되었고 미군은 휴 맥키 대위를 선두로 요새를 향해 돌격을 개시. 조선군은 재빨리 사격을 실시하였으나 화승총의 재장전이 이루어지기 전 미군의 선두가 요새에 도달.(화승총의 특성상의 단점으로 재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림). 조선군은 결국 요새위에서 바위 등을 던지며 저지. 맥키 대위는 한손에 검을 다른 한손엔 연발권총을 든 채로 가장 먼저 요새에 도달하였으나 내부의 조선군에 의해 하체에 총상을 입고 옆구리를 창에 찔림. [*백제군 소수 결사대에게 고전하던 신라군 화랑 관창의 역할처럼 전투촉발의 매개체가 된듯함] 상륙군 지휘관 쉴리가 그 뒤를 따라서 맥키 대위를 창으로 찌른 조선군을 사살함. 맥키 대위가 왜 요새를 향한 공격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앞서서 질주해 들어갔는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되는 일화가 있다.
For a long time, I wondered why he did something that was seemingly suicidal. Then, one day I received e-mail from a distant descendant of his, William C. McKee. He transcribed a newspaper clipping from that time. In it, was the story of how word got back to his ship, the USS Colorado, the day before it left for Korea that his fiancee, a socialite, ran away with a career diplomat. Lieutenant McKee overheard crewmembers talking about it and, when someone noticed him standing there, he had a clenched fist, like he wanted to strike someone. He spent the entire night pacing the deck, according to the story. It might explain his feelings on June 11, where he was probably still very emotionally distressed over losing his fiancee.
오랫동안 나는(토마스 듀버네이 교수) 왜 그가 xx에 가깝게 보이는 행동을 했는지 궁금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윌리엄 맥키라는 그의 먼 친척으로부터 그 당시의 신문기사를 옮겨적은 이메일을 받았다. 그 내용에 따르면, 한국을 향해 출항하기 바로 전날 밤 자신의 소속함인 기함 콜로라도 함상에서 맥키 대위는 승무원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지나다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교계에도 이름이 알려진 그의 약혼녀가 어느 중견 외교관과 눈이 맞아 달아나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누군가가 거기에 서있던 그를 보게 되었을 때, 그의 주먹은 꽉 쥐어진 채 마치 누구라도 때릴듯한 모습이었다고 하며 그 밤 내내 그는 갑판을 반복해서 왔다갔다 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6월11일의 그의 감정이 약혼녀를 잃게 되어 매우 정서적으로 격앙된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Also, in an event related to Lieutenant McKee, I got to know his great-great nephew, James Wardrop quite well. I arranged for him to visit Kanghwa Island for the chesa (제사) for General 어재연 back in 2000. Jamie was a focal point of the ceremony that year and became quite close to 어윤원, the elderly grandson of the general. A rift between two families had been healed.
또 한가지 맥키 대위와 관련한 일로서, 나는 제임스 워드롭이란 그의 증조카를 알게 되었는데 지난 2000년도에 강화도에서 올린 어제연장군의 제사에 그를 초청하도록 주선하였다. 제임스는 그해 제사에서 부각되는 인물이 되었고 어재연장군의 장손인 어윤원씨와 친해지게 되었다. 두 가문간의 역사상에 이루어진 균열이 메워지는 순간이었다.
I was very glad to have been part of a chapter in Korean history that was finally closed. The fighting went on for only fifteen minutes or so and all the defenders were killed, wounded and captured or escaped. When the fighting was over, about 350 Koreans and three Americans, Lieutenant McKee, landsman Seth Allen and Marine Denis Hanrahan, were dead. Lieutenant McKee’s body was shipped back to his hometown of Lexington, Kentucky, in the United States, for burial. The other two KIA, plus one sailor, Thomas Driver, who died from a fever, were buried on Chakyak Island.
나는 마침내 종결된 한국역사의 한 페이지 중에 일부로나마 참여하게 되어 기뻤다. 그 15분간의 전투에서 모든 방어자들은 죽거나, 부상당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탈출했다.
[*고종실록엔 전사 53명 부상 24명 포로(부상) 14명이며, 광성보 함락직후 주 거점을 염하(鹽河, salt river, 강화해협) 건너편 덕포진(德浦鎭)에 이전설치.
애너폴리스 미 해사박물관에 있는 당시 상륙군지휘관의 일기에, 백병전 시 조선군은 숫적 열세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최후까지 싸웠고 창검이 부러지면 돌, 흙을 들고 싸웠으며 중상을 당했어도 항복을 하지 않고 죽여달라고 손짓으로 표현하는 모습 등 조선군의 용맹함에 놀란 마음을 기록했고 또 미군이 총검을 사용했으나 조선군이 착용한 13겹의 목면갑에 총검이 효과가 적어 개머리판으로 백병전을 벌였다고 하는데 디지타이즈된 원본이 없는듯하여 미확인. 그러나 용맹함에 대한 부분은 다른 지휘관들의 자료에서도 간간이 언급됨. 그리고 미군이 광성보를 함락한 당일 오후 초지진으로 후퇴하여 숙영하는 그 밤에도 조선군{첨사(僉使:종3품, 중앙파견부대가 아닌 해당지방 진영지휘관) 이렴(李濂)}의 야간기습이 있었고 그 다음날 아침 미군은 함선으로 철수한 뒤 작약도 근방으로 물러남]
전투가 끝났을때 350여명의 한국인(실록기록과 상이)과 3명의 미국인 맥키 대위, 수병 세스 앨런, 해병 데니스 핸러한이 죽었다. 맥키 대위의 시신은 배로 옮겨져 장례를 위해 고향인 미국 켄터키주의 렉싱턴으로 보내졌다. 나머지 두 전사자와 열병으로 사망한 토마스 드라이버의 시신은 작약도에 매장되었다.
사료에 기록된 천보총과 총열길이를 늘린 장조총간의. 구조적-성능적 차이에 대해서 아쉽게도
구분하지 못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기존 조총과 구조적 차이점도 없이.
숙종대. 박영준이 제작한. 1km이상 사거리의 천보총-영조대.박영준의 아들 박지번이 만든 900보의 천보총.
비슷한 시기. 수어청 소속 윤필의 천보총.모두 기본적으로 사거리 천보에. 가볍고 휴대하기가 편한 장점을 지닌 조총에 해당되는 조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적인 조총은 아직 보지 못하였기에. 개인적으론 천보총은..
미발견 혹은 완전히 실전된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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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미 천보총이 등장하기전. 조선에서는. 조총보다 사거리와 위력이 향상된 대조총을 사용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대조총은 지나치게 무거워서 휴대의 어려움이 있어 야전보다는.거점 방어용으로 성의 거치대에서 운용하였다 한는데.
이러한 기존 대조총이나. 총열 길이를 증가시킨 장조총을 제외한. 독보적인 성능의 천보총의 존재는. 현재로서는 사료속 에서만 접할수 있을듯 하네요.
조총이 서울 경기권에서만 10만정이었어요...
전국 다 합하면 20만정이 넘었을 겁니다.
신미양요당시 미 해병이 천 이백명 정도 조선군병력은 350명 정도였습니다.
350명 중 250명이 싸움 도중에 사망하고 100명은 물에 뛰어 들어 죽었죠...20여명이 포로로 붙잡혔어요.
그러게요~ 제가 합산해봐도 360명인가 밖에 안되더군요.
본래 세개 초 병력이 투입되었다는데.. 1초 당 병력이 대략 125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일단 병력도 훨씬 모자르고,
오히려 미 상륙군이 640~650명이라는데, 얘네들은 분당 10발 이상 쏘는 연발소총이 주무장이고,
조선군은 분당 1~2발이라.. 병력도 거의 반 밖에 안되는데.. 조선군이 360~720발(사거리 50~100미터) 쏠 사이.
미군은 6400발 이상(사거리 400미터짜리 최신식 연발소총)을 퍼붓는데다..
암스트롱포로 보이는 육상포와 전투 시작 전 약 70문에 달하는 대구경 함포의 지원사격까지 받았기에...
압도적으로 발릴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있달까요.
200미터를 전진하는데 일단 3명인가 총에 맞았고, 광성보 돌입시 1명(맥키 대위가 창에 찔렸는데..
3명 전사, 10명 부상.. 백병전 때 부상자가 좀 있었나 봅니다.
특히 광성보의 360명 병력한테 8~10인치 함포를 수십문이 갈겨댔으니..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거의 육군으로 치면 포병여단급 이상인데, 구경조차 무식하게 크니...
그렇다고 명중률이 크게 떨어지는것도 아니고..
딱 유리한게 지형 정도인데.. 그 지형도 약간 높은 고지라..
조총 쏜다고 아래를 내려다 보려 상체를 세우면 저격을 당하는 상태..
이런 신식무기를 가진 상대에 대항할 무기나 전술이 아무것도 바쳐주지도 않고,
연구, 도입된 적이 없으니.. 지는 것도 그럴만 하지요.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지 않은 나머지 병력은 손돌목 포대 병력이거나, 다른 곳 병력인가 싶기도 합니다.
매복으로 이겼다는 걸 보니 신미양요가 아니고 병인양요를 말씀하는 것 같군요...
정족산성과 문수산성에서 매복을 해 프랑스군에게 타격을 줬었죠...
신미양요 땐 매복을 해 이긴 싸움 없어요...
미군이 무단으로 강화해협을 올라왔기에 조선군이 먼저 포로 공격을 했었죠...
그리고 당시 조선군 주력 무기는 활이 아니라 조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