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였다
12월 14일
선봉부대가 한양 부근에 도달하였다.
조선은 강화도에 옮겨가서 장기항전을 하려 했으나 청군 선견대가 통로를 봉쇄하였으므로 남한산성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 일행이 성에 들어갔을 때 남한산성에는 미곡 14,300여석, 피·잡곡 9,500석, 장 220여독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는 13800명의 병력이 2개월 이상 버티기에 부족하지 않은 양이었으나 왕실과 종친, 문무관료, 서리, 노비 등 14,300여명이 들어와 장기 농성시 양곡 부족이 우려되었다.
12월 19일
청 좌익군 24,000명이 모두 당도하자 이들은 남한산성의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12월 22일
청군의 대공세가 있었다. 청군은 5천여 병력을 동원하여 각 문에 1천여 명씩 배치하고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화포를 동시에 사격하여 돌격부대를 엄호하고 운제와 당차 등 공성기구를 동원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조선군도 화포 사격을 가하고 화살과 돌을 날려 청군을 공격하였으며 정오 무렵 청군은 성과 없이 후퇴하였다.
12월 23일
이튿날에도 청군은 1만여 명을 동원하여 공세를 폈다. 조선군은 전날과 달리 청군이 공격진영을 갖추기 전에 병력을 내보내어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이날의 전투에서 조선군은 80여명이 전사하고 청군 200여명을 사살하였다.
두 차례의 집중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군은 남한산성을 단기간에 함락하여 항복을 받아내기는 곤란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작전을 바꾸어 성을 외부와 완전히 고립시키려 하였다. 청군은 성 외곽의 주요 통로에 수십 군데의 목책을 설치하여 통로를 차단하고 복병을 두었는데 이 때문에 남한산성의 방어군과 외부의 연락은 완전히 두절되고 말았다.
12월 29일
한양에 입성한 청 태종이 4만여 병력을 이끌고 남한산성 부근으로 진군하여 청군의 군세가 더욱 강해졌다. 청군의 포위망이 강화되는 반면 남한산성 안의 조선군은 외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여 점차 군량이 부족해져갔다.
1637년(인조 15) 1월 11일
그때까지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던 청군은 병력을 재배치하여 산성에 대한 외부의 지원을 보다 확고히 차단하였다. 아울러 서문과 북문 앞에 병력을 집중시켜 무력시위를 벌였다.
1월 24일
양군은 하루 종일 포격전을 전개하였다. 청군의 포격으로 동문 문루 일각과 성벽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조선군 역시 천자포를 이용하여 청군 포대를 공격하였고 조선군의 대응포격을 견디지 못한 청군은 병력을 철수시켰다.
저녁이 되자 청군은 다시 동문 밖에 진출하여 홍이포 7,8문을 거치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홍이포는 사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강하여 동문과 남문 일대의 성벽 여러 곳이 파손되었고 성내의 사창과 행궁까지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도 이에 대응하여 화포 사격을 개시하였다.
특히 청군 포대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청군 화약더미에 명중탄을 작렬시키자 청군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월 26일
접근전이나 포격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청군은 자신들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그곳에 피난한 비빈과 왕자, 종실, 신료의 가족 등을 포로로 잡았음을 조선측에 알리고 출성항복을 촉구하였다. 출성항복 여부를 두고 성안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청군은 포위망을 강화하고 공성기구를 배치한 채 28일까지 여전히 포격만을 가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1월 30일
사태가 악화되어 가자 조선은 국왕의 출성항복을 결정하였으며 이를 청군 진영에 통고하였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45일간에 걸친 남한산성의 전투는 종식되었다.
남한산성 전투는 방어전에 유리한 지형을 택하였으나 외부의 성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고립된 처지에 내외 연계작전을 펼 수가 없었고 식량부족과 전의 상실로 말미암아 끝까지 성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 못한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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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이 남한산성 공성전에 얼마나 혼이 났던지 항복조건에 남한산성을 보수하지 말라는 요청을 집어넣었고
청의 사신이 올때마다 보수 흔적을 찾았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으로 패전의 불명예를 얻었지만 성자체는 10만 정예군이 쳐들어와도 결코 함락시킬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청태종도 광교산 전투에서 매부가 죽은 아픔을 겪고서도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청이 전쟁에서 이긴것이 아니라 협상으로 굴복시켰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이 함락되었다면 삼배구고두가 아니라 왕이 처형당하고 조선은 청에 점령당했을 꺼고
아마 3백년 전에 한반도는 중국땅이 되었을 겁니다.
그나저나 청의 선견대라면 2000명 정도인데 1만여명의 정예군사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냥 쳐부수면 강화도 갔을 텐데 왜 포기했을까요? 인조는 정말 선조보다 못한 병크인 것 같습니다.
전 인조보단 선조를 더 높이 쳐줍니다.
도망이라도 잘 가서 조선이 장기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을 사간원의 극심한 반대에도 7계급이나 특진시켜 전라 좌수사로 임명시킨것도 혜안이고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해 종전 2년만에 기병 5천으로 노토부락을 쑥대밭 만든것도 마음에 듭니다.
그전에 선조는 이순신을 한번 살려준적 있죠. 이순신장군이 억울하게 녹둔도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썻을 때
선조는 이순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백의종군으로 감형시켜 줍니다
나름대로 선조는 임진왜란이란 국난을 극복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헀으나 인조는 쓸데없이 청의 심기를 건드려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고 제대로 도망도 못가서 적에게 굴복하고 소현세자가 개혁적이고 청의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아들인데도 죽여버리는 잔인한 면도 있었습니다. 진짜 무능과 잔인과 아집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물인데 왜 시호가 인조인지 너무 아이러니 합니다
여담으로 도망중인 왕을 따라다닌다는 건 목숨을 건 행위였습니다.
일본군이 왕의 목숨만 노리는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았다는 건 신료들이 나름대로 충성심을 보인 것이고
덕분에 전쟁중에도 정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을 따르던 신하들을 공신으로 많이 책봉했는데 일면 타당한 논공행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