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요하 석붕산(石棚山) 대남구 유적 출토 도문토기(圖文土器)[왼쪽]와 도화(圖畵)문자 모사도[오른쪽 위]와 탁본[오른쪽 아래] 발해연안 북부 내몽골 옹우특기 석붕산 대남구(大南溝)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토기 문자 평양 남경 유적 제31호 신석기시대 집자리에서 출토된 바리[발(鉢)]의 밑바닥에 새겨진 부호
아래보니 고조선 문자등 이야기가 있어 간단히 한 글 올리자면
아직 우리 학계쪽은 이런 문자와 관련해서 연구하는 인력이나
관심이고 데이타가 미흡한게 사실이고(연구하는 입장도 돈이 안
되다 보니 그만큼 더 관심이 떨어지는 상황)
인문학쪽에서 언어 관련 학자들에게서 나오는 연구내용을
차용해서 인용하거나 검토하는 식이 많은데 하여튼
아직 초보적 상황이긴 하지만 간단히 몇가지를 짚어보자면
우선 문헌 기록상만 보면 이미 우리나라쪽에도 앞서 문자가 있었
던 내용들은 여러 곳에서 확인은 가능하군요(서토 도교의
원류도 우리쪽이라는 게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기의 진시황
본기에서도.)
해동역사에 서토의 수많은 사서 내용(사고전서) 중에서 동
이관련으로 묶은 동이총기(東夷總記)편을 보면 우리의 자부선생이
아직 신화적 인물로 치부되면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황제에게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줘서 서토로 흘러들어간 내용이 분명히 보
이긴 합니다. 그외 여러 문자 기록들도 단편적으로는 확인 가능
하고
귀장(歸藏)》 ○ 《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黃帝)가 동쪽으로 청구에
도착해서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紫府) 선생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
文)을 받아 이로써 만신(萬神)을 불렀다.” 하였다. ○ 《회남자(淮南子)》에
는, “요 임금이 예(羿)를 시켜서 청구의 못에서 대풍(大風)을 돌리게 하였
다.” 하였다. ○ 《여씨춘추》에는, “우(禹)가 동쪽으로 가서 큰 나무가 있
는 곳, 구진(九津)에서 해가 떠오르는 청강(靑羌)의 들판, 나무가 모여 있는
곳, 하늘까지 닿은 큰 산, 조곡(鳥谷) 청구(靑邱)의 향(鄕), 흑치(黑齒)의
나라에 이르렀다.” 하였다. ○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청구는 고
려의 경계 안에 있다. 자허부(子虛賦)에, ‘가을에 청구에서 사냥한다’ 하였으
니, 대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복건(服虔)이 말하기를, ‘청구국은 해동 3백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고, 《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청구 칠성(靑
邱七星)은 진수(軫宿)의 동남쪽에 있는데, 청구는 만이(蠻夷)의 나라 이름이
다.’ 하였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토벌하고는 청구도 행군총관(靑邱道行軍摠
管)을 두었다고 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곽박(郭璞)이 말하기를, “우(禹)가 수해(竪亥)에게 청구의 북쪽
을 명하였다.” 하였고, 《회남자》에 말하기를, “청구는 제(齊)의 바다 바깥
에 있다.” 하였으니, 청구라는 것은 대개 동방에 있는 나라이다. 《천문유초
(天文類抄)》에 “청구 칠성은 동방 삼한(三韓)의 나라를 주관한다.” 하였으
이 분야는 아직 갈길이 먼 상황으로 지금 당장
어떤 결론식으로 성급한 예단(豫斷)보다는 좀더 묵묵한 연구와
여유로운 관점이 필요한 상황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