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일대의 발해 부흥의 역사
http://blog.naver.com/kne24240/80096874900발해는 고구려 5부를 이어받아 5경의 대도시 문명을 구축하였고
그 크기들이나 웅장함은 자금성을 뛰어 넘는게 고고학적 발굴 성과이다.
그 속에 살던 수많은 발해인(고구려인)들은 엄연히 삼국지의
위촉오 처럼 국호를 가지고 만주일대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존립하다
사라지면서 이후
한반도에서는 천년 사직 신라에서 후삼국의 혼란한 시기 이후 고려로
국호가 바꾸자 일단의 신라인 무리가 북만주일대에서 여진 세력을 규
합하면서 요나라 대군을 격파하고 금나라를 세워
수많은 발해인 세력들까지 포섭,통합되어 마침내 요나라를 무너뜨리
고 압박해오던 송나라도 궤멸 시켜 버리고 두 황제를 만주로 압송해
버린다.
실제 역대 금나라의 황후는 발해인들의 몫이였고 금나라의 대국의 행
정이나 북경을 지배하기 위해 중도를 건립하거나 현재 남아 있는 북경
내의 황제의 정원이라는 북해 공원은
다 우리 고구려인이 직접 설계하고 만들어낸 작품들이다. 이것이 오늘
날 이어져 중공의 북경의 수도가 된 연원의 기반이다.
남북국 시대의 발해 신라 이후
한반도 일대는 다시 고려로 세력이 재편 되었고
만주 일대는 요나라에 망한 발해 이후 이름만 동란국으로 바뀌면서
이후 발해 부흥의 여러 세력들이 국가를 세우게 되는 다소
어지려운 상황이 삼국지의 위, 촉, 오처럼 진행된다.
요나라는 송나라를 굴복시켜 조공을 바치게 하고
다시 고려와의 2, 3차 대전을 치르게 되는데
고려는 3차 대전을 다 승리로 장식하고 마지막 3차 대전은
육박전에서 고구려 이후 이어온 중장 기병을 통해 쓸어 버림으로서
고려의 위상이 동북아를 흔들게 된다.
이런 고려의 위상에 문종시기에 오면 만주 일대의 여러 발해인
세력과 여진족들이 속속 고려 조정으로 편입해 들어오면서
만주경영이 이루어지다
신라인이 통치한 금나라에 의해 만주가 다시 빠르게 재편되는
상황을 맞이 한다. 이에 위기를 느끼면서 고려에서
윤관이 동북 9성을 쌓다 이후 돌려주지.
신라인 황제가 다스리는 금나라는 만주 일대의 고구려인들을 흡수 통합하면서 세력을 곤고히 불려 나가고 이후 반요 사상으로 결합하면서
요나라와 이후 압박해오던 송나라
를 멸망시키고 북방을 지배하는 패자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금나라 대국의 행정은 수많은 고구려인과 중도라는 북경의 도시 설계와 건설은 장호라는 고구려인들에 의해 이루어 지며 북경일대를 100여년간 지배하며 군림하게 된다.
송막기문
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혹은 송막기문 판본에 따라 女眞之主乃新羅人號完顔氏
여진 추장은 신라인이며 완안씨다
송막기문의 저자는 송나라 사람 홍호입니다. 홍호는 포로가된 송나라 황제의 석방교섭을 위해 1129년 금나라에 파견된 인물
입니다. 그는 결국 금나라에 잡혀 억류생활을 하는데 그때 경험담과 견문기를 책으로 정리한 것이 송막기문입니다. 여기 나
오는 이야기가 100% 정확한 것은 아니겠지만 금나라 영토 내에서 10년 가까이 억류 생활을 했던 사람이 지은 책이라는 점에
서 여진-거란-발해 관련 연구에서는 제법 비중있게 취급되는 자료입니다
女眞酋長乃新羅人, 號完顔氏. 完顔猶漢言「王」也. 女眞以其練事, 後隨以首領讓之. 兄弟三人, 一爲熟女眞酋長, 號萬戶. 其一適他國. 完顔年六十餘, 女眞妻之以女亦六十餘. 生二子, 其長卽胡來也. 自此傳三人, 至楊哥太師無子, 以其侄阿骨打之弟謚曰文烈者爲子. 其後楊哥生子闥辣, 乃令文烈歸宗. -송막기문 원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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