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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조선과 유교는 썩었다! 이런 사람들이 있길레...과연 그 시절에도 그런 취급을 받았을까요?
볼테르와 그 유명한 칸트의 스승의 스승 (...)인 크리스챤 볼프의 평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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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시기 프랑스에서 유교사상을 적극 수용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볼테르(Voltaire: 1694-1778)를 들 수 있다. 볼테르가 지닌 동양문화에 관한 지식은 그보다 조금 앞서 활약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에 볼테르의 유교사상에 관한 지식은 오히려 교회권력과 예수회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는 자신이 반교권주의자라고 자처하였으며, 18세기 프랑스에서 교회권력의 붕괴는 전적으로 볼테르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교회권력에 대한 대항뿐 아니라, 절대왕권에 대항하여 위로부터의 개혁을 꿈꾸던 볼테르에게 유교적 성왕정치는 이상적인 정치의 전형으로 비쳐졌다. 특히 꽁트·부베·노엘 등의 선교사에 의해 소개된 유교의 정치·도덕 철학은 혼란에 처한 당시의 프랑스 현실 속에서 일종의 이상으로 비쳐졌다.
볼테르가 태어난 직후인 1696년 꽁뜨(Louis le Comte: 1655-1728)는 파리에서 ꡔ중화신인상기中華新印象記ꡕ를 출판하였는데 서간집인 이 책의 제2권 제2신에서는 유교의 ‘인정’(仁政)에 대하여 상술하고 있으며, 부베(Joachim Bouvet: 1656-1730) 신부는 1697년 파리에서 ꡔ중국황제소사中國皇帝小史ꡕ를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청의 강희제를 이상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묘사하고 유교적 성왕 정치의 구체적 실현의 예를 담고 있다. 또한 예수회 신부 노엘(Francois Noel: 1657-1729)은 1711년에 ꡔ육경ꡕ(Sinensis Imperii Libri Classici Sex)을 펴냈는데, 이러한 책들은 볼테르를 위시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애독되었다.
볼테르는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공자와 유교에 관한 책을 읽고, 유교야말로 기적이나 현담(玄談)에 근거를 두지않은, 이성에 기초를 둔 자연법적 도덕이라고 생각했다. 볼테르는 그가 쓴 글 중 80개의 작품과 200여통의 서간문에서 유교 문화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혼란스런 사회현실에 분노했던 볼테르의 눈에 유교문명은 덕성(德性)의 문명이었으며, 유교적 군주들은 이상적인 ‘개명군주’(開明君主)로 비쳐졌다. 신과 교회의 권위 그리고 절대왕권에서 벗어나서, 신적 질서 대신 자연적 질서를 탐구하고 계시에 의한 신앙대신 이성에 의거한 지식을 모색하던 볼테르에게 유교 사상과 민본정치의 이념은 그가 목마르게 찾고있던 진리 그 자체였다. 볼테르는 유교의 본질이 하늘을 공경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가르침으로 보고 공자를 천하에 둘도 없는 사표라고 보았다.9) 볼테르는 그의 연구실에 공자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경배하였다고 한다.10)
볼테르의 유교에 관한 생각은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 등의 백과전서파에 전수되었다. 원래 ‘백과전서’는 영리에 밝은 한 서점이 착수한 사업기획의 하나였으나, 견실한 시민계급 출신인 디드로가 이 사업을 위임받은 후 그는 사람들의 인식을 중세 때부터 계속되어온 종교적 세계관에서 이성적 세계관으로 바꾸는 방향으로 편집방침을 정했다. 백과전서파는 종교적 권위가 아닌 이성이야말로 진리의 기초가 되며, 인류의 진보는 자연의 질서를 파악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백과전서파는 진정한 정치는 이성에 기반을 둔 법에 의한 통치에서 가능한 것이며, 교육은 종교교리를 암기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지혜를 배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유학이 지닌 합리적 세계관과 도덕적 군주관 그리고 덕성의 교육은 이들 백과전서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계몽시기에 ‘중농주의자’라고 불렸던 일군의 경제학자들도 유교의 정치·경제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정부에서 추진했던 공업정책의 실패에 자극을 받은 이들 중농주의자들은 유교의 성왕과 같은 ‘개명군주’(開明君主)가 다스리는 농본주의적 유토피아를 이상사회로 삼았다. 중농주의자 케네(Quesnay: 1694-1774)는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자연만이 인간을 이롭게하는 부의 생산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연적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하나로 연관짓는 통일적 질서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는 유교의 천인합일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유교의 자연관과 사회관을 극찬하였으며, 그의 사후에 그의 입장은 제자인 미라보(Mirabeau)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유교사상의 요지는 인간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여 다시는 우매함과 정욕에 가리워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공자가 가르쳤던 것은 경천외인과 물욕의 극복이며, 정욕이 아닌 이성으로 행위의 표준을 삼는 일이다. 공자는 이성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말도록 가르쳤다. ·····도덕을 세상에 펴는 일, 이것이야말로 나의 스승이 하려고 했던 일이었다. 나의 스승 케네는 자연이 준 비전(秘傳)을 밝혀냈으며, 이것이 바로 경제의 체계이다”11) 케네의 유교사상에 대한 숭배 때문에 당시의 중농주의자들은 그를 ‘유럽의 공자’라고 부르기도 했다.12)
계몽시기 독일에서의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은 프랑스에 못지않았다. 칸트(Immanuel Kant)의 스승인 슐츠(Schults)의 스승이었던 크리스챤 볼프(Christian Wolf: 1679-1754) 역시 유교사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1721년 7월12일 할레(Halle) 대학에서 유교의 실천철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라이프니츠의 이신론(理神論)에 영향받은 그는 유교사상과 기독교가 서로 모순된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유교의 도덕철학은 그가 수립하고자 했던 자연도덕(신의 계시에 의한 도덕과 구별되는 의미에서)과 부합된다고 믿었다. 그는 유교의 도덕이 인간의 본성과 정감에 합치한다는 점을 발견하고 유교를 상당히 합리적인 사상으로 생각했다. 그는 강연을 통하여 독일의 대학에서도 합리성에 기반을 둔 덕성의 배양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유교적 교육은 이상적 교육의 전범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할레대학의 신학교수들은 울프의 입장이 무신론에 가깝다고 비판하고 27조목의 반박 성명을 냈다. 사태가 시끄러워지자 프러시아 국왕 프레데릭 1세는 다음해 11월 그를 대학교수직을 해임하고, 48시간내에 국경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고 불복시에는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할레에서 쫒겨난 그는 오히려 마르부르그 대학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프레데릭 2세가 등극한 후에는 다시 소환되어 궁정 고문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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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유교가 답답해 보일지 몰라도 18세기까지만 해도 매우 우수한 정치 철학으로 인정받았던걸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