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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1-13 12:08
[기타] [펌] 조선과 명의 외교 득실.
 글쓴이 : 정헌대부
조회 : 5,333  

1. 조선이 명에 조공을 많이 하려한 이유

조선은 조공을 많이 하고자 하고 명나라는 적게 받고자 한 것은, 조공이 일방적인 헌납이 아니라 쌍방적인 물물교환이었기 때문이다. 조공을 받는 황제국은 회사(回賜)라는 답례를 해야 했다. 

황제국은 조공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회사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황제국들은 무역적자를 보면서 패권을 유지했다. 이것은 돈을 많이 쓰는 쪽이 주도권을 잡는 세상사의 이치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하국 입장에서는 조공을 자주 하는 것이 이익이고, 황제국 입장에서는 조공을 적게 받는 것이 이익이었다. 

또 신하국 사신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 사신이 지나는 지방 관청에서는 신하국 사신에게 숙식과 선물을 제공해야 했다. 그래서 신하국 사신이 자주 방문하면 명나라의 재정적자가 증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선은 매년 세 차례 조공을 하고자 하고, 명나라는 3년에 한 차례만 받고자 했던 것이다. 

3년에 한 차례만으로도 조공 횟수는 많은 편이었다. 명나라의 행정법전인 <대명회전>에 기록된 국가별 조공 횟수에 따르면, 유구(오키나와)는 2년에 1회, 섬라(태국) 및 안남(베트남)은 3년에 1회, 일본은 10년에 1회였다. 

유구·섬라·안남은 다른 나라에 비해 조공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조공을 3년에 1회로 제한한 명나라의 조치는 조선에 대한 차별 대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은 1년에 세 번은 조공을 해야겠다고 우겼다. 

1년에 3회면, 3년이면 9회다. 명나라는 3년에 1회만 하라고 한 데 반해, 조선은 3년에 9회를 하겠다고 했다. 따라서 조선의 주장은, 명나라에 대한 무역흑자를 아홉 배로 늘리겠다는 협박과 마찬가지였다.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통해 고구려 고토 수복, 사병혁파 등의 여러가지 의미를 두었지만 그 중 한가지가 명에 군사적 압박으로 무역흑자를 늘리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정도전이 죽고 태종 이방원 때 부터 명나라에서는 무역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나왔다.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과감한 무역특혜를 주자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명나라는 정도전이 제거된 지 2년 뒤인 1400년에 과감한 무역특혜를 조선에 제공했다.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이례적으로 1년에 3회의 조공을 인정한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반 명나라 자주파를 제거해 줘 명나라의 안보를 강화해 준 것에 대한 명나라 황실의 답례로 무역적자를 감내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은 명나라와의 무역에서 최대의 무역흑자를 거두는 나라가 되었다. 조선의 조공 사절단은 매년 세 차례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 그만큼의 무역흑자를 안고 돌아왔다. 

조선의 흑자폭은 중종 때인 1534년부터는 한층 더 확대되었다. 이때부터 명나라는 조선에 1년에 네 차례의 조공을 허용했다. 이런 무역특혜는 명나라가 무너진 1644년 이전까지 계속 유지됐다. 

2. 명나라의 실익

명나라도 조선 못지않은 실익을 얻어냈다. 명나라는 무역특혜를 제공하는 대신, 여진족과의 전쟁에 조선군을 동원했다. 명나라는 툭하면 파병을 요청했고 그때마다 조선은 군대를 보내야 했다. 

여진족은 왜구와 더불어 명나라의 안보를 가장 많이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명나라는 조선군의 지원에 힘입어 여진족의 위협을 상당부분 감소시킬 수 있었다. 조선이 얻은 무역흑자는 결국 조선군 파병으로 상쇄된 셈이다. 명나라는 무역적자를 보는 대신 조선군을 공짜로 이용한 셈이다. 

명나라의 요구에 휘말려 툭하면 파병을 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잃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손실은, 조선의 주적이 아닌 명나라의 주적(여진족)을 막기 위해 조선군이 힘을 소모하다 보니, 일본군이나 왜구의 침략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됐다는 점이다.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여진족과의 전쟁에 휘말리다 보니, 조선군은 여진족 기마병을 상대하는 데만 익숙한 군대가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이 일본군에 연전연패한 것은, 일본군 같은 보병 위주의 군대에 대한 훈련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은 명나라 덕분에 무역흑자를 얻었지만, 명나라 때문에 임진왜란을 당한 측면이 있었다. 

조선은 정도전을 잃고 명나라에 무역흑자를 얻어 냈다면 자주국방에서는 손해를 보았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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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헌대부 15-01-13 12:11
   
글 밑 부분은 수정에서는 12인데 게시를 하면 10으로 줄어버리네요.
아뒤도업네 15-01-13 12:28
   
대부분 동의 한다지만 여진이 조선의 주적이 아니었다보긴 힘들텐데요...
한반도 역사상에 있던 대규모 침공의 대부분이 북방민족들이 기반인데 틈만 나면 약탈하러 내려온 여진 또한 조선의 적이지요. 조선이 예방전쟁이라는 이름 하에 틈날때마다 여진족들 밟아놓은게 괜히 그런게 아닙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측에서 행한 대규모 침공은 삼국시대 때가 거의 마지막이었고 그 이외에는 왜구의 침략정도인데
그나마도 대마도정벌과 일본정권의 안정화 이후로는 잠잠해졌습니다. 조선이 대규모의 침공이 온다면 북쪽에서 온다고 생각하지 남쪽에서 올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정헌대부 15-01-13 12:47
   
이 글을 쓰신 분은 여진족을 주적이라 하지 않은게 고려와 여진족이 크게 전쟁을 한 경우가 없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또한 조선 건국에 여진족이 일조를 한 부분도 있고, 실제적으로 약탈로 인한 소소한 전쟁을 한 경우는 있지만 전면전은 없었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와 전쟁을 한 북방민족에 여진족은 청이전에는 없었죠.
조선초 여진과의 전쟁은 조선의 자주적인 전쟁이 아니라 명에 의한 대리 전쟁 시각이 있다는 건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아뒤도업네 15-01-13 12:58
   
....윤관의 17만 대군 북방정벌 정도면 충분히 대규모 전쟁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리고 조선/명같은 유교권 나라들에게 있어 북방민족은  요/금/원나라 이후 싸그리잡아서 트라우마같은 존재라..
굿잡스 15-01-13 13:25
   
1번 무역 혜택은 맞는데 당시 명의 골치와 주적은 동북방의 여진족이 아니라 고스란히 군대를 물린 몽골

세력등 북로로서 영락제 기간에 친히 5번의 친정 정벌을 강행하다 결국 돌아오는 막사에서 숨을 거두

었군요.(명이 이런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 오는 우리쪽에 무역 혜택을 많이 준 이유는 바로 주적인 북방쪽과

조선의 연결고리를 외교적으로 사전 차단하면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함)

그리고 여진족문제는 고려부터 이미 조선 조정의 직접적 능동적 입김하여 우리의 지배 관할권이였습니다.

(명이 어쩌고 한게 아니라)

동북방은 앞선 고려시대 윤관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두만강 700리 밖까지 공험진을 설치하고

동북 구성을 쌓으면서 3,40만 고려백성의 이주 개척을 한 정도만 일반 분들이 아는데 이건 이관련 최초 전

후 시대사를 연구한 일본 학자인 이케우치의 논문에서도 확인되듯 직접적 주진(州鎭) 정책으로의

선회이지 이미 고려는 초기 태조 앞선 세조 즉 왕건의 아버지인 송악의 호족인 왕룡때부터 북방에 대한

경영과 인식 그리고 숙신을 휘하로 한 고려의 천하관은 이미 정립되어지고 있습니다.(조선 건국자

이성계집안이 이미 여진족을 휘하로 하는 군벌이였던 시대상처럼)

이렇기에 후삼국 통일의 일리천 전투에서 왕건은 <흑수(黑水)ㆍ달고(達姑)ㆍ철륵(鐵勒) 등 제번(諸蕃)

의 강한 기병 9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숙신을 통제하에 두고 있었다는 기록이 이미 고려사절요에 보이는

것이고 이 관련 연구 내용은 고려의 천하관을 알 수 있는 추명엽의 <고려전기 '번(番)'인식과 '동·서번'의 형

성>을 통해서 확인 가능하면 고려의 팔관회는 이런 고려가 거느린 주변 동서번과 탐라국등에 대한

실질적 조공과 회사의 황제국으로서의 면모에서 실체가 확인되는 사항입니다.

(고려는 거란을 적으로 여진은 동일체 의식 및 짱개풍이 스며들면서 화이관에 입각한

차별의식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한 박경안의 연구내용도 주목)

그리고 이런 북방에 대한 고려 태조 왕건의 경영과 숙신을 포용하는 세계관은 이후 현종시기 거란과의

3차대전을 치르면서 3차에서 정예 10만을 궤멸시키는 실질적 힘의 역량을 내보이면서 동만주 일대는

요나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기미주(羈縻州)형식으로 고려조정에 입조되고 북방경영이 더욱 확대

활발해지고 있었다는 점이죠.

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不及高句麗, 而東北過之
 
그 경계선의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을 경계로 하였고,동북쪽은 서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대게 서북쪽은 고구려 경계에 미치지 못하였으나,동북쪽은 고구려의 경계를 넘었다.
                                                                                    <고려사> 권56,지1

그리고 아래에서도 누누히 이야기 했지만 한규철 교수의 <高麗 來投·來往 女眞人―渤海遺民과 관련하여>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8992&sca=&sfl=mb_id%2C1&stx=eogkseo

의 연구 내용을 보면 이해되겠지만 여진족이라는게 발해 멸망 후 따로 새로운 종족이 뚝 나온게 전혀 아니

라 다름 아닌 발해 말 힘이 약화되고 요가 강성을 하면서 일부에 불린 여진족명이(신라계가 완안부 통합)

이후 발해가 멸망하면서 발해민이 변칭, 범칭되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가운데 상경용천부일대를 요가 멸망시키지만 그 주변 발해민들의 저향이 거세었고(마치 일시 평양성

함락 이후에도 황해도나 요동성일대의 건재한 고구려 성주들의 공격이 지속된 것처럼) 결국 이름만 바뀐

동란국의 발해민을 요나라가 반란이 거세지자 발해 서쪽 요양일대로 옮기고 주변 저항 세력이였던

발해민에 의해 후발해가 세워짐. 그리고 이런 후발해는 히노가이사부로는 1004년으로 박시형은 오사성발해

국 즉 후발해(烏舍城渤海國(後渤海))의 멸망을 올야가 여진에 귀속하는 1114년로 금 건국 1115년직전까지

로 발해 멸망 후 금 사이를 메울 정도로 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겁니다.

요의 팽창이 서쪽 연운 16주를 먹고 동으로는 발해민의 거센 저항으로 요양일도로 물러나고 고려와도

3차 대전을 치르면서 패배를 하는 가운데 구소련시절 대항격인 나토전선마냥 요를 견제하기 위한

송과 고려를 중심 동서축으로 동만주일대의 이런 후발해나 정안국등은 고려조정에 의지하면서 대방어라인

을 구축하게 되는 형국이 100여년을 자리하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고려가 동만주일대에 실질적 기미주

형식을 치하다 신라계가 통합한 완안부의 아골타가 이런 후발해 발해민을 대거 흡수하고 남으로

고려 일대의 발해민(동여진족)까지 끌어 당기려 하자 충돌이 일어나면서 주진 정책으로 선회한게

당시 예종시기의 윤관 17만대군의 북진 정벌이군요.
     
전략설계 15-01-13 22:50
   
고려사 윤관전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의하면
함주에 병민 1,948정호, 영주에 1,238정호, 웅주에 1,436정호, 길주에 680정호, 복주에 632정호, 공험진에 532정호, 합계 6,466정호가 이주되었다는 기록이..

민지가 편찬한 〈동국편년강목 東國編年綱目〉에는 6만 9,000호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게..
그 좁은 지역에 머 먹을게 있다고 고려 인구의 1/10 가까이 간다는게 말이 되며,
동북 9성을 쌓고 비우는 1년간 계속 전투중으로 수년 내 금을 건국하는 완안부의 군세를
보더라도, 그 자리에 눌러 않을 수 없는 것으로..

고려사 윤관전에.. 한자리까지 이주한 가구가 정확히 나와있구만..
꼭 빠질을 해도, 저런 자료만 가져와서, 30-40만이라고 뻥을 쳐요?
그럼 윤관전의 저 한자리 숫자는 사기란 소리요?

저번에도 김종서가 6진을 쌓고 여진족의 절반이 흡수됐다고 뻥을 치더만..
6진이 함경북도 절반 크기 밖에 안되는 그 자리에 여진족 절반이 흡수된답디까?
          
Tenchu 15-01-14 13:40
   
그당시는 함경북도가 한반도 크기만했었죠.. ㅋㅋㅋ
          
굿잡스 15-01-14 21:01
   
민지가 편찬한 〈동국편년강목 東國編年綱目〉에는 6만 9,000호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게..
그 좁은 지역에 머 먹을게 있다고 고려 인구의 1/10 가까이 간다는게 말이 되며,
동북 9성을 쌓고 비우는 1년간 계속 전투중으로 수년 내 금을 건국하는 완안부의 군세를
보더라도, 그 자리에 눌러 않을 수 없는 것으로..

고려사 윤관전에.. 한자리까지 이주한 가구가 정확히 나와있구만..
꼭 빠질을 해도, 저런 자료만 가져와서, 30-40만이라고 뻥을 쳐요?
그럼 윤관전의 저 한자리 숫자는 사기란 소리요?

>??ㅋ 하여튼 본인 수준의 말본새 하군.

한줄 어디서 봤다고 뻥 어쩌고 사기 어쩌고(볼려면 제대로 보든지. 기본적으로 학설이라는 것도

여러가지가 제기되는 입장인데 본인 입맛에 안맞다고 뻥?하긴 이전부터 사료 한줄

안들고 와서 2,3차 가공된 것들 보고와서는 그기에 다시 본인 입맛따라 어쩌고 하든

식이였으니 기본 뻥질 열심히긴 했군.)

우선적으로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일대가 좁은 지역?? ㅋ두만강 넘어

길림성 일대까지 아우르고 있는 영토로 두만강 밖 700리(대략 300킬로)영토인데

함경도일대를 포함한 이 지역이 좁다?(이관련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이고 동국지

도,방동인, 윤희병의 연구내용이고). 그리고 고대영역과 현대 지도랑 기본 차이 개념이

없으니 현대 선의 개념으로 함경도 일대 좁은 지형으로 내려 뻗는 모양새나 보고 수준

낮은 소릴하지(고대의 영역이란 점의 개념으로 각 성이나 군사 요새적 진등 핵이 최소 사

방 수리에서 최대 수백리를 영역화 관할권 아래 두는 개념은 기본 지식으로 탑재)

그리고 후자의 이주민 대략 7만호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과장이 있음이 인정됨은 타당하

나 본인이 쳐올리고도 뭔가 기본 개념 자체가 없는 한심한 소리하군.

<함주에 병민 1,948정호, 영주에 1,238정호, 웅주에 1,436정호, 길주에 680정호, 복주에 632정호, 공험진에 532정호> 지금 본인 올린게  9개로 보임??

다음 해에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성을 더 쌓아다는 기록은 모르시남?

이들 성은 쌓기만 하고 그럼 텅텅 비워둬겠음? 이런 식 논리면 본인은 캐뻥질이거나

산수 계산도 못하는 쪽인가?(그기에 예종 6년에는 공험진에 산성까지 쌓는 기록이

나오면서 여진족에 돌려준 뒤에도 공험진은 빠져 여전히 관리되고 있는 기록이 나오구만.

이때문에 여진족도 이를 근거로 내투, 내항하는 식이 고려 이후에도 조선시대에도 꾸준

이 나오고 있고)

그리고 고려 인구를 본인은 얼마로 보는데 10분의 1 어쩌고가 하시남?

고려보다 조선시대에 인보장법(隣保長法)나 호패법등으로 강화되었다고 해도

백성들의 병역기피나 세금 회피를 위해 그리고 여성,유노년층, 노비등 제대로

파악이 안된 상당히 제한적 기록들로 실제는 이보다 훨씬 높았을 것로 보구만.

고려가 고요전쟁 당시 대체로 2,30만 대군을 운용함에 인구의 10퍼센트를 넘나들

정도의 병력 동원이라면 세계사에서도 가장 막대한 병력 동원이 된 독소전쟁의 고대

보다 산업. 도시화가 훨씬 높던 시절에도 살인적이고 어려운 비율인건 아시남?


<저번에도 김종서가 6진을 쌓고 여진족의 절반이 흡수됐다고 뻥을 치더만..
6진이 함경북도 절반 크기 밖에 안되는 그 자리에 여진족 절반이 흡수된답디까>??

그리고 이런 뭔 또 소리시남? 참.

조선이 여진족을 관할하에 동화 흡수 정책이 무슨 함경도 땅 어쩌고랑 단순히 뭔 직접적

상관임?? 에휴 내왕(來往),내투(來投),내부(來附) 이런 단어가 뭔 뜻인 줄 알긴 알고 떠듬?
          
전략설계 15-01-14 22:29
   
길게도 썼는데.. 두만강밖 700리란 소리말고는 없네..

윤관의 출정병력 17만도 한자리 수자까지 나와 있고..
이주한 호구수도 한자리까지 나와 있는 고려사 윤관전 기록은 반박도 못하고..

댁이 한국사를 새로 쓰지 않는 이상..
윤관 출정 전에 고려, 여진 경계는 함경남도 일대였는데..

17만이라도 부대를 나누다 여진에 포위된게 한두번도 아니고..
윤관 자신도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윤관이 두만강 이북 300킬로까지 전선을 넓혔다고??
이거는 윤관을 욕보이는 모자란 소리임..

당시 전쟁과정은 임진왜란만큼 자세히 묘사히 묘사되어 있는데..
두만강 이북 300킬로가 고려군이 최대로 올라간 지역일지는 모르나..
고려군이 상주하고 주민을 이주시킬만한 자리였다고 보면 이건 모자란 소리임..

함경남도 출발점부터 두만강 이북 300킬로면 전선만 600킬로인데..
고려군이 전선을 600킬로 넓혔다고?
이게 말이여 머여?

성을 쌓고 비우기 까지 1년 내내 고려-여진은 생과 사를 오고가면서 전쟁중이었고..
고려군이 성에서 포위된게 몇번인데..
고려인구의 1/10 가까이가 그리로 옮겨갔다구?
임란만큼 그 1년간 전사를 읽어보시고.. 그런 인구 대이동을 할 수 있는 당시 상황이었나
상식으로 사고해보시길..

김종서가 6진 개척하고 여진족 절반이 흡수됐다고,
댁이 한 소리 그대로 옮긴 것인데..
인제와서 먼 딴 소릴 함?
그 내용 밑에다가도 리플 달았구만..

고려사 자꾸 베껴오더만..
고려사에 있는 6,466정호 부인하는 근거가 머임?
1개성에 들어가는 단위를 보소?
끽해야 1천호씩으로 1만도 안되는 사람을 이주시켰고..
그럼 남은 3개성에 10만씩 가야되는데.. 전쟁중에 거기가 어디라고
1개에 10만씩 쳐넣는답디까?
1년이란 기간이 10만씩 이동할 기간이랍디까..

9개성 쌓았다고 9개성에 전부 주민을 이주한다는 공식이라도 있답디까?
일부 성은 순수 군사용으로 주민을 이주 안시킬 수도 있지.
고려사 윤관전은 합계라고 해서.. 이미 이주한 주민 합을 낸 것이라
3개성은 이주 안한 것으로 봐야지.. 우기기는..

끝으로, 질문..
1자리 숫자까지 표시된 고려사 자료는..
빠질에 있어 숫자 적어서 없는걸로 치는감??
               
굿잡스 15-01-14 22:50
   
?? 어디 단편적 몇조각 쳐들고와서는

이후 내내 하는 주특기는 난독질에 어그로 재시작.(매번 패턴이 똑같군. 참.)

고려 인구 10분의 1? (하긴 본인 수준에서 그리 보이긴 하겠군. 그리고 후자의

주장이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한글 독해력은 여전히 딸리남? 그기에 나머지 3개성

쪽 기록은 본인도 모르면서 뭔 개뻥 어쩌고 쳐하남?. 애초에 공험진은 돌려

주지 않는 것도 인지도 못하는 까막눈에 전후 흐름도 모르고 고대 영역이

어찌 돌아가는지 기본 바탕도 없는 수준으로 뭔 어쩌고 바로

위에 말해줘도 뭔 반복질. 번역기 돌려 댓글 담?)


그리고 내왕 내투 내부가 뭐냐니깐?? (고려 시대만 해도 소위 여진족

어쩌고 내투에 내항이고 인원이 얼마인줄은 암?? 그리고 뭔 조선시대 여진족이 수백만

명되는 줄 아남??ㅋ)


<≪삼국유사≫ 권1 칠십이국조(七十二國條)에 인용된 ≪후한서 後漢書≫에 의하면 “사한(四漢)이 조선사지(朝鮮四地)에 처음으로 사군(四郡)을 두었다가 …… 법령이 번거로워 칠십팔국(七十八國)으로 나누었으며, 각 만호(萬戶)”라고 기록돼 있으며, 그 중 서쪽의 마한이 54읍, 동쪽의 진한이 12읍, 그리고 남쪽의 변한이 12읍으로, 각기 나라라고 불렀다고 돼 있다.

또한 고구려조에 보면, “고구려 전성기에 21만500호”라는 구절이 있으며, ≪구당서 舊唐書≫의 고종건봉3년(高宗乾封三年) 계사조(癸巳條)에는 “고구려 멸망 때(668) 민호(民戶)의 수가 총계 69만7000호가 되었다.”고 부기하고 있다.

변한·백제조에는 “백제의 전성기에 15만2300호”라고 나와 있으며,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에는 “백제가 멸망할 당시(660)에…… 약 76만호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진한조에는 “신라 전성기에 경중(京中)의 호구수는 17만8936호”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삼국유사≫에서 삼국시대의 인구분석에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기록으로는 <가락국기 駕洛國記>에 기록된 “구간자시추장령총백성구일백호칠만오천인(九干者是酋長領總百姓{{%310}}一百戶七萬五千人)”이라는 구절이 있다.

물론, ‘百姓{{%310}}一百戶’라는 대목에서 ‘{{%310}}’자가 ‘凡’자냐 ‘九’자냐, 또한 ‘{{%310}}一百戶’가 ‘9,000백호’를 의미하는 것이냐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합리적으로 추정하여 본다면 이 구절은 호당 인구수를 계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310}}’을 ‘구(九)’로 하여 ‘구일백호’로 하면, 백호(百戶)가 91개라는 뜻이 되므로 총호수는 9,100호에 인구수가 7만5000명으로 호당 평균인구는 8.2명이 된다.

한편 ≪삼국사기≫는 편제상 이 시대의 인구분석에 도움을 줄만한 기록이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삼국유사≫의 단편적인 기록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본기(本紀) 9의 6면(六面)에 신라 경덕왕 16년(757) 행정구역을 개명(改名)하여 9주(州)가 관할하는 경(京)·군(郡)·현(縣)의 수를 기록하고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이 9주·5경·117군·293현으로 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어 현당 평균호수를 추정할 수 있다면 이 시기의 개략적인 인구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단편적인 기록들을 종합해서 고대의 인구규모를 재구성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당시기록들의 정확성여부도 문제려니와 당시에는 백성들이 병역기피나 조공부역을 포탈하기 위하여 신고를 허위로 한 일이 많았으며, 더욱이 여자나 유년·노년 인구는 부분적으로밖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어 당시의 인구수 파악에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록을 통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본다면, 우선 ≪삼국유사≫ 칠십이국조의 78국각1만호(七十八國各萬戶)의 시기를 삼한시대 초기인 서기 1년으로 잡고 이 시기의 호당 평균인구수를 앞서 계산한 8.2명으로 가정하였을 경우, 마한 54개 국이 54만 호에 인구 약 443만 명, 진한과 변한이 각기 12개 국으로 각각 12만 호에 인구 98만 명씩 있게 되므로 서기초 삼한에는 모두 78만 호에 약 640만 명의 인구가 있었던 것이 된다.

한편, 기록에 따르면 백제멸망기 및 통일신라시대가 전개되는 7세기 중엽, 백제의 인구가 76만 호에 약 623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매우 개괄적이기는 하나 삼한시대의 마한을 삼국시대의 백제와 동일한 지역으로 가정한다면, 서기초의 마한인구와 660년 경의 백제인구를 대비하는 데에서 이 지역의 연평균인구증가율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를 계산하면, 그 치(値)는 연평균 0.0518%가 되는데, 이 성장률은 서기 이후 17세기 중엽까지의 세계인구의 연평균증가율인 0.04∼0.05%의 수준과 비슷하여 그 타당성이 높다.

따라서 그 타당도를 고려하여 역으로 근대적 인구조사가 실시된 1906년 일본관헌에 의해서 조사된 우리 나라의 인구수를 기수(基數)로 이 성장률 0. 0518%를 대입시켜 고대의 인구수를 추정하면,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한 7세기 중엽 우리 나라 인구는 약 675만 명이 되고 서기초 삼한시대의 인구는 약 482만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1933년 10월 일본 도다이사(東大寺)의 쇼소원에서 발견된 8세기 중엽 신라시대의 4개 촌락의 촌적부에 관한 인구통계학적 분석은 한정된 사례수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발견된 4개 촌락의 호수는 모두 43호에 지나지 않으며, 기록상의 총 인구수도 442명으로, 이 기록에 의한 호당인구는 10.3명이다.

이는 앞에서 삼한 및 통일신라시대의 호당평균인구 8.2명보다 높다. 기록에 따른 이들의 성별·연령별 인구구조는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선 전체인구의 성비(性比)가 78.2로 매우 낮을 뿐만 아니라, 특히 정수(丁數:15∼59세의 생산연령인구)에 있어서는 68.3으로 매우 낮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5387&cid=46634&categoryId=46634
               
전략설계 15-01-14 23:05
   
고려사 윤관전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의하면
함주에 병민 1,948정호, 영주에 1,238정호, 웅주에 1,436정호, 길주에 680정호, 복주에 632정호, 공험진에 532정호, 합계 6,466정호가 이주되었다는 기록..

이걸 해독을 못하시오?
이주한 자리만 적시한 것인데.. 3개성 소리를 모르단 한심한 소릴 하는지..
합계란 소리가 먼지 모르네..
3개성은 이주 안했단 소리요..
그래서 부정한다??

댁이 역사요..
고려사가 역사가 아니라 댁이 역사 그 자체네요..
기록을 갖다 메겨줘도..

허구헌날 남 책만 배껴오면서..
숫자 적다고 고려사에 있는 내용도 트집잡고 부정하네..

윤관 출정한 병력도 1자리 단위로 기록돼있고..
이주한 기록도 1자리 단위로 기록돼 있는데..
댁같이 빠질하는 사람은 이런 1단위 기록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1단위 기록하면서 3개성 이주했는데 그걸 일부러 빠트리겠오..
그러고나서 합계란 소릴 했겠오??
이주 안했으니까 뺀거지..

그래서 남은 3개성으로 30만이 갔다??
말같지 않은 소리했는데 그거나 입증해보시지..

30-40만이 이주했다고 얘기를 먼저 꺼내서 반박하는 것인데..
본론은 어디로 가고..
1/10이 어쩌고 호당 인구수나 한가하게 따지고 계시나..
                    
굿잡스 15-01-14 23:11
   
?? ㅋㅋ 이건 뭔 내내 하는 말 또하고 또하고 ㅋ 참.

전략> 저 기록을 몰라서 어쩌고 인줄 아남? 그리고 이주를 안했다?? 성은 짓는

데 사람은 없다?? 그럼 그기에 누가 방어 함? 말같은 소리 쳐하길 바람(후자가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고 분명히 말해줘도 이건 뭔 이정도면 난독증이 중증이구

만)

에휴..

그기에 얼씨구나 뭔 개뻥이니 사기니 ㅋ. 어쩌고에 뭔 좁니(그기가

무슨 본인 마당 크기임??) 다 돌려준 줄 알고 어쩌고.

다시 말하는데 내왕 내투 내부가 뭐냐니깐?? 알긴 알고 떠듬??


허구한날 책 베꺼?? 본인은 허구한날 헛소리임?? ㅋ 그 베껴 오든 모든

본인이라도 제대로된 논문이라고 읽고 습득할 수준되면 베껴와서 말해보든지

ㅋ제발 그래주길.(그리고 본인 수준 자폭질 쳐하는데 사학과 교수고 논문 낼때 기본 논문의

거의 상당수 지문이 기존 관련 수많은 학자들의 논문을 주인용으로 가져와서

본인의 연구성과와 비교 교차하면서 설명하는 건 알고 떠듬?? 어디 제대로된

논문 한편이라도 보고 습득해 본적이 없으니 저런 허접소리나 매번 나오지.쯧.)
                    
전략설계 15-01-17 11:03
   
고려사 내용은 근거없이 부정하면서, 논문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동북9성에 이주한 내용을..
여기 저기 요기 얼마 해서 '합계' 6천 하면 끝난 얘기지..
3곳이 빠져있다고 물고 늘어지네..
그건 고려사 윤관전 쓴 사람하고 논쟁하시고??

조선시대에도 6진에 이주하기 싫어서 xx하는 사람이 속출했는데..
지 고향땅 버리기가 쉽나.. 그 자리가 어디라고 한번 가면 못 돌아오는데..
여진이 성을 각개격파로 포위공격하고, 윤관까지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
성을 구축하고 1년이란 짧은 기간에..
30만-40만이 이주했다는 것은,
개닭대가리도 아니란걸 알텐데..
 
학계에서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는.. 30-40만 이주 여기서 사람들 모른다 뻥치다..
고려사 자료 제시했니까.. 헷소리하고 자빠졌네..

전에도..
안시성싸움, 설연타가 남하해서 당태종이 빽한걸..
끝까지 아니다고 하다.. 들통나니까..
주필산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몰살당했냐고 화제를 바꾸더만..

인정할건 인정하슈..
댁이 이주한 사람 직접 세봤어??
1자리 단위까지 어느 성으로 얼마가 갔다는 고려사 내용까지 부정하게??
숫자 적다는 이유 하나가 죄구먼..

그니까 '빠질한다' 소리 듣는거여..
                         
굿잡스 15-01-17 13:36
   
고려사 내용은 근거없이 부정하면서, 논문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 중증 난독증 환자님아 윗글에 고려사 기록에 대해 뭐라고 몇번을

말했는지 100번 정독.(논문 한편 본적 없으니 내내 헛소리나 쳐하지 쯧)


그리고 왜 답을 못함?? ㅋ 나머지 3개 성의 인구는 어디로 가고?? 본인이

알리가 없지. 알리 없으면서 전체 인원수를 단정쳐하남?(xx한 사람

속출???? ㅋㅋ 이런 기록이 어디에 나오남?? 함 올려 주길 ㅋ 원문은 보고

읽을 줄 알긴 아남? 아니 1차 원문은 찾아서 본적은 있음?? 보닌 기초 한자

도 제대로 못읽는 수준같더만)

논문을 본적 없으니 학계 연구 발표나 주장들이 어떻게 정립되어 돌아

가는지 모르지. 수준 낮게 어디 교과서 중고딩 애들 수능 시험마냥 답글로

올려주면 끝나는게 역사줄 아는 수준하군.  공험진은 돌려주지 않는 내

용도 전혀 모르고 있고 무슨 고대 영역의 개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기초도 없고, 내왕 내투 내부가 뭐냐니깐?? 왜 답을 계속해서

못하남??(고작 내내 쳐하는게 번역기 돌려 난독질하듯 똑같은 말뿐의

똑같은 어그로 패턴질. 그기에 한참 있다 지난 글 함 보면 뒷늦게

헛소리 댓글이나 쳐달고 쯧. 막상 몇마디 대회해보면 중간 중간에

댓글 수정질에 살이나 보태고. 뭐 그런다고 본인 수준이 올라가고

점수 주남?? ㅋ 어그로나 내내 끌다 혼자 정신 승리질 하군. 한심한.. 쯧.)


<안시성싸움, 설연타가 남하해서 당태종이 빽한걸..
끝까지 아니다고 하다.. 들통나니까.. >?? ㅋㅋ 그리고 이건 본인 무식

들통난 사건 아님? 어디서 겉햝기로 배워와서는 주필산 15만 대군

다 몰살 어쩌고 쳐떠들다 이미 몇십년 전부터 나온 연구 내용과 사료

올려주니 똑같은 어그로 패턴으로 반복질로 혼자 정신 자위수준이나 쳐

해놓곤. 어구..
     
굿잡스 15-01-14 21:54
   
위에서도 아래 글에도 누누이 말했지만 발해 멸망 후 신라계가 통합한 일부 흑수말갈 외에

대다수 발해민이 변칭 범칭되어져 나온게 여진족이였고 이들은 여전히 역사적 공동체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게 한규철 교수의 연구내용이며 이는 고려사등 여진족으로 불리어 지는

발해민들의 꾸준한 내왕, 내투등에서도 지속적으로 확인. 이런 인식은 이후 고려 조선초기로

이어져 여전히 지속적 나름의 공동체적 역사,지리 인식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그외에도 남북국시대 이후 고려 입장에서도 이런 북방의 제번들을 아우러는 동일체적

의식과 협력관계가 이미 고려 초 후삼국 통일시기부터 명확히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



<高麗史에 국적이 명확한 ‘渤海人’의 고려내투 기록은 ‘契丹’‧‘女眞’이 많이 나오

는 현종 년간부터 줄어든다. 그러나 ‘渤海’에 대한 기록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으

며, 발해 멸망 후 189년이 지난 睿宗 12년까지도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契丹’‧‘女

眞’의 고려내투도 이들 기록과 함께 끝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도 주목되는 바다. 비록 규모

나 횟수면에서는 ‘渤海’가 ‘契丹’‧‘女眞’에는 훨씬 못미치나, 이들 삼자의 고려내투

기록은 睿宗 12년까지 같이 나오고 있다. 결국 ‘渤海’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완전히 사

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두 기록과 끝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는 사실은, 발해계 契丹‧女眞人

의 실상 파악에 시사해 주는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여진이 발해유민과 흑수말갈을 가리키는 종족명이었고, 다수의 여진은 발해시대 발해인이었

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진과 고려의 관계는 발해유민과 고려의 관계로 생각할 수 있다.



여진의 고려 내투는 태조 4년(921)에 들어 처음 나타난다. 여진의 고려 투화는 거란과 달리

대규모적인 것이 많았다. 그리고, 여진의 고려 내투·내부는 그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자, 정치

적 보호자로서 고려조정을 선택하였다는 의미도 있다. 어떠한 이유로든 고려로의 이동은 그

들의 생존과 깊은 관련이 있었고, 거란의 여진(발해유민) 토벌과 관련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또한 부락단위의 고려 왕래는 고려에 대한 정치적 추파로써 여진부락간의 우위 확

보를 위해 고려를 세력 배경으로 삼고자 하였던 면도 있었다.>

한규철 -高麗 來投·來往 女眞人중에서.
굿잡스 15-01-13 13:35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고려의 주진 정책으로 직접적 지배 선회로 윤관이 동북 9성을 쌓고

3,40만을 이주 개척하고 이후 돌려줬다고 하지만 원시기에 이곳을 다스리고 있던

고려민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땅을 가지고 항복하면서 조휘로 총관(摠管)을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관할이 지속되고 있었고 이후 공민왕이 재차 복속해서 관리를 파견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의 초기 기록내용입니다. 이를 통해 조명간의 동북방 국경선에서 공험진 이남을

조선의 지배지로 인정받고 조선 스스로가 동북방의 사군 육진 개척등 여진족을 대대적으로 관할 아래

절반 이상을 흡수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해 나가면서 명과의 무역에서 이런 조선이 여진족을 휘하로 한

말을 받아 명에게 선불로 10배로 후려 팔아 먹을 수 있었던 이유이고 15,6세기 조선의 주변 여진, 왜,류큐,

동남아등에 따로 독자적 군사,정치,외교,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대조선만의 황제적 질서와 인식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 역시도 선대의 이런 일찍이 고려의 동서번에 대한 정립과 그에 앞선 고구려의 3차원적

천하관의 영향 아래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천하관에 입각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고구려의

이런 천하관도 앞선 선대 고조선 시대의 옛 고토회복이라는 다물 정신의 국가 이념

이나 주몽신화에서 보이는 천자의 손자, 하백의 외손등의 세계관에서 알 수 있듯 이미 선

대 천하관 아래 이어져 온 인식)
굿잡스 15-01-13 13:36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병 신 19년(936), 후진(後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원년ㆍ거란 천현 11년

 

○ 가을 9월에 왕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이르러 군사를 합쳐 일선군(一善郡)으로 나아가 머물렀는데, 신검(神劒)이 군사를 이끌고 이에 대항하여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왕이 견훤과 함께 군사를 사열하고 견훤과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述熙)ㆍ황보금산(皇甫金山)과 원윤(元尹) 강유영(康柔英)이 마군(馬軍) 1만 명을 거느리고, 지천군 대장군(支天軍大將軍) 원윤(元尹) 능달(能達)ㆍ기언(奇言)ㆍ한순명(韓順明)ㆍ흔악(昕岳)과 정조(正朝) 영직(英直)ㆍ광세(廣世) 등이 보군 1만 명을 거느려 좌강(左綱)이 되었다. 대상(大相)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박수경(朴守卿)과 원보(元甫) 연주(連珠)ㆍ원윤 훤량(萱良) 등이 마군(馬軍) 1만 명을 거느리고, 보천군 대장군(補天軍大將軍) 원윤 삼순(三順)ㆍ준량(俊良)과 정조 영유(英儒)ㆍ길강충(吉康忠)ㆍ흔계(昕繼) 등이 보군(步軍) 1만 명을 거느리어 우강(右綱)이 되었다. 명주(溟州) 대광(大匡) 왕순식(王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렴(王廉)ㆍ왕예(王乂)와 원보 인일(仁一) 등이 마군(馬軍) 2만 명을 거느리고, 대상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ㆍ관헌(官憲) 등이 흑수(黑水)ㆍ달고(達姑)ㆍ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 9천 5백 명을 거느리며, 우천군 대장군(佑天軍大將軍) 원윤 정순(貞順)과 정조 애진(哀珍) 등이 보군(步軍) 1천 명을 거느리고, 천무군 대장군(天武軍大將軍) 원윤 종희(宗熙)와 정조 견훤(見萱) 등이 보군 1천 명을 거느리며, 간천군 대장군(杆天軍大將軍) 김극종(金克宗)과 원보 조간(助杆) 등이 보군 1천 명을 거느려서 중군(中軍)이 되었다. 또 대장군 대상 공훤(公萱)ㆍ원윤 능필(能弼)ㆍ장군 왕함윤(王含允) 등이 기병 3백 명과 여러 성의 군사 1만 4천 7백 명을 거느리어 삼군(三軍)의 원병(援兵)이 되었다.
꼬마러브 15-01-13 13:36
   
명나라에있어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를 뽑자면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나라가 조선이였죠 다음이 베트남,류쿠정도 되려나?ㅋ 자주국방에서의 손해는.. 그런식으로 본다면 반대로 실전전투를 함으로써 더 잘싸울 수 있었다고도 볼수있지않음? 여진족과 전투를 한 게 명나라가 우리에게 임진왜란을 안겨줬다고도 볼 수 있군요ㅋ
굿잡스 15-01-13 13:36
   
태종 7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5월 19일(기미) 4번째기사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110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135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Tenchu 15-01-14 13:45
   
조선이 좃망테크탄건... 부국강병 추구하던 훈구파를 부패했다며 몰아낸 사림파들이 정권잡기시작한뒤부터였슴.
사림파가 훈구파 아예 쫒아낸게 선조때임...
     
부르르르 15-01-14 22:07
   
제가 보는 조선의 망테크는 서인의 득세와 거기서 갈린 노론의 집권과 탐욕이라 생각합니다.... 일제 식민사관이 관통하는노선 이기도 하구요...
영도갈매기 15-01-15 07:02
   
원래 조공무역이란게 그런거임...

패권 국가라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거기다 국경 안정화를 통해 반란을 일으킬 군벌 양상에 대한 견제였음..

물론 충성을 바치는 댓가로 많은것을 줘야하지만... 그정도는 위에 언급한 두가지를 얻는
대가라고 보면됨...

그정도도 안해주고 내놔라고 압박하면 바로 들고 일어나지...

참고로 한반도가 들고 일어나서 망하지 않은 한족 왕조가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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