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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1-08 20:15
[일본] 19세기 (1800년대) 일본 조선 비교 증거자료
 글쓴이 : shrekandy
조회 : 8,259  

걍 기왕 올리는거 추가로 올립니다

19세기 1800년대 조선은 세도정치로 망조가 들기시작하는거...다들 아실테죠

그나저나 예전에 일본은 여자가 조선 남자의 아이를 가지면 일본 정부에서 돈받고 보상받는다고 한적이 있었는데요, 조선 헌정 스님께서 19세기에 일본에 표류한후 쓰신 "일본 표해록" 이라는 현 사학계에서도 아주 귀중하게 다루는 책에서 출저한 정보였죠.

오늘은 아예 그 기록을 직접 가져왔습니다 (사실 예전부터 저장해둔거 걍 꺼낸거지만...) 예전에 어느 분이 역갤 뭐시기들이 에도시대가 조선보다 좋았네 기술도 좋았네 뭐네로 난리쳐서 막 반론 어떻게 하냐 그러신적이 있는데 이게 참고자료가 될지도?

추가로 밑 글을 실제 일본 표해록 기록과 어느 교수님의 추가 설명/코멘트등이 섞여 있으니 재밌게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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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선이 표착한 곳은 일본 규슈(九州) 앞바다 오시마우라(大島浦)라는 섬이었다. 계산해보면, 표류선은 순전히 서북풍에 떠밀린 나머지 동래 앞바다에서 일본 후쿠오카(福岡) 앞바다까지의 약 100여 마일(200리) 거리를 단 이틀 만에 도해(渡海)하는 엄청난 대기록을 수립한 셈이었다. 

해안을 오가는 주민들이 많았으나 누구도 가까이 오려하지 않았다. 표류자들은 상륙은 꿈도 꾸지 못 하고 배에 웅크리고만 있었는데, 그 날(28일) 오후 종이와 붓을 든 군 장교(將校) 하나가 졸개를 앞세우고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일본인과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장교가 필담(筆談)으로 물었다. 

“어느 나라, 어느 읍 사람이오((何國何邑人也)?” 

현정 스님이 답했다. 

“나는 조선국 전라도 대둔사 대사입니다. 경주 불석산에서 옥을 쪼아 만든 천불산을 선편으로 운반하다가 동래 앞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곳이 어느 나라 어느 고을인지를 묻자 장교가 한자로 썼다. 

- 日本 西海道 筑前國 宗像郡 大島浦(일본 서해도 축전국 종상군 대도포). 

그것으로 장교는 돌아갔는데, 잠시 후 또 다른 수험관(搜驗官;수사관)이 와서 임시막사를 설치한 다음 쇠도끼(國鐵鉞)를 든 두 사람에게 선내의 온갖 물건과 승객의 의복까지 실오라기 하나 남김없이 모두 조사, 기록하였다. 그런 다음 쌀을 비롯한 두부·소금·간장·무·참기름·땔나무 등 일용품을 공급해 주었는데, 이 때 승려를 제외한 일반 승객에게는 별도로 생선 한 마리씩을 더 얹어주었다. 

특히 쌀은 1인당 하루에 한 됫박 반(1升5合)이나 되었는데, 배급 담당자가 반 넘어 떼어먹었으나 그럼에도 양은 축나지 않았다(일본의 도량형은 조선의 두 배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선법(船法)에 따라 표류자들의 상륙은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표류자들은 닷새간 유숙하였는데, 그 영문을 알지 못 하였으나 상급관청인 나가사키진(長崎鎭) 당국의 표류자에 대한 향후의 조치를 하달받으려고 그랬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드디어 호송이 시작되었다. 선도역인 지로선(指路船)과 지휘선인 관선(官船) 각 1척씩에 병사 4명씩이 탄 비선(飛船) 40척 등 모두 42척이 동원됐을 만큼 그 규모가 컸다. 일본인 책임자는 표류선더러 일체의 조선(操船)을 하지말도록 지시한 다음, 세 그룹으로 나눈 비선을 앞과 좌우로 배치시킨 가운데 밧줄로 연결한 다음 예인(曳引)을 시작하여 30리 거리의 쓰야자키우라(津屋崎浦)라는 곳으로 1차 이동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마을 규모는 앞서의 오시마우라보다 열 배도 더 컸고 번화하였는데, 그곳에서도 앞서와 같은 신문이 되풀이되었다. 밤이 되자 각선에 두 자루씩의 양초를 공급해주어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니 그로써 그 나라의 부유함을 알 만하였다고 현정은 쓰고 있다. 

그 날 이후 바람이 불지 않아 열흘이나 발이 묶였다. 드디어 12월 11일 재기동을 하였는데, 첫 표착지인 대도포로부터 나가사키진에 도달하기까지의 해로는 다음과 같다. 

대도포 출발(12월 2일) → 당백포(唐白浦/90리) → 백도(栢島/100리) → 호자도(呼子島/40리) → 삼율도(三栗島/100리) → 서도(西島/100리)에 이어 한 달 후(이듬해 정월 2일) 드디어 종착점인 나가사키진에 도착하였다. 그 물길이 실로 1천 리도 넘는 450리였다. 

표류자들은 어떤 차별을 받음이 없이 그곳에서 석 달간 머물렀다. 현정은 체류하고 있는 동안 자신이 직접 본 바를 귀국한 다음 여과없이 적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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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표객도
- 나가사키진은 큰 도시였다(長崎鎭 大都會也). 누각과 저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였으며, 여염집이 즐비하였다. 외국 선박들이 앞바다에 가득 차 있었고, 화물이 폭주하여 집집마다 금은보화요, 사람들은 모두 비단을 감고 있었다.…… 

표류자 27인은 모두 여덟 곳의 조선관(朝鮮館)에 분산, 기거했다. 일본국으로는 예로부터 타국선의 표착이 잦아 조선관 말고도 중국관과 러시아관을 별도로 두고 있었다. 

어느 날 표류자들은 관례에 따라 나가사키진의 도주(島主)를 예방하였는데, 그 대목의 묘사를 보면 당시 일본국의 시대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 몇 개나 되는 솟을대문을 지나서야 우리는 본관에 이르렀다. 본채 용마루는 매우 높아 우리나라 정주감영(全州監營)의 갑절이나 되었다. 기둥은 모두 검붉은 옷칠이 되어 있었고, 벽은 금박지를 입혀 서로 비추도록 하고 있었다.…… 본채 마당에 들어서서야 우리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관인(官人)을 뵙게 되었는데, 용모는 지극히 사랑할 만하였다. 수도인 오사카성(大阪省)으로부터 온 도주로, 그가 물으면 양쪽으로 부복한 통역사가 전해주는 식이었다.…… 

당시 중국과는 무역거래가 활발했던 모양으로, 항내에는 마침 4척의 중국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 중국선은 매우 크고 높았다. 길이가 무려 70여 파(坡;성인 양팔 거리)에, 높이는 거의 50여 파였다(그 옆에서 홍원선의 14파 돛대는 반에도 미치지 못 하였다). 선실과 창문은 땅에 지은 집 같았고, 배 전체는 철갑(鐵甲)으로 감싸져 있었다. 등나무 줄기로 만든 닻줄 네 개가 사방을 묶고 있으니 풍랑 속에서도 요동치지 않았다. 배 건조비를 물었더니, 2천 냥쯤 된다 하였고, 출항을 앞두면 반드시 점을 치고 굿을 하는데, 그 비용이 또한 1천 냥이라 하였다.……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인식은 예로부터 변함없이 좋았다고 한다. 평범한 뱃사람이어도 다투어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유를 물었더니 ‘조선은 부처님의 나라여서’라고 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언제나 꿇어앉는 자세를 취하였는데, 부엌에서 불을 지피는 계집종도 그러하였다. 남녀 구분없이 뒤섞여 앉는 것도 유별났다. 그래서 성(性)에 대한 인식도 매우 개방적이어서, 어떤 여자들은 사람들 앞에서도 거리낌없이 ‘요철(凹凸;성기)’을 말하는 게 그 정도가 우심하였다. 

더욱 해괴한 것은, 왜녀(倭女)가 조선사람과 정을 통하면 스스로 관가에 보고하는 제도인데, 그러면 정부에서는 출산날짜를 계산하여 조선아이가 맞으면 장려금을 지급해 주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또 일본법에는 여자가 남자를 버리면 죄가 되지만, 절개를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약 남편이 여러 해 집을 떠날 경우가 생기면 처를 친구에게 맡기는데, 그 사이에 아이가 생겨도 원 남편의 호적에 등재한다고 한다. 여자들은 남편과 사별하더라도 결코 개가(改嫁)하지 않으며, 아들이 있으면 아들에게, 딸이 있으면 사위에게 의지하고, 그 누구도 없으면 삭발하여 비구니(比丘尼)가 된다.…… 

현정이 관찰한 일본인들의 전통과 풍습인데, 이 말고도 뒷장에 갖가지 특이점을 부록(附錄)처럼 정리하고 있어 이를 요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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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부(富)는 쌀이나 돈이 아니라, 금은을 보관한 창고 크기가 결정한다. 설령 빈한한 사람일지라도 자물쇠를 채운 창고를 갖고 있었으며, 반면 쌀이나 전은 방치해 두고 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금은이 많기 때문에 항상 다른 나라의 침략을 걱정하고 있다’는 식으로 나가시키 주민들은 말할 정도였다. 

도적도(盜賊島)라는 섬이 있다. 도둑질을 세 번하면 권솔까지 섬으로 보내어 왕래조차 못 하게 하는데, 그곳에는 도적들만 집단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에게 일본이나 일본인이라 부르면 좋아하고, 왜인(倭人)이라고 하면 매우 싫어하였다. 

겨울에도 따뜻하여 돋아난 죽순을 캐 먹었으며, 감자는 조선의 무 뿌리처럼 흔하였다. 감귤은 달고 향기를 풍겼는데, 약간 신맛을 내어 그야말로 신선의 맛이었다. 조선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애초부터 좋은 열매를 보내지 않은 탓이었다. 


왜인들은 조선인을 매우 흠모하였다. 간혹 제주인들이 표착해오면 그들이 쓰고 있던 털모자 등을 귀중하게 보관하였다. 또 연전에 제주 현감(縣監)이 표류해 와 일곱 달 머무는 동안 몇 장의 붓글씨를 남겼는데, 그것을 비단으로 장식한 족자(簇子)로 만들어 내실에 걸어 두었다. 

원래 부역(賦役) 제도는 없었다. 황제는 별도의 납공(納貢)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토지에서 생산한 곡식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변방의 천민으로부터 들은 말인데, 아마도 자상한 내막을 모른 결과가 아닌가 하고 현정은 쓰고 있다. 세금이 없는 대신 임기를 마친 도주에게는 상인들이 모은 전별금을 전달하였다. 

황성(오사카성)은 모르겠으나 지방 고을에는 학당이 하나도 없었다. 조선과 달리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없어서 학문을 해봐야 입신양명할 기회가 없으니 학문을 등한히 할 수밖에 없었다. 

 

집집마다 한 좌씩의 부처님을 모시고 음식을 먹을 때는 먼저 제(祭)부터 올린다. 공후경상(公侯卿相) 아들 중에 아우는 모두 승려가 된다. 승려들은 법화경(法華經) 이외의 경전이나 참선, 혹은 수륙불사(水陸佛事)도 이해하지 못 하였다. 장삼(長衫)은 모두 흑색이고, 가사(袈裟)는 붉은 공단(貢緞)이었다. 

처마에는 구리통을 달아 물을 한곳에 모았고, 간혹 지붕을 풀을 씌운 집도 있었는데, 돌로 쌓은 담장은 회칠을 하였다. 

손님에게는 차를 권하고, 다음에 떡과 과일을 내놓는다. 소주는 없고, 1년 이상 숙성시킨 청주뿐인데, 그 맛이 절묘하였다. 

매일 해가 뜨기 전에 강에서 떠낸 물로 손을 씻고, 사방 하늘을 향해 절을 하였다. 

비가 내리면 기름우산을 들었고, 물건을 옮길 때는 바구니를 양쪽에 매단 장대를 어께에 맸다. 

사람이 죽으면 사찰 근처의 들판에 매장하는데, 묏자리를 조성하지 않고 다만 돌 하나에 이름 석 자만 적을 뿐이어서 도처가 북망산(北邙山) 같았다. 신주(神主)는 사찰에 두고 제사는 묘지에서 지냈다. 

말과 소는 있었으나 노새와 가라말(驪;털빛이 검음 말)은 보이지 않았다. 

고래잡이에 열성적이었다. 고래가 나타나면 배가 총출동하여 새끼줄로 만든 어망으로 길을 막은 다음 돌아가며 긴 갈고리창을 던져 죽은 다음 끌고 온다. 큰 고래는 길이가 40파나 되었다. 고래를 잡기 위해 조선 연안까지 원정을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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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자들이 귀국 길에 오른 것은 나가사키에 석 달 보름을 머문 다음의 4월 14일이었다. 그리고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당초 목적항인 해남 앞바다에 도착하여 닻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석 달 후인 7월 14일이었다. 
  소식을 듣고 절간 사람들이 모두 달려와 생환을 축하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일행은 완도선 소식을 듣는다. 폭풍우를 피해 동래 만으로 용케 피항한 다음 홍원선을 기다렸으나 종무소식이어서 며칠 후 혼자 뱃머리를 돌려 해남에 도착, 싣고 있던 불상 232좌를 모두 하역하였다는 것이다. 거기에 한 좌도 망실됨 없이 홍원선이 싣고 있던 768좌를 모두 대둔사에 봉안하니 비로소 ‘천불전(千佛殿)’이 완성된 것이었다. 

말미에 현정은 이렇게 쓰고 있다. 

- 무릇 가까운 산이나 냇가로 놀러가더라도 기록으로 남기거늘 하물며 험난한 항해이면서 표착한 곳이 이역(異域)이었으니 어찌 기록해두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기억을 더듬어 그곳 사람들의 번화한 모습과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일과 고기를 잡고 나물 캐는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서술하여 후세에게 보이고자 한다.…… 

이 기록(<일본 표해록>)을 두고, 불교사상연구원 이종수 연구위원은, 

- 불교인의 해외교류가 원활하지 못 했던 조선시대에 장기간의 표류 과정에도 신심을 잃지 않고 무사귀환하여 천불전을 완성하였다는 종교의 감화력을 보인 영험담(靈驗談)이기도 하여 이 문헌의 소중한 가치를.…… 

이렇게 호평하고 있다. 

이 말고도 많은 국내 학자들이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에는 일본 당국이 남긴 <조사보고서>도 전해져 두 나라 간 표류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이고 있다. 

사족(蛇足)이지만, 이 기록자는 사공이 아닌 승려였다. 따라서 그의 기록이 현지의 종교(불교) 묘사에 치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더라도, 일본인들의 일상생활과 관련한 일부 뒷골목 풍경 묘사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 두어 가지 삽화(揷畵)를 보면 다음과 같다. 

창녀집은 중국관 가까이 있었는데, 높은 누각에 벽은 금을 입혀 지극히 휘황찬란하였다. 30명쯤 되는 창녀들 모두 빛나는 의상으로 눈을 아찔하게 하였고, 향기는 날아서 코에 와 닿았다. 

창녀들은 멀리서 보면 구름 위 선녀 같았지만, 행실은 음란하기 그지없어 개나 돼지와 같았다. 

그들은 날마다 중국관으로 들어갔으며, 때로는 러시아관에서도 숙박할 정도로 교류가 극심하였다.…… 


극도로 언행을 정갈히 하여야 할, 속세를 떠난 승려가 뒷골목을 자주 기웃거린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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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으셨나요? 이 글을 줄이면

1. 일본이 19세기에 꽤 어느정도 잘살긴 한듯 (다만 또 다른 통계나 사진보면 에도 시대가 오히려 극악했던 시기란 말도 있어서...)

2. 일본=성진국

3.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좋아하고 우러러 보았다. 조선이란 나라 자체를 부처님의 나라로 보았다. 조선 아기를 가지면 돈도 주었다 (근데 지금은 왜이러니)

4. 일본은 당시 학교가 없었다! 헉!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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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동자 15-01-08 21:36
   
잘살았겠죠..... 일부 귀족들과 거상들만요..... 먹을게 없어서 농민반란도 엄청 일어났고 심지어 사람도 잡아먹는 상황이었는데요.사실 당시엔 딱히 일본만 그런건 아니지만요. 안그런 조선이 이상한거....
mymiky 15-01-08 21:44
   
누가 말했지 않았었나요?
에도시대는 우리나라로치면 고려시대랑 비슷한 면이 있다고-
사병거느리고, 대궐만한 집과 농장을 경영하던 소수의 귀족들. 뭐 이런면을 보자면 비슷한거 같기도 하고..
     
나와나 15-01-08 22:39
   
그래도 고려 시대는 과거 보고 관직 진출이라도 됬고
나라에서 의창, 활인서같은 기구로 구휼 정책도 피고 했었죠
근데 에도 시대는..
차라리 신라 하대랑 비슷하죠
신칸 코타이 제도도 신라 상수리 제도와 유사하고..
박하수 15-01-08 22:06
   
님 동아시아게시판에만 전문적(?)으로 글 쓰시네요
꼬마러브 15-01-08 23:06
   
일본이라.. 글세요ㅋ 에도시대초기 17세기말~18세기초 때를 원록(겐로쿠)시대라고 해서 경기가 아주 좋았다고는 하지만 겐로쿠시기가 끝나고 나서는 오히려 막부세력과 신흥세력간의 세력다툼으로 휘청휘청거렸고 가뭄은 계속해서 발생하는데 지배계급은 농민들을 계속해서 착취하고 여기저기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상황이였죠. 이렇게 혼란스러운 사이 여러가지 개혁들이 단행하게 되고 결국 19세기 말 메이지유신이 성공하면서 다시 부흥하기 시작한것이지 19세기 일본이 전체적으로 잘살았다고 하는 것은 오류죠.
아비요 15-01-09 04:34
   
나가사키가 저시대엔 무역항으로 정말 대단한 곳이었죠. 말그대로 금과 은이 흐르느 곳이었는데 안좋았을리 없죠. 우리나라로 말하면 고려시절 벽란도쯤 되죠.
만법귀일 15-01-09 07:49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가 신라인인데..

키요케는 일본이 백제,고구려인이라고 단정을 하네요.

한국인은 신라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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