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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1-07 00:58
[통일] 고려가 한반도에 없었다라는 증거도 많습니다.
 글쓴이 : 만법귀일
조회 : 7,662  

신당서 고려.png

신당서 백제.png

신당서 신라.png


신당서를 소개합니다.


고려는 한반도에 없었다는 명확한 증거이기고 합니다.

구오대사는 물론 24사를 연구해 봐도 우리가 알고 있는 교과서의 고려는 아닌 듯 합니다.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소유하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
-
송서<백제전>



"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 남방 월주에 닿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 국경까지
남쪽은 왜국에 이른다
. 백제는 동,서 두곳에 서울을 두고있다."
-
구당서 <백제전>



"백제국이 양자강 어구를 좌안을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 양대에 이르기 까지 점령하고 있었고, 후위 때에는 중원을 차지하였다."
-
주서 <백제전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 ()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노나라를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
삼국사기 <최치원전>


"백제국이 진 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 양대에양자강 좌우를 차지하고 있었다."
-
북사 <백제전>


“백제는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 해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월남,베트남)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
신당서 <백제전>



<구당서> 75 위운기전과 <신당서> 116 위운기전<자치통감> 180 수기 4 양제 대업 원년(A.D.605)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습니다. 


 


거란이 영주지역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위운기에게 명을 내려 돌궐의 병사를 이끌고서 거란부락을 토벌하도록 보냈다. 돌궐의 계민가한이 병사 2만명을 동원했다. (중략) 운기가 거란의 경계에 들어갈 때에 돌궐의 병사 2만을 상인단으로 위장시켜 유성에서 고려와 교역하러 간다고 거란에게 속이고, 무리 가운데 수나라 사신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감히 말하는 자는 죽여버렸다. 거란이 방어를 하지 않았다.
會契丹入抄營州, 詔雲起護突厥兵 往討契丹部落 啓民可汗發騎 (중략) 雲起旣入其界, 使突厥詐云向柳城郡 欲共高麗貿易. 勿言營中有隋使, 敢漏泄者斬之. 契丹不備 


(5) 갑자일에 거란에서 오윤판관 야율골타를 파견하여 동북 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하였으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
고려사 5, 현종 17년  고려는 대륙에 있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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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법귀일 15-01-07 01:01
   
에고 다 짤렸네요... 이어 넣겠습니다.
만법귀일 15-01-07 01:03
   
고려는 부여의 별칭이며 동해를 건너 신라, 남해를 건너 백제, 영주, 북말갈과  접했고,
왕은 평양성과 장안성에 머물렀다. 나라의 크기가 오천리이다.

백제는 부여의 별칭이며 직경 육천리이다. 해양강국이며 서로는 월남(베트남),
남왜,북고려, 모든 남쪽, 기동, 신라와 접했으며, 왕은 동서 두곳의 성에 머물렀다.

신라는 변한의 후손이며, 한수지역에 살고, 횡으로 천리, 종으로 삼천리의 강역이다
동쪽사람으로 키가 크다. 동남으로 일본, 서로는 백제,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북으로는 고려에 접해있다. 왕은 금성에 거주 한다.
만법귀일 15-01-07 01:04
   
왕건(王建)의 출생지는 구오대사(舊五代史)에서 밝힌 것을 보면 진주(陳州) 항성(項城)이다. 여기서 진주 항성이란 땅 이름 자체가 한국땅이 아니다. 그럼 진주 항성이 어디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진주는 춘추전국시대 때 진(陳)나라이다. 특히 북주(北周 AD.557∼581년) 나라가 있었던 곳이다.진주는 현재 중국 대륙에 있는 하남성 항성현 동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양현(陽縣)이다. 양현은 희양군이자 진주부(陳州府)라고 한다. 진주는 하남성 낙양에서 동쪽으로 산동성 접경지대에 있는 개봉(開封)시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왕건이 자랄 때 이름은 우충(于忠)이다. 왕건의 자는 약천(若天)이라고,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기록돼 있다. 왕건은 송악군 사람이라고 되어있다. 왕건(王建)이 태어난 고향이 진주 항성현이고, 도읍한 곳은 송악군이다. 송악군은 오늘날 중국의 성도(成都)이다.

왕건은 옛날 진(秦 BC.221∼207년)나라 때 무군(武軍)의 권력을 가진 종가집 자손이다. 왕건의 조상은 진(秦)나라 때부터 군인 집안으로서 선조들은 채주(蔡州)에서 살았다고 되어있다. 지금의 채주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본문 1195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漢 BC.206∼AD.220년)나라 때 여남군(汝南郡) 땅이다. 남조(南趙 AD.420∼589년)시 송(宋 AD.420∼479년)나라가 여주라 했다. 그러나 수(隋 AD.589∼618년)나라는 채주라 했으며 당(唐 AD.618∼907년)나라가 다시 찾아 여주라 했다가 다시 고쳐 채주라 했다. 금(金 AD.1115∼1234년)나라 때는 채주를 진남군이라 했는데, 원(元 AD.1206∼1368년)나라는 채주라 하다가 승격시켜서 여령부라고 했다. 이곳은 지금 하남성 여남현이다. 서위(西魏 AD.535∼556년) 때는 남옹주(南雍州)라 하여 두었으나 수나라가 폐지시켰다. 그곳은 옛날 호북성(湖北省) 조양현(棗陽縣) 서북이라고 적고 있다.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왕건의 조상들은 진(秦)나라 때부터 하남성(河南省) 등지에서 살아온 것을 알 수 있다. 조상이 살았던 곳이 하남성 지방이라면 왕건의 고향 또한 하남성이다. 왕건의 고향이 대륙 하남성이라면 왕건은 한반도 한국에 있었던 사실조차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에 있던 왕건은 고려왕이었던 왕건이 아니라고 한다.
또는 왕건(王建)은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라고들 한다. 고려 왕건이 무엇 때문에 중국 대륙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들 우긴다. 모든 정사들은 고려 왕건의 기록을 똑똑히 기록하고 있다. 필자의 저서「고려사의 새발견」에서도 밝혔지만 한치윤의 저서「해동역사(海東繹史)」,「고려사(高麗史)」「명사(明史)」, 서긍(徐兢)이 지은「고려도경(高麗圖經)」 그 외 많은 사서(史書)들은 왕건(王建)이 중국대륙에 있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고금동성명 대사전 제1권 62쪽 왕(王)자 편을 보면 왕건은 분명히 한 사람이다. 왕건이라는 왕은 역사적으로 한 사람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성명대사전에 보면 왕건중(王建中), 왕건급(王建及), 왕건방(王建方), 왕건립(王建立), 왕건봉(王建封), 왕건상(王建常), 왕건형(王建衡), 왕건극(王建極) 등이 있다. 그리고 중국인명대사전에는 당나라 때 문인(文人)으로 왕건(王建)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왕건이란 왕은 고려왕인 태조 왕건밖에 없음을 이 기회에 확실하게 밝혀두고자 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22쪽에는 왕건이 전촉(前蜀) 왕이라 기록하고, 그곳은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2대에 걸쳐 후당(後唐 AD.923∼936년)에게 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금 동성명 사전에는 당나라 장흥(AD.930∼933년) 때 고려국왕으로 책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건의 혈통관계에 대한 고찰을 통해 왕건의 위치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왕건의 자(字)는 광도(光圖)이며 허주(許州) 무양(舞陽) 사람이라 했다. 이곳은 전술된 바와 같이 진주(陳州) 항성(項城)과 가까운 거리이다. 여하간 고려 태조 왕건의 출생지는 하남성이 분명하다.그런데 왕건의 뿌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때 이승휴의「제왕운기(帝王韻紀)」에 있는 세계도(世系圖)를 살펴보기로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은 성골장군(聖骨將軍)이다. 고려 시조는 사찬(沙粲)이다. 사찬의 후손이 원덕대왕(元德大王)이며, 당(唐)나라 숙종(肅宗 AD.756년)황제와 정화왕후(貞和王后)에게서 태어난 경강대왕(景康大王)에 이어 세조(世祖)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다.
(중국 안전원홈페이지 기록과 일치)당나라 숙종은 이형(李亨)이며 지덕(至德 AD.756∼758년)의 후손이 경강대왕이며, 경강대왕의 후손이 세조이다. 세조는 당(唐)나라 무종(武宗)이며, 무종(武宗)이 바로 세조이다.숙종인 이형은 후당(後唐)시 토번(吐番)의 성(城)을 함락시키고 칠군(일곱의 군부대)을 거느리고 삼성(三城)을 장악한 명장이다.

고려 태조의 직계 조상은 당나라 무종인 회창(AD.841∼846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양서(梁書), 원사(元史), 명사(明史), 해동역사(海東繹史), 북사(北史), 송사(宋史), 책부원구(冊府元龜) 등 정사(正史)를 살펴보면 신라(新羅) 경순왕(AD.927∼935년)은 경습왕(敬襲王)으로서 당(唐)나라 무후(武后)인 무종(武宗) 회창(會昌)의 손자로 되어있다.무후인 회창(AD.841∼846년)은 이신상(李紳相)가 장충무(張沖武)와 함께 떠돌이 도적들을 격파한 후당(後唐)의 26대 왕이다. 고려태조 왕건의 아버지는 후당(後唐)의 26대 왕인 무종 이전이며 회창이다.
이상과 같이 따져보면 고려태조 왕건은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3촌뻘이 된다. 성씨가 다름으로 외삼촌 뻘이 된다고 보아야한다. 왕건이 태어난 곳은 엄연히 대륙인 하남성 진주인 항성현 사람이며 직계 조상은 당(唐)나라 왕이다. 그러나 윗대 조상은 진(秦)나라로부터 한(漢)나라로 이어 내려왔다고 되어있다. 이상에서 대강 살펴본 왕건의 혈통은 엄연히 왕족의 자손이며 직계손이다.
왕건의 활동무대는 대단히 넓었다. 왕건은 기원후 890년에 전촉(前蜀) 왕으로 사천성 성도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왕건이 세운 전촉 나라는 후당(後唐)에 의해 등극한지 42년 후에 망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제10편에 있는 견훤전에서 왕건과의 활동무대가 어디인지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견훤은 상주(尙州) 사람이다. 상주라면 경상도 상주가 아니다. 백제(百濟)가 망한 후에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등장한 인물이 견훤(甄萱)이다.
당나라 혈통인 왕건은 당당히 지금의 서안(西安)인
 옛 서경(西京)이었던 개성(開城), 즉 송악군(松嶽郡)
에서 다시 도읍했다. 고려는 신라에게서 항복을 받아
 고려인 코리아로서 17대 인종 때 전 대륙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건(王建)의 묘(墓)는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 있다.
필자(상고사학회이중재회장)는 1993년 8월초 사천성
성도를 역사 탐방했다. 그러니까 1990년 여름부터
중국대륙을 직접 5번이나 답사한바 있다.왕건의 묘 이름은 영릉(永陵)이다.
영릉은 왕건묘(王建墓)이다.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왕건의 묘는
사천성 성도에 분명히 있었다.


일요서울 보도일자:1997년 04월 06일
만법귀일 15-01-07 01:05
   
왜국은 일본국이다.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
만법귀일 15-01-07 01:10
   
<구당서> 권75 위운기전과 <신당서> 권116 위운기전, <자치통감> 권180 수기 4 양제 대업 원년(A.D.605)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습니다. 
 
거란이 영주지역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위운기에게 명을 내려 돌궐의 병사를 이끌고서 거란부락을 토벌하도록 보냈다. 돌궐의 계민가한이 병사 2만명을 동원했다. (중략) 운기가 거란의 경계에 들어갈 때에 돌궐의 병사 2만을 상인단으로 위장시켜 유성에서 고려와 교역하러 간다고 거란에게 속이고, 무리 가운데 수나라 사신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감히 말하는 자는 죽여버렸다. 거란이 방어를 하지 않았다.
會契丹入抄營州, 詔雲起護突厥兵 往討契丹部落 啓民可汗發騎 (중략) 雲起旣入其界, 使突厥詐云向柳城郡 欲共高麗貿易. 勿言營中有隋使, 敢漏泄者斬之. 契丹不備 

그 경계선의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쪽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대개 서북쪽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동북쪽은 고구려의 경계를 넘었다.
《고려사》
내일을위해 15-01-07 01:11
   
적당히 합시다. 왕건이 무슨 중국사람이되고 고려가 한반도에 없었으면 한반도엔 누가 있었고 발해는 어떻게 설명할건지. 그리고 한바도에서 나오는 고려시대 유물들은 뭣으로 설명하려는지. 적당히좀 합시다.
     
만법귀일 15-01-07 01:36
   
세조 3년 정축(1457, 천순 1) 5월 26일(무자)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 기 지리성모 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하였다.  

예종 1년 기축(1469, 성화 5) 9월 18일(무술)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수집하게 하다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조선때도 심한 역사왜곡이 있었습니다. 아울러 대륙에서 발견되는 고려시대 유물들을 아시는지요? 중국에는 고려시대박물관도 있습니다.

그럼 반문드리겠습니다. 게시판의 어느 분이 말씀하셨더군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기록하는 사서나 역사를 기록하는 역관들은 목숨을 바쳐서 사실만을
기록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친다면...
중국의 수많은 사서는 위서입니까?
제가 소개한 중국의 25개 정사가 위서입니까?
     
만법귀일 15-01-07 08:47
   
고려의 강역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려가 대륙에서 건국했고 또 그곳에서
멸망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간파할 수 있다. 북송北宋은 개봉開封(감숙성 영흥현)에 도읍하고 있었고 요는 감숙성 난주시蘭州市, 그리고 감숙성 정서현에 도읍했고, 금金은 감숙성 회령현, 감숙성 천수시, 감숙성 영흥현에 도읍했었다. 또 남송은 사천성 내강시와 광서성 융안현에 도읍했었다.
북송은 고려와 양자강을 통해서 사신을 파견했었다.
고려로 파견되었던 남송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를 다녀가서 그 체험담을 저술한(고려도경
高麗圖經>을 보면 고려가 대륙에 있었다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서긍이 AD 1123년 고려의 도읍지인 개경으로 가서 그가 보고들은 내용을 AD 1124년에 기록으로
남긴 책이 바로<고려도경>인데 원본은 AD 1126년 금金이 북송의 도읍지인 개봉(감숙성 영흥현)으로 쳐들어 갔을 때 불타 없어졌다고 기록은 전한다. 부본 한 권이 남겨져 있어 그 부분으로 중간했다고하는데 당시 고려의 정황을 그렸던 그림은 없어져 볼 수 없다. 이 책의 경우에도 대륙에 있던 고려를 밝히지 않으려고 변조했지만, 아무리 변조한다 해도 근본적인 개작이 아니므로 원저에 담겨 있던 사실 부분이 상당량 남아 있다.
 
우선 개경, 즉 송도를 관통하면서 흐르는 강이 북류한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한반도 개성에는 성읍을 관통하는 강도 없고 단지 작은 하천만이 남류하고 있을 뿐이다. 또 서긍이 당시 개경에서 근처의 대규모 절을 19곳이나 돌아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한반도 개성에는 이 19곳의
절이 한 곳도 남아 있지 않고 단지 그 터만 남아 있다고 전하는데 19곳의 절 가운데 한 곳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하다.
 
우리에게는 고려 때 저술된<고려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 고려 때 제작된 고려의 강역도가
전혀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근세조선 때 제작된 고려의 강역지도가 전해지고 있고 근세조선이 편찬한
고려사가 전해지고 있는데 수차례에 걸쳐 다시 쓴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전하는 사서를 살펴 보아도
고려의 역사가 대륙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다.
 
역사에 대해 문외한인 일반인들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읽어본다면 고려가 대륙에 있던 나라임을 확연히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고려의 지명은 근세조선의 지명과 너무나도 다르다. 또 고려 때의 궁궐과 대규모 사찰이
현재 한반도에는 전혀 흔적이 없다.
 
고려는 태봉을 이은 나라였는데 태봉은 동주東州(산동성 덕주시)에서 건국했다. 한반도 철원에
가보면 천백년전  태봉의 도읍지였다고 하는 곳에 문화재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기록에는 궁예의 사치는 도를 넘어 호화찬란한 궁전을 지었다고 했는데 그 궁궐은 지금 철원의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가?
 
한반도의 강원도는 근세조선 세종 때 인구가 3만명 정도였고, 당시 철원에는 1,000명 정도나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런곳이 어떻게 태봉의 도읍지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심지어 일부 학자들은 태봉의 유적이 휴전선 안에 있다고 잘못 알고 그곳을
발굴하겠다고 하는데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다.
 
대륙 산동성 더주시가 태봉의 도읍지였던 고려의 동주였다. 이곳에는 대규모 궁궐 건축물울 비롯한 문화 유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대륙에서 이 유적을 남송의 궁궐 유적이라고 하고 있는 있는데 남송은 산동성의 그 어느 지역도 강역으로 차지했던 사실이 없다.
 
AD 1010년 요는 섬서성의 위하渭河(대동강)를 건너 고려의 서경(섬서성 서안시)을 거쳐 산동성 임치구에 있던 개경으로 쳐들어 왔다. 고려의 현종은 라주로 피난 가게 된다.
라주는 호남성 장사시이다.
 
당시의 피난 경로는 고려사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고려의 개경 즉 산동성 임치구에는 고려의 옛 성곽과 궁궐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륙에서는 이 유적도 남송의 황제가 기거하던 궁성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지역도 남송이 차지하지 못했던 곳이다.
 
AD 1232년 고려는 23대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임시 천도했는데 고려의 강화는 한반도의 강화도가 아니라 강소송 진강시였다.
강화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고 천도한 곳인데 고려는 이곳에서 39년간을 버틴다.
 
이 곳은 개경에 버금가는 큰 도읍지로 변모하게 된다. 개경에 있던 궁궐이나 대규모 사찰의 이름을 그대로 이름 지으면서 강화에도 개경에 못지않게 궁궐과 사찰을 건설했던 것이다.
 
강화로 건너가는 길목에 강도江都를 건설했는데 이 곳에 쌓은 성곽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강소성 양주시에 남아 있다. 이곳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강화(강소성 진강시)와  마주치고 있는 위치이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생할 근거지가 변동될 때에는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주거 환경도
옛 모습을 재현시키려고 노력했다.
대륙에서 반도로 옮겨오면서 대륙의 지명도 같이 옮겨졌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우리 역사상 획기적인 이동이었다. 근세조선의 집권층은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우리 역사가 마치 반도에서 이루어진 것인양 위장했던 것이다.
 
강화에는 선원사禪源寺가 있었는데 선원사에서 AD 1236년부터 AD 1251년까지 팔만 대장경판을
만들어 보관했었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충주忠州(산동성 래무시)로 옮겼다가 근세조선 태조 때
한반도의 한양에 있던 지천사支天寺(서울 탑골공원)로 옮겨와서 보관하다가 합천 해인사에 장경각을 건축하고 AD 1398년 해인사로 옮겼던 것이다.
 
고려에는 AD 1010년부터 AD 1083년까지 제작한 초조 대장경이 있었는데 이것은 안휘성 수현에
있던 팔공산 부인사八公山 符仁寺에사 제작되었다.
이 초조 대장경은 AD 1231년 몽골의 침입 때 당시 경주 월성(안휘성 회원현에 있던  황룡사의 9층탑과 함께 불탔다.
 
당시 불타고 남은 일부(1715판)가 일본의 경도京都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고려 말 왜구가  안휘성 지역에서 훔쳐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 강화도에는 궁궐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현감이 집무했던 건물이 있고, 또 제도권 사학자들이 선원사 터라고 주장하는 곳이 있는데, 고려사의 기록에 보면 강화에는 경안궁慶安宮,용암궁龍암宮, 려정궁麗正宮, 수창궁壽昌宮, 장봉궁長峯宮, 진암궁辰岩宮이 있었고 선원사禪源寺, 건성사乾聖寺, 용장사龍藏寺, 묘통사妙通寺, 법왕사法王寺, 보제사普濟寺, 봉은사奉恩寺, 복령사福靈寺,
왕륜사王輪寺,  안화사安和寺, 천수사天壽寺, 혈구사穴口寺, 흥국사興國寺, 현성사賢聖寺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면 고려의 왕들이 39년 체류했던 강화의 궁궐이 근세조선 500년
동안의 한반도 한양의 궁궐보다 더 크고 더 많았다는 것인데 한반도와 강화도에는 그나마
고려의 궁궐터라고 우기는 단 한 곳만이 있고 나머지는 그 터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 그 수많은 거대한 절들은 한반도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강화에 있던 궁궐과 대규모 사찰이 불탔다는 기록은 없다. 불타지 않은 건물들이 왜 없는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현재 한반도 강화에는 AD 1245년에 창건했다는 선원사는 터만 있다고 하면서 AD 372년에
창건했다는 전등사傳登寺, AD 639년에 창건했다는 정수사精水寺, AD 635년에 창건되었다는
보문사普門寺, AD 416년에 창건했다는 적석사積石寺는 남아있는데 선원사는
없는 것이다.
 
선원사가 지어지기 전에 지었다는 절들은 온전히 남아 있는데 AD 13세기, 그것도 팔만대장경을
만들었고 또 보관했었다는 선원사는 남아 있지 않다는 현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어렵다.
 
결국 한반도의 강화도는 고려의 강화가 아님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대륙의 강소성 진강시에는
대규모 건축물이 즐비하고 대규모 사찰들도 그대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과연 어디가
고려의 강화였겠는가?
 
고려가 강화로 피난했을 때 청기와를 만들어 강화에 있던 궁궐과 사찰의 지붕을 덮었다고 하는데
한반도에는 청기와가 한 조각도 없다. 우리는 고려의 청자와 청기와가 녹색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고려 사람들이 청靑과 녹錄을 구별하지 못했을까?
 
고려의 청기와와 청자는 지금도 대만에 보관되어 있다.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갈 때 가져간 것이다. AD 1290년 충렬왕은 합단哈丹의 침입으로
또다시 강소성의 강화로 천도했다가 AD  1291년에 다시 산동성의 개경으로  환도했다.
 
AD 1354년 공민왕은 섬서성의 서경으로 잠시 이거했다가 AD 1355년 산동성의 개경으로 환도했고
AD 1360년에는 산동성 제남시의 한양으로 천도한다. 다음 해 공민왕은 홍두적의 침입으로
절강성 항주시인 안동으로 피난갔다가 AD 1363년 산동성의 개경으로 환도한다.
 
AD 1390년 공민왕은 다시 한 번 산동서 제남시 역성구인 한양으로 천도하려다가 실패하고
고려는 결국 AD 1392년 대륙의 개경에서 멸망한다.
 
AD 1392년 대륙에서 건국한 근세조선은 1394년브터 1405년에 걸쳐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긴다.
 
대륙의 지명도 한반도로 옮긴다.
고려의 강역을 주요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고려사>를 보면 고려의 행정 구역은 초기에 10도 12주로 편제되었다가 AD 1018년 현종 때
5도호부 75도로 개편되었고, 그 후 4도호부 8주로 바뀌고, 다시 8도 체제로,
AD 13세기에는 5도 양계로 바꿨다고 기록되어 있다. 5도 양계 체제는 공민왕 때 12도
개편되었다가 멸망한다.
 
근세조선의 8도 체제는 고려의 행정구역 편제에서 파생된 것인데 고려와 근세조선의
차이는 고려는 대륙을 관장했던 행정편제였고 근세조선의 8도는 한반도를 관장했던것이다.
 
대륙과 한반도의 지형이 전혀 다르기 대문에 대륙의 지명을 한반도로 옮기는데 있어
지역 안배의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적절하게 조절하는 지혜가 발휘되었다.
지금 우리가 그 변화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럴듯하게 개편하였던  것이다.
근세조선의 행정 체제가 갖춰진 한반도의 상황은 고려의 5도 양계가 가장 근접한 것이기
때문에 고려사의 지리지를 5도 양계 체제를 약간 변형시킴으로써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위장되었다.
 
따라서 반도사관에 입각한 오늘날의 한국사에서는 고려의 행정 구역을 논함에 있어 초기의 10도 12주, 5도호부 75도, 4도호부 8주, 8도, 12도 체제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은 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고려의 5도 양계의 체제도 변조되었음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고려의 개경은 황제가 살던 황도인데 동경東京이었고, 경주慶州는 남경南京,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었다.
만법귀일 15-01-07 01:12
   
윤 5월) 갑자일에 거란에서 오윤판관 야율골타를 파견하여 동북 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하였으나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고려사 5권, 현종 17년

원풍 5년) '선조 시기에는 여진이 등주에 와서 항상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막혀서 끊겨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지금 조정이 고려와 왕래를 하는 데, (고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여진이 만일 중국에 말을 팔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길을 허락하도록 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끝내 여진의 사신은 오지 않았다.

-속자치통감장편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마행도가 어디인지 설명하셔 주실 분 계시는지요?
만법귀일 15-01-07 01:14
   
“동여진의 대란 등 11개 촌락에서 귀부해온 자들이 자기들의 거주 지역을 빈주·이주·복주·항주·서주·습주·민주·대주·경주·부주·완주 등 11개 주로 정해줄 것을 요청해 왔으니 그들에게 각각 밀봉된 공문을 내려 귀주와 순주에 소속시켜 주십시오.”라고 건의하자 왕이 이를 허락했다.

-《고려사》, 문종 27년 9월

최영(崔瑩)…1354년(공민왕 3)에 중국 산동(山東) 고우(高郵)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사성(張士誠)을 치기 위하여 원(元)나라에서 원병을 요청하자 그는 대호군(大護軍)으로서…정병(精兵) 2천명을 인솔, 그 선봉이 되어 적을 거의 전멸시켜 그 용명(勇名)을 대륙에 떨쳤다.
다음은 중국역사지도집에 실린 고우의 위치입니다.  고우는 산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소성 고우호(高郵湖)에 면해 있습니다.
  장사성(張士誠)의 난(亂)을 통해본 고려의 위치
밥밥c 15-01-07 01:17
   
넹. 그러면 일단 고려가 지역적으로 수도가 몇개있었는지부터 봐야하겠죠.

 수도는 아주아주 중요하죠!

 어디에 수도가 어떻게 형성이 되어있었는지 확인해 보아야하죠.
만법귀일 15-01-07 01:17
   
삼국사기 저술에 참가한 김부식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고보의 의용(義勇)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민멸하여 전문(傳聞)할 수 없었다"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皐之義勇微中國之書則泯滅而無聞

다시말하면 한반도 땅에서 영웅 을지문덕과 장보고의 기록을 찾을수 없어 중국서적을 인용하여 소개한다는 것이며 편찬자 김부식 본인도 "살수"가 어딘지 모르는 "미상 지명"이라 하였습니다.세상에 고려땅에 살았던 김부식도 모른 명장 을지문덕의 "살수"가 언제 "청천강"으로 바뀌었다는 말입니까 ?

요나라의 기록은 여진족을 공격할때 고려땅을 지나서 갔다라는 기록도 있다.

신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경계(境界)는 선춘령(先春嶺) 이남으로부터 모두 우리의 옛 땅인데, 나라에서 너희들이 돌아갈 곳이 없음을 가엾이 여겨 우리 백성(百姓)과 같이 보고 그 땅에 살게 하였는데도 너희가 스스로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고 스스로 불안하게 만드니, 어찌 능히 우리 토지(土地)에서 의거하겠느냐?
국역조선왕조실록 > 세조 7년 신사(1461,천순 5) > 9월5일 (임인)
 
 
高麗盛時。尹忠肅以文臣。闢地三千里。勒石先春嶺。近日金公又刱設六鎭
 수산집(修山集 ) >
 
고려전성기에 윤충숙(윤관장군)이 문신으로써 3천리의 땅을 넓혔으며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정했다. 근래에는 김공(김종서장군)이 육진을 거기에 설치했다.
     
내일을위해 15-01-07 01:20
   
이 양반, 고려와 고구려를 구분못하는거 아닌지. 왔다갔다하는거 보니 그런거 같은데.
          
만법귀일 15-01-07 01:32
   
사서를 읽어 보셨는지요?

고려는 고구려의 강역을 대부분 승계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만법귀일 15-01-07 01:17
   
조선말기의 지리지와 고지도에는 공통적으로 조선땅을 동서로 최대로 넓은 곳을 측정해도 900리라고 했다. 즉 조선후기와 말기에 영토가 다른것이다. 명나라기록에 조선건국시 조선영토는 동서2천리 남북 4천리이고 송나라기록에 고려영토는 동서2300리 남북 3000리이다. 수나라기록에 고구려는 동서6천리 남북 4천리이다. 즉 동서의 길이가 변천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과연 한반도강역의 크기 일까요?
만법귀일 15-01-07 01:19
   
상식적으로 북송을 위협하던 나라는 요나라이다. 고려가 아니다.  그래서 당시의 기록인 구오대사와 송사를 읽어보니 회이즉 지금 회수에 사는 동이족이라고 표현된 집단이 개봉과 호북성 무한시를 포위한적이 있다는 기록을 찾았다. 우리 역사시대로는 견휜의 후백제시기였다. 견휜의 백제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수 있는 단서는 바로 당시의 지리지에 있다. 백제에 대해 월주에 경계를 가진다고 했던 것이다. 이는 절강성 북부지방이 백제땅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강성북부지방을 현지확인해보니 아직도 김치를 담그는 사람들이 일부 존재한다고 한다. 물론 고지도에 고려성이라는 유적까지도 나와있었다.
즉 포청천은 후백제의 중원침공을 기억하고 후백제가 고려에 병합되었으니 고려역시 침공할지 모른다. 이렇게 본 것이다.  
 萊州,上,定海軍節度。宋軍萊郡。戶八萬六千六百一十五。縣五、鎮一:
  掖倚。有三山、夜居山、掖水。
  萊陽有高麗山、七子山。鎮一衡村。舊有海倉、西由、移風三鎮。
  即墨有牢山、不其山、天室山、沽水、曲裏鹽場。금사
래주는 정해군절도이다 송나라 군래군이다. 현이 5개 있다. 래양현에는 고려산이 있다.
즉묵현도 있다.  
현재 즉묵에는 오호도가 있는데 조선의 지리지에는 오호도는 조선땅이라고 나와있다. 그렇다면 금나라가 뺴앗은 송나라 래주일대의 땅바로 옆에는 고려역시 땅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산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금나라기록에는 금나라와 신라경계에 신라산이있다고 했다 . 아랍의 기록에는 당나라때 지금 절강성 앞바다의 주산군도를 신라군도라고 불렀다고 했다.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신라군도라 불린 것이고 신라군이 주둔했으니 신라산인 것이고 고려군이 주둔하면 고려영 고려군이 주둔하면 고려산이렇게 기록이 남은 것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로 막혀 있고 북쪽은 옛 거란(契丹)의 땅과 접하였고 동쪽은 금(金)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日本), 유구(琉球), 탐라(耽羅), 흑수(黑水), 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땅의 경계가 서로 맞물려 있다
 
고려수군의 활동범위를 짐작케 하는 기록이다. 유구즉 지금 오키나와일대에도 고려수군의 기지가 있었으니 땅의 경계가 서로 맞물려 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유구국(琉球國)의 왕이 사신을 보내 신하임을 자칭하고, 전문(箋文)을 바치면서 왜국에 포로가 되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섬라국(暹羅國)의 왕도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진상하였다
국조보감1397년 태조
 
유구즉 오키나와의 왕이 조선에 신하를 자청했다.
 
문치(文治)는 이미 흡족하고 무위(武威)도 먼 곳까지 미쳐서 동쪽에 있는 왜구가 예물을 받들고 찾아왔고 유구(琉球)나 남만(南蠻)도 중역(重譯)을 거쳐 조공하였습니다
국조보감 1392년 태조
 
성교(聲敎)가 멀리까지 이르러 산융(山戎 여진족을 말함)과 유구(琉球)까지도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궐하(闕下)에 부복(俯伏)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오직 남보다 뒤질세라 두려워하였거든, 하물며 서로 바라보이는 섬 오랑캐임에랴
이보흠(李甫欽)의 기(記) 신증동
만법귀일 15-01-07 01:21
   
고려의 신주(信州) 영녕(永寧) 사람인 강전은 자(字)가 휴우(休祐)이다. 그의 아버지는 강윤(康允)이며, 3대가 병부 시랑(兵部侍郞)이었다. 강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 이때 흘승(紇升)이 거란(契丹)과 교전을 벌였는데, 강전이 아버지 강윤을 따라 목엽산(木葉山) 아래에서 싸우다가 잇따라 화살 두 대를 맞고서도 얼굴빛을 변치 않았다. 그 뒤에 거란에게 함락되고서는 흑두령(黑斗嶺)으로 도망쳐 살았으며, 또다시 황룡부(黃龍府)에 이르러 샛길을 통해 고려로 돌아갔는데, 이때에도 강윤은 고려에 살아 있었다
(해동역사 제68권) 인물고(人物考) 2

황룡부가 어디이고 목엽산이 어디인가요?
만법귀일 15-01-07 01:24
   
정인지의 「고려사」를 보면 왕건의 혈통이 바로 당나라 숙종의 혈통으로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동이족의 대륙사관적 시각이 아닌 반도사관의 시각으로 보면 전혀 감 잡지 못할내용임을 알아야 한다. 당나라는 본래 중원본위의 국가에 속했으며 당나라의 황실 성(姓) 씨인 이(李) 씨는 동이족인
노자(老子)의 성(姓)씨에서 온 것이다. 중국의 사가들도 당 황실의 이(李) 씨 성이 이적(夷狄)의 혈통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唐初的皇室及其父祖之輩都有夷狄血統) (당초적황실급기부조지배도유이적혈통)

노자(老子)의 원명은 이이(李耳)로, 자(字)는 백양(伯陽)이며, 시호(諡)는 담(聃)이니, 광대(光大)한 이(李) 씨 성의 제(第) 1인이다. 그는 춘추(春秋) 전기(前期)의 동이(東夷)족 초국(楚國) 고현인(苦縣人)이다
만법귀일 15-01-07 01:28
   
왕우량교수(중국다렌대학):"(고려와 여진은)  동일한  언어,  동일한  지역,  동일한  문화가 있었습니다... 다시말해 여진인과 신라인(나중 고려인)은 민족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송막기문(松漠紀聞)》여진  추장은 신라 사람(女眞酋長乃 新羅人)이다. 女眞酋長乃新羅人 號完..///氏完..///猶漢言王也 여진 추장은 신라인에서 비롯된다. 호는 완안씨로 (여진에서의) 완안이란 한자말에서는 왕과 같다.
뿐만이 아니다. 금나라 정사인 《금사》에는 자신들의 황실 뿌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형 아고내는 고려에 남고 둘째인 금의 시조와 동생 보활리는 여진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 금시조의 8대손이 태조 아골타다. 고려에서 온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였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고려사》예종 4년, 일찍이 저희 여진의 선조가 대방(고려)로부터 나왔으니...이 오아속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옛 땅을 돌려주시면 기왓장 한 장 던지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였죠. 고려는 거란(요)이 서북쪽에 있었기에 군사를 만주 동북쪽에 주력으로 두기가 곤란한 등 관리의 어려움과 함께 여진이 같은 민족인데다 금석의 맹약을 하고 조공을 약속하므로 그 청을 허락하게 됩니다. 1115년 금황제가 된 완안 아골타는《고려사》예종 12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 조심스럽게 섬겨왔고… 라는 서신을 고려에 보내기도 합니다.금나라에게 고려는 선조들이 나온 부모의 나라였던 것이죠.
     
깡통의전설 15-01-08 00:57
   
임진 왜란때 여진이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왜늠을 무찌르겠다고 했지만 신하들이 오랑케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명에 Help를 쳤었죠....
          
만법귀일 15-01-08 07:32
   
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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