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1999년 7월에 작성된 글입니다.
최근 문무왕릉비문 논쟁을 알게 되었는데, 비슷한 맥락의 책이 기억이 나서 써 둡니다.
필자는 블로거 안빈낙도입니다 - http://blog.naver.com/hyntel )
또 주간지같은 제목의 역사서 한권이 서점에 등장했다.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부제는... 경주 김씨는 선비족 모용씨다...쯤이다)
...사실 "누군지 정확히 모르는 북방 기마민족이 어떤 길인지
잘 모르는 경로로 몇차례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 영향을 준 적이
몇번인가 있다"는 것은 학계의 공인된 사실이다.
이게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그게 누군지, 어떻게 왜 어떤 경로로 얼마
만한 영향을 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얼핏 이런 얘기를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었다가 "한국사의 수수께끼" "우리는 과연 단군의
후손인가" "기마민족과 일본의 형성" "대륙의 한" 등등을 보며
온갖 희안한 가설들을 많이 보고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설들은 일관된 시대상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 많았다.
좌우간, 이러한 기본 지식이 없었다면, 이 책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마민족"이 바로 경주 김씨
이고, 그들이 사실 선비족 모용씨라는 주장이니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자 장한식은 의외로 서울대 신문학과 출신으로, 대단히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너무나 설득력있게 주장을 편다. 사실 현실적으로
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고구려
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소릴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한 그 모든 가설들은 당위성이 없다. 그러나 최초의 김씨
왕이 신라 마립간이 된 이후 신라 왕가의 무덤은 전부 중앙 아시아
선비족의 적석 목곽분이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슷
한 시기 이후 일본 고분과 가야 고분도 급격히 양식이 바뀐다)
저자는 "그 기마민족"이 고국원왕 시절인 342년 고구려를 침공한
전연 군대라고 주장한다. 전연의 모용황은 중원 진출에 앞서
후방의 안위를 위해, 세를 확장하던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고구려의 5만 수비군을 호도하기 위해 수비군에는 1만 5천의
별동대만을 대치시키고, 5만의 본군은 방벽을 피해 남쪽으로
우회, 무방비 상태의 국내성을 함락시키고 왕비와 대비를
인질로 잡아간다. 고국원왕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5만 수비군과 맞선 1만 5천의 중무장 기병은 한명도 연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삼국 사기엔 이들이 전멸했다고 했으나
중국 사서에는 돌아오지 못했다고만 했을 뿐이고, 기병인
이들이 보병위주 수비군에게 전멸까지 당했으리라곤 상상
하기 힘들다. 퇴로를 차단당한 이들은 고구려군에게 쫓기며
원산만까지 도망해서 동해안을 따라 남하했을 것이다.
등자에 철갑씌운 말로 무장한 기마병들이 신라를 무력으로
유린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은 신라에서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이들 중 현실적으로
귀환이 어렵다고 판단한 일부가 자신들을 수용해 준 석씨 왕가에
반란을 일으켜 이들을 거의 죽이고 왕이 된다. 이들의 성이 모씨
였음은 신라 비문들과 중국 사서들에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경주 김씨 왕족의 기원이며 북방계 적석 목곽분의 등장
사유이다.
신라 잔류에 반대한 일파는 잔류파에 항거하며 가야로 도망쳐
신라 잔류 동족과 대립한다. 이들의 무덤이 가야 지방의 북방계
적석 목곽분이다. 이들은 가야 지방의 점유 후 백제를 통해 본국
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며 해로를 개척 대거 일본으로 진출하여
사실상 일본 내의 첫번째 국가 조직을 건설하는데 이것이 야마토
조정이고 그 수장이 응진 천황이었다. 가야-왜의 기마민족은 신라
계 기마민족과 완전히 동일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이 무덤과
출토 유물로부터 입증되나, 삼국사기 등 사서의 기록으로는 4세기
말 이후 지증왕 즉위까지 140여년간 가야, 왜에 의한 신라 침공이
엄청난 회수로 있었던 이유가 이를 증명한다.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광개토왕은 5만 병사를 파견하는데 이는 전연 침공시 동원한 병력과
같은 규모다. 왜가 5만 병사를 현해탄을 건너 보낸 것이 무리라
생각하면, 기마민족의 가야-왜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고, 여기서 패전하여 반 신라계 기마민족이 본거지를
반도내 가야에서 일본으로 완전히 옮겼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 모용씨냐? 중국 사서와 마립간 시기(140년간) 비문에서 신라
왕은 흔히 모씨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용 혹은 모요라는
원래 성을 신라의 외자 성씨로 고쳐 모씨라고 쓰게 되었고, 침략
기마 민족으로서 피정복 민족인 신라인을 수탈하기에만 급급하던
마립간 시대 140년을 극복하고 제대로 된 신라를 건설하기 위해
쇄신을 단행한 지증왕과 법흥왕에 의해 스스로를 창씨 개명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법흥왕의 즉위 초기에는
성은 모, 이름은 진이라 쓴 비문과 사서가 많고, 후기에는 김원용
이라는 이름을 쓴 비문과 사서가 이를 증명한다고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조목조목 방대한 사료와 사진 자료를 곁들여
제시되어 있다. 문장은 간결하지만 유려하다. 더구나 재미있다.
웃기는 제목이군 하며 보기 시작했는데, 이 책의 의미는 곧 내게
심각하게 다가왔다. 이 책의 주장대로라면
1.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으나 그들이 어떻게 일본으로 이사하게
되었는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의 문제 해결)
2. 북방 기마민족이 어떻게 고구려 장벽을 넘어 반도 남부와 일본에
영향을 주었는가(우리는 단군의 자손인가...의 문제 해결)
3. 김씨보다 오래된 석씨가 왜 비교도 안 될만큼 적은가
4. 고구려-백제 귀족/왕족과 신라 귀족/왕족의 얼굴이 왜 다른가
(고분 벽화와 중국 사서에 그려진 얼굴들이 확연히 다른 문제의
해결)
5. 고구려가 왜 신라를 침공한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5만이나 동원
해야 했으며 왜는 어떻게 그 대군을 보낼 수 있었는가
6. 요서 경영을 시작해서 중국 땅에서 고구려와 경쟁하게 된 백제가
계속 신라에 추파를 보냈으나 신라가 응하지 않았는가(대륙의 한..
에서 제시된 문제의 해결)
7. 임나 일본부의 정체
8. 기마 민족설에서 기마 민족이 누구고 어떻게 일본까지 왔는가
9. 일본 황가의 제사 용어에 등장하는 "아지메 오게 오오"하는
말이 왜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라 경상도 사투리인가 (경상도 사투리의
상당수는 선비족 말이라면 다 해결된다)
...등등의 많은 문제에 대해 너무나 명쾌하고 간단하게 설명을 해
버리는 것이다.
복잡한 증거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을 때, 여러 가설들이 그들을
설명하고 있다면, 그들중 가장 정답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여러
설들 중 가장 단순한 가설이다...라는 얘기가 있다. 남극 대륙이
아틀란티스였다는 가설이래 이만큼 명쾌하고 단순하며 그럴듯한 가설은
첨 봤다. 2시간이면 다 본다. 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