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옛부터 991회의 외세침략(대부분이 일본 쪽에서 온 침공)과 350회 가량의 대외정벌을
감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침략을 받을 때는 성문을 꼭 닫고 성을 지키는 수성전을 펼쳤고, 군조선이 멸망하고 부여에서
고구려가 갈라져 나와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영토확장정책을 펼칠 때는 치밀한 조직력과 우수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하여 타국의 방파제인
성을 공격하는 공성전을 펼쳤다.
1만년 한민족 역사이래 5000년의 잃어버린 환국과 배달국을 빼고, 2000년
넘도록 평화롭고
조화롭던 단군조선의 멸망 뒤 고대 세나라 시대부터,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수많은 타국정벌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고조선 고토에 힘쓴 고구려는 6대 태조태왕에 이르러 바야흐로 단군조선의 옛땅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가 고토회복에 성공적이었던 비결은 따로 있었다. 바로 우수한 공성용 무기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당시 로마도 제국을 만드는데 한창일 때 투석기와 박격기가 유행했으나 고구려는 이보다 한수위의 무기를
개발했다. 바로 맥궁 연속 발사기 [그림 참조]
고구려의 개마무사나 장군들의 갑옷의 경우, 얼굴이나 팔 부위가 아니면 왠만한 무기로는 절대
상처 하나 낼 수 없는 철갑 무장이었기 때문에 보통 화살로는 갑옷을 뚫지도 못했다.
오히려 갑옷의 철판에 닿아 화살촉날이 휘거나 화살 자체가 튕겨져 나가며 부러질 정도였다.
하지만 백제는 제 9대 책계대제가 집권하면서 고구려의 최강병기인 개마무사단(철갑기마병)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를 고안했다.
맥궁 연속 발사기
창과도 같은 거대한 화살을 여러개 장착시킨 활시위판 태엽장치에 방아쇠를 달아
일시에 발사판을 칼로 내려치면 한꺼번에 목표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대량살상 무기였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정면전을 벌일 형편이 못 되었다.
두 나라 모두 엄청난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붙을 경우 양쪽이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임은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백제는 고구려가 아니라 비류백제 서남에서 성장하던 한나라와 전쟁을 치뤘다.
한나라는 당시 흉노 귀족 유연이 이끌던 세력으로 이 전쟁에서 안타깝게도 책계대제는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새로 고안해낸 발사기는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한 채 전쟁은 종결되었다. (백제가 이겼지만 대제의 죽음으로 인해 큰 성과가
없었던 것..)
그 당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분서제가 책계제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적 백제는 무지 혼란스러운 시국을
걷고 있었다. 이 때를 틈타 신라의 간첩들이 맥궁 연속 발사기의 제조기술을 빼내어간것이다.
신라의 제13대 미추왕은 이것을 개량하여
더욱 효과적이고 강력한 병기로 만들도록 했고 266년 8월 백제가 신라의 봉산성을 급습했을 때 이를 내세워 백제군을 대패시켰다.
백제는 신라의 방어력을, 신라는 백제에서 따온 신종병기를 실험해본 셈이었다.
그 이후로도 백제는 수없이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는 인내했고 이후 미추왕 뒤를 이은 유례왕 대에 이르러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복수침략 차원에서 감행된 전쟁을 선포하여 신라는 군사들을 모아 맥궁연속발사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백제를 공격, 또한 백제의 식민지인
왜백제,
그리고 심지어는 가야(미나미)와도 전쟁을 선포했다. 사서에는 유례왕이 왜백제(일본)정벌을 포기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신라는 한반도 중남부에 식민지를 세운 반도백제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켰으며 가야의 병력(중무장 기병이 주류)과도 피튀기는 혈전을 벌여 결국엔
승리를 거두었고 나아가 배를 타고 바다넘어 왜백제의 본토까지 공격하여 오늘날의 일본 나가사키, 히로시마, 마쓰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국의
백제군과 힘겹게 싸워 이겨 나가노 반도를 정벌했다.
백제와 고구려와는 달리 신라는 수전에서 항해술이 미숙했기 때문에 백제나
고구려처럼 해상에서 해안쪽으로의 공격이 능숙하지 못했다. 때문에 신라는 중무장 기마병과 맥궁연속발사기, 그리고 성곽 공습대를 배에 실어 상륙한
뒤 공성전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