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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1-20 09:50
[중국] 삼국지의 시작을 만들어낸 좌원대첩
 글쓴이 : wooraky
조회 : 5,298  

조조, 유비, 관우, 장비는 잘 알고, 적벽대전은 알아도 명림답부와 좌원전투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한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고구려의 재상 명림답부가 십상시가 보낸 10만대군을 좌원에서 섬멸하는 바람에 중국은 근 400년동안 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유명한 삼국시대의 도래가 시작되었습니다.

개판오분전의 동한을 접수한 그 위세도 당당한 조절과 그 일당(십상시라 불리우던..)은 민심을 수습할 요량으로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고구려와의 작은 전투에서 승리의 경험도 있고했던 경림이라는 현도군 태수에게 10만의 군사를 내어주며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명함니다.

이에 고구려는 결전을 할 결심과 함께,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며, 장기전에 지쳐 돌아가던 경림의 10만대군을 좌원이라는 곳에서 섬멸을 하게 됩니다.

이후, 중국은 400년간 대 혼란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러한 중요한 좌원전투는 후한서나 삼국지에는 단 한줄도 기록되지 못합니다. 춘추필법의 무시무시함은 여기에서 나오죠....

 - 원문보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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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mrage 14-11-20 10:04
   
10만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후한서와 삼국지에 기록이 있었다고 예전에 봤었는데요..
     
wooraky 14-11-20 10:48
   
다시한번 찾아봐야 겠네요...
하얀gd 14-11-20 10:25
   
삼국지는 소설
위 촉 오는 있었겠지만 유비 관우 장비 손권 조조가 과연 현실인물일까? 의문이듭니다.
또 사실이라고 해도
관우 장비 조운 이런 장수가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 캐사기급으로 싸웠을까?
     
wooraky 14-11-20 10:48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습니다. 일반인들의 인식에는 삼국지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만 남으니까요..일본과 중국이 흔히 써먹는 수법이죠..침소붕대 부풀리기...우린 있는 영웅도 서로 깍아먹고 있구요..
     
dokie 14-11-30 10:57
   
삼국지 정사는 괜히 있는게 아닙니다..
빅터고 14-11-20 15:28
   
http://cafe.daum.net/WorldcupLove/RaN/6843?q=%C1%C2%BF%F8%B4%EB%C3%B8&re=1

이런 의견도 있던데요. 좌원대첩이 정말 중요성이 큰 전투라면 동북공정등 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요즘 시대에 안 다룰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촌년여우비 14-11-20 15:46
   
드록바VS또라이바 라는 분이 쓴 글은 뭘 모르시는 분 같네요. 사마천의 사기를 보시면 우리나라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알겁니다. 우리가 쓰는 역사와 중국애들이 쓰는 역사에는 차이가 많습니다. 어디가 더 정확하다고 할 수는 말할 수 없지만 변방의 나라에게 당한걸 사실대로 쓸 리가 없죠. 10만은 부풀려 있을지 몰라도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 드록바VS또라이바 라는 분은 사대주의사상에 빠져 계신분이신듯..
     
굿잡스 14-11-20 16:27
   
삼국사기 외에는 좌원대첩에 대한 기록이 정확히 남아 있지 않아서 단정짓기는 뭐하지만

당시 고구려를 마냥 소국 운운하는 것도 좀 우습군요.(뭐 이런 건 백제와 북위 전쟁이나

고수 1차 전쟁. 고당같은 전쟁에도 상당히 간략하게 혹은 병력수도 축소해서 적어 놓는

상황도 있어 마냥 단정지어서 말할 부분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당시 대군이 10만 단위

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실제 삼국지 위,촉,오도 소설에서 말이 백만대군 어쩌고지 몇만단위

로 놀았고 이정도만 되어도 당시는 대군이라고 칭할만 했습니다.수당시기에 와서 병력의

충원여력이 엄청나게 증가한 거죠)

기원후 55년 이미 태조대왕시기에 요서 10성을 쌓은 나라가 고구려입니다.(무슨 고구려가

멘탕에 헤딩하고 나온 나라 인줄 아는? 기존 고조선 재지 5부연맹국의 기반하에서

주변국을 빠르게 통합하면서 태조대왕시기는 이미 대국에 올랐구만. 북방의 여러 유목

민족들도 고작 백여년 왕조기간에 초기 몇십년안에 얼마든지 대국으로 이미 성장하고 활동

한 예는 흔합니다.)

그기에 좌원대첩이 172년인데 신상왕 시기 축조시작(198년)한 초기 성곽중 하나인

환도성의 앞측 궁궐건물지의 크기만해도 자그만치 90미터의 위용을 자랑합니다.
칼리 14-11-20 18:38
   
삼국사기에만 전할뿐이라 좌원대첩을 확실하게 평가하기는 그렇지만, 발제글은 헛소리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172년 당시는 후한 내부에서 권력의 다툼이 심한 시기였습니다. 즉 내시들간에도 권력다툼이 심한 시기로, 고구려를 칠 여력 자체가 없는 상황이었을뿐만 아니라, 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한말로 갈수록 변방은 사실상 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나 각 지역의 호족(지방의 군벌)에 의해 지배되고 조정은 그냥 형식상으로만 임명하는 상태였습니다.

 즉 현도태수가 경림이란 것도 단지 삼국사기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실존인물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일개 태수가 중앙에서 파견된 군을 통솔한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경우입니다(중앙에서 파견된 군은 지방의 관리가 통솔하는 관례는 없습니다. 애당초 듣지도 않고요)

 아마 고구려와 현도군 사이의 싸움도 실제는 요동지역의 군벌과 고구려간의 마찰로 인한 국지전이었을 확률이 큽니다(애당초 후한은 그 시기 사실상 수도 근처를 제외한 지역의 지배력을 상실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좌원대첩으로 삼국지의 시작이 됬다는 건 그냥 소설입니다.

후한 영제시대에는 이미 후한 조정의 지배력은 와해된 상태였습니다. 각 지방은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이었고요. 이런 상황에서 각 지방의 실력자들은 독자적으로 힘을 길르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고구려를 한조정에서 공략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능력도 안 됬습니다.

 즉 고구려와 현도태수(삼국사기에는 현도태수이지만, 사실상 그 시기의 북방 유력 세력, 그 이후 공손씨의 발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간의 요동의 지배권을 놓고 싸운 힘겨루기 정도로 보는게 맞다고 봅니다.
스파게티 14-11-20 19:13
   
태조대왕때 이미 요서에 10성을 쌓은 고구려의위치는 어디이며  현도와 요동은 어디일까?

현도는  지금의 요서로 알고있고    요동은  하북성으로알고있어요


틀린부분이 잇다면 알려주시죠~
아름다움 14-11-20 22:18
   
제가 역사를 좋아해서 동게가 좋아요^^
새로운걸 알고 갑니다.감사합니다.^^
     
aosldkr 14-11-24 04:19
   
저 좌원대첩 내용은 잘못된 게 많으니 확실히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dokie 14-11-30 10:56
   
솔직히 10만명인지도 의심스럽죠..  애초에 경림은 현도태수였습니다.. 온 영지에 병사들을 다 끌거모아도 1만명이 안넘어가는 판국에 태수가 10만명의 병사를 파견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당시에 후한은 상비군 체제를 선택했는데 후한의 남북군을 모두 합쳐도 15만이였습니다 근데 일개 태수가 10만명? 말도 안되는 소리죠 그리고 이 전투가 후한 조정의 약화를 불러왔을지언정 이 전투로 나라가 망했다는것도 말도 안되는 소리 한개의 군 태수가 패했다고 나라가 망했다는게 말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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