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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1-03 23:07
[일본] 존 카터 코벨과 부여기마족 그리고 왜
 글쓴이 : 투기꾼
조회 : 3,908  

일본은 그들이 한국문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그토록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미국 서구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일본미술사와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78년 하와이 대학을 정년퇴임할 때까지만 해도 동양미술사의 권위자로서 학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던 그녀에게 한국에서 예정한 6개월이라는 체류시간이 9년으로 늘어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180도 달라지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1978년 부터 체류하는 동안 그녀는 '일본 것' 혹은 '중국 것' 으로 알아왔던 수많은 미술품들이 사실은 한국땅에서 건너갔거나 한국인 예술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져 나온 것임을 알게 됩니다.
 
1981년 <코리아타임스>에 쓴 글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는 가짜였다" 를 시작으로 아들과 함께 쓰여진 관련 글들은 모두 7권의 책과 1400 편이 넘습니다. 1978~1986년까지 체류하며 그녀가 쓴 글은 당시 한국대중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앞서간 내용이 많아서 그런지 한글번역 소개는 1982년 ' 경향신문' 에서만 가능했습니다.
 
한국의 문화재가 일본에 많이 가 있는 것처럼 이집트의 문화재는 런던에,일본의 문화재는 보스턴에 많이 가 있는데 런던에 있는 이집트 문화재는 처음부터 이집트 것으로, 일본 것은 일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해 일본에 가 있는 한국 문화재만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것은 완전한 일본작품, 혹은 중국 것으로 왜곡되어 있어서 이제 와서 한국이란 근원을 찾는 작업은 지극히 어렵고도 미묘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날조의 한 예로,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 문화적으로 일본을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립니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크면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쉽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역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주장을 하며 또, 우리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받아들여왔습니다. 
 
이런 식의 수많은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목격한 코벨박사는 이 어려운 작업에 도전장을 내밀고 남들은 은퇴하고 유유자적하게 여생을 보낼 시간에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데 평생을 바칩니다.
 
그녀가 무턱대고 한국미술이 우월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님을 책을 읽으면 알게 됩니다. 특히 쉬운 언어로 난해한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단순해 보여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맨 처음에 출간된 ' 한국문화의 뿌리' 는 일반인도 부담없이 술술 읽혀내려갑니다.
 
코벨박사는 일본에서 오래 살았던 까닭에 처음에는 한국미술을 일본식 눈으로 보았지만,
점차 한국식으로 바뀐 눈으로 일본에 보존되어 있는 한국미술을 보게 되면서

어째서 일본은 그들이 한국문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그토록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일본 내의 박물관장들은 아무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유교가 지배적인 일본에서 그 누구도 오래전부터 일본적으로 치부해놓은 예술품의 분류가 부정확할 뿐 더러 국수주의적 행태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서 일본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반면 코벨박사를 내내 괴롭혔던 생각은 왜 당사자인 한국(당시 1981년 하지만, 지금도 분위기상 큰 차이는 없음)은 이토록 소극적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해법으로 나이든 학자들은 일본사람 밑에서 공부했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젊은 학자들,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은 이들은 박차고 일어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했습니다.부여기마족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시작으로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 관계의 흐름은 99프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일방적 흐름이 지속되었고그 영향은 그림, 건축, 도자기 등 수많은 미술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실제로 책속의 많은 사진과 그림을 통해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1프로는 20세기 초 동경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많은 한국화가들이 일본식 구도에 일본식 채색을 사용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도 당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코벨박사의 생전에 하던 말 중에 -
 
" 한국인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에너지는 부여기마족이라는
  조상을 이해하는 데서 수수께끼가 풀릴 것. 
한국인의 조상 부여족의 실체를 파헤쳐 그들의 에너지를 이어받는 것이야말로, 
오랜 기간 지속된 유교의 침체적 분위기보다 한국의 미래를 확실하게 할 힘의 원천이 될 것 "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서 이 주장이 피부에 와닿고 있습니다. 부여기마족과 왜(倭)' 라는 그녀의 책에서 '바위의 아이들' 이란 단어로 한국의 민족적 기질을 정의했는데, 일본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한류를 보며 고대부터 외부에 긍정적 영향을 끼쳐왔던 우리민족의 문화적 힘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생전의 코벨박사는 자신의 글이 한글로 번역되는 것을 '연못에 던진 돌이 파문을 일으켜서 커져가는 것 '이라며 기뻐했었다고 합니다. 편역(編譯)을 맡으셨던 김유경 선생님은 문화일보 기자였을 당시에 코벨박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되셨다고 합니다. 
 
코벨박사가(家)의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상황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 하시며 절판된 책들이 하루빨리 재 출판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분이 아니셨다면 이런 귀한 글들이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도 어려웠을 거라 짐작됩니다.
 
1996년 코벨박사가 미국에서 작고한 뒤 그의 유해 일부가 일본 교토 다이토쿠지 신주안에 안장되었는데 그녀의 생전에 한국의 해인사 등 몇 군데 절에서도 그녀의 묘자리를 약속했는데 
그의 사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한국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셨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코벨박사가 더 이상 일본의 편에서 얘기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아니 가차없는 지적과 신랄한 비판에 대해 오랜 기간동안 그녀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일본학계는 섭섭함과 상당한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그녀를 받아준 건 한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학자로서 역사적 사실규명에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자기 나라도 아닌 일에 이토록 열정적일 수 있을까? 한국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고 받는 것도 없이, 이만한 학문을 이룬 그녀의 업적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합니다.
 
위의 글 중 일부분은 코벨박사의 책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맨 처음 이들이 한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책  
" History of Korea " by Hurbert"1985년 
" Korea's Colorful Heritage "1984년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 Japan's Hidden History "
전세계적으로 지금까지 10쇄를 넘길만큼 한국문화의 확고한 영문소개서로 자리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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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로 논농사 기술이 전파된 것이 기원전 330년경이었다. 이들은 주로 큐슈 지역에 거주하면서(야요이인으로 한반도 남부지방 사람들과 비슷함) 현지 원주민(즈몬인)과 융합되었다.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앞선 문화기술을 가지고 일본열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계속 있었다. 기록 상으로 보면 한반도의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였다. 8세 초 편찬된 <이즈모(出雲) 풍토기>에 보면 ‘신이 어느 날 살펴보니 한반도 남부에 땅이 아주 넓었다. 그래서 신라 땅을 조금 떼어내 바다 건너로 끌어다 이즈모 자리에 붙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신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 건너 이즈모로 이주해 왔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369년경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요동에 있던 부여족이 선비족의 침입을 받아 346년이래 남으로 이동해 백제와 가야를 거쳐서 마침내 배를 타고 규슈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이들의 이동으로 말(기마병)이 왜에 전파되었으며, 느슨한 부족 사회였던 일본열도에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등장하게 되었고 더불어 거대한 왕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의 일본 고분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들여온 청동거울이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는데, 서기 400년 이후의 고분에서부터는 갑작스럽게 마구(馬具)들이 부장품으로 출토되기 시작했다. 이즈음에 말이 왜에 전래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부장품들은 현재 경북대 박물관에 소장된 대구 근교(가야 지역)의 출토품들과 완전히 똑같다. 즉 가야 지역에서 왜로 진출한 무리가 있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한반도 남쪽으로 이동하던 부여족은 순수 부여 혈통의 마지막 피붙이인 어린 공주 신공(神功진구)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들은 과거에 그들 부족이 세운 나라인 백제로 향하였고, 백제의 근초고왕은 이들 난민을 받아들였다. 세월이 흘러 어린 왕녀 신공(神功진구)이 성숙해지자, 백제 왕은 그녀를 가야의 중애왕(일본 역사서에서는 14대 주아이천황으로 기록되고 있는 인물)에게로 시집 보냈다. 그래서 신공(神功진구)은 지금의 대구지방인 고령가야의 왕의 후궁이 된 것이다.

중애왕은 규슈 남부의 반란 지역을 평정하려는 중이었는데 신의 뜻이 어떤지를 알고자 점을 쳤다. 바다 건너 땅으로 가서 정복하라는 신의 명령이 내렸으나 중애왕은 그 예언을 거부하였다. 그날 바로 중애왕이 가야금을 타다가 죽었다고 일본의 <고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중애왕이 신의 뜻을 거역하였기에 바다 건너 땅은 신공(神功진구) 왕후가 잉태한 아이에게 주겠다는 신의 응답이 내렸다.   

중애왕이 죽은 후 한달 뒤 신공(神功진구)은 신의 뜻을 묻는 굿판을 벌여 정벌에 나서라는 점괘를 받아냈다. 그래서 신공(神功진구)은, 중애왕 휘하의 최고대신으로 ‘용감한 큰 곰’으로 불린, 뛰어난 무인이자 무당인 무내숙니(武內宿禰다케우치노 스쿠네) 장군와 함께 왜의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일본 서기에 따르면 신공(神功진구)이 이끄는 정벌군이 처음 고령(대구)에서 발진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가야 연합의 여러 도시를 지날 때 저항하는 일단을 동해안 지역으로 밀어붙였다고 쓰고 있다. 신공(神功진구)은 백제의 지원 하에 가야를 제압하고 바다 건너 왜의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8세기 일본 역사가들은 신공(神功진구)을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신공(神功진구)이 처음 큐슈에서 출발해 고령으로 갔다가 거기서 되돌아 다시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고 기록하였다. 일본이 부여 기마족에 의해 정복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서기>에 신공(神功진구)이 신라왕을 굴복시키자 신라왕이 ‘아리나례강’이 거꾸로 흐를 때까지 신공(神功진구)에게 복속할 것을 맹세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일본 서기를 영역한 애스톤(W.G. Aston)은 아리나례강이 바로 압록강이라고 했다. 신공(神功진구)이 일본인이라면 신라왕이 압록강을 언급하면서 맹세해야 할 이유가 없다. 신라왕이 압록강을 두고 맹세했다는 것은 정복자인 신공(神功진구)이 압록강 유역에 있던 부여족 사람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기마병을 이끌고 왜에 도착한 부여 기마족들은 손쉽게 왜를 정복할 수 있었다. 소수의 기마병으로 다수의 보병을 정복한 사례는 역사에 흔하다. 왜를 정복한 후 신공(神功진구) 왕후가 낳은 아들이 호무다(譽田) 왕자(후일의 오진왕) 였다. 이 아기가 자라서 오늘날 일본이 ‘진무(神武)천황’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인물이 되며, 또한 일본왕가의 족보상 15번째를 차지하는 오진왕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규슈로부터 야마토, 나라를 평정한 정복자였다.

그런데 8세기 일본의 사가들은 이 정복 사건을 기원전 660년경의 일로 각색한 후 그를 진무천황이라 명하였다. 그리고는 1대부터 14대까지 일본 천황을 만들어냈다. 부여 기마족에 의한 정복을 은폐하고 8세기에 들어선 일본 천황의 정통성을 강화하게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왜에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나타난 것은 400년 이후였다. 그 이전의 왜는 느슨한 부족사회였다. 서기 220-265년간의 중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에 의하면 왜에는 이때 100여 개의 부족사회가 있었다고 한다.

369년 부여 기마족의 왜 정벌로 생겨난 15대 천황부터 그 후 25대 천황까지는 모두가  부여 기마족 출신의 순수 한국 사람이었다. 그 뒤부터는 부분적으로 한국 혈통을 가진 자들이 일본의 왕권을 쥐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그들은 369년 부여기마족이 왜를 침입하고 중앙집권화된 정권을 만들기 전에 왜로 건너와 정착한 한국인들로서, 그 당시 원주민의 상위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15대 천황인 오진왕이 중애왕과 신공(神功진구)왕후 사이의 자식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무내숙니(武內宿禰다케우치노 스쿠네) 장군과 신공(神功진구)왕후 사이에서 낳은 자식일 가능성이 높다. 중애왕이 죽은 후, 무내숙니(武內宿禰다케우치노 스쿠네) 장군은 신공(神功진구)왕후와 무속의례를 치르느라 같이 있을 시간이 많았는데, 아마도 이 때 둘이 모종의 연인관계에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는 동부여 출신으로서 고령 가야의 장군이었다. 하지만 왕위 계승 서열에서는 한참 뒤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두 사람이 힘을 합해 새로 태어날 아이가 다스릴 땅(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얻기 위해 왜를 정벌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은자의 나라 조선>의 저자 윌리엄 그리피스는 1870년에서 1880년경까지 동경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후에 일본이 제국주의 팽창을 위해 없애버렸다고 생각되는) 한국사 자료에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을 지배한 모든 왕조의 시조는 부여족이었으며, 이들은 또한 일본 문화에 크나큰 발전을 이룩한 한국 이주민의 대부분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세기 초 동경대학 기쿠치 다이로쿠 총장과 함께 <일본사>를 저술한 브링클리 선장은, 참고 목록에 140가지의 문헌을 밝히고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은혜를 자주 언급하면서도, 부여라는 이름은 특별히 밝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는 20여 년 전 윌리엄 그리피스가 참조했던 한국사 자료들을 볼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20년 사이에 왜를 정복했던 부여족에 관한 자료가 모두 없어졌거나 은폐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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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은 왜곡된 일본 역사 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고도 어이없는 부분"으로 고대사를 꼽았다.

근대 교육을 받은 일본 젊은이 대부분이 일본 지배자의 혈통이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일 없이 백수십대를 이어져 온 만세일계의 왕가'라고 배웠고 일제 강점기 교육을 받은 한국 학생들 역시 같은 사실을 주입 당해 왔지만 이는 8세기 당대 일왕을 합법화시키기 위해 '조작된 역사'라는 것.


"일본이 서기전 660년에 나라를 세우고 천황 혈통이 한 가계로 이어져 왔다"는 주장은 712년과 720년에 편찬된 <고사기>와 <일본서기> 두 역사서에 나왔다. 역사 편찬 당시 일본 왕가는 왕위에 오른 지 겨우 100년 된 집안이었을 뿐이고 그때까지 일본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문자로 기록된 역사서가 없었다. (…) 그들이 알고 있는 실제 역사는 오직 300년 전부터였지만 1000여 년이나 더 길게 역사를 늘이기 위해 어떤 일왕은 100년이 넘게 통치했다고 썼다."

그러나 100년 역사를 1000년 이상으로 늘이는 과정에서 실수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8세기 일본의 사가들은 '일본 최초 왕조가 바다 건너 북쪽으로부터 내려왔다'는 기술을 지우지 않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들은 무시해버려도 좋을 일개 유목민 집단이 아니라 한 세기에 걸쳐 한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까지를 휩쓸었던 부여족으로 3세기경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선진기술을 지녔던 이들 부여족이 가야와 백제에 둘러막힌 지역을 버리고 부산에서 바다 건너 새로운 땅 왜를 점령하러 온 369년 무렵에는 가야와 백제에 많은 '사촌'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들은 바다 건너 왜 땅 남서부로 건너간 많은 한국인들이 수백 년 동안 정착해 있음을 알고 있다."

코벨은 당시 역사학자들의 돌이킬 수 없는 범실에 혀를 차며 완벽할 수 없었던 일본 역사 조작의 시초에 묘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8세기 역사학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이러한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부여족이 이룩한 중앙집권 국가를 당대 일왕네 조상들이 만든 것처럼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대였으면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한국학자들도 日 주입식 교육에 기죽어"

이처럼 책에 실린 62편의 글을 통해 코벨은 일본의 고질적인 역사왜곡을 학문적으로 되짚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일본은 전적으로 한국의 선진문화에 힘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를 숨기려고 하는지 그 근원을 밝히려는 고찰이 전 편을 관통하는 것이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제3국 학자의 이 같은 객관적 성찰은 한국문화의 정립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코벨은 "일본학자들은 물론 한국학자들도 일본식 교육의 주입 아래 진실을 밝히는 데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코벨은 특히 "한국을 대표한다는 역사학자나 미술사가들에게 자신의 주장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아 광야에서 혼자 외치는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일본이 한국에 가한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라는, 항변에 가까운 아쉬움 토로 끝에는 10년 여간 한국에 머물며 한국을 연구해 온 학자로서의 씁쓸함마저 느껴졌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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뿡뿡 14-11-03 23:16
   
이때 동방프라자에서 한국사 발표회를 갖기로 했는데 이병도 똘마니들이 지저분하게 훼방질해서 결국 유네스코에서 열렸었죠.
변변한 역사가 없눈 나라가 외치는게 실증사학인이 독일처럼요...
다시 이걸 실증사학이랍시고 훼방질하는게 지금의 일뽕이나 식민시학 식빠들이 주구장창 부르짓는 개소리죠...
패닉호랭이 14-11-04 01:17
   
이게 다 신민사학탓이다. 이병도가 죽기전에 참회한것처럼 다른 교수들도 좀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seharu77777 14-11-04 16:52
   
좋은 글 감사합니다~중국에서는 부여가 이미 fuyu로 중국사에 편입된지 오랩니다~우리나라가 고구려에 집착하고 있는데 하루빨리 부여와 고조선에 대한 연구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원숭사냥꾼 14-11-05 01:10
   
궁굼한게 잇는대요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의
  비율이  도래인 9  원주민1 이엇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내가 사전을 찾아보니  한국인의 조상이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여겨질만큼 많이 건너가지
 는않앗다고 하던대 그렇다면  도래인이 지배층 극소수뿐이엇다는건대  어떤사람은 도래인이 더많앗다고
하더라고요
     
지나가던이 14-11-10 21:00
   
학자들 논문보면 dna 같은 과학자료나 사료들로 봤을때 압도적인 숫자의 한국인들이 건너갔다고 통계가 나옵니다...
과학으로 증명을 하더군요....ㅋㅋㅋ 한반도에서 건너간 숫자가 적다는것은 일빠, 일베충,식민빠, 니뽕우익들 주장임~
snflgksk 14-11-07 19:10
   
좋은글이네요..출처도 있어서 도움되었습니다.
snflgksk 14-11-07 19:15
   
엄청난 좋은 글임...복사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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