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羅禪;러시안)정벌과 천보총(千步銃)
아래보니 무슨 조선 후기의 군사력을 유럽에 비해 쓰레기급 어
쩌고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참 당황스럽군요. 요즘 중고딩 국사
책에서는 나선 정벌에 대한 이야기는 안배우는지??
임진왜란전 조선은 개인 화기부터 다양한 발달한 중장거리 화약
무기들이(세계최초의 2단 로켓 신기전,천자, 지자, 황자,현자 총
통, 세계최초의 시한 폭탄 비격진천뢰,조란환,완구,대장군포
등)이 발전해 있었고 임진 기간을 통해 더욱 발전을 거듭했죠.
그외 김충선같은 항왜세력이 동래성 전투 다음날
3천명을 데리고 귀화하는 등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개인화기인
조총부대에 대한 경각심과 중요성을 체험하면서 조선은
개인화기 개발과 관심,주력 부대 편제에도 상당한 공을 들이고
정예병을 키워 냈던 나라였음.
그에 따라 18세기 영,정조시기에는 10만정에 달하는 조총을 가
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기존 조총보다 더욱 가볍고 사거리가 무려
천보 즉 1.8킬로에 달할 정도의 우수한 자체
천보총까지 개발해서 대량생산 운용까지 한 나라였습니다.
영조 8권, 1년(1725 을사 / 청 옹정(雍正) 3년) 12월 26일(기축) 1번째기사
군기시에서 박영준의 천보총을 제작하도록 아뢰다
군기시(郡器寺)에서 아뢰기를,
“병기(兵器)는 포(砲)와 총(銃)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군중(軍中)의 행용(行用)되는 총은 그 힘이 미치는 바가 백보(百步)를 지나지 못합니다. 숙종조(肅宗朝)에서 박영준(朴英俊)이란 자가 천보총(千步銃)을 만들어 올린 적이 있다고 하는 까닭으로 박영준의 아들 박지번(朴枝蕃)을 시켜서 시험삼아 총 두 자루를 만들게 하였는데, 행용하는 총에 비하여 조금 길고 조금 무거우나 그 힘은 거의 9백여 보(步)에 이르게 되니, 이는 실로 옛날에도 없었던 기계(器械)입니다. 서북(西北)의 두 도(道)는 이것이 관문(關門) 방어(防禦)의 중요한 곳이니, 청컨대 삼남(三南)에 분송(分送)하는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무고(武庫)에서 만들어서 나누어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己丑/軍器寺啓言: “兵器無過於砲銃, 而軍中行用之銃, 其力所及, 不過百步。 肅廟朝有朴英俊者, 造進千步銃云, 故使英俊之子枝蕃, 試造二柄, 則視行用之銃, 稍長稍重, 而其力幾至九百餘步。 此實古所未有之器械。 西北兩道, 自是關防重地, 請依三南分送例, 自武庫打造分送爲宜。” 上從之。
영조 24권, 5년(1729 기유 / 청 옹정(雍正) 7년) 9월 12일(계미) 5번째기사
윤필은이 만든 천보총에 대한 일을 지사 윤순이 아뢰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지사(知事)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비국(備局)에서 회계(回啓)하는 상소 중에 윤필은(尹弼殷)의 상소가 많았습니다. 윤필은은 바야흐로 수어청(守禦廳)에 속하고 있는데, 그가 만든 천보총(千步銃)은 총대가 작고 매우 가벼워 모양이 하나의 철장(鐵杖)과 같았습니다. 성을 순찰할 때 쏘아 보았더니, 과연 1천 보(步)를 넘어 갔었습니다. 또한 그가 말한 바 강노법(强弩法)도 매우 좋은 것인데 아직 만들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에 아직 노쇠(老衰)하지 않아 오히려 임용(任用)할 만하다면, 병조(兵曹)나 혹은 본청(本廳)에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行晝講。 講訖, 知事尹淳曰: “備局回啓上疏中, 尹弼殷疏多矣。 弼殷方屬守禦廳, 而其所造千步銃, 體小而甚輕, 狀如一鐵杖。 巡城時放之, 則果逾千步。 且其所言强弩法甚好, 而未試造矣。” 上曰: “若不衰老, 猶堪任用, 自兵曹或本廳調用。”
그런 가운데 러샤가 동진하면서 흑룡강 일대에 성을 쌓고 청군과
충돌하면서 청군이 연일 패배를 거듭하자 그들의 낙후된 무기 수
준에서 조선의 조총부대를 요청 1654년과 1658년 1,2차 나선정
벌에서 조선 총병의 거듭된 활약으로 러샤 총병들을 전멸시킨
사건이 바로 나선정벌임.(물론 여기에는 활도 보조로 활약을 했
고.)
아래보니 당시에 활의 전력을 우습게 아는데 이건 대단한 착각입
니다.(산업혁명 초기가 무슨 기계 만능시대가 본격 도래한줄 대
단히 착각하는. 이건 유럽도 19세기 오면서 가속화된 것임. 증기
선이고 무기도 그렇고)
19세기 독일 프로이센의 드라이제가 후장식 총을 만들어냄으로
써 분당 30여발에 정확도도 올라가면서 19세기 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에서 전면적 활약을 하게 되자 유럽주변으로
파급 앞다투어 프,영등도 후장식 총을 개발하게 되었고 본격적
개인화기의 위력적 시대가 도래한 것이지 그 이전까지는
전혀 총병부대만으로 어쩌고 할 부분이 아니였다는 말입니다.
단적인 예가 다름 아닌 나선정벌에서 당시 조선은 화승총 위주
의 총병을 운용했고 러시야는 머스켓 일명 수석총간의 대결이였
음. 그기에 여전히 보조로 화살도 사용되었고. 조선 정예 총병이
가새하자 결국 러샤는 패배를 거듭하면서 궤멸되었고.( 이를 통
해 조선도 수석총의 존재를 알았지만 청군이 이 총을 전리품으로
온전히 가져가는 걸 방해하고 하멜등에 의해서도 끊임없이 개발
을 시도하죠)
수석총의 장점은 기존 화승총에 비해 우천시나 부싯돌등 격발 문
제를 해결했다는 것이지 여전히 분당 1발 정도라서 집단 사격에
돌아가는 2,3단 사람간의 교체를 하지 않고는 연사가 힘든 오랜
장전시간과 부정확성을 보였고 그럼에도 가격은 화승총에 비해
더 비싼 제작단가를 불러왔습니다.
당연히 이런 부정확성이나 연사불리속에서 화살이 보조 역할로
때로 위력적 힘을 발휘하지 말라는 법이 전혀 없죠.(특히나 우리
의 편전같은 경우는 사거리나 위력도 엄청났고 숙달되면 정확도
도 높았으니)
이런 예를 또한 잘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
명청 교체의 분수령이 된 샤르후 전투임.
화승총이나 수석총은 그 나름의 장점도(화살에 비해 오랜 숙달
을 요하지 않고 관통력이 높긴 하죠) 있지만 어떤 장소에서 어떻
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당시 여전히 고전적 즉 기마술이나
기사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기본적
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명청 교체기의 분기점이 된 샤르후 전투에서 광해군이
명의 요청에 의해 어쩔수 없이 1만 5천명의 나름 대군을 파병했
지만(명도 이런 정예 조선의 조총 부대를 탐냈고)
초기 언덕에서 활을 쏘는 후금 세력에 조선의 총병이 사살
하는 부분적 승리를 거두지만 이후 먼 거리의 원정에 지치고 굶
주림 속에 제대로된 방어 시설 없이 외부에 노출되자 연사가 떨
어진 우리의 조총부대의 위력은 급격히 떨어졌고 대규모 기습,
기동력을 앞세운 후금의 기마병에 쓸려 버리는 형태가 나타난 것
임. 즉 전쟁이라는 것이 아무리 스펙 어쩌고 해도 육군과 공군의
싸움등 차원 다른 급이 아닌 이상은 고금이고 지형 지물 군세나
야간 기습, 기후등 다양한 조건과 적의 여러 전술적 운용에 따라
얼마든지 객관적 우수한 무기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당하거나
전멸할 수 도 있는게 전쟁 양상이라는 기본적 이해는 깔고 봐야
할 것임.(도리어 주변 창수병이 제대로 호위를 못해주면서 총병
이 기마병에 썰려 나갔음.)
병자호란 역시도 인조반정후 조선 내부적으로 이괄의 난으로 주
력 정예조총부대가 상당한 타격을 입고 북방경비가 약세진 틈을
알고는 청군의 기습적 남하때문에 유효했던 거지 마냥 조선부대
가 허약했다고 봐서도 곤란하며 무슨 단순히 고전적 전투
방식이 무조건 약하고 총기 사용이 무조건 절대적 우위의
시대로 보는 것 역시 대단한 착각임.
하여튼 이런 수모를 알았기에 효종 이후 계속해서 더욱 여러
고전적 무기부터 방진 체계에 개인 화약무기고 포병도 더욱 진화
되고 자체 노력을 거듭했던게 조선 후기의 군사력이였고. 그외
에도시대의 화포를 장착한 대형 선박이 우리내로 기어 들어와서
저항하자 조선 수군이 발빠르게 대처해서 납포한 사건만 봐도
조선의 전반적 군사력을 무슨 쓰레기 수준으로 묘사한다는 건 대
단히 잘못된 시각일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에도 어느 나라고 지금의 미국 정도 아니면 대외 원
정은 늘 무리과 부담을 주는건 당연한 이치이고 저 서유럽 프랑
스 영국이 전군을 데리고 조선을 치러 오기 힘든건 마찬가지. 단
지 유럽은 이런 서로간의 인접 국간에 무기 교류가 빈번해지다
보니 19세기 후반기 발빠르게 위력적인 후장식 총기로 나아갈
수 있게된 것이지 우리도 유럽과 가까운 거리였다면 어떻게든
발빠르게 흡수했겠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동북아쪽에서 나름
주변 수준에 맞는 상응하는 군사력을 보유했고 그렇다고
당시 유럽나라와 비교해서 그들이 우리를 무시할 수준은 전혀 아
니였다는 점을 알아서면 하군요.
조선 후기는 기존의 중앙 5군과 지방군으로 속오군 체계에 양반
과 노비까지 동원 가능하게 하는 한편 아래에서도 언급된 정조시
기에는 친위직속 부대인 장용영까지 두었는데 이들은 최대 1만
2천명에 이르러 훈련도감을 능가할 정도였고 물론 1차로 왕 호
위에 왕권 강화를 노린 목적이였지만 그만큼 왕 직속인 만큼
기존 고전적 무기와 화약 무기등이 고루 연계된 무기편제를
중심으로 단련된 정예 병력이였다는 점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후 대한제국이 들어서 연대급 군편제가 1903년 완료되고 당시
기관총도 들어온 상태에 본격적 징병제의 대규모 군편제로 이어
질 부분이였으나 러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영,미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잽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후 1904년부터 본
격적 대한제국의 근대 조세권을 강탈하고 1907년 군 해산의 치
욕으로 이어지지만 이때 저항했던 대한제국의 일부 군병들이 결
코 호락하지 않았던게 당시 서양인의 목격담에 만약 당시 매국
파가 대한제국 군대의 기관총과 탄약고에 미리 빼돌리는 손을 써
지 않았다면 잽병사들이 참패했을 거라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호락한 수준은 결코 아니였음(물론 이후 이런 본격적
전투 훈련을 받은 이들에 의해 항일 투쟁이 본격화 된 계기였고.
국권 강탈의 어려운 시기에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2500명과
여러 독립 항일병들이 잽 5만 대군을 물리친 청산리대첩의 전과
도 잊지 않았으면 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