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보니 이제는 스토커짓에 막말까지 계속하면서
이미 십년 전부터 연구되어 공개된 내용조차 제대로 모르는 어떤 무개념 인
간을 위해서 주필산 전투에 대해서 새삼 다시 알아 보죠.(하긴 이러니
우리나라 사람이면 아는 그 유명한 광개토태왕의 기초 공격루트하나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말갈, 거란 정도 어쩌고 웃긴 소리나 하더만. 그기에 무슨 당
나라 이세민은 돌궐이나 거란, 말갈 획책 신라 연합 어쩌고는 전략 운운식이
고 우리 고구려가 주필산에서 효과적으로 당나라를 묶어 두면서
이미 몇년 전에 고구려 전문가인
김용만의 <새로 쓰는 연개소문>에서 주필산 전투에 대한 사료 연구를
통해서 상당부분 밝혀지고 이미 공개된 내용을 새삼스럽게 올립니다.
우선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주필산전투는 고연수, 고혜진의 한방 전투가 전혀 아니라 6월 21일~6월 23
일까지 고당간의 백병전을 벌여 당나라군이 크게 승리한 초기 3일간의 전쟁
을 선발대 전초전이라고 본다면 8월10일까지 주필산에서 양군이 대치하며
벌인 공방전을 2부로 50여일간의 전투로 밝혀진 부분이죠.(즉 이말은 이세민
이 이끈 당나라는 요동성과 안시성사이에서 박혀 고구려 내지로 제대로 들어
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군사력을 소진하면서 식량 부족과 다가오는 겨울 추위
등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됩니
다.
결국 고구려는 효과적으로 고구려 내지를 보호하면서 요동일대 외곽 방어선
에서 당나라 군대를 철벽 방어 이후 당의 퇴각 과정에서 이세민을 추격까지
하게 된 것이고. 이후 1여년이 안되어 이세민은 병사로 켁)
요동성과 백암성이 당나라군에 함락되자 연개소문은 대군을 징발하여 안시성으로 보낸다. 고구려 대군과 당태종 이세민 친정군과 이세적의 선봉대가 합쳐진 당나라 대군 간의 일전을 말한다. 주필산 전투는 6월 21일부터 시작되어 8월 10일 당나라군이 안시성으로 진영을 옮기면서 끝난다.
고구려는 백암성을 보호하기 위해 고돌발 장군과 1만명의 병사를 파견한다. 백암성 성주 손대음은 이세민에게 항복하기에 앞서 한번 망설였다. 이에 이세민이 크게 노했다는 기록이 <신당서>에 전해지고 있다. 이는 고돌발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고돌발이 데려온 병사는 1만은 이세민과 대적하기에는 일천하다고 판단하고 다시 이세민에게 항복하였는지도 모른다. 백암성을 지원 나온 고돌발은 계필하력의 당나라군과 싸워 1천명의 사상자를 내지만 당나라 장수 계필하력과 싸워 중상을 입히는 등 당나라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당나라군의 거센 저항에 백암성 입성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이 부분은 백암성편에서 자세히 다뤄볼 예정입니다.)
백암성 점령한 이세민은 요동으로 돌아가 9일간 군을 재정비하고 고-당전쟁 진격로를 부하들과 숙의한 걸로 보인다. 이세민은 6월11일 요동성에서 출정하여 6월 20일 안시성 부근에 정착한다. 이곳을 주필산이라고 불렀다.
이세민과 이세적이 합해진 당나라군 수십만(흔히 당나라군을 육군 병력 10만, 20만, 30만, 50만명 등 학자마다. 다양하게 추정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세민과 이세적의 군대를 26만명으로 규정지어 보았다.)명과 고구려가 후방에서 급히 징발한 15만명, 고구려성 주변에 약 10만명, 고구려군은 총 25만명 정도가 대치했으리라 본다.
주필산전투는 크게 두 번의 전투로 나뉜다. 6월 21일~6월 23일까지 고구려-당간의 본격적인 백병전을 벌여 당나라군이 크게 승리한 초기 3일간의 전쟁을 1부라고 본다면, 8월10일까지 주필산에서 양군이 대치하며 벌인 공방전을 2부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주필산전투는 중국사서와 <삼국사기>에 자세히 나와있다. 주필산전투에 관련된 문헌을 인용해 보았다.
○[太宗이] 安市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에 高[句]麗의 北部傉薩 高延壽와 南部傉薩高惠眞이 [그들의] 군대 및 靺鞨의 무리 15만을 이끌고 와서 [安市城을] 구원하였다. 太宗은 이렇게 말하였다.“저들이 만약 군사를 정비하여 安市[城]과 연합을 하여 城壁을 쌓고, 높은 산에 의거하여 城中의 곡식을 날라다 먹으면서, 靺鞨의 무리를 풀어 우리의 牛馬를 약탈하여 간다면, [우리가] 공격을 하여도 함락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上策이다. 城中의 무리를 이끌고 밤에 도망가는 것이 中策이다. 우리와 싸움을 벌이면 사로 잡힐 것이다.”
○ [高句麗의] 어떤 大對盧가 [高]延壽에게,“내가 들으니 中國이 어지러우면 英雄들이 모두 일어난다고 한다. 秦王은 총명하고 용감하여 무너지지 않는 敵이 없고 싸움에 상대할 적이 없으므로, 드디어 天下를 평정하고 皇帝의 자리에 군림하니, 北狄이나 西戎에서 稱臣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은 온 나라를 쓸어 와서 謀臣·重將이 다 [이곳에] 몰려 있으니, 그 銳鋒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군사를 돈좌시켜 날짜를 끄는 한편, 몰래 奇兵을 보내어 그들의 饟道를 끊는 것보다 더 나은 계책이 없다. 한달이 못되어 군량이 떨어져 싸우려 하여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하여도 길이 없게 되니, 그때에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계책을 세워 주었으나, [高]延壽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安市[城]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다.
○ 太宗은 ‘오랑캐가 나의 계책에 빠져 들었다’ 하고, 左衛大將軍 阿史那社尔에게 명하여 突厥의 騎兵 1천을 이끌고 가서 유인하게 하였다. 고구려가 늘 靺鞨의 銳兵을 앞세우므로, 社尔의 군사가 싸우다가 패하여 달아났다. [高]延壽는 ‘唐[兵]은 상대하기가 쉽다’ 하고 30리 진격하여 산기슭에 진을 쳤다. 太宗이,“내가 너의 나라에 强暴한 臣下가 있어 제 임금을 죽였기에 그 죄를 물으러 왔은즉, 交戰을 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하니, [高]延壽도 그렇다 하며 행동을 멈추고 기다렸다.太宗이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李勣으로 하여금 步·騎兵 1만 5천을 거느리고 서쪽 산고개에 진을 쳐서 賊과 대적케 하였다. 長孫无忌와 牛進達로 하여금 精兵 1만을 거느리고 [高]句麗의 후면 狹谷으로 나가게 하였다. 太宗 [자신은] 騎兵 4천을 이끌고 깃발을 눕히고 高[句]麗 [陣營의] 북쪽 산 위로 올라 갔다. 그리고 모든 군사에게 ‘鼓角 소리가 들리면 돌격하라’고 하였다. 이어 朝堂에다 장막을 설치하고 말하기를,“내일 한낮에 이곳에서 오랑캐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에 [高]延壽의 진영에 流星이 떨어졌다.
○ 이튿날 고구려가 [李]勣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바로 싸움을 벌였다. 太宗은 [長孫]无忌의 군사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바라보고, 鼓角을 불고 兵幟를 사방에서 함께 들게 하였다. 고구려가 당혹하여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무리가 이미 어지러워졌다. [李]勣은 창을 든 보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그들을 무너뜨리고, 无忌는 그 후미를 쳤다. 太宗이 산에서 달려 내려오니, 고구려군은 크게 와해되어 2만급의 머리를 베었다.[高]延壽는 남은 무리들을 수습하여 산을 등지고 굳게 지켰다. 无忌와 勣은 [군대를] 합세하여 포위하고, 냇물의 다리를 철거하여 歸路를 차단하였다.太宗은 말고삐를 잡고 고구려의 營壘를 살펴 보고,“高[句]麗가 온 나라를 기울여서 왔으나, [大將旗를] 한번 흔들어 깨뜨렸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다.”하고, 말에서 내려 하늘에 두번 절을 올려 감사하였다.[高]延壽 등이 事勢가 궁함을 헤아리고 바로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轅門에 들어 와서 무릎으로 기어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 命을 청하였다. 太宗이,“이 뒤에도 감히 天子와 싸우겠는가?”하자, 두려워서 땀을 흘리며 대답을 못하였다.
○ 太宗은 酋長 3천 5백명을 가려내어 모두 벼슬을 주어서 內地로 들여 보내고, 나머지 3만명은 [그 나라로] 돌려 보냈다. 靺鞨 사람 3천여명은 목을 베었다. 노획물은 牛馬 십만필과 明光鎧 1만벌이었다. 高[句]麗가 크게 놀라서 后黃과 銀의 두 城이 스스로 빠져 달아나니, 수백리에 人家의 연기가 끊겼다.이에 驛을 통하여 太子에게 [소식을] 전하고, 아울러 여러 신하들에게 글을 내려,“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니 이와 같다. 어떻게 보는가?”하였다. 거동하였던 산을 駐蹕山이라 이름하고, 破陣圖를 그렸으며, 전공을 기념하는 글을 돌에 새겼다. 그리고 [高]延壽에게는 鴻臚卿을 제수하고, [高]惠眞에게는 司農卿을 제수하였다.斥候를 하던 騎兵이 [高句麗의] 諜者를 잡아 왔는데, 太宗은 그 포박을 풀어 주었다. 그가 사흘동안 밥을 먹지 못하였다고 하자, 밥을 먹여 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신발까지 주어서 보내며,“돌아가거든 莫離支에게 전하라. 만약 군사의 동정을 알려거든 부디 내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가라.”고 하였다. 太宗은 모든 營壘에 참호를 파지 않고 斥候만 근엄히 할 뿐이었으나, 군사들이 군량을 운반할 적에 비록 單騎일지라도 고구려는 감히 약탈을 하지 못하였다.
<신당서>
고구려와 당이 첫 대오를 갖추고 싸운 전투는 고구려 장수의 그릇된 전략으로 당나라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성격은 본진 보다는 선발대의 성격이 크다. 선발대가 몇 명이었는지 정확한 숫자의 근거도 틀리고 1차 주필산전투에서 죽은 고구려군의 숫자는 한국과 중국 양측 기록이 모두 틀리다. 고구려군은 3일간의 전투에서 전사자가 <삼국사기>에서는 3만명, <자치통감> <신당서>에서는 2만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로잡힌 군사가 많은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는데 <삼국사기>와 <신당서>는 36,800명이다. <구당서>서는 156,8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후에 <신당서>에서 오기를 바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군은 첫 전투에서. 선봉대장 고연수와 고혜진이 사로잡히는 최악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포로로 잡힌 3만6천8백중 욕살이하 관장들 3천5백명은 중국 경내로 옮겨졌고, 말갈족 선봉대 3천3백명은 생매장 당했다. 나머지 고구려군 3만명은 돌려 보냈다. 당나라군도 피해가 만만치 않았는데, 고구려군이 항복한 6월23일 당나라군 장수 왕군악이 전사한다. “당태종 이세민은 후에 1차 고-당전쟁을 회고하기를 신성-건안-주필산의 세차례의 큰싸움에서 고구려군과 싸워 양측 모두 큰 사상자를 내어 황제가 큰 공을 세우지 못해 한탄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특히 3대 전투에서 주필산전투는 요동성 점령과 함께 당나라군 최대의 성과로 보았는데, 전후 당태종 이세민이 안타까움을 표했다면, 당나라군의 피해가 상당히 컸으리라 유추해 볼 수 있다.
위의 <신당서>의 기록과 <삼국사기>에 실렸던 고구려군 3만명을 되돌려 보냈다고 하는데. 일반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김용만 선생은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에서 “주필산의 미스테리”란 소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항복한 고구려군이 36,800명이라고 기록한 <신당서> 등의 기록은 어떤가? 이 또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 3만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신당서> “고려전”등에 기록된 고연수군을 포위한 당군의 숫자가 3만 명이었다. 그런 당군이 이렇게 많은 고구려군을 순순히 풀어줄 수는 없다. 3만의 고구려군 역시 처음부터 당군에 항복하지 않았거나, 당군에게 포위되어 고연수가 항복을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자발적으로 탈출했거나, 고구려군의 구원작전으로 구출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주필산 전투는 3일만에 끝난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필산 전투에서 활약한 당나라 장수들의 기록을 통해서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신-구당서>(양홍례열전)에는 당시 병부시랑이자 군대의 기밀을 책임지는 1급 군사참모였던 양홍례가 주필산 전투에서는 기병과 보병 24개군을 이끌고 고구려군과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장손무기, 이세적과는 다른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또한 전군대총관 유홍기도 주필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는데, 대총관이라면 이세적과 비견되는 장군인 만큼, 고구려 선봉부대를 격파한 전투가 아닌 고구려 주력군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양홍례, 유홍기의 활약은 주핋산 전투가 단 1회의 전투가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것은 고구려군이 고연수가 항복했다고 붕괴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당문>에 따르면 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은 이세적으로 하여금 장사귀를 비롯한 14명의 행군총관을 거느리고 고구려군의 서남면을 맡게 하고, 장손무기에게는 26총관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아가 고구려군의 배후를 담당하게 하고, 자신은 북쪽 산에 올라가 전황을 살폈다고 한다. 장손무기가 이세적보다 더 상위의 관등을 가진, 이세민에 필적할 권력자였음을 감안하면, 이세적이 1만5000, 장손무기가 1만을 거느렸다는 기록보다는 장손무기가 이세적의 두배에 해당하는 총관을 거느렸다는 <전당문>의 기록이 사실에 더 부합하는 것이다.
장손무기와 이세적이 거느린 40명의 행군총관의 숫자라든가, 양홍례가 지휘한 24개의 병력을 고려한다면,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당군은 대략 30만명에 이른다. 물론 당군의 전체 병력은 물론 이보다 더 많다. 그런데 이러한 당의 대군이 안시성 북쪽에 도착해 6월21일~23일까지 고구려군과 대결을 한 이후, 7월5일 안시성 동쪽 고개로 이동할 때 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유홍기, 양홍례 등이 당군은 주필산 일대에 머물면서 건안성 공격 등 다른 대안을 찾기도 하지만, 결국 안시성 공격 외에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8월 10일 안시성 남쪽으로 진영을 옮기면서 뒤늦게 안시성 공략에 나서게 된다.
결국 당군은 1차 주필산 전투 이후 무려 50일간이나 주필산 전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이 진군하지 못했던 것은 고구려 지원군 본진이 당군을 이곳에 몰아넣고 포위공세를 펼쳤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주필산 부근에서 펼쳐진 고구려군과 당군의 지루한 대결을 2차 주필산 전투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2차 주필산 전투는 고구려군이 원하던 작전은, 즉 고정의가 말한 지구전이며, 연개소문이 의도했던 작전의 결과였다.
-중략-
당군은 7월13일 전사자의 시체에 표식을 하도록 하고 이들을 일부 군대가 먼저 퇴각할 때 함께 귀환하도록 조치했다. 이것은 당군이 주필산에 머물 때 전투가 많이 생겨 전사자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군의 포위 공세가 심했음을 뜻한다.
당군은 1차 주필산 전투 이후 고구려의 후황성과 은성, 두성을 함락시켰다, 기록에는 성안에 있는 고구려군이 스스로 빠져 달아났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투를 통해 함락시켰을 것이다. 후황성과 은성이 천산산맥을 넘는 길목에 위치한 성이라고 할지라도 당군이 이를 토대로 고구려 내지로 진격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군이 안시성을 피해 천산산맥을 넘어 수암쪽으로 진군을 시도했을 수도 있겠지만 수암 지역에는 노성구산성 등 둘레 2~3km의 남짓한 고구려 성들이 있다.
도리어 당군은 곳곳에 포진한 고구려 성들에 둘러싸여 새로운 활로를 뚫지 못하고 요동성에서 안시성 이르는 좁은 공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주필산 전투는 당군이 고구려 원정에서 거둔 대표적인 승리라고 말했지만, 고구려의 장군 2명을 포로로 잡은 것 외에는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당군은 시간과 군량을 소모하면서도 고구려군을 격파시키지 못했고, 전략적 목표인 고구려 내지로 진격할 힘조차 상실해 갔다. 당군에게는 분명 전략적으로 실패한 전투였다. 반면 고구려군은 당군을 포위 압박해 적의 힘을 소모시켰으며 전장을 요동으로 한정시키려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