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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16 16:43
[기타] 아시아는 왜 대항해시대가 없었나?
 글쓴이 : gagengi
조회 : 4,086  

대항해는 자본주의가 뒷받침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식민지개척해서 거기 물자 실어다 팔아먹고 부자가 되어야 대항해를 할 것 아닙니까? 부를 축적할 수단이 있어야 대항해할 동기부여가 됩니다.  열심히 배타고 가서 물건 날라 팔면 부자된다는 동기부여가 있어야 돈을 들여 배를 건조하고 선원들 월급주고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식민지개척하러 가는겁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없으면 제아무리 배를 잘 만들어도 대항해따위는 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변변한 화폐가 없는데 대항해 해봤자 인생낭비 시간낭비입니다. 바다건너 식민지 개척해서 물건 실어와서 팔아봤자 뭐합니까? 자본주의가 없으면 돈을 못버는데.  당시 조선에 상평통보같은 옆전 화폐는 있었지만 화폐로서 구실을 못했습니다. 중앙정부가 마구 화폐를 찍어내니 화폐가치가 폭락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화폐로 가장 많이 쓰던 것이 쌀이었습니다. 

당신이 조선시대에 전재산 들여서 배만들고 선원 모집해서 바다건너 식민지를 개척했다고 한들 그 물건 조선에 가지고 돌아와봤자 팔고 손에 들어오는 것은 쌀가마니 뿐이었습니다. 쌀은 이년만되면 묵은쌀이 되어서 재산이 증발해버립니다. 그렇다고 엽전으로 가지고 있어봤자 가치폭락으로 순식간에 거지됩니다. 자본주의가 없는데 뭐하러 대항해를 합니까? 부자가 될 수 없는데 뭐하러 돈을 법니까? 부를 축적할 방법이 없는데 뭐하러 배타고 바다건너 식민지개척하는 미친짓을 합니까?

서양의 대항해시대를 연 동인도회사는 바로 인류문명사 최초의 주식회사였습니다. 이 동인도회사는 네델란드에서 세워졌고 최초의 주식발행으로 자금으로 모으고 배를 건조해서 아시아까지 항해를 해서 가져온 무역품을 팔아 번돈을 주주들에 나눠줬습니다. 이런 자본주의가 있었기 때문에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이죠. 

자본주의가 작동하려면 안정적인 화폐가 있어야합니다. 유럽에서 안정적인 화폐는 로마시대 금화를 발행해서 무분별한 화폐발행에 의한 가치폭락을 막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금화가 발명된 덕에 부의 축적이 가능해지고 부자가 되려고 열심히 일하는 자본가들이 생겨나게되었죠. 그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좀더 배타고 멀리 가서 돈벌어 보자고 궁리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주식회사입니다. 

그 최초의 주식회사가 바로 대항해시대를 연 네델란드의 동인도회사입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전에도 바이킹들이 아메리카대륙에 이미 항해를 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바이킹들은 돈이라는 안정적 화폐가 없었고 자본주의라는게 없었기 때문에 그냥 고기나 잡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 뿐입니다. 대항해시대를 연 것은 주식회사를 발명하고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돈벌어 부를 축적하는 것을 가능케 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조선과 동아시아등 유럽이외의 문명에서는 금화라는 것이 사용되지 않아서 안정적인 화폐가 발달을 못했고, 대를 이어 부를 축적할 방법이 없었교, 그래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때 정화의 함대가 아메리카대륙까지 왔었다고 한 들 뭐하겠습니까? 물건 가져다 중국에다 팔아봤자 돈을 못벌고 부자가 못되기 때문에 대항해는 거지되는 지름길이었을 뿐이죠. 그래서 대항해도 없었던 겁니다.  오직 안정적인 화폐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자본주의가 뒷받침된 유럽문명에서만 대항해가 시작될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화폐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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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gengi 14-09-16 16:44
   
중요한 내용이라 아랫 댓글에다 쓴 글 정리해서 올린 것입니다.
     
굿잡스 14-09-16 17:00
   
ㅋ 제대로 우리 조선후기의 사회상에 대한 이해도 없고 대항해시대(15세기)이후

이를 통해 신대륙으로부터 막대한 금,은등이 들어오면서 이후 17세기에 가서야 나오는

주식회사 어쩌고등 전혀 전후 시기 인식도 중세의 시대적 상황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

만 하시군요.(그리고 자본주의라는 개념 자체도 뭔지 다시금 생각해 보시길)
     
전략설계 14-09-17 12:19
   
이 인간 천성이 남을 까대는거구만..
엉뚱한 소리는,
15만 고구려 정예병을 한방에 깨끗이 말아먹은 고연수를 당태종군 묶어줬다고 칭찬하던
너 아니었냐??
          
굿잡스 14-09-17 15:07
   
15만 고구려 정예병을 한방에 깨끗이 말아먹은 고연수를 당태종군 묶어줬다고 칭찬하던
너 아니었냐?? >??? ㅋㅋ 참. 이정도면 여기 저기 달라 붙어서 이제는

스토커짓에 지식은 딸리고 입에서는 막말이나 연신 쳐하는 쯧.(하긴 이러니 그 유명

한 광개토태왕의 기초 공격루트하나 제대로 모르면서 무슨 말갈, 거란 정도 어쩌고

웃긴 소리나 하더만. 그기에 무슨 당나라 이세민은 돌궐이나 거란, 말갈 획책 신라

연합 어쩌고는 전략 운운식이고 우리 고구려가 주필산에서 효과적으로 당나라를 묶

어 두면서 발이 묶긴 이후 후방의 설연타로 하여금 교란 작전을 펴게 한건 꼼수 어

쩌고나 쳐하는)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1818&sca=&sfl=mb_id%2C1&stx=becaus

주필산에 대한 기초 공부가 전혀 없구만(이건 이미 몇년전에 고구려 전문가인

김용만의 <새로 쓰는 연개소문>에서 주필산 전투에 대한 사료적 연구를

통해서 상당부분 밝혀지고 이미 공개된 내용이구만.

주필산전투는 당신이 어설프게 주워듣고 단세포로 생각하는 것처럼

고연수, 고혜진의 한방 전투가 전혀~~ 아니라 6월 21일~6월 23일까지 고구려-당간

의 본격적인 백병전을 벌여 당나라군이 크게 승리한 초기 3일간의 전쟁을

선발대 전초전이라고 본다면  8월10일까지 주필산에서 양군이 대치하며 벌인 공방

전을 2부로 50여일간의 전투임.(즉 이말은 이세민이 이끈 당나라는 요동성과

안시성사이에서 고구려 내지로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군사력을

소진하고 식량 부족과 추위등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고

고구려는 효과적으로 고구려 내지를 보호하면서 요동일대 방어선에서 당나라

군대를 철벽 방어 이후 퇴각 과정에서 이세민을 추격까지 하게 된 것이고. 이후

1여년이 안되어 이세민은 병사로 켁)



당군은 7월13일 전사자의 시체에 표식을 하도록 하고 이들을 일부 군대가 먼저 퇴각할 때 함께 귀환하도록 조치했다. 이것은 당군이 주필산에 머물 때 전투가 많이 생겨 전사자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군의 포위 공세가 심했음을 뜻한다.

당군은 1차 주필산 전투 이후 고구려의 후황성과 은성, 두성을 함락시켰다,  기록에는 성안에 있는 고구려군이 스스로 빠져 달아났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투를 통해 함락시켰을 것이다. 후황성과 은성이 천산산맥을 넘는 길목에 위치한 성이라고 할지라도 당군이 이를 토대로 고구려 내지로 진격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군이 안시성을 피해 천산산맥을 넘어 수암쪽으로 진군을 시도했을 수도 있겠지만 수암 지역에는 노성구산성 등 둘레 2~3km의 남짓한 고구려 성들이 있다.

도리어 당군은 곳곳에 포진한 고구려 성들에 둘러싸여 새로운 활로를 뚫지 못하고 요동성에서 안시성 이르는 좁은 공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주필산 전투는 당군이 고구려 원정에서 거둔 대표적인 승리라고 말했지만, 고구려의 장군 2명을 포로로 잡은 것 외에는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당군은 시간과 군량을 소모하면서도 고구려군을 격파시키지 못했고, 전략적 목표인 고구려 내지로 진격할 힘조차 상실해 갔다. 당군에게는 분명 전략적으로 실패한 전투였다. 반면 고구려군은 당군을 포위 압박해 적의 힘을 소모시켰으며 전장을 요동으로 한정시키려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중에서
znxhtm 14-09-16 17:20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는 알겠는데
좀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태동하기 이전에 이미 대항해시대가 열립니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를 전달하시자면

"대항해는 자본주의가 뒷받침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
가 아니라
"대항해는 상업의 융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
로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굿잡스 14-09-16 17:30
   
참고로 님이 말하는 로마시대 금화 어쩌고는 로마제국이 붕괴하고는

영국은 두세기동안 아예 화폐의 자취를 감춰버림. 서유럽 갈리아 일대(프랑스)에 일부 금화제조도 있었지만

순도도 높지 않았고 불순물에 희귀해지면서 은화로 대체. 이런 프랑크 왕국의 은화도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순도가 낮아지다 결국 9세기 이후 중단되고 그나마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쪽에서 금화가

어느 정도 유통되었지만 이것도 회교인들에서 유입된 것이고. 13세기 중엽에 가서야 피렌체등

어느 정도 무역을 통해 금을 쌓은 일부 지역에서 점차 금화가 사용되고

본격적 금,은화의 사용은 다름 아닌 15세기 대항해시대를 맞아 신대륙이 발견되고 이런

신대륙에서의 막대한 금,은이 유입되면서 기존의 금가격이 폭락하면서 실물경제를 쥐고

있던 생산자, 상인. 독립농민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수세기의 걸친 17세기 초에 가서야

동인도회사같은 님이 말하는 주식회사가 최초 등장하고 이후에도 수세기동안 서구 열강들의

자원 인적 침탈를 통해서 쌓으면서 소위 말하는 자본주의 시장 체재가 일반 경제체재로

올라서게 된 것임.
열의성취 14-09-16 17:48
   
제레미 다이아몬드라는 저명한 학자는,
자본주의와 겹합된 타대륙개척이 동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에서 태동한 것은....
해안선이 단조롭고 이로인해 중앙집권적 정권이 항상 버티고 있는 중국에 비해,
유럽은 적당히 힘이있는 정치권력이 많았고...
이것은 결국 '실패에 대한 용인'과 '경쟁력 대결'의 문화적 토양이 됐고,
결국 유럽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도 꾀 타당성이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로의 진출(경제적 이득 목적)은 포루투칼, 에스파냐,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 네덜란드 등이 경쟁관계에 있게 되었고,
진출에 대한 지원이 어느 국가에서 좌절되면 다른 국가에서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반면, 중국에서는 정화가 정치적으로 패배하자 항해도 금지되고 맙니다.
만약 유럽이라면 다른 나라에서 곧이어 시도했겠죠?
제가 알기로는 정화의 진출의 결과가 'zero'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 현재 동남아를 화교들이 꽉잡고 있는 이유도 정화의 진출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중국도 그 당시 식민지 개척(유럽식과는 차이가 잇을 수 있지만..)이 있었다는 뜻이죠.
중국에서 실패한 대항해가 일본이나 조선에서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지도를 보시면 알겟지만, 중국을 제외한다면 동북아시아는 유럽에 비해 문명이 우위에 있다고 보기 힘들죠.
인구적, 상업적으로 봤을때...
     
호부 14-09-17 01:12
   
절대적인 수준은 높지만 최강자 한명이 버티고있는 동아시아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미개하지만 여러 약자들이 경쟁하는 유럽이 문명 발전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이겠죠.
덤벨스윙 14-09-16 19:43
   
gagengi씨 거꾸로에요.
자본주의가 대항해시대를 탄생시킨게 아니구요. 대항해시대가 자본주의를 촉발시킨거에요.
아래 댓글에도 썼지만 후추무역은 10척의 배중에 1척만 돌아와도 대박일만큼 수익성이 높았어요. 따라서 원양항해의 위험을 감수할만했지요.
이만큼 고수익이니 자연히 중소자본을 가진 사람들도 원양무역을 하고 싶어졌죠.그런데 선단을 꾸리는 것은 역치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일정 이상의 자본이 모여야만 가능하죠. 그래서 자본을 합쳐서 선단을 꾸리기 시작한것이 주식회사가 태동하게 된 원인입니다.
어떻게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알고 계시는건지 원....
멍게 14-09-16 20:11
   
서양이 왜 지배하는가 라는 책에서 이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시 14-09-16 20:28
   
아시아는 금화는 없더라도 '은보' 라는 은화폐나 은괴가  오랜기간 사용되었고 부의 축적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슬픈하루 14-09-16 20:49
   
대항해시대는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습니다.
진실게임 14-09-16 21:32
   
유럽인들에게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비단, 양탄자, 도자기, 후추같은 메이디 인 아시아 상품이 있었고...

아시아인들에게 그에 해당되는 것이 메이인 차이나 상품이 있었죠.

근데 당시 차이나는 공무역만 허용하는 폐쇄 상태라 뭐 개인이 따로 해볼게 별로 없었고...
나와나 14-09-16 22:32
   
사실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아시아가 풍요롭고 유럽은 비교적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죠

당시 아라비아, 인도, 동아시아 등은 유럽에 비해 훨씬 부의 규모가 거대했고 발전된 사회였죠

그리고 이미 실크로드 및 여러 육로를 통해 서로 손쉽게 교류하고 필요한 상품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즉, 아시아는 너무나 풍요롭고 부족한 것이 없었기에 크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은 향료, 화약, 종이 등 아시아의 발전된 문물 및 필요한 재화들을 지중해를 통해 아라비아를 거쳐야만 구할 수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고 이를 막아버리자 유럽은 난리가 났고

이를 뚫을 여러 방법을 하다가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 가는 방법을 발상한 것이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대항해 시대가 열린 것이죠

그 후 이를 위해 항해술이 발달하고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고

식민지덕분에 상업이 발달하고 끝내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된 겁니다

당시 유럽은 가장 도태되고 변방이었지만 이게 오히려 성장의 원동력이 된 거죠
디노 14-09-16 23:20
   
뭘 잘못 알고 계시네요...동인도회사 때문에 대항해시대가 열렸다니오?

대항해시대는 대략 15세기 말에서 17세기 말 정도까지를 일컫는데, 동인도 회사는 17세기 초에 설립된 회사예요...

그리고 애초 영국이나 네덜란드는 대항해시대의 후발주자고요....

동양엔 없었다고 하시는데, 대항해시대가 열리기 이전에 명나라 정화의 아프리카까지 가는 대항해도 있었어요...

애초 대항해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건, 향신료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또 한가지 이유는 이름이 잘 기억이 안나는데 그리스도교 왕국을 세운 존 프레스코인가 뭔가 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어요.

육로로 향신료를 구하려니까, 아랍상인들이 워낙 통행료를 비싸게 받아 먹어 바다를 개척하게 된 거에요...
그리스도왕국도 찾고요.

대항해를 꿈꾼 엔리케 왕자, 그리고 실제 항해를 해 희망봉을 넘어선 바스코다가마...이런 초기 항해가들의 용기와 노력으로 대항해시대가 활짝 열리게 된 것이고요...

님이 말한 동인도 시대엔 대항해라기 보다는 해군과 해적들이 왕성하게 활약하던 시기에요...
     
마왕등극 14-09-16 23:43
   
명나라 정화... 이야기를 해볼까 했는데 이미 쓰셨네요.

그당시 유럽은 로마시대였을 겁니다. 그리고 로마와 명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간의 직통 교역로를 개설하고 싶어했는데 아라비아 상인들이 중개무역하려고 막았죠.

막았다고 해서 무력을 동원해서... 는 당연히 아닙니다.

육상 교역로를 숨긴거죠.

정화가 황제의 명을 받고 로마까지 가는 교역로를 뚫기 위해 아라비아 지역까지 가서 상인들에게 어떻게 해야 로마로 갈 수 있냐고 물으니,

아라비아 상인들이 사막은 길이 없어 가면 죽으니 아프리카 대륙을 빙~~~~ 돌아 가는 뱃길 밖에 없고 항시 왔다갔다 하는 상인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주 위험한 뱃길이라고 하며 정화를 포기시키려 합니다.

그래도 황제가 까라면 까야했던 정화가 그냥 포기할 수 없어 뱃길에 올랐....다가 아라비아 상인들의 농간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여로가 험난했는지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되돌아옵니다.

이게 정화가 아프리카까지 갔던 이야기죠. 아라비아 상인들의 농간만 해결할 수 있었어도 대항해시대는 필요없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디노 14-09-17 00:22
   
당시 유럽이 로마시대였다고요?
동로마제국을 말하는 건가요? 동로마제국을 가지고 로마시대라고 하긴 그렇죠.
정화의 항해와 엔리케 왕자의 시대는 몇십년 밖에 차이나지 않아요.
정화의 항해는 목적이 불명확해요.
로마를 찾았다기 보다 진귀한 보물을 찾아 떠난 여행이라고 봐야 맞겠죠.
그러기에는 항해를 떠난 인원이 너무 많기도 했지만...
환9100 14-09-17 00:04
   
뻘글 같지만 중국이 춘추전국시대 때 백제나 통일 신라에서 아라비아까지 해상 무역을 했지만
부자들의 취미생활을 위해 한거니까 국력에는 도움이 되지않아서 오래가지 못했고
기록이 남지않았다는게 거시기합니다
     
디노 14-09-17 00:35
   
백제는 몰라도 신라는 해상왕국이 아니에요...
당나라에 있던 신라방, 신라소의 사람들도 신라인이 건너간 게 아니라 백제인들이었어요.
백제가 망하자 그들을 재당신라인이라고 부르게 된 거에요.
백제는 대륙백제 시절부터 당나라시대까지 백제인들이 중국으로 많이 건너가 살았어요.
무역을 하며 오가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신라는 후기신라 이전에는 중국과 사신왕래도 거의 없을 정도로 접촉이 미미했어요.
그러다 김춘추가 도움을 요청하느라 접촉을 자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고구려, 백제가 망하고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죠...
그 전쟁 후에 신라와 당나라는 감정이 좋지않아 교류가 단절됩니다.
그러다 다시 교류가 시작되자 산동성 쪽에 신라방, 신라소가 갑자기 생겨난 거에요.
이는 신라인들이 건너간 것이 아니라 이미 건너가 있던 백제인들을 일컫는 말이었어요.
신라유적에서 발굴되는 아랍쪽 유물은 북쪽 초원길로 스키타이이 유물이 들어온 것이고,
혹은 페르시아왕자가 신라로 왔는데, 그때 많이 전해지기도 했어요.

또한 제나라를 세운 이정기도 고구려유민을 데리고 제나라를 세운게 아니에요.
이들 산동지역에 있던 신라방, 신라소의 백제유민들을 데리고 제나라를 세운겁니다.
당시 안동도호부의 고구려 유민들은 발해 건국과 함께 대거 되돌아갔거든요...
시간여행 14-09-17 02:31
   
조선 중후기엔 무역선도 별로 없어서 해적도 없던걸로 압니다..
고려때는 그나마 국제무역해서 세계로 향한 귀가 열려 있었읍니다만 아쉬운점이죠...
시간여행 14-09-17 02:49
   
그리고 중국도 대선단을 이끌고 해외로 돌아댕긴 적이 있는데 ....자세한 년도나 기억이 잘...
콜롬부스가 애타게 찾던게 향신료라고 하고...인도 찾아 서너번이나  출정햇는데 못찾은거 보면
당시 과학이나 그런 수준이 보입니다...
전략설계 14-09-17 12:32
   
동아시아도 해상무역을 하였지만 원거리 대항해 무역을 할 필요성이 별로 없었죠.
통일신라시대 장보고만 해도 해상무역이 왕성했고, 왕건 자체가 해상무역 세력이었던
고려시대도 아라비아 상인 오고가고 다 배웠던 것 아닌가요.
우리의 지정학상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무역이 일본, 중국 사이의 중개무역 하기가 좋았고..
일본도 은 무역으로 부를 쌇았고..
조선이야 상업 자체를 죽이는게 나라의 정책이라 못한 것이라..
중국이야 동남아와 무역을 해서 향신료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가까운 항해로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
단지 대항해를 해야 할 필요성 자체가 없는 것이죠.
광동성에서 향료무역 하는데, 유럽처럼 희망봉을 돌아갈 일 자체가 없었던 것이죠.

동아시아도 나름대로 해상무역이 있었던 것이고..
대항해를 안한 것은 지정학적인 문제와 정치체제적으로 봐야 합니다.
유럽이야 대서양만 넘으면 신대륙이지만, 동아시아는 태평양을 건너가야 하는데.. 할 짓이 아니죠.
유럽처럼 수십개 나라가 끊임없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확고한 왕조국가들이라 굳이
국가적으로 돈을 대서 그렇게 탐험해야 할 이유도 없죠..
인도의 후추나, 동남아의 향신료는 대항해가 필요 없는 물건들이고..
중국을 중심으로 해서 필요한 것은 '차'같이 필요한 것은 유럽보다 큰 중국대륙에서 거의 다 나오고,
중국 내수만 가지고도 충분한 것입니다.
국가간 무역 할 필요가 없고, 동아시아는 중국 중심으로 해서 오고가는 것이라..
대항해가 아닌 중국이 무역의 중심지라..
네델란드야 쪼그만 나라지만, 멀리서 기발한 무역품 가져오면 팔아먹을 시장이 많아서,
도박을 할 필요가 있지만..
멀리서 가져왔기 때문에 더 비싼 가격도 받을 수 있는 것인데..
향료제도의 육두구를 조선 함대가 가서 10척에 실어왔다고 해도,
광동에서 가져오는 것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귀한 것도 아니고 팔아먹을 곳도 없습니다.
만일 동아시아가 중세 유럽처럼 고만고만한 도토리 키재기하는 수십개 국가가 각축을 벌이는 상황이었다면,
진기한 물건 찾으러, 신대륙을 찾으러 좀 나가볼 맘이 있었겠죠.

동인도가 대항해를 열고, 화폐가 대항해를 열었다기 보다는,
항해기술이 발전해 멀리 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그걸 도박해서 가져오면 비싸게 팔아먹을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즉 시장이 유럽에
있었다고 봐야하고,
팔아먹을 시장이 있었기에 유럽의 작은 나라들도
서로 경쟁하며 대항해를 통해 부를 축척한 것이죠.

결과론적으로 볼 게 아니라..
지정학적인 면, 시장적인 면, 정치적인 면에서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페닐 14-09-17 18:51
   
대항해 시대는 고사하고 제국주의가 무르익기 시작한 19세기 초중반 까지도
전세계 공업 생산량의 30%가 인도, 50%가 중국이였음.
정화의 원정 당시 사용된 중국 함선들에 비하면 콜롬부스의 버스는 나룻배 수준이였고....
화교자본이 형성된것도 명대임...

문물이 뒤쳐지고 생산력이 딸리는 당시 유럽이야 발달된 세계와의 교역에 목말랐던 것이고...
아시아에 대항해 시대가 없던건
자본 축적 부족이나 항해술 문제가 아니라 필요가 없어서가 정답임.

산업 자본의 축적이나 항해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대항해 시대중..혹은 그 이후 얘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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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3 [기타] 고구려의 크리스탈 수정 궁전 (11) shrekandy 09-23 10375
2122 [기타] 청나라 금나라 세운 여진족들 말인데요 (18) 대은하제국 09-22 3966
2121 [기타] 후연은 어떤 나라인가요? (3) 대은하제국 09-22 2792
2120 [기타] 혹시 복지겸이 어떤 인물인지 아시는 분 있나요? (10) 히어로즈강 09-18 3057
2119 [기타] 100년전쟁 규모?? (3) 아라비안 09-18 1891
2118 [기타] 고구려 vs 로마 (33) 대은하제국 09-17 7412
2117 [기타] 아시아인의 기원과 이동경로 (1) gagengi 09-17 5328
2116 [기타] 순다랜드 해안선은 한반도와 연결안돼 (6) gagengi 09-17 11790
2115 [기타] 통일신라가 통일하긴 한건가요? (7) Irene 09-17 2345
2114 [기타] 아래 우성 열성 이야기 말인데요 (3) 환9100 09-17 1278
2113 [기타] 아시아는 왜 대항해시대가 없었나? (23) gagengi 09-16 4087
2112 [기타] 열성유전자가 우성유전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잘못… (52) 행복찾기 09-16 9663
2111 [기타] 7000년전 한반도 유럽인류발견 (6) gagengi 09-16 13269
2110 [기타] 이분 뭐하는분인가요? (4) 대은하제국 09-16 1858
2109 [기타] 아니 명나라한테 왕위책봉드립까지나오네요 (9) 엑샤크 09-15 2435
2108 [기타] 최초의 귀화인 박연 (16) RedOranG 09-15 3393
2107 [기타] 한국 수학의 역사2 (4) shrekandy 09-15 3582
2106 [기타] 한국 수학의 역사: 우리 수학은 후지지 않았다 (3) shrekandy 09-15 4348
2105 [기타] 임진왜란이 조선에겐 엄청난 대재앙이었군요...^^; (26) 시간여행 09-15 5280
2104 [기타] 횽들 '순다랜드'라고 들어보셨나요? (7) 배찌형 09-15 7533
2103 [기타] 대륙 백제의 유물이 발견 안되는건 이상한게 아니다 (3) shrekandy 09-14 6341
2102 [기타] 이제 정말로 중국이 세계최대 경제대국이네요 (15) ㅉㅉㅉㅉ 09-14 4285
2101 [기타] 스페인 무적함대 조선 함대 (21) shrekandy 09-14 7044
2100 [기타] 황인 백인의 자손이 백인이 되는이유 (7) gagengi 09-14 15099
2099 [기타] 만약 중국과 일본이 지도에서 지워진다면? (7) 창기병 09-13 9645
2098 [기타] 까마귀와 까치 (10) 디노 09-12 3686
2097 [기타] 동양 3국 최고의 검법 - 조선세법 (9) 스코티쉬 09-12 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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