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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09 18:28
[기타] 발해인이 우리민족인 이유
 글쓴이 : 성마나
조회 : 4,752  


가뜩이나 발해관련 사료도 너무 부족하고 
더군다나 발해의 중심지인 5경이 거의 중국 길림성 헤이룽장성 일대에
있고 그나마 북한지역에 걸쳐있는터라 
한국이 발해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태부족한게 현실입니다

발해가 한민족과 이질적인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 주장하는 중국 동북공정의
주장과는 달리

발해인들은 당시 고려인들과 민족적 유대 내지 동질성이 컸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되는데 그 근거는 의외로 단순한 논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92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에 의해 발해의 상경성이 함락된 후 
요나라의 피지배민족으로 편입된 상당수의 발해인들은

발해 멸망후 2~300년동안 발해인이란 정체성을 계속 유지했다는 중국측
기록이 적지 않습니다.

요나라에 의해 요양 등지로 수많은 발해인들이 강제사민됬지만
요나라 지배 근 200년간 발해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발해인이라
생각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죠

더군다나 발해시절 발해의 영향력 하에 있던 흑수말갈계통 완옌부가
아골타의 지도하에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우지만

대씨 고씨 세력가를 필두로한 발해인들은 아골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에 저항하다 발해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흔히들 여진족의 금나라가 발해와 여진은 본래 일가였다는 선전을 한
기록때문에 여진족과 발해인은 동일계통으로 오해를 하는 분들이 많지만

여진족의 금나라는 발해인들의 정체성을 없애기 위해
발해유민 핵심세력들을 요동 하북등지에서 산동성으로 강제사민시켜
한족들과 반강제적인 동화정책을 시키기도 했죠

심지어 징키스칸에 의해 금나라가 멸망한후 원나라 초기에도
발해인들이 하북등지에서 모여살고 있었다는 원나라기록도 있을 정도로

발해인들은 발해 멸망후 이민족의 터전인 요서와 하북 산동 등지에서
이삼백년간 여전히 발해인이란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는 
중국측 기록들이 여럿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발해멸망후 거란 여진족에 의해 강제사민된 것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고려로의 이주를 택한 수십만의 발해유민들은
우리역사에서 고려로의 유입이후 여전히 발해인이란 정체성을
별도로 유지한채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라 금나라에서 이민족 이중지배체체의 구속을 받으며
발해인이라 불리던 것과는 달리

고려에서는 전혀 이민족 지배 통치방식을 전혀 받지 않고
곧바로 고려인으로 살아가고 있던 겁니다.

 1019년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수만명의 거란족 포로들이
발생한후 그들은 고려에 강제적으로 귀화된지 200년 가량 흐른뒤

몽골군에 쫓긴 거란족 일파(대요수국)가 고려의 국경을 넘어
강동성에 침입했을때

이들 거란족 포로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거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채 거란군의 앞잡이 역할을 자처하기까지 합니다.
(고려사에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음)

심지어 최충헌의 집권기에 거란족 포로의 후손인 기생이
여전히 자신을 거란족이라 생각하고 살고 있었고
최충헌의 눈에 들어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동족인 거란족 포로의 후손들에게 악행을 저지르다
이들에게 몰매맞아 죽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들 거란족들은 심지어 조선 전기 세종조 성종조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여 당시 화척 재인들과 같은 천인들이 본래 고려때 귀주대첩때
발생한 거란족 포로들의 후손들이 적지 않다고 밝히고 있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발해멸망후 근 이백년 가까이 꾸준히 고려로 유입되었고
최대 2~3십만에 이를것으로 추정되는 발해인들은
거란족들과는 달리 고려사회에서 별도로 발해인이라는 칭호로 불렸던적도
없고 그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았다는 기록도 한줄 없습니다.

태조왕건이 발해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을 대환영하면서
그에게 왕씨성을 주고 발해왕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것을 허락해주었지만
발해인들은 이후 거란족의 고려에 대한 3차에 걸친 침입에서 
최일선에서 고려를 위해 고군분투하죠

물론 귀화한 발해인들에 대한 고려의 기록이 미비한게 너무나 아쉽지만
발해인들이 고려인과 언어 풍습 역사인식 등에서 동질성이 적지 않았기에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에서와는 달리 고려에서는 굳이 발해인이라는 정체성을
따로 유지하며 살 이유가 전혀 없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참고로 중국 길림대에서 발해상경성에 발굴된 발해인들의 고인골이
현대 한국인과 매우 흡사하다는 결과또한 의미심장하다고 봐야겠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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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벨스윙 14-09-09 19:25
   
말갈인이 대부분이라고 치더라도
말갈인 중국인, 말갈인 한국인 비교해보면 중국보단 한국에 더 가까워 보임
흉노 14-09-09 20:13
   
헉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논거네요
gagengi 14-09-09 20:34
   
말갈족은 원래 한강토착민이었습니다.

말갈은 한강상류 토착민 (학술논문):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2152
다물정신 14-09-09 22:50
   
좋은글 잘봤습니다.
도밍구 14-09-09 23:59
   
어려운 내용을  단순하고 쉽게 잘 적어주셔서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려봅니다.
코쿠리아 14-09-10 03:44
   
읽으면서 바로 바로 이해되는 좋은 글이네요
역사적 지식과 문장력이 매우 좋으셔야 읽는이에겐 쉽게 이해되는^^
하린 14-09-10 12:00
   
발해(진국)가 왜에 보낸 국서에 남긴 국왕의 왕호만 봐도 바로 결론나죠..

"고려국왕 대흠무"

그때당시 아직 왕씨 고려는 개국도 안했을 무렵이었고...

진국(발해)은 고(구)려의 정통 후예라는 것을 표방한 것이죠...
중용이형 14-09-10 12:20
   
재밌게 잘 읽었어요.
6시내고환 14-09-10 13:25
   
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당연히 우리민족이죠 추가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발해 지역에서 속말, 백산 말갈은 우리 민족과 같은 풍습에 언어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속말과 백산 말갈은 수렵이나 유목보다는 정착해서 농경을 한 농경 민족이죠 무엇보다 일단 퉁구스계열 보다는 우리 민족에 가까운 유전자라고 합니다 학계 주장으로는 고구려에서는 지방 사람들을 말갈이라고 칭했다는 말도있습니다 그 외에 불열부 월희부(애네는 확실하지 않지만) 흑수부 말갈은 퉁구스계 민족으로 구분하죠 하지만 발해의 지배 아래있으면서 상당히 우리 민족과 동화되었죠 아골타만 봐도 그렇구요 뭐 일단 우리 민족의 세력에 아래에 있던 제족들이니까 각각 제부족을의 상세한 역사는 아니더라도 발해 자체 역사는 우리민족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죠
굿잡스 14-09-11 15:41
   
흔히들 여진족의 금나라가 발해와 여진은 본래 일가였다는 선전을 한
기록때문에 여진족과 발해인은 동일계통으로 오해를 하는 분들이 많지만


여진족의 금나라는 발해인들의 정체성을 없애기 위해
발해유민 핵심세력들을 요동 하북등지에서 산동성으로 강제사민시켜
한족들과 반강제적인 동화정책을 시키기도 했죠>

첨언은 좀 하자면 요양일대에 밀집 거주하던 발해인들이 이후 반요사상으로

아골타와 연합하면서 요나라를 빠르게 멸망시키고 이곳이 금나라의 수도가 됩니다.

물론 아골타는 이런 발해계를 포섭하면서 행정과 군사력에서도 빠른 대국의 위치에 올랐던

배경이고. 아골타의 발해 여진 일가는 단순한 정치적 발언은 아님. 이미 북방의

우리 부여계(최근에 요서 라마동과 김해 가야 대성동 고분에서 셋트로 나온 부여계

확인 유물등 경상도 유구에도 부여계가 확인되는 상황)이후

발해시대의 흑수말갈은 한러 고고학 탐사에도 보이듯 직접행정치소가 발견될 정도로 어느 정도

용접된 상태였고(부여시대에 흑룡강 일대의 유구도 부여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무엇보다 이런 흑수말갈은 그 숫자가 결코 많은 세력이 아닙니다.

그기에 요양 자체가 이미 발해인들의 도시 기반과 송정벌에서도 발해인들의 군사력이 2,3만명

정도가 관여할 정도로 세력이 컸던 상황으로 활약도 두드려졌고 그렇기에

고려시대 왕건이 통합 안정을 위해 지방의 유력 호족들을 대우하고 통혼을 통한 혈족 관계로

유대를 강화하듯 그렇게 발해인들은 금나라 황실의 외척으로 상당히 깊게 관여되고 있었고

그런 가운데 님이 말하는 발해인들의 강제 이주등은 순수 여진계열인 희종때에 강화

된 정책인데( 발해인들의 세력이고 활약이 두드러지자 견제가 들어간 것임)

이전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런 희종의 정책은 발해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면서

다름 아닌 발해계 해릉과 발해인들의 도모로 살해 폐위되면서 발해계 황제가 전면에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하겠군요.>
굿잡스 14-09-11 15:49
   
이런 발해계 황제의 등장을 전면에서 침전소저근시국직장이었던 발해인 대흥국이 나섰고 이후

해릉이 등극하고 도리어 이런 여진 귀족의 권한이 제한되는 식도 나타남.  그리고 당연히 해릉을

옹립하도록 도운 발해인들의 신뢰는 높아지고 요직에 발해인들의 인재 등용은

대거 줄을 잇음.(대회충(점검-도단태후 살해), 고정(태자태보, 어사대부-해릉왕의 신변경

호), 이유충(왕안형 살해, 모반사건), 고희정(영사-희종 시해 계획)등 )

이외에 금사에서 당시 국무총리격까지 오르고 해릉 이후 금나라 최전성기라는 세종시기

에도 대단한 활약을 한 본래 고씨인 장호 역시도 계속해서 높은 관직에 올랐고

세종시기에는 몸이 노쇄했다고 입궐해도 굳이 절할 것도 없이 앉아서 보게 할 정도 파격

적으로 신뢰했음.(그리고 이 장호 집안은 이 인물 이외에도 장호의 아들 및

같은 항렬이고 조카들도 요직에서 활동. 이외 비서승의 대영, 정책공의 이석, 절도사 장현

소, 장여필, 고간, 고덕기, 고희정등도 세종시기에 계속해서 활약)

아니라

금나라 말기에 해당하는 8대 선종 역시도 외척인 어머니가 요양 발해인 소성황후 유씨임을

봐서도 무슨 금나라의 초기외에는 발해인들이 토사구팽을 당했니 혹은

서토인처럼 취급해서 차별 어쩌고 식과는 거리가 있는 얘기입니다.(발해인들의 영향력은 금

을 관통하는 시기동안 금황실에 상당히 깊숙히 관여하면서 지속적이였음)


그리고 맹안모극제라는건 이후 금나라가 건국의 기반 내실을 다지고 주현 제도를 확립하면서

이건 일종의 소수의 여진족의 기상과 풍습을 이어가기 위한 호구지책이였든 거지 금황실 내부에 단순히

발해인 차별 어쩌고 이런 개념으로 단순하게 봐서는 곤란합니다.(이전부터 정착 도시문명을 일꾼 발해

인들이나 서토인들에게는 주현제를 실시하면서 굳이 맹안모극제대로 할 필요성이 줄어든 측면도 있고

이걸 마치 발해인을 서토인 취급해서 금황실에서 토사구팽 이런게 윗글에서 언급했듯 실상은

아니라는 것임. 이건 마치 우리가 미국의 대통령제를 도입했다고 현대 대한민국은 미국인

취급했다는 소리랑 다를게 없는.) 그리고 이런 맹안모극제도 점차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적 빈부차가 여진족 내부

에서도 표면화되면서 세종의 노력에도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이후에는 갈등화 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리고 발해계 해릉이 등극하면서 남송 정벌에 대한 의지는 더욱 강렬해지고 이에 따라 북경일대에

중도를 건립하는 책임을 맡은 장호는 이후 이 곳에서 서토인들을 지배하기 위한 중축 인력을 이동배치

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10년간의 세금 면제등으로 기반을 닦는 정책을 주도하는데  이게 결국 이후

금이 몽골에 먹히면서 점차 이곳 일대로 이주한 여진이나 발해인들이 만주일대에선

오랜 지역적 토착 기반과 정체성을 가졌던데 비해 시간에 따라 희석되었던 제일 큰 요인이라

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굿잡스 14-09-11 16:03
   
그리고 <발해가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단순히 고려내에서

하층민 즉 천민식으로 대우받으면서 나름 정체성? 어쩌고 운운하던 거란과는 전혀 상황이 다릅니다.

(이것도 조선시대로 가면서 점차 동화 단지 천인신분으로서 받는 차별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만주일대의 오랜 정주 도시문명을 구가한 주체는 바로 이런 우리 예맥계 집단 및

이에 동화된 수천년 고조선 고구려 문명 세력들이였고(백성들) 이들이 이후 다시 발해를

열고 엄연히 과거 위만 조선이 멸망하고 위치부터 논란이 있던 한사군 어쩌고 할때도

이미 다른 공간에서 열국시대로 압록강 상류 집안일대에 고구려부터 부여 옥저 동예등이

활동했던 것처럼

발해가 멸망해도 동만주 일대를 위주로

여기 저기 엄연한 국호를 가진 세력들이 외교활동까지 하고 있었단 말이죠.

그리고 요양은 금 건국 직전까지도 반요사상으로 발해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던 지역이고.

(이 동경(요양) 일대도 거의 반독립적 상태로 발해인들은 나름 군사력까지 갖추고 있던 상태에서 생

활)

다시 설명하면 발해(698~926)멸망 후 금나라(1115) 건국 사이 만주일대에도

고려시대

북방 상경용천부일대가 이름만 바뀐 동란국으로 이후 반란이

거세지자 고구려 서북 발해 지역인 요양일대로 대거 이동시켜 수십만이

살고 있었고 요동반도 역시 수십만호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며

그기에 나머지 요나라 저항 반란 규합세력이 상경용천부 일대에

오사국을 세워고 그곳 왕은 부유부 발해염부왕(烏舍城浮渝府渤海琰府

王)’  혹은 ‘발해염부왕’·‘발해왕'으로 여전히 불렀고

후발해국, 정안국, 흥요국등 금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도 엄연히

발해세력들이 고려시대에도 만주일대 여기 저기 발해, 고구려 계승국을

자처하면서 국호를 세우고 대외적 외교활동까지 하고 있었던 토착세력과 인구력 문명력을

자체 가지고 있는 엄연한 그지역 주체 세력이였단 말이죠.(흑수말갈만이 만주일대의 주체 세력이라고

봐서는 전혀 곤란합니다. 이들은 그냥 수렵생활로 전투력이 강했던 세력이지 상당한 인구

비중으로 봐서는 곤란. 그래서 더욱 이런 도시문명을 주도하던 발해인들의 활약을 순수 여진

희종(여진족이라는 명칭도 알고보면 신라계가 북방의 일부 말갈 부락을 통합하면서 정체성이

부여된 이름이죠) 견제를 했던 것이고 결국 그 결말은 발해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발해계가

전면에 등장하는 배경을 만들 정도로 이런 발해인들의 입김은 앞선 스스로의 주체적 국가부터

이후 금에 통합된 상황에서도 전후기를 관통하는 통한 상당한 영향력을 최상층에 뿌리내리고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커다 하겠습니다.
굿잡스 14-09-11 16:09
   
금나라 황릉과 고려 황릉의 유사성.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1741&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A%B3%A0%EB%A0%A4+%ED%99%A9%EB%A6%89&sop=and


이전에도 몇번 올렸지만 장경희 한서대 교수 비교논문으로 나온 당대 금, 고려, 송의 황릉 비교에서

송과는 매우 이질적이지만 고려와 금의 황릉이 상당히 밀접한 친여성을 보이는 부분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고학에서 그 민족의 세력권이나 문화권을 결정짓는데 상당히 중요한 잣대로 보는 건

다름 아닌 토기, 묘제, 주거양식등입니다. 특히나 이런 묘제나 주거등은 이동의 용이성이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특징부터 무엇보다 이런 최고 통치자의 묘제가 이런 밀접한 유사성을

가진다는 의미는 이런 금황실에 우리 발해계의 직접적 입김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분명한 반증이라는 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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