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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07 23:12
[기타] "일본인 조상은 한국인" -98년도 홍콩 주간지
 글쓴이 : 할움
조회 : 7,335  

'2,400년전 한반도에 살던 이들이 배를 타고 일본 남단 규슈로건너가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우수한 철기 및 대규모 쌀재배기술을 바탕으로 토착민인 조몬족을 제치고 빠른 속도로 일본남부지방을 장악해나갔으며 기원후 초기에 드디어 통일국가를 이룩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바로 현 일본인들의 조상이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17일자 최신호에 소개된 '모두 한가족'이란 제하의 기사를 통해 "역사적 자료를 종합해볼때 일본 조상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한국인들로 추정되는데 일본인들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잡지는 그 실례로 일본 규슈대 인류학교수 다카히로 나카하시 최근 발표한 연구논문을 인용, 규슈에서 출토된 2,000년전주민의 두개골과 치아를 분석한 결과, 동시대의 한국 남부와 중국산둥(산동)반도에 살던 대륙인들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밝혔다. 조사 결과 일본인들이 자기네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조몬족의 두개골은 현 일본인들과 공통점이 없으며, 도리어 평소 천대해오던 일본 북부 홋카이도 거주 소수민족인 아이누족의 조상인것으로 밝혀졌다.

이 잡지는 "일본어가 단일언어라는 점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정착-확장하면서 언어를 통일시킨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한국인들이 사용한언어는 현재 한국에서도 멸종된 고대한국어 방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잡지는 "많은 일본학자와 사료가 현 일본인의 조상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데도 이것이 공론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 한국을 식민지배한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이 꾸며낸 '한국민은 열등하며, 과거일본이 한국에 쌀재배기술을 가르쳐주었다'는 식의 날조된 역사관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잡지는 "일본에 대해 한국이 영향을 끼쳤다는 역사적 사실을 얘기하면 노인네들부터 반발하고 나선다"는 국립 일본사박물관소속 고고학자 시나치로 후지오씨의 말을 인용하면서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뿌리를 찾는 작업은 과학자보다는 이념(ideology)과 문화이론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121370170

명불허전 역사,뿌리 날조국 ㅋㅋㅋ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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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리링 14-09-07 23:16
   
일본 빼고 다 아는 사실 ~~
     
무난힝 14-09-08 15:10
   
당시 한반도와 대륙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갔다는거라는건

충분히 합리적인 이야기인데

그 사람들이 지금의 조상이냐는건

당시의 한국인들이 현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냐의 문제로도 이어져서

또 다른 문제가 되니까요.
밥주세요 14-09-07 23:23
   
일본은 한국인이 개척한 역사죠
     
무난힝 14-09-08 15:07
   
아니 땐불에 연기가 날리가없다고

이렇게 여과없이 받아들이고 비약을 하니

기원설이 나돌죠..

이렇게 팔랑귀 분들 때문이라도

기원설 자체가 날조가 9할이지만 1할은

사실이라고 보네요.

한민족 중 일부가 건너갔고, 그 분들이

일본 문화 형성에 도움을 쥤다고한들

그게 도움의 수준인지 님말처럼

독자적인 국가를 개척한 수준인지는 알수없죠

또, 조상이 그렇다고한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지않는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어떤 문화를 형성했다고해도

그걸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나요?

만약 한반도사람들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그들 주도로 문화형성을 했다면

최소한 그런 역사의 흔적이 필요하지요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한국인이 문화를 전파해줬으니

한국인에게 감사해야하고 일본인들은 열등하다는

일각의 주장들은 뿌리부터 잘못된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화전파란게 어떠한 사명감이나 선민의식을

가지고 남에게 배푼게 아니라 그냥 전쟁 , 기후변화

등으로 자연스레 민족이동이 일어난 현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일본에 넘어가서 일본인으로서

역사를 일궈나간 이들을 두고 한국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고, 이때이뤄진 문화 전파를

마치 한민족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듯 행동하면 곤란하죠.

그리고 문화란건 내외적인 요소에 대해 변용성이

있는거라 발전의 정도에는 모두 차이가 있습니다.

자의적이던 타의적이던

우리가 잠시 일본보다 못산다고해도

우리 문화가 열등한 것도 아니고

고대시대 일본인들이 대륙보다 발전 정도가

더뎠다고해서 일본인들이 열등한 것도 아니죠.

또, 선진적인 문물들의 가치를 얼마나 빨리

파악하느냐 그리고 그걸 내재화해서
 
훌륭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일궈내느냐 마느냐

역시 능력이라면 능력인데 말이죠. .
          
전쟁망치 14-09-08 20:07
   
님 의견에 공감하네요

분명 한국인만 100% 다 건너가서 이룩하지는 않았을 꺼라 감히 짐작합니다

하지만 분명 우리조상들도 가서 영향을 줬겠죠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굿잡스 14-09-08 20:53
   
한민족 중 일부가 건너갔고, 그 분들이

일본 문화 형성에 도움을 쥤다고한들

그게 도움의 수준인지 님말처럼

독자적인 국가를 개척한 수준인지는 알수없죠 >??

ㅋㅋ 이건 열도의 고고학 발굴 성과만 알아도 너무도 명확히 나옵니다만.

(재고 자시고 할 게 없음)


6세기 열도의 풍경

열도는 부산과 근거리의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서열도 즉 후쿠오카를 중심으
 
로 문명이 싹트기 시작하는데 대마도와 이끼섬을 징검다리로 고조선시대 우
 
리 선조들의 본격적 해양 개척시대가 열리면서
 
후쿠오카 일대로 농경과 청동,철기문화를 전파시키게 됩니다.
 
(열도의 주원주민인 조몬인들은 동열도를 주본거지로 에도시대까지도 수렵
 
생활을 할 정도로 미개)
 
이후 우리의 본격적 삼국시대로 접어 들어가는
 
3세기에서 늦어도 7세기경까지 서열도에서는
 
고분들이 여기 저기 출현하는데 이를 고분시대로
 
부릅니다.
 
윗그림은 그중에서도  열도 고분시대에 발견되는 가장 크고 선진적?인
 
미츠데라 유적(6세기 초)임. ㅋ
 
도시취락이라고 전혀 부를 수 없는 인구 희박에 단지
 
저기 뒷쪽 고분 양식과 앞쪽에 사각형의
 
방어시설이 있는데 정치 지배자가 사는
 
굴립주식(과수원 원두막 형태임 ㅋ) 양식입니다.
 
당연히 이당시의 저런 방어 시설은 우리 가야 백제의 소규모
 
호족 집단들이 열도에 300여개가 난립 개척하든
 
시대인데 이곳에서 살다 죽으면서 나오는게 저런 고분양식들임.
나머지 취락 마을의 주거 양식은 땅을 파고 움집생활을 했고 8세기까지도 이
 
게 대부분이였던게 열도의 문명 생활 수준이였고
 
우리의 근세 조선이 들어서기 직전 즉 14세기까지도 열도의 일반 서민들은
 
움집생활을 할 정도로 미개했음(이건 울나라 신석기 청동기시대나 봄직한)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commu07&wr_id=179751&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6%EC%84%B8%EA%B8%B0+%EC%97%B4%EB%8F%84&sop=and


이게 뭘 말하냐 하면 열도는 백제 도래인 이후 문명이 계속해서 정체된

상태였다는 말임. 즉 자발적, 내재적 어쩌고 소리할 고대사가 아니랍니다.
     
굿잡스 14-09-08 20:57
   
열도내 우리 유적 -신롱석산성(神籠石山城:고고이시산성)

사가현(佐賀縣) : 오츠보산성(おつぼ山城, 1.87km)
사가현(佐賀縣) : 쿠마산성(帯隈山城, 2.4km)
후쿠오카현(福岡縣) : 코우라산성(高良山城, 2.8km)
후쿠오카현(福岡縣) : 녀산성(女山城, 3.0km)
후쿠오카현(福岡縣) : 라이산성(雷山城, 2.3km)
후쿠오카현(福岡縣) : 하키성(肥木城, 2.63~3.0km)
후쿠오카현(福岡縣) : 카케노우마성(鹿毛馬城, 2.35km)
후쿠오카현(福岡縣) : 고쇼카다니성(御所ヶ谷城, 2.55km)
후쿠오카현(福岡縣) : 도바루성(唐原城, 2.5km)
후쿠오카현(福岡縣) : 미야지다케성(宮地岳城, 2.5km)
야마구치현(山口縣) : 이와키산성(石城山城, 4.0km)
에히메현(愛媛縣) : 에이누산성(永納山城, 2.8km)
카가와현(香川県) : 키산성(城山城)
오카야마현(岡山縣) : 키노산성(鬼ノ山城, 3.2km)
오카야마현(岡山縣) : 오메구리고메구리산성(大廻小廻山城, 3.0km)
효고현(兵庫縣) : 시로산성(城山城)

평균 2~3km, 최대 4km의 산성.
 

 
 
고대 열도에서 성곽이라는 방어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배경은 삼국시대 우리 가야 백제 세력들이 서열도
 
즉 후쿠오카 일대를 근거지로 하면서 본격화됩니다.
 
 
열도에 있던 소위 원주 조몬인들은 기본 동열도를
 
본거지로 에도시대까지 수렵생활을 지속할 정도로 미개했던
 
종족이였고 열도에서의 본격적 문명은 기원전 3세기경을
 
전후로 야요인들이라는 고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마도와 이끼섬을
 
징검다리로 후쿠오카에 터를 잡으면서 벼농사와 청동문화를
 
퍼뜨리게 됩니다.(우리 남부지역의 고인돌이나 청동기 밀집
 
주거등을 보면 이미 이때 상당한 인구수를 보이는데
 
신석기시대 세계에서도 가장 이른 고래 포경등 해양 문화까
 
지 향유하다 보니 늘어난 잉여 인구들에 의해 이런
 
해양개척 역사가 이른 시기에 이미 본격화)
 
 
그리고 이런 가운데 열도에서 나타나는 우리성곽은
 
전체적으로 3단계의 양상을 거칩니다.
 
백제가 패망하기 전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일명 조선식 산성(혹은 신롱석산성)과 이후 백제가 패망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663년 400여척 약 3만에 이르는 열도의 백
 
제 지원세력이 백촌강에서 전투를 벌리다 신라와 당 연합세력에
 
캐털리고 나자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열도에 다시금 대대적 산성들이 등장하는데
 
이게 2차의 백제식 산성입니다.
 
 
그리고 이후 우리나라할때 나라헤이안 백제계 유민의
 
극소수 귀족시대가 열리면서 기존 사찰 위주의 아스카 도시
 
문명에서 본격적 도성체재가 급격히 등장하고 중소형 위주로
 
동열도 일대 에조를 방어하기 위한 성곽들이 등장하는데
 
이것도 재정 여력등이 여의치 않아서 성곽이 석성이나 토성도
 
아니고 목책형임 ㅋ(이것만 봐도 삼국시대 이후 남북국시대이고
 
우리와 열도의 문화나 국력의 역량에서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겠죠. 잽 극우들은 우리의 남북국 시대에 등장하는 열도내
 
의 풍을 무슨 당풍 어쩌고로 변색,희석시키려고 애써지만 이때에
 
도 우리 신라 발해의 정치적 문화 영향력이 더 직접적이고 지속
 
적으로 열도에 미치면서 기본 뼈대의 우리식 성곽들은 여전히 이
 
어짐. 당연히도 나라 헤이안 시대의 극소수 귀족이 다름아닌 우
 
리 옷과 언어 문화를 향유하던 우리 백제계나 고구려계 기타 신
 
라계들이니 )
 
BC 3세기 ~ AD 2세기경에 산자락에 우리 선조들이
 
이주하면서 발생한 고지성집락(高地性集落)이 발견되는
 
데 이 일대에 잽어로 '신이 깃든 돌'이라는 고고이시산
 
성 즉 신롱석산성도 발견됩니다. 이게 연구가 진행되면서
 
우리나라식 산성이라고 해서 조선식 산성으로 불리게 된
 
거죠.
 
 
이당시의 미개했던 이런 열악한 열도공간에서도 울 선조
 
들은 일찍히 저런 수킬로의 산성을 구축해내면서 이후 점
 
차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동열도로 세력을 확장.
 
가야 이후 백제가 본격적으로 열도를 담로체재로 지배하면
 
서 외치영토로 군림, 문명을 꽃피워 나가게 됩니다.
     
굿잡스 14-09-08 20:58
   
“이나리야마”에 새겨진 백제의 열도 지배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


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68467§ion=sc1§ion2


흔히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백제의 칠지도 명문에 대해 설왕설래하지만  명문이 새겨진 쇠

칼은 열도에서 칠지도 이외에도 다양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두식 한자죠. 즉 삼국시

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에만 보이는 뜻이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식 발음을 위해 차용하여

사용되는 이두식 한자 명문이 새겨진 쇠칼들이 열도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그기에는 백제가

지배한 담로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뚜렷한 흔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굿잡스 14-09-08 20:58
   
백제가 건설한 열도의 사야마이케 저수지


http://blog.daum.net/ih2oo/15707804
 
사야마이케(狹山池)는 오사카부 사야마시에 위치한 관개용 저수지로 전체 둘레 약 3㎞, 전체면적 약 36
 
㏊ 축조연대는 일반적으로 616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저수지는 에도시대까지도 사용되었을 정도로 매우 오랫동안 오사카의 중
 
요한 젖줄이며 이곳을 개척하기 위해서 건설된 것으로 물에 관한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 선행된 저수지 건설입니다. 당시 백제의 앞선 고도의 기술력
 
을 알 수 있죠.


고대 세계적인 저수지의 효시가 벽골제인데요 벽골제 제방의 크기를 1,800보로 틀을 잡은

때가 백제 비류왕 서기 330년에(삼국시대 이전 삼한 시대로 까지 거슬려 추정됨), 사야마이

케는 616년 무렵에 각각 축조됐으며 부엽공법과 용도 등이 다르지 않습니다.

일제 이전까지 열도에서 오사카는 우리 백제주로 표기.
     
굿잡스 14-09-08 20:59
   
"백제의 성왕은 일본왕을 겸했다"


http://blog.daum.net/kes6030/12497581


참고로 나라 헤이안 시대할때 이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할때 순 우리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이당시를 극소수귀족시대라고 하는데 그 귀족이야 우리 백제계 및 기타 고구려

신라인들임(당연히 이당시의 문학에서의 향찰등은 우리식으로 풀어야 해석이 가능하고

이들이 입은 옷이나 언어 정원 사찰이나 건축 형태고 어떤지 두말이 필요없겠죠)
     
굿잡스 14-09-08 21:00
   
최근에 열도의 고대사학계 권위자인 도노 하루유키 나라대 교수가 예군 묘지명을 근거로

일본이라는 명칭은 본래 백제땅을 지칭했는데 이후 백제가 멸망하고 일부 백제인들이

열도에 정착 본격적 우리나라할때 나라 헤이안 극소수(백제인 및 일부 고구려 신라인등) 귀족

시대를 열게 되면서 왜라는 단어가 부끄럽다보니 백제땅을 부르든 일본이라는 명칭을

국호로 바꾸면서 본격적 국호가 등장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일본은 원래 백제땅 일컫는 말이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144835
후안무치 14-09-07 23:23
   
그러네요 일본 빼고는 알고 있는 사실이네요ㅋㅋㅋㅋㅋㅋ
gagengi 14-09-08 00:58
   
중국북부인도 홍산문화에서 남하한 동이족 한민족이 조상입니다. 고조선 직계인 홍산인들이 중국동부로 남하하여 은나라를 세우고 중국에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에도 금나라 청나라등을 세워 북경을 비롯한 중국북부지역을 지배했습니다. 북경에 가보면 중국사람들이 한국사람과 비슷해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즉, 한국사람이 중국과 일본 양쪽으로 퍼져나가 동아시아 문화의 원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문화는 중국문화가 아니라 한국문화권입니다.

동북아시아는 한국문화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41450
     
솔로윙픽시 14-09-08 01:14
   
참 꿋꿋하시네요. 그 기세로 가갱이닷컴이라도 만드시는 게... ㅎㅎ
          
얼음누늬 14-09-08 10:48
   
원래 쪽발이보다 그 앞잡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는데

쪽발이들 식민사관에 노예가 된 줄도 모르고 쪽발이 앞잡ㅇ 노릇하는거 보면 참 안타까움..

요새 강단사학은 홍산문명 요하문명도 중국거다 이 지랄하기 시작했는데 다 쳐죽일 넘들임...

원래 중국넘들은 장성이북은 동이의 역사다 할 정도였는데

한중 수교후 한국과 교류해보니 한국넘들은 다 중국역사라니 중국애들도 우리거다 하고 주장하기 시작함...

민족의 역사를 팔아먹고, 역사를 배우면 배울수록 고개가 쳐지고 어깨에 힘이 빠지게 만들어진 식민사학의 노예가 된 이들이 너무도 많아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상이 이모양 이꼴인지도...

상고사는 그냥 동이의 독무대인 역사임...짱깨들이 배워가서 짝퉁문명 만든 것이고

춘추필법에 의해 역사를 다 조작했지만 저 홍산문명은 너무 늦게 발견되서 중국넘들이 조작할 시간이 없어서 이넘들 한국인들은 접근도 못하게 막으면서 동북공정하고  이러는데..

이 정신 빠진 민족은 자기네들의 역사도 못찾아먹고 다 남의 것이라네..
걍노는님 14-09-08 02:32
   
고맙네요.....동복공정이 결국은 부정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거니깐요....
ANINY 14-09-08 04:44
   
인류발생기원을 처음부터 추적하다보면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인류가 이동을하며 개체수가 늘기 시작했는데,,
지리적인 특성을 봐도 이건 초딩이 봐도 알만큼 아주 상식적인것인데도 말입니다. 대륙에서 아래로, 한반도를 거쳐서 섬으로 흘러들어가게 된것이죠.
고대일본인들 그러니까 소위 원주민들도 한반도와 훗카이도북부를 통해 흘러들어온 러시아계 그리고 소수의 중국계들이 믹스된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일본의 원주민들이 정착하게된것이고... 이후로도 수없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한국을 통해 많은 이동이 있었을테구요.
이건 그냥 딱봐도 알수있는 상식수준인데 일본얘들은 거꾸로 일본을 통해 한반도로 흘러들어갔다고 주장하죠 ㅎㅎㅎㅎ..
구석기역사 날조같은 사기극도 비슷한 맥락이고..
모든 역사를 지네들 입맛에맞게 고치는 얘들입니다.
.. 태평양 한복판에서 인류가 발생했나보죠.
     
패닉호랭이 14-09-08 12:10
   
근데 그거 아프리카 기원설도 깨졌다네요.
굿잡스 14-09-08 21:06
   
잽극우들이 자신들 고대사에 스스로의 열등감으로 울보고

매번 기원설 날조 어쩌고 쳐하든 말든(쓰레기들에게 뭘 바람)

열도의 문명과 국가 기원은 캐무식한 정치적 잽극우들이 아닌 전통적

일본 고고학자들은  부인할 수 없는, 부인하지도 않았고 일반인들이 알던 모르든

이전부터 한결같이 주장한 내용들이고 열도는 그런 삼국시대 우리의 백제 외치영토로

이후 나라헤이안시대에는 그런 건국의 주체임을 더욱 생생히 체험할 수 있는

유적 경연장임.

이자체를 우리 스스로가 더티 잽극우들 눈치봐서 못할 이유도 전혀~~ 없고 팩트는 팩트임.

그걸 가지고 잽극우들이 지들 스스로 열등감에 부들 거리는 것일 뿐이고

(무슨 한떄 해가 지지 않은 영국도 런던이 로마 식민지 개척의 병영기지인 론디니움에서 나온 외세

가 개발해서 시작된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되게 가르치고 있음? 지들이 캐무식하게 그런 열등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쳐하는 거지)


그리고 현재는 솔직히 이런 기사도 별로 달갑지도 않죠. 뭐 한때 우리에서 뻗어 나갔니 어쩌니 쳐해도

아직도 과거사 하나 스스로 당당히 사과못하는 허접들에 부모의 나라에 패륜짓의 역사를 반복

쳐하면서도 부끄러움 하나 없이 막말 언행을 계속하는 호로색들에게 도리어 기분 나쁨.
6시내고환 14-09-10 13:49
   
일본은 자신들이 도래인들을 기록하고 그들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였음을 기록했음에도 ㅋㅋㅋㅋㅋㅋ인정안하죠 현실부정 날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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