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함도 적당히 해야 멍청하다고 해주지 이 정도로 멍청하게 대응해놓고 반박이라고 적은거 보면 초등학교에서 주장-근거에 관한 일반도 배우지 못한 저능아로 보일 수준. 하나하나 그 지적능력이 박약하고 정신병원에 가둬야 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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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무식한게 우기기만 하네.. 니가 질문한거 일일이 찾아서.. 가르쳐달란건지..귀찮게 짜증나게하네...
진짜 간도 관련 책이라도 한번이라도 읽어보고 나대길.. 한번이라도 읽어본적 있다면 알만한 기초적인 내용도 모르고 나대는넘이 ㅉㅉ
1. 토문이 두만이라는 증거
-> 당시 정계비 세울당시.. 두만강의 상류 찾다가 토문강이 두만강의 상류인걸로 알고 기록한점.
그리고 이점을 지적하는 상소도 있었고 (위에 링크한 내용)
간단히 말해서.. 당시 착오로 토문강을 경계로 정한것인거고.. 나중에 가서 이걸 근거로 조선 청의 국경이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이란 주장이 나오게된 배경인건데.. 다 따져보면 애초부터 두만강이 국경이고(두만강 건너서 국법으로 처벌된 기록들 수두룩함), 강 상류는 경계가 모호해서 이를 명확히 하기위해 정계비 세운것이었다는거 한국측 기록만봐도 나오는 내용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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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번. 숙종실록이고 쳐 들고 온 그 자료에서 어디에도 토문이 두만이라고 적힌 바는 없음. 혼자만의 해석질을 놓고 계속 기록에 있다라고 우기는 자세. 숙종실록에 적힌 내용은 목극등이 실수해서 토문이라고 해놓았다라는 말일뿐. 무엇보다 이 저능아는 계속 같은 말이나 하면서 자기가 반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토문이 두만이라는 증거"라고 했지 숙종실록에 기록된 문헌해석하자고 한게 아님.
이 저능아도 자기가 직접 이렇게 떠들고 있음
"간단히 말해서.. 당시 착오로 토문강을 경계로 정한것인거고.. 나중에 가서 이걸 근거로 조선 청의 국경이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이란 주장이 나오게된 배경인건데.. 다 따져보면 애초부터 두만강이 국경이고"
조선이 (숙종시기에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식했다가 주제가 아니라, 토문이 두만이라고 볼 수 있는 지리적 근거를 대라고 하는 것임.
게다가 근거라고 해봐야 숙종실록이 전부. 앞서 언급한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고종실록은 왜 무시하냐고 이미 2번이나 적었음. 여기에 대해서는 전혀 반박도 못하는 정신박약이지.
1712년의 착오가 지금 주제가 아니라 토문이 두만인가에 대한 증거를 들고 오라고 했음. 이 간단한 것도 돌파 못하니까 (애초에 토문은 송화강이 맞음) 쓸데없는걸 쓰면서 자기도 비판했다라고 개착각, 대충 저 글을 보는 사람도 비판이라고 생각하게 만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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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계회담에서는 송화VS두만으로 싸운 이유
-> 감계회담에서 송화vs두만으로 싸운적 없다..
1차회담에선 청에선 두만강이 국경이니 두만강 하류에서부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확인해보잔거였고, 조선에선 정계비대로 토문강이 경계라 하다가.. 다 확인해보니 토문강은 송화강으로 이어지는거확인만 한셈이다. 그래서 청주장대로 회령, 무산거쳐서 두만강 상류로 올라가다가 3갈래로 갈라지는 삼하강구에서 탐사팀을 3개로 나눠서 조사한거였고..
청에선 두만강 상류가 젤 남쪽인 서두수라 주장한거고.. 조선의 이중하는 홍토수가 두만강 상류라한거였고.. 여기서 그냥 회담이 깨졌던거고..
이중하는 관련상소 올린 내용이
" 오늘날 경계를 확인하는 일은 지난 시기에 비할 것이 못 됩니다. 옛날의 경계를 다시 밝히고 유민들을 찾아다 안착시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경계로 말한다면 수원(水源)이 일치하지 않고 목책(木柵)도 다 썩어서 실제의 장소가 옛 문헌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옳게 확인하기가 오늘날에는 난처합니다. 유민들로 말한다면 강에 대한 단속이 오랫동안 해이해져 넘어간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쇄환할 길이 없으며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이중하 부터도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이어지는거보고.. 송화강이 조선의 국경이라 주장하지도 않았고.. 청하고 같이 두만강 상류찾는 탐사한게 1차 강계회담때 내용이란다.
2차회담역시.. 강을 조사하잔거 가지고 다툰건데 이중하는 홍토수를 조사하자고했고 청에선 서두수를 조사하자고 싸우다가.. 타협한게 중간에 있는 홍단수 먼저 조사하고 (셋다 모두 두만강 상류다) 그뒤에 다시 논하자고 했던게 2차회담이다.
"또한 년 청국 관원들에게 양국의 국경선이 홍토수 라고 하니 그들이 1887 ( ) 紅土水
이중하를 둘러싸고 위협을 가하자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나라의 강토는 축소할
수 없다 오두가단 국강불가축 면서 단호하게 그들을 제지하는 ”[ , ] 吾頭可斷 國疆不可縮
모습을 보였다 감계사등록)
2차회담때 이중하가 홍토수가 국경선이라 했는데.. 홍토수가 어딘지 니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라.
http://blogimg.ohmynews.com/attach/691/140054548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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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자기 억지의 주장. 일종의 편한대로의 편집증을 발휘해서 억지로 중국의 땅이라고 우기고 싶은 중뽕블로그글을 복사한 수준. 안타깝지만 이미 내가 적어준 장문의 출처부터 반박하고 쓰는거 어떠심?
"이러한 소식이 때마침 경원부(慶源府)를 순시 중이던 서북경략사 어윤중(魚允中)에게 알려졌다. 어윤중은 보다 신중을 기하고자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두 차례나 백두산에 파견해 현지를 재 답사시키고 정계비의 탁본을 떠오도록 조처하였다.
어윤중은 이보다 앞서 1882년 10월 청나라와 통상 장정(通商章程)의 타결과 서북 각읍의 암행 및 서북 국경의 답사, 감계(勘界)의 사명을 받고 서북경략사로 두만강 유역 열읍(列邑)을 순시 중에 있었다.
어윤중은 김우식의 답사 결과를 토대로 하여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문강은 송화강상류로 간도 지방은 우리 영토임을 주장했고,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 조사에 의해 국경을 획정할 것을 청나라의 현지 관료에게 제기하였다.
한편, 어윤중의 보고와 건의에 따라 우리 정부도 청나라 정부에 같은 일을 자문하였으나 청나라 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시일만 지연되었다. 1885년 4월에 청나라의 혼춘 당국이 함경도안무사 조병직(趙秉稷)에게 월경 조선 경작자들을 무력으로 축출할 것임을 통고하고 일부 지방에서 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였다.
이에 우리 정부는 청나라에 대해 토문감계(土門勘界)를 다시금 요청했다. 이 요청에 청나라가 응하게 되니, 이제 간도 문제는 현지 관료들의 행정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발전되어 간도 귀속 문제는 양국간의 새로운 외교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회담인 제1차 을유감계회담은 우리 정부의 제안에 청나라가 응해 온 것으로, 1885년 11월 함경도 회령에서 회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때 이중하는 정계비를 먼저 사감(査勘)하고 강의 발원을 조사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강원(江源)을 먼저 조사해야 하며 정계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청나라가 두만강 상류를 도문강(圖們江)으로 보고 정계비의 토문강이 곧 도문강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자기들 주장대로 우리측을 승복시키기 위한 강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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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억지편향해석을 위해서 어떻게 자료를 멋대로 해석질을 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지.
"1차회담에선 청에선 두만강이 국경이니 두만강 하류에서부터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확인해보잔거였고, 조선에선 정계비대로 토문강이 경계라 하다가.. 다 확인해보니 토문강은 송화강으로 이어지는거확인만 한셈이다. 그래서 청주장대로 회령, 무산거쳐서 두만강 상류로 올라가다가 3갈래로 갈라지는 삼하강구에서 탐사팀을 3개로 나눠서 조사한거였고.. "
"이중하 부터도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이어지는거보고.. 송화강이 조선의 국경이라 주장하지도 않았고.. 청하고 같이 두만강 상류찾는 탐사한게 1차 강계회담때 내용이란다. "
글을 보면 대체로 이런 식임. 엄격한 근거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기가 편한대로의 우물쭈물로 대충 넘어가는 수준. 1차회담에서 이중하는 분명히 사감이 먼저이고 나중에 강원을 조사하자고 했음. 그런데 이 사람은 청의 주장만 떠들고 마치 조선도 여기에 동의했다는 뉘앙스를 깐다. 더 웃긴것은 머리속에서 끝까지 조선은 두만강을 국경이라고 주장하였을 것이고, 오히려 토문이 두만이 아니니까 조선은 두만을 주장해야 한다라는 신기한 논리를 폄. 조선이 두만까지를 영토로 인정했다면 뭣하러 감계를 했는지조차 혼미해지는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음. 청하고 두만강 상류를 탐사하는게 1차 감게회담때 내용이라고 우길거면 왜 탐사를 했는가의 이유를 적시하지 않고 그냥 끼워서 붙여넣기.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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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간도는 우리땅이 아니지만 중국의 땅이라는 근거는?
->청에서 봉금령 내려서 임자없는 땅이라는 논리라면.. 독도를 공도정책펴서 주인없는 섬이된거라 우기는 왜넘들과 다를게 뭔가?
일단 당시 조선에선 월강금지령으로 압록강 두만강 건너면 국법으로 처벌했었고.
당시만해도 청나라 사람들이 국경에 출몰해서 문제가 되서 강희제가 월경하는 청나라 사람들을 조선에서 잡아서 처벌하게 허용했고.. 그뒤엔 영고탑이 두만강일대 개간할때 조선에서 청에게 자문보낸 내용이 국경일대에 사람이 거주하지않아야 국경을 불법으로 넘나드는 범죄가 안일어날거란거였고.. 이에 강희제가 응해서 봉금지대를 확대했던 배경이었다.
간단히.. 간도가 우리땅이란 근거로 내세우는게 1870년 함경도 가뭄으로 대거 조선인이 빈땅인 간도로 대거 이주하면서 뒤에 벌어진일이다.
그뒤에 청에서 이들 이주한 조선이들을 다시 데려가란 공문을 고종때 보냈었고
고종 21권, 21년(1884 갑신 / 청 광서(光緖) 10년) 5월 14일(무자) 3번째기사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임한수(林翰洙)의 장계(狀啓)를 보니, 종성 부사(鍾城府使) 홍시형(洪時衡)의 치보(馳報)를 낱낱이 들어 아뢰기를, ‘중국 사람 세 명이 와서 공문(公文)을 전하기에 그 내용을 보니, 길림(吉林) 돈화현(敦化縣)에서 보낸 공문이었는데, 토문강(土門江) 북쪽 기슭을 차지한 채 개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민들을 다 데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회답 공문을 먼저 만들어 보내고 유민을 찾아오는 문제는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그뒤에 조선에서 북간도에 관리 보낼려할당시.. 이미 북간도는 청나라 관리들이 있던 지역임.
고종 43권, 40년(1903 계묘 / 대한 광무(光武) 7년) 8월 11일(양력) 1번째기사
이범윤을 특별히 관리로 임명하여 북간도에 주재시키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 온 것은 이미 수십 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인데 아직 관청을 설치하여 보호하지 못하였으니 허다한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청나라 관원들의 학대에 내맡기니 먼 곳을 편안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소홀함을 면치 못합니다. 우선 외부(外部)에서 청나라 공사와 상판(商辦)한 후에 해당 지방 부근의 관원(官員)에게 공문을 보내어 마구 재물을 수탈하거나 법에 어긋나게 학대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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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딴에는 뭔가 길게 쓰고 있는데 다 쓸데 없는 소리. 기본적인 주장과 근거에 대한 개념도 없다고 보일 정도. 요구한 것은 간도가 왜 중국의 땅이어야 하는가의 근거를 물어본거지 왜 우리네 땅이 아닌가에 대한 게 아님. 비판의 취지(사실 취지라고 할 것도 없음. 그냥 대놓고 물어보고 있는데 여기에도 대답을 못함. 늘상 이런 매국적인 사고에 뇌가 녹아버려서 그럴듯한 말로 대충 넘어가려는 한심한 수작은 어느 사이트 블로그에 가면 늘 있는 소리) 부터 이해를 못하는 수준이니 간도에 대해서 이야기해봐야 어느 중빠블로그에 있는 흔해빠진 글과 주장을 그대로 복사하는 수준.
그래서 간도가 중국의 땅이라는 근거는? 조선인이 월경해서 처벌하는게 중국의 땅이라는 근거인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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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근대적 국경개념 해설
5. 영토와 영향력의 차이
6. 합리적인 해석 (숙종시기의 간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고종시기로 확장되었는가)
1870년 가뭄으로 조선인이 대거 북간도에 이주하게됐고.. 이에 청에선 이들을 귀화시킬려하다가 다시 조선에 데려가라고도 했다가 감계회담 결렬되고선 청관리 파견해서 통치했다.
조선이 간도에 관리 파견하게되는건 1903년이고.. 러일전쟁뒤에 일본-청간에 간도협약맺은게 1905년...
저 2년간 조선이 간도 통치했는데 일제에 의해 억울하게 뺏긴 영토란 주장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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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딴에는 비판다운 비판을 하는 척 하지만
1) 근대적 국경개념을 적시하지도 못하면서 헛소리 나열
2) 영토개념과 영향력의 분명한 차이점.
3) 이 사람이 가장 잊고 있는게 있는데 지금 주제는 간도가 우리땅인가라는 것이지 숙종시기의 두만강의 정확한 국경인식을 물은게 아님. 그러니 숙종에서 고종시기로 가면서 조선에서의 영토인식에 '합리적인 해석'
을 물어본것임.
기껏해야 어디서 주워들은 숙종실록의 내용만 듣고 이것만 머리속에 집어넣었으니 여기에 대해서만 비판을 하지만(두만강이 어떻고 하는 그의 소리를 들어보자. 이 자가 하는 소리는 오직 여기만 해당) 정작 국경, 영토문제에 있어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경과 행정권의 존부, 근대적 영토관, 조선 후기 고종시기의 북방영토에 대한 인식을 놓고 조금의 잡소리도 없다. 그래도 적어도 연도는 맞추고 쓰자. 간도협약은 1909년임. 1905년이 아니라.
대한제국은 분명하게 간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했을 뿐 아니라 직접 관리까지 했음.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와도 '간도는 중국님의 것입니다'라고 우기고픈 한 중빠인생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주제는 간도가 우리나라 땅인가 여부이지, 숙종 시기의 두만이 어떻고가 아닙니다. 간도가 우리땅인가의 여부를 놓고 조선숙종실록만 쳐 들고와서 모든 논증을 하는 무식한 수준으로 선동질 당한 사람은 없다는 것만 알았으면 함.
"손문의 '민족주의'에서 중국이 망한적이 두 번 있다면 1번은 몽골족의 원, 2번째는 만주족의 청"
조선과 청사이의 정계비를 세우든, 감계를 하든간에 그건 중국과 관계가 없는 소리. 근본적으로 중국의 땅이라고 우길만한 역사적 연고권은 전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