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은하 제국님께서 아래에 한사군에 대해 물으셔서
저도 호기심이 생겨 여러자료 살펴보았고 상당히 문제가 많다 여겨집니다
대강 정리해 보면
사료에 나타나는 한사군의 의문점
1. 사마천은 중국 최초의 역사서인 <사기>를 집필한 인물로 한사군전쟁에 몸소 종군하여
<사기 조선열전>에 다음과 같이 한사군전쟁을 기록합니다.
'한 무제는 순체와 양복 두 장군에게 5만 여의 대군으로 고조선을 정벌케 하였고
1년이 넘는 전쟁 끝에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귀국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수도를 점령하고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장군에게 합당한 논공행상는 무엇일까요?
당시 승전하여 개선한 장군은 제후에 봉하고 이하 장병에게도 합당한 포상을 하는것이 관례
였습니다.
그러나 사기에는
(1)좌장군 순체: 사형 후 시신을 길거리에 조리돌리는 기시형
(2)누선장군 양복: 기시형이었으나 막대한 벌금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
(3)위산: 고조선과 강화협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참수
(4)공손수: 마음대로 군사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참수
(5)졸정다: 육군선봉장, 참패의 이유로 참수
이처럼 전쟁에 참전했던 한나라 장수와 사신들은 모두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중 좌장군 순체는 시중으로서 무제의 총애를 받던자였습니다.
사마천은 <사기 조선열전>에서 한사군전쟁의 결과에 대해 아래와 같이 사평합니다
“兩軍俱辱 將率莫候矣 (수.육 양군이 모두 치욕을 당했다. 장수들 중 제후로 봉해진 자가 없다)
승리한 전쟁의 사평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2. 낙랑, 임둔, 현도, 진번 이라는 한사군의 구체적 지명은 사마천의<사기>가 아니라
고조선과 한의 전쟁 200년 후인 반고의<한서 무제열전>에 처음 등장한다 합니다
사마천은 전쟁에 직접 종군한 목격자 임에도 한사군 식민지명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고,
단지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으로 삼았다'라고만 합니다.
반고의 <한서>가 한사군에 대한 역사적 사료로써 빈틈이 없다면 위 논쟁은 불필요 하지만,
<한서> 역시 한사군에 대한 모순적 기술이 많이 나타납니다
(1)한서 무제본기: 한 4군으로 기록
(2)한서 지리지: '현도·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다'고 한2군으로 기록
(3)한서 오행지: '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삼군을 열었다'고 한3군으로 기록
즉, 같은<한서>내에 한사군에 대한 모순된 기록이 나타나는 겁니다
3. 이처럼 고대 역사서 <사기>와 <한서>에도 모순된 기록으로 그 존재조차 불확실한 한사군을
한반도내에 위치했다고 정설로써 각인시킨 인물은 누구일까요?
바로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했던 이마니시 류라는 일제 식민사학자입니다
이마니시 류는 조선총독부의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을 ‘한 낙랑시대의 고적조사 사업’으로 개칭한다는 총독부 방침에 따라 역사왜곡에 돌입합니다
이마니시 류도 평양 일대의 유적은 고구려 유적으로 보았으나,
총독부의 방침대로 평양을 한사군 '낙랑'의 유적지로 탈바꿈 시킵니다
(1)이마니시 류는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와당과 봉니를 발견하였다 하고,
(2)점제현 신사비를 최초로 발견하였다 하며
(3)평양을 낙랑군의 유적지로 둔갑시킵니다.
이마니시 류는 1935년 출간한 <조선사의 길잡이>에서 한사군이 조선사의 시작이라 말합니다.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인 한사군으로 믿게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추락시켜 식민지배에 순응케하고,
일제의 식민지 경영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고조선과 한의 전쟁 후 2000여 년이 흐른 일제강점기에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평양은 한사군 중 낙랑군으로 규정됩니다.
4. 한국사의 식민지성을 강조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이들의 역사왜곡은
해방 후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국사 체계를 만들었어야 함에도,
일제 식민사학은 실증주의란 이름으로 한국사의 주류로 남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였다는데에 이견을 제시할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래는 네이버 백과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낙랑에 대한 일제식민사학이 여전함을 보여주는것 같아 씁쓸합니다...
한강이북이 중국사의 일부라는 중국 동북공정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한사군에 대해 대강 정리해 보았습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2002년 MBC 뉴스 ---------------
'임둔'라는 글자가 적힌 유물이 중국 요서지방인 요녕성 진시시(錦西市) 소왕대에서 발견됩니다,
한사군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최소한 임둔이란 지명은 한반도와 관계없음을 나타내는것 같습니다.
“고조선 중국내륙에"
앵커: 고조선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넓었다는 학설이 제기됐습니다.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중국 요서 지방에서 출토됐습니다. 김성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설치된 한 4군은 지금의 평양의 낙랑, 오른쪽에 임둔 , 오른쪽에 진번 그리고 만주 동부와 함경도에 현도가 위치했는 게 통설입니다. 그런데 임둔 이라는 글자가 적힌 유물이 중국 요서지방인 요녕성 진시시(錦西市) 소왕대에서 발견된 사실이 최근 단국대 박물관 복귀대 박사의 논문에서 밝혀졌습니다.
공문서를 넣은 상자 등에 함부로 뜯어볼 수 없도록 진흙을 바르고 직인을 찍은 봉니가 바로 그 유물인데 규격과 서체로 볼 때 한의 중앙 정부가 인근 태수에게 보낸 것입니다. 더욱이 복리 출토 성토에서는 고조선 계통의 유물이 다량으로 나와 바로 이곳이 임둔 소재지임을 밝혀준다고 복 연구원은 말합니다. 임둔 이 요서지방에 있었다면 낙랑은 그 왼편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따라 한 4군의 전신인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 내륙쪽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습니다.
인터뷰: 우리나라의 상고사인 고조선이 만주지역으로 비장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럼 만주지역으로 비정이 된다고 할 때는 우리나라 상고사 전체의 틀이 한번 바뀔 수 있는 거죠.
기자: 이번 연구결과로 일제시대 일인학자들이 한반도 위치설의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했던 평양지역의 낙랑유물 유적부터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MBC뉴스 김성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