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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7-12 23:00
[기타] 한사군 이야기...
 글쓴이 : 옥토29
조회 : 2,038  

엔하위키/리그베다위키에서는 현재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보는게 정설이라고 말하더군요.

한나라시대. 특히 삼국지 소설 등으로 꽤 이 시대에는 프로 아마추어 안가리고 지식을 가진 분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제 머리로는, 아무리 국경선이 모호한 고대시대라고 해도, 요서를 넘어 요동을 넘어 고구려와 부여땅을 지나서 한반도 북부에 행정관(주자사?태수? 쯤 되려나요?)과 군대를 파견한다는게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인지 도무지 납득이 안가더군요;

아무리 당시에 고구려나 부여가 변방의 소국이었다고 해도 군대가 자기네 영토를, 아니면 자기네 영토 근방이라 할지라도 타국의 군대가 지나가는걸 가만히 용인한다는거 자체가 이게 말이 되는건지. 최소한 고구려나 부여와 군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협약을 체결하기라도 했다는 외교문서라도 있어야 말이 되는게 아닌지요. 혹시 제가 몰라서 그렇지 그런 기록이 있나요?;;

또, 설사 군대는 안보내고 행정관만 보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솔직히 당시 한반도에 한사군이 존재했다면, 그 한사군이 중국의 통제를 따르는 메리트는 고구려나 부여 등의 국가들로부터 보호받는 것 외에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겁니다. 근데 군대를 안보내준다는건.....한사군 사람들이 다 바보도 아니었을텐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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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현수 14-07-13 00:18
   
한사군이 낙랑군으로 변모해갈때 처음엔 파견 나중엔 토착민 융성 이후엔 독자적 세형성 이거 아닌가요
     
꼬마러브 14-07-13 09:11
   
잘못된 지식입니다..낙랑군은 엄연히 한반도 내부가 아니가 요하 서쪽에 있었고 한사군을 피해 한반도로 이주하여 새로 새운 나라가 낙랑국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동예가 있는데 요서에 있던 예족들이 한사군을 피해 동쪽으로 이주했다는것을 알수있죠
          
꼬마러브 14-07-13 09:14
   
그리고 위만조선또한 단군이 무너지고 열국시대에 있던 여러 나라들 중에 하나였을 뿐입니다. 그 수도 또한 요서에 있었고요..한나라는 이 위만조선을 멸망시켜 군현을 설치했지 고조선 전체를 지배했다는 것은 정말 억지입니다
어모장군 14-07-13 01:05
   
개인적으로 한사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입니다.

한사군이 세워졌다는 당시 기록인 사기 조선열전에 보면 한사군은 존재하지 않기에 믿지를 않습니다. 또한 평양에서 나왔다는 한사군 유물이 최근에 전한 당시 금석문 등 거짓으로 보인다는 연구가 발표 되면서 더더욱 믿지를 않습니다.

사기 조선열전에 보면 한무제가 만조선을 쳐서 한사군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없어요.
다만 한무제가 공격했다는 위만조선을 치러간 지역이 사기연표에 보면 발해만에서 부터 산동반도에 걸쳐 있던 곳으로 평주/날양/홰청/추저 라는 조선인이 다스리는 네개의 지명이 나옵니다.
이 4개의 지명에 관한 설은 원로 역사학자들과 한중수교 이후 사기를 연구한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습니다.
원로 역사학자는 4개 지역을 만 세력을 쫓아내고 분열되어 나뉘어진 옛날 기자조선 사람들로 한나라 군을 상대로 싸워 영토를 지킨 사람들로 보는 반면, 최근 사기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 4개지역의 사람들을 한에 동조한 조선 민족의 최초 반역자로 보는 설로 반대되고 있습니다. 이 4개 지역이 한무제 공격 후 어떤 의미이냐로 이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전쟁 후 무제는 장수들을 전부 사형에 처합니다. 또한 사마천이 육해양군이 모두 졌다고 까지 써놔서 원로학자는 조선이 이긴 전쟁으로, 신진 학자들은 한무제가 장수들을 처형은 시켰으나, 조선이 평정되어 사후가 되었다.[수정조선위사후]를 들어 만조선이 져서 4개 지역이 생긴 것으로 봅니다.

[사후]에 관해서 원로학자들은 패자 한나라가 승자 조선한테 [후]라는 직위를 줬다고 적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흔히 기자가 주나라를 거부하여 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주나라 무왕이 이를 듣고 기자를 조선의 군주로 봉하였다고 한 <상서대전>의 기록과 같은 의미로 보시면 됩니다. 지 싫다고 떠나 다른 나라로 망명 하였는데 지 맘대로 군주로 봉하고, 전쟁에 진 패자가 승자한테 후라는 직위를 주고 웃기는 일이지요. 갑자기 생각은 안나는데 한족역사미화 수법으로 보시면 됩니다.(이걸 무슨사관이라고 하는데 생각이...)

사기가 편찬되고, 180년에서 200년이 지난 후한 때 반고가 편찬한 한서 조선전에 한사군이 최초로 나옵니다. 물론 이것도 원로 역사학자들은 사기 조선열전과 내용이 똑같은데 한사군에 관련한 기록만 틀린 것을 두고 후한 이후 필사를 하면서 고친 것으로 봅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수정조선위사후]이라고만 되어 있지 한사군은 나오지도 않습니다. 후한 반고의 한서 조선전에 보면 [수정조선위낙랑현도진번임둔사군]이라 되어 있습니다.

한사군을 거론하시는 분들은 한무제 당시 기록인 사기 조선열전이 아닌 한서 조선전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후 사서들은 한서 조선전을 참고 하였고, 우리의 삼국유사도 한서 조선전을 참고하여 필사 하였다고 합니다.

허나 한사군이 아닌 사군이 존재는 했을 겁니다. 물론 한무제 당시가 아니라 후에 생겼을 겁니다. 헌데 이게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쳐서 사군을 세운 것 같이 되어 버렸다는 것 입니다.

한사군 중 가자 오래도록 존재한게 낙랑군 입니다.
한나라는 전한(서기 8년에 멸망), 신, 후한 다 합쳐 서기 220년에 망합니다.
허나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은 서기 318년에 망합니다.
믿기 힘들지만 어찌되었던 한서 조선전에는 한사군이 나옵니다.
또한 위만조선을 쳐서 한사군을 만들었다고 하니 사기연표에 따르면 한나라 군이 치러 간 곳이 발해연안과 산동반도에 위치한 곳이니 한사군도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설설설설설 14-07-13 01:20
   
일단 말씀하시듯이 한사군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그러함에 한사군은 학계자체에서도 완전히 부정되고 있고 낙랑에 대해서는 더 조사해야 되는데 북한이 뭐 연구결과를 말하지 않고 있으니 머리가 아프죠 ㅋㅋ
굿잡스 14-07-13 01:31
   
고고학적으로 서북한(평양) 일대가

위만조선의 중심지인 왕검성이 있거나 낙랑군이 존재했다고는 솔직히 납득하긴 힘들군요.

이건 차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지만

만약 그지역에 새로운 외세나 신진세력이 들어와서  지배를 했다면 당연히 그에 따른 그들식

성곽의 분명한 지배실체가 나와야 합니다. 수백년 어쩌고 이야기 하면서 서북한일대에 한나라식

성곽(평지에 정방형)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건 아래에도 언급했지만 당나라가 일순간 고구려 장안성을

털었서도 이후 몇년 못가 요동 요서로 밀려 났듯 일시적이였거나 애초에 이곳이 아니라는 가정이

성립되어야 마땅합니다.  (이미 이 서북한 일대의 여러 토성들은 한나라 이전 고조선 재지세력이 만들어놓은

막쌓기 공법의 토성들임.)

그기에 조선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한나라는  수륙양동의 5만 7천명으로 초기 5만군사는 왔

다가 패하여 흩어져 버리고  7천명은 규모가 작다하여 위만조선이 성에서 나와서 대파

시켜버림. 즉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최소 위만조선의 왕검성내에는 7천명이 적다고

나가서 싸울만큼  1만 내외의 군사력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크기에 전란으로 부터 보호

하기 위해 주변의 백성들도 불러 들여 기록처럼 1여년 이상을 싸울 정도의 성곽의 덩치는

되어야 한다는 것임.(그기에 한나라 철기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의 철제문화력을 가진 군사

력이고)

그런데 서북한 일대는 인구밀도가 높고 일찍이 이른 도시문명의 흔적이 나오지만 소위 낙랑토성이라는 평양시

토성동 일대의 이 토성은 주변 여러 고조선 재지 토성들에 비해 가장 큰 크기임에도

실제 가용면적은 0.1㎢미만으로 최대치가 1500명 정도의 수용 공간입니다.

이정도 크기의 소형성곽을 가지고 무슨 거의 6만명을 상대로 그기에 7천명은 적다고 나와서 대파를 시키고

1여년을 버틸 수 있었다는 건 기록과 맞지 않는 이야기임.(당연히 이일대에서 찾을 길 없다면

다른 곳에서 찾아야 마땅)

도리어 전국계 영향의 철기든 아니면 함경도 무산일대에 이미 기원전 7세기부터 발달한 선철 철기들이 나오

거나 연해주일대의 발달한 철기문화의 영향이든 고조선 재지의 구들양식부터 토기등이 나오는

요하에서 북한 북부 지역의 연화보 세죽리 철기문명권 지역이 위만 조선의 지배지이고 발해만 일대를

중심으로한 곳이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이유입니다.
굿잡스 14-07-13 01:41
   
그리고 고조선이 요하일대에서 이후 진개에 밀려 평양 일대로 이동했고 여기서 한나라에 망해 어쩌고

평양설을 지지하는 이들이 상투적으로 내세우는  근거가 이런 서북한 이남으로만 나오는 세형동검 어쩌고

인데 이건 상당히 호도된 측면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고조선 초기 비파형동검양식도 요령일대에서

요동 남북한 지역으로 그리고 연 소왕(B.C. 311~279) 사이에 나온 진개의 고조선 침략 이후에도

초기세형동검은 여전히 기원전 2세기까지도 만주일대에 출토되고 있는 양상임.(이런 현상이

이후 서만주일대의 전국계 철기 영향이든 아님 연해주나 두만강일대의 이보다 앞선

철기의 발달 영향이든 요하에서 북한 북부지역으로 광범위한 철기문화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이런 초기 세형동검이 이후 서북한지역에서만 이어지고 빠르게 철기문화로 대체되는

양상을 보인다일 뿐임) 즉 이말은 진개의 침략 이후에도

이 요동 일대가 연나라 영역에 제대로 떨어지지도 않았고 연나라 역시도  전국 7웅중에 가장 힘이 약했다

이 소왕시기에 합종연횡으로 제나라등과 연합하면서 세력이 일시 강성해졌다 이후 급격히 붕괴되면서

멸망한 나라로 요동일대를 제대로 복속할 시간 조차 없던 역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잽강점기 이후 잽학자의 주장을 답습해온 평양설 지지자들은 마치 세형동검은 이런

진개 침략이후 고조선의 평양으로 옮기면서 이곳 이남에서만 나왔다는 식으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부각시켰고 일반인들을 호도해 왔다는 점을 아셔야 함.(그기에 저기 토성동 토성(소위 낙랑 토성)

도 평산성에 전혀 정방형도 아니면서 마치 평지성에 한나라식 토성 어쩌고 캐소리를 답습해오면

서 잘 모르는 일반인을 상대로 구라질을 쳐하더군요)
굿잡스 14-07-13 02:00
   
다시금 말하지만 요하일대를 중심으로 전파된 고조선청동문화의 대표적인 전기 비파형 동검양식

은 바로 사라지면서 서북한 이남으로 세형동검이 나타나는게 전혀 아니라

요동에선 촉각식형태이면서 검신이 세형동검의 전형화 고정화되는  출토 유적들이 (4c후말엽~

기원전 2c전엽)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서 위만 조선 성립 시기인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한 시기

의 연화보 세죽리 철기 문명의 영향력이 광범위화 정착화 되면서 기원전 2c중엽~기원전 1c초엽

에는 요령식세형동검이  서북한등 청천강 이남과 달리 지역별로  좀 더 이르게 쇠퇴하여 서북한

과 다른 시기별 존속과 철기가 더욱 광범위 정착화되는 발전상을 보입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세형동검들은 한반도지역에서 출토되는 한국식세형동검과 대비하여 요령식

세형동검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요령식세형동검은 중국 하북지역으로부터 한반도의 서북한지역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고, 세부형태 역시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요령식세형

동검은 검신 하부 형태는 주형 속성을, 등대 마디 형태는 연마 속성을 각각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

여 이 두 속성간의 조합관계를 통하여 다양한 형식을 설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요령식세형동검의 형식은 다양

하게 분류된다.요령식세형동검은 요서지역에서 등장하여 주변으로 파급되는 과정에서 지역별로 다양한 형식을

파생시키면서 변천한다. 크게 보아 ‘과목수영자식→양갑산식,대청산-길상둔식→조가보자-유가초식→마가자-상

보촌-박보촌식,오현리-왕둔식’으로 변천하는 계열과 ‘고비점식→윤가촌식→신송리식’으로 변천하는 계열로 양

분된다.중국 동북지역의 세형동검문화는 요령식세형동검의 형식변천과 공반유물의 전개양상에 따라 크게 4단계

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기(초기:기원전 4c전엽~후엽)에는 요령식세형동검이 처음으로 요서지역에서 등장

한다. 요서지역에서 과목수영자식이 등장하여 유행하였으나 비파형동검이 여전히 사용된다. 요서지역 유적에는

전국연계 유물의 비중이 높아진다.2기(전기:기원전 4c후말엽~기원전 3c전엽)에는 요령식세형동검의 지역별

분화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요서지역은 점차 분포범위에서 탈락하게 된다. 천산산맥 이동의 요동동부지역에

서 엽맥문 청동기가 출현하였으며, 비슷한 시점에 길림중서지역에서 촉각식세형동검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양식

의 세형동검이 등장한다. 전국연계 철기문화도 요동지역으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3기(후기:기원전 3c중엽~기

원전 2c전엽)에는 요령식세형동검의 형식이 몇몇으로 고정되고, 요동서부지역이 분포범위에서 탈락하는 대신

서북한지역에서 다양한 형식이 유행한다. 다양한 형태의 촉각식세형동검이 제작, 사용되며, 이와 함께 길림중서

지역에는 다뉴성문경이, 요동동부지역에는 엽맥문 청동기가 유행하게 된다. 공반유물에서 전국연계 유물의 비중

이 급증하고, 이와함께 연 이외에 조․제의 유물도 부장되며, 진․한초기 유물도 유입되기 시작한다.4기(말기:기

원전 2c중엽~기원전 1c초엽)에는 요령식세형동검이 지역별로 쇠퇴, 소멸하게 된다. 요동지역은 분포범위에서

제외되나 촉각식철검이나 진․한대 동검의 영향속에 일부 세형동검문화의 자취가 확인되고 있다.>

- 이후석-요령식 세형동검을 중심으로
대은하제국 14-07-13 03:32
   
한사군은 처음 들어보네요

제가 역사에 관심이 많아가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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