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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7-09 19:05
[일본] 알기쉬운 일본사
 글쓴이 : 바토
조회 : 4,129  

고수분들이 많아서 쓸까 말까 했는데...
'아하~~! 그렇구나...'라고 알고자 하시는 분이 있을까 해서 적어봅니다
 
장황하게 알고싶으시면....
도서관 가셔서 '911' 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알기쉽게 쓴 관계로..
세세히 파고들면 틀린부분도 있을겁니다
 
 
 
 
구석기 시대
일본은 한반도 및 타이완, 남중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이곳의 주민들은 고립되어 일본 원주민을 생겨난다..
 
 
 
물론 세세하게 파고들자면 이 당시 " 일본'이란 말은 없습니다..-_-;
세세하게 파고들자면 말이죠..
이하 세세한건 생략하겠습니다..
 
 
 
 
조몬시대
일본의 선사시대 중 BC 1만3천년~BC 300년
일반적으로 중석기에서 신석기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된다.
조몬[繩文]이란 명칭은 이 시대의 토기에서 볼 수 있는 새끼줄 문양의 한자어 승문(繩文)에서 비롯되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일본 열도가 대륙과 단절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변하는 시기로
새끼줄 문양의 토기를 제작하였고 이후 정착생활이 진행되어서 수렵과 어로, 식물의 채취 등으로 생활을 하였다
 
야요이 시대
일본의 청동기와 철기 시대
기원전 5 ~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한반도 및 남중국에서 문물이 유입되는 시대로..
조몬에 비해 급격하게 문명이 발전했다

이시기 남중국 문물도 받아들이지만...대부분 한반도 문화를 받아들어 문명을 발전시키는데..
일본학계에선 자존심 때문인지 한반도보다는 남중국 유입설을 은근히 밀었지만... 떼굴멍..
열심히 땅을 팠는데..되레 한국 청동기시대의 연대만 높혀줬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한반도 문화 받아들인게 아니라...
한반도의 이민자(도래인)들이 들어와 조몬문화의 원주민을 밀어내고 일본을 장악했다는 학설이 대두되고 있다.

야요이 시대를 통해 일본은 금속 도구와 농업이 널리 퍼져나가고 기타큐슈와 혼슈 남부를 중심으로 소국들이 세워졌으며....
4세기경에는 미약하게나마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갖춘 야마토가 등장하여 외교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야마토 국가
고대 일본에 존재했다고 하는 국가
일본 최초의 국가로 불리지만 사실 시작을 어디에서 언제 했는지 모르고....
대략 고훈시대가 시작되는 3세기 중반에 없어진다...

신화에선..
천손이 "왕의 덕을 입지 못한 불모의 땅"에 강림한 이후...진무일왕(제1대 덴노)때 동쪽의 좋은 땅을 찾아 정벌여행을 떠나....
야마토 지방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고..
 
 
고훈시대
서기 250년 ~ 538년 정도의 기간이다.
지배층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각지에 대형 고분을 세웠던 시기다.
고훈은 대형 무덤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

이시 일본은 백제, 가야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였고 신라 해안을 수시로 노략질했다.
백제와 가야의 정치적 혼란 및 멸망 시기에는 많은 이주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에서 일본의 지배층으로 성장한 이들도 다수 있었다.
특히 백제는 일왕의 계통과 직접 연결될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
 
 

아스카시대
6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까지 국가로서 틀을 잡은시대
아스카(飛鳥)라는 명칭은 그 당시 정치 중심지인 아스카 지방에서 따온것.
쇼토쿠 태자가 활약하던 시기로..

왜(倭)라는 국호를 지금의 일본으로 바꾸고..
일왕을 덴노(天皇)란 명칭으르 확립했다.
문화적 갈증을 한국과 중국을 통해 해소해왔으며...
이렇게 전래된 문화를 섬나라라는 지형적 특성을 이용하여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도입해 소화시켰다..
 
*쇼토쿠 태자
백제의 아좌태자를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많은 것을 배웠으며..
외국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여 아스카 시대를 연 걸로 유명하다.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중앙집권화 강화를 위해 만든 정치 시스템이 지금까지 내려온다고..
견수사를 파견되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수나라)의 선진 문화를 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때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에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라는 문구를 기입하는 용자짓을 보여준다.
수양제는" 아 ㅆㅂ 이/새/끼 미쳤나?" 하고..사신을 내쫓으려 했으나 신하의 만류로 겨우 참았다.
당시 일본 사절은 쇼토쿠 태자에게 수양제가 일본천자(소토쿠 태자)를 허가하였다고 초특급 구라를 친다.
여기에 버프받은 쇼토쿠 태자는 다음 사절에도 윗 내용을 천자에서 천황이란 표현으로 바꿔 서신을 보내나..
일본사절은.." 아 ㅆㅂ 이러다 내가 죽겠다..." 생각해 도망쳤다
 
 
나라시대
710-794년의 기간.
일왕이 헤이조쿄에 수도를 세웠는데 이 곳이 현재의 나라 지역.
이 시기는 율령시대의 전성기에 해당하며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추구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신라와 당과의 교류가 활발했고, 특히 당나라로 직접 견당사를 파견하는 등 대륙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헤이안시대
794~1192년
간무 일왕이 헤이안쿄(현재의 교토)에 천도했던 시기
헤이안(교토)로 수도를 옮기면서 자주적인 국풍 문화를 꽃피우고 번성했으나....
나라 시대때 확립된 율령제와 토지공령제가 무너져간 시기이며...
일왕의 권력이 외척과 귀족에게 넘어간 시기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중기에는 외척의 섭정과 신하들의 공직 독점으로 귀족정치로 변모한다.
중기후반부터는 도호쿠를 중심으로 변방에서 늘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지방은 중앙에는 조세만 보낼 뿐 반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한마디로 지방 봉건화가 시작된것..
 
 
 
가마쿠라 막부시대
1185-1333
가마쿠라 막부가 집권하였던 시대.
미나모토노 가문이 타이라 가문을 물리치고 가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헤이안시대 말기에 타이라 가문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에 타이라 가문의 반발 세력들은 교토 근처의 시시가타니에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으나(시시가타니 음모사건)...
황태자 모치히토 왕자가 타이라 가문에 맞서 봉기하고...미나모토 가문은 왕자의 봉기에 동참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미나모토 가문은 반타이라 세력에 짱을 먹게 되고 가마쿠라(현재 가마쿠라시)에 본거지를 두고 타이라 가문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게 된다
초기 가마쿠라 막부가 직접적으로 미치는 지역은 여전히 관동 지역 뿐이었고...
일왕의 조정이 있는 관서 지역에 있는 장원 등은 조정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일왕이 가마쿠라 막부를 밟아 버리려고도 했지만...역관광크리.

가마쿠라 막부가 역으로 관서 지방으로 진군..조정은 저항도 못하고 붕괴됬다. 아..망했어요..

일왕과 조정은 막부의 포로가 되었고..조정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관서 지방도 모두 막부에게 상실된다.
이때 부터 일왕은 쇼군의 허수아비가 되었다..

이후 가마쿠라막부는 내부 권력투쟁으로 힘이 약화되고..
이틈을 타 고다이고 일왕이 여러무장의 반막부세력을 끌여들어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다 (겐무 신정)
 
 
 

남북조 시대
1336~1392년 무로마치 시대의 초기.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 시킨 일왕이 새로운 정치를 펴보려고 했지만...
반막부세력은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애시당초 일왕의 친정이라는 체제에 일치할수가 없었다.

논공행상의 과정에서도 무사들이 소외되면서 불만은 점점 쌓여가고...
결국 반막부세력 타도에 대장역활을 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권력을 잡기 위해 왕자를 살해하고 겐무 신정에 반기를 든다.

아시카가는 교토로 입성하고 고다이고 일왕은 요시노로 도망쳐 이로써 신정은 3년여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아시카가는 고곤 일왕의 남동생인 고묘를 일왕으로 옹립하여 북조가 성립되었고,
고다이고 일왕는 요시노에서 자신이 진짜 일왕라고 주장하며 버텼다.

그리하여 일본은 교토의 북조와 요시노의 남조로 분열되어 60여년 동안 내전을 치루는 남북조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마디로
남조엔 쇼군에게 쫓겨난 고다이고 일왕이..
북조엔 쇼군이 옹립한 교묘 일왕(허수아비)이 다시스리게(실세는 쇼군) 되었다..
초기에는
정통성에서 앞선 남조 고다이고 일왕이 우세했지만..여러번 기회를 놓치게 되면서 점차 북조쪽으로 힘이 기울게 된다.
결국 북조가 강성해지면서 남조 일왕이 북조의 일왕에게 흡수통합되는 형식으로 막을 내렸다.
흡수통일 당시에는 일왕을 북조와 남조 혈통이 로테이션 돌리는 식으로 하자고 정했지만....
막상 통일되고 나니 칼자루를 쥔 북조가 입을 싹 딱어버린다....
이에 열받은 남조의 잔당 세력이 난을 일으키지만, 깨갱..
참고로..
승자는 북조이지만, 메이지 일왕 이후로 진짜 정통은 남조로 인정받게 되었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
1336년 ~ 1573년

천황을 갈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최고위 관직을 받고, 이것으로 명실공히 일본의 실력자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를 개창했다.
암튼..
남북조가 통일되었고 '무로마치 막부'의 어원이 되는 교토의 무로마치 어소를 지어 쇼군의 처소로 정한다..
오랜 전란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크게 성장하여 후의 일본의 기틀을 다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분에 연연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주류세력인 무가부터가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었던 점과 더불어 오랜 전란으로 인재를 쓸 때 신분으로 가릴 수 없게 된 점등이 원인이 되었다.

한 편으로 실력만 있으면 출신성분은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자 반대로 실력이 없으면 윗사람이라고 끌어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서 후의 전국시대에는 가신들이 다이묘를 끌어내리는 꼴을 쉽게 볼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하극상이 만연해진 시대

한편으로 이 시대에는 무라(일본 전통적인 마을 구성)가 구체화되고 농민 봉기 등 서민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는 소와 말을 이용한 경작과 모내기의 확산 등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시장, 도시의 확산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또한 왜구가 들끓던 시기라 세 차례에 걸친(고려 창왕-조선 태조-세종) 쓰시마 섬 정벌이 이 시기 초중반에 이루어졌다.
 
 

전국시대
중앙 정부가 사실상 붕괴하고 각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는 사회적 혼란시기

무로마치 막부 말기에 일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오닌의 난으로 쇼군과 막부의 권위마저 땅끝으로 떨어진 상태..
이에 지방 다이묘들과 사무라이들이 내가 킹왕짱 먹겠다고 들고 일어나고...
어제의 부하가 오늘의 적이 되는 하극상이 비일비재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의 다이묘들은 스스로 법령을 제정하는 등, 독립적인 특성이 더욱 강해졌다.
역사가들은 이들을 전국 다이묘라고 불러 이전의 슈고 다이묘 등과 구별한다.

대충 정리하고서 통일을 목전에 두었던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
그의 사후 마지막으로 정리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한국사로 치면 대략 조선왕조 초기 ~ 중기와 겹친다.
한국사와 전국시대의 접점이 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후기 왜구"

대충 시작은 1467년의 오닌의 난
대충 종결 시점은 1573년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를 축출한 때
왜? "대충" 이란 말이 나오냐면 학자들마다 이 시기의 시작과 종결이 다 다르기 때문..
 
*오닌의 난
1467-1477년까지 쇼군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일어난 내란.
1467년이 일본의 연호로 오닌(應仁) 원년이었으므로 여기서 이름을 따서 '오닌의 난'이라고 한다.
이 난으로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각지에서 격화된 무사들의 분쟁으로 결국 전국시대 개막
 
 

에도시대
(1603~1867)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지금의 도쿄)를 본거지로 집권하던 시대.
1867년 대정봉환(일왕에게 정권을 넘겨준것-메이지 유신) 때까지 약 265년 간 일본을 통치하였다.
앞서의 두 막부와는 달리 오랜 세월 동안 안정기를 유지하는 데 비교적 성공했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하는 데도 그런 대로 성공하였다.

이 시기는 전국시대의 자유로운 교역보다는 쇠퇴했지만, 도자기와 회화 등을 수출하고 금, 은 화폐 사용이 일반화되었으며..
상업 발달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참고로..
위키백과를 참고하였습니다...나머지는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가져왔고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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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설설설설 14-07-09 19:07
   
한반도의 이민자(도래인)들이 들어와 조몬문화의 원주민을 밀어내고 일본을 장악했다는 학설이 대두되고 있다. // 이 학설은 거의 정설로 알고 있습니다.
굿잡스 14-07-09 19:45
   
열도내 우리 유적 -신롱석산성(神籠石山城:고고이시산성)

사가현(佐賀縣) : 오츠보산성(おつぼ山城, 1.87km)
사가현(佐賀縣) : 쿠마산성(帯隈山城, 2.4km)
후쿠오카현(福岡縣) : 코우라산성(高良山城, 2.8km)
후쿠오카현(福岡縣) : 녀산성(女山城, 3.0km)
후쿠오카현(福岡縣) : 라이산성(雷山城, 2.3km)
후쿠오카현(福岡縣) : 하키성(肥木城, 2.63~3.0km)
후쿠오카현(福岡縣) : 카케노우마성(鹿毛馬城, 2.35km)
후쿠오카현(福岡縣) : 고쇼카다니성(御所ヶ谷城, 2.55km)
후쿠오카현(福岡縣) : 도바루성(唐原城, 2.5km)
후쿠오카현(福岡縣) : 미야지다케성(宮地岳城, 2.5km)
야마구치현(山口縣) : 이와키산성(石城山城, 4.0km)
에히메현(愛媛縣) : 에이누산성(永納山城, 2.8km)
카가와현(香川県) : 키산성(城山城)
오카야마현(岡山縣) : 키노산성(鬼ノ山城, 3.2km)
오카야마현(岡山縣) : 오메구리고메구리산성(大廻小廻山城, 3.0km)
효고현(兵庫縣) : 시로산성(城山城)

평균 2~3km, 최대 4km의 산성.
 

 
 
고대 열도에서 성곽이라는 방어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배경은 삼국시대 우리 가야 백제 세력들이 서열도
 
즉 후쿠오카 일대를 근거지로 하면서 본격화됩니다.
 
 
열도에 있던 소위 원주 조몬인들은 기본 동열도를
 
본거지로 에도시대까지 수렵생활을 지속할 정도로 미개했던
 
종족이였고 열도에서의 본격적 문명은 기원전 3세기경을
 
전후로 야요인들이라는 고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마도와 이끼섬을
 
징검다리로 후쿠오카에 터를 잡으면서 벼농사와 청동문화를
 
퍼뜨리게 됩니다.(우리 남부지역의 고인돌이나 청동기 밀집
 
주거등을 보면 이미 이때 상당한 인구수를 보이는데
 
신석기시대 세계에서도 가장 이른 고래 포경등 해양 문화까
 
지 향유하다 보니 늘어난 잉여 인구들에 의해 이런
 
해양개척 역사가 이른 시기에 이미 본격화)
 
 
그리고 이런 가운데 열도에서 나타나는 우리성곽은
 
전체적으로 3단계의 양상을 거칩니다.
 
백제가 패망하기 전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일명 조선식 산성(혹은 신롱석산성)과 이후 백제가 패망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663년 400여척 약 3만에 이르는 열도의 백
 
제 지원세력이 백촌강에서 전투를 벌리다 신라와 당 연합세력에
 
캐털리고 나자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열도에 다시금 대대적 산성들이 등장하는데
 
이게 2차의 백제식 산성입니다.
 
 
그리고 이후 우리나라할때 나라헤이안 백제계 유민의
 
극소수 귀족시대가 열리면서 기존 사찰 위주의 아스카 도시
 
문명에서 본격적 도성체재가 급격히 등장하고 중소형 위주로
 
동열도 일대 에조를 방어하기 위한 성곽들이 등장하는데
 
이것도 재정 여력등이 여의치 않아서 성곽이 석성이나 토성도
 
아니고 목책형임 ㅋ(이것만 봐도 삼국시대 이후 남북국시대이고
 
우리와 열도의 문화나 국력의 역량에서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겠죠. 잽 극우들은 우리의 남북국 시대에 등장하는 열도내
 
의 풍을 무슨 당풍 어쩌고로 변색,희석시키려고 애써지만 이때에
 
도 우리 신라 발해의 정치적 문화 영향력이 더 직접적이고 지속
 
적으로 열도에 미치면서 기본 뼈대의 우리식 성곽들은 여전히 이
 
어짐. 당연히도 나라 헤이안 시대의 극소수 귀족이 다름아닌 우
 
리 옷과 언어 문화를 향유하던 우리 백제계나 고구려계 기타 신
 
라계들이니 )
 
BC 3세기 ~ AD 2세기경에 산자락에 우리 선조들이
 
이주하면서 발생한 고지성집락(高地性集落)이 발견되는
 
데 이 일대에 잽어로 '신이 깃든 돌'이라는 고고이시산
 
성 즉 신롱석산성도 발견됩니다. 이게 연구가 진행되면서
 
우리나라식 산성이라고 해서 조선식 산성으로 불리게 된
 
거죠.
 
 
이당시의 미개했던 이런 열악한 열도공간에서도 울 선조
 
들은 일찍히 저런 수킬로의 산성을 구축해내면서 이후 점
 
차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동열도로 세력을 확장.
 
가야 이후 백제가 본격적으로 열도를 담로체재로 지배하면
 
서 외치영토로 군림, 문명을 꽃피워 나가게 됩니다.
굿잡스 14-07-09 19:48
   
아래 알기 쉬운 서토사의 댓글에도 언급했지만

로마제국이나 우리처럼 한나라의 수백년 지배지 어쩌고라는 서북한 일대보다 훨씬 문명 수준이 떨어지고

인구도 적은 영국이나 이런 열악한 열도에도 세력이 이동해서 수백년 지배하면 당연히 나와야 할

한나라식 성곽이 서북한 일대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는 상황임. 이건 기존의 잽강점기 이후의 굳어진

통설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재검토, 재해석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굿잡스 14-07-09 19:53
   
이전에 올린 글이지만

“이나리야마”에 새겨진 백제의 열도 지배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


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68467§ion=sc1§ion2


흔히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백제의 칠지도 명문에 대해 설왕설래하지만  명문이 새겨진 쇠

칼은 열도에서 칠지도 이외에도 다양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두식 한자죠. 즉 삼국시

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에만 보이는 뜻이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식 발음을 위해 차용하여

사용되는 이두식 한자 명문이 새겨진 쇠칼들이 열도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그기에는 백제가

지배한 담로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뚜렷한 흔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굿잡스 14-07-09 19:55
   
백제가 건설한 열도의 사야마이케 저수지


http://blog.daum.net/ih2oo/15707804
 
사야마이케(狹山池)는 오사카부 사야마시에 위치한 관개용 저수지로 전체 둘레 약 3㎞, 전체면적 약 36
 
㏊ 축조연대는 일반적으로 616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저수지는 에도시대까지도 사용되었을 정도로 매우 오랫동안 오사카의 중
 
요한 젖줄이며 이곳을 개척하기 위해서 건설된 것으로 물에 관한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 선행된 저수지 건설입니다. 당시 백제의 앞선 고도의 기술력
 
을 알 수 있죠.


고대 세계적인 저수지의 효시가 벽골제인데요 벽골제 제방의 크기를 1,800보로 틀을 잡은

때가 백제 비류왕 서기 330년에(삼국시대 이전 삼한 시대로 까지 거슬려 추정됨), 사야마이

케는 616년 무렵에 각각 축조됐으며 부엽공법과 용도 등이 다르지 않습니다.

일제 이전까지 열도에서 오사카는 우리 백제주로 표기.
굿잡스 14-07-09 19:58
   
"백제의 성왕은 일본왕을 겸했다"


http://blog.daum.net/kes6030/12497581


참고로 나라 헤이안 시대할때 이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할때 순 우리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이당시를 극소수귀족시대라고 하는데 그 귀족이야 우리 백제계 및 기타 고구려

신라인들임(당연히 이당시의 문학에서의 향찰등은 우리식으로 풀어야 해석이 가능하고

이들이 입은 옷이나 언어 정원 사찰이나 건축 형태고 어떤지 두말이 필요없겠죠)
헬로비녓스 15-01-10 01:09
   
굿잡스 님 좋은 정보 잘 보았습니다.
하늘나비야 15-02-23 14:48
   
잡스님 볼때마다 대단하신거 같습니다 혹시 역사 연구하세요 ?  덕분에 많이 배우네요 ^^ 감사 합니다 글올려주신분도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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