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고학의 최근 연구성과 - 최성락
한국고고학에서의 시대구분은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등으로 설정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를 합쳐서 철기시대로 구분하고자 한다.
1) 구석기시대( ~1.2만 년 전)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후 빙하기가 끝나는 약 1.2만 년 전까지이다. 구석기시대는 전기(400~12만 년 전), 중기(12~4만 년 전), 후기(4~1.2만 년 전)으로 나눈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에는 석기밖에 남아 있지 못하다. 석기 이외에 다른 도구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의 연구는 매우 제한적이다.
먼저 언급해야 할 문제의 구석기시대의 시작 연대이다. 구석기시대의 시작 연대를 6차 교과서에서는 단양 금굴 유적을 기준으로 70만 년 전으로 설정되었으나 당시 절대연대의 제시가 없었다. 최근 파주 장파리 유적도 70~8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아직까지는 과학적인 연대측정의 뒷받침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일본고고학계는 구석기시대가 70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후기 구석기시대만을 인정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에서도 구석기시대의 연대문제를 재고하여야할 시점이라고 본다. 한반도에 한정한다면 70만 년 전이라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당시에 서해가 없어 한국이 중국과 연접해 있었고, 중국 북경(北京)지역에 70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한반도 지역에 당시부터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은 높다.
최근 구석기시대에 대한 연구는 지질학과 고생물학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당시의 지층형성과정, 자연환경의 연구와 더불어 문화상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인들은 황인종에 속하고, 동북아시아에 널리 분포한 몽골계로 알려져 있다.
2) 신석기시대(기원전 10,000년~1,500년경)
유럽에서의 신석기시대는 농경의 등장으로 정의되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토기의 사용과 정착생활의 시작을 그 특징으로 보고 있다.
과거 중석기시대로 알려진 기원전 10,000년에서 6,000년 사이는 점차 신석기시대 조기로 설정되고 있다. 제주도 고산리(高山里)유적에서 뗀석기와 함께 덧무늬토기와 원시적인 토기가 발견되었고, 그 연대도 기원전 10,000년에서 8,000년 사이로 알려져 있다. 또 강원 양양 오산리 최하층에서도 신석기시대 조기에 해당하는 층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서 보면 신석기시대의 토기발생이 일본지역뿐 아니라 연해주, 중국 동북부, 한국지역까지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신석기시대는 뗀석기와 간석기가 함께 사용되었고, 토기는 빗살문토기 이외에도 덧무늬토기, 단도마연토기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인들은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정착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한 유적에서 발견되는 주거지의 수가 적거나 발견되지 아니한 경우가 있어 계절별 이동생활을 많이 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들의 생업은 채집(採集)과 어로(漁撈)에 의존하였고, 일부 원시농경이 나타나지만 벼농사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최근 조사된 경남 창령 비봉리 유적(국립김해박물관 발굴)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저습지, 저장공, 패총 등이 조사되면서 갈돌과 갈판, 도토리, 탄화조 등과 더불어 동물이 그려진 토기, 검형목기(劍形木器), 망태기, 배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신석기시대의 생업경제를 알 수 있다.
3)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300년경)
청동기시대의 개념은 새로운 금속인 청동(靑銅)이 사용된 단계를 말하지만 한국고고학에서는 통상적으로 민무늬토기가 사용되는 단계를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시작연대를 종래에는 기원전 1000년경으로 설정하였으나 최근에는 방사성탄소연대에 의거하여 기원전 1500~1300년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조기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은 돌대문토기이다.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북방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북방 청동기문화는 요령지역을 거쳐 한국 청동기문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이 중에서 요령식동검(즉 琵琶形銅劍)은 한반도지역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식동검(즉 細形銅劍)의 발생을 충남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이는 요령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반면 중국의 동검문화의 일파가 직접 들어온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예는 바로 전북 완주에서 출토된 도씨검(桃氏劍)이다.
청동기시대에 나타나는 벼농사의 기원이 중국의 화중(華中)지역이나 화남(華南)지역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벼농사의 시작이 신석기시대 중기까지 소급해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은 고고학 자료가 충분하게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탄화미가 출토된 곳은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 유적 등이 있고, 벼농사 유구가 나온 곳도 울산 무거동, 논산 마전리 유적 등이 있다. 최근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 습지유적(동양대 박물관 발굴)에서는 기원전 8~7세기경의 저수지가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에는 고인돌(지석묘), 석관묘, 토광묘, 옹관묘 등이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지석묘이다. 최근 춘천 천전리 유적(강원문화재연구소 발굴)에서는 지석묘 주변에 장방형의 주구(周溝)가 발견되었고, 경남 마산 진동리 유적(경남발전연구원 발굴)에서는 주구를 가지고, 구획석, 적석을 갖춘 유구로서 지상식 구조를 갖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청동기시대에도 상당한 세력을 가진 자의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천 고강동 유적(한양대박물관 발굴)과 안성 원곡 반제리 유적(중원문화재연구원 발굴) 등지에서는 종교 및 제사유적이 발굴되었다.
4) 철기시대(기원전 300년~기원후 300년경)
철기시대란 한국고고학에서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로 부르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삼한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중국 전국시대 말 새롭게 철기문화가 한국에 파급되었고, 그 여파가 일본에 미쳤다.
북부지역에서는 기원전 300년경 전국시대의 등장과 함께 철기가 유입되었으며 그 일파가 남부지역까지 파급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본격적인 철기문화는 낙랑의 설치 이후일 것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새로운 주거지와 무덤의 등장이라고 볼 수 있다. 중부지역의 주거지는 呂자형, 凸자형 등이 있고, 남부지역에는 대부분 방형의 수혈주거지가 만들어진다.
이 시기에는 남해안일대에 패총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또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이르는 해로(海路)가 만들어졌으며 한반도 남부지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새로운 철기문화가 유입되었다. 이러한 해로 상에는 각 지역에 거점이 확보되는데 대표적인 곳이 해남 군곡리 패총과 사천 늑도 패총 등이다.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는 화천(貨泉)과 복골 (卜骨) 등이 출토되었고, 사천 늑도 패총에서는 반량전(半兩錢), 낙랑토기(樂浪土器), 복골(卜骨)을 비롯하여 일본의 야요이토기(彌生土器)가 집중적으로 출토되어 해로상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제주도 산지향(山地港)에서도 중국계 동전들이 한식경(漢式鏡) 등 중국계 유물과 함께 출토된 바가 있고, 일본지역에서도 이들 유물이 많은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 시대의 무덤은 새로이 토광묘(목관묘와 목곽묘)가 등장하는데 특히 서남부지역에서는 주구를 가진 토광묘(즉 주구토광묘)가 등장한다. 동남부지역에서는 기원후 2세기 중엽경에 목관묘에서 목곽묘로 변화되었다.
중요한 유적조사에는 서울 풍납동 토성이 있다. 풍납동 토성은 지하 3~4m에서 백제 초기의 유구와 유물들이 발견되어 백제의 왕성일 가능성과 기원전 3세기 이전에 토성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동시에 제기하였다.
5) 삼국시대(기원후 300~660년경)
삼국시대 남부지역에서는 3세기 후반~4세기초 경에는 백제, 신라, 가야 등이 국가의 체제를 갖추게 된다. 각 국은 새로운 형태의 고분이 만들어지는데 백제지역에서는 적석총이, 신라지역에서는 적석목곽분이, 가야지역에서는 수혈식 석곽분이 중심묘제로 등장하는 데 그 시기가 4세기 전반대이다. 이후 각 지역에서는 지배층의 무덤이 석실분으로 통일되었다.
한편 영산강유역에서는 4세기에서 5세기에 유행하는 옹관고분에 이어 5세기말에서 6세기 전반에는 석실분을 매장주체로 하는 전방후원형 고분(前方後圓形 古墳)이 나타난다. 이들 고분이 왜 나타났는지 그 피장자가 누구인지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고고학으로 본 고대한일문화교류
각 시대별로 고대한․일문화교류를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구석기시대로 일본지역에서 전기 및 중기 구석기문화에 대한 존재가 최근 공식적으로 부정되고 있어 알 수 없으나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한국지역과 공통적인 문화양상이 보인다. 즉 동북아시아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긴돌날격지문화가 있고, 단양 수양개, 양구 상무룡리, 홍천 하화계리 유적 등에서 출토된 슴베찌르개[剝片尖頭器]와 같은 전형적인 경부(莖部)를 지닌 석기들이 일본 큐슈(九州)지역에 분포하고 있고, 나이프형 자르개와 좀돌날석기[細石刃核] 역시 그 형태나 제작기법에 있어서 양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으로 신석기시대는 일본지역과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자료가 다소 많아진다. 최근 확인된 제주도 고산리(高山里) 유적에서는 타제석기와 원시적인 토기(융기문토기, 원시무문토기 등)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물의 조합상은 연해주 지역의 조기 신석기유적이나 일본 죠몬시대(繩文時代) 조기의 양상과 유사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즉 일본의 월고 유적(越高 遺蹟) 등 큐슈지역에서 가장 이른 융기문토기와 타제석기가 출토되었다.
한국 빗살문토기와 일본 소바다[曾畑]식토기와의 관계는 일찍부터 일본학자들에 의해 언급되었다. 실제로 대마도의 부부석 유적(夫婦石 遺蹟), 좌하패총(佐賀貝塚), 길전패총(吉田貝塚) 등지에서 빗살문토기가 출토되었다. 또한 양양 오산리 출토 결합식낚시는 일부 서북구주형 결합식 낚시의 출현에 배경이 되었다. 부산 동삼동 유적 출토 배모양 토기와 일본 죠몬시대[繩文時代] 독목주(獨木舟)의 존재는 당시 선박을 이용한 교류임을 보여주고 있다.
역으로 남해안의 많은 유적에서 일본의 죠몬토기(繩文土器)와 흑요석(黑曜石)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흑요석은 일본 큐슈의 코시다케(腰岳)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대마도의 융기문토기를 주체로 하는 월고(越高) 유적 등을 코시다케 생산의 흑요석을 입수하기 위한 중계지점으로서 파악하고, 거기에서 남해안의 거점 취락인 부산 동삼동․범방 패총, 통영 연대도 패총을 경유하여 각 유적으로 공급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한국 동남부지역과 일본지역 간의 문화교류는 신석기시대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는 공동의 생업환경(漁業)과 해난사고로 인한 표류 등에 의해 자연적으로 접촉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은 청동기시대로 거의 일방적으로 한국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화파급은 한국의 청동기시대 후기, 즉 일본에서는 죠몬시대 만기 후엽부터 시작된다. 벼농사가 중심이지만 주거, 묘제, 생활이기(生活利器)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문화요소가 포함된다. 즉 송국리형 주거지와 같은 주거양식, 환호, 목책열 등의 취락구조, 지석묘로 대표되는 무덤양식, 석검, 석촉, 석부, 석도와 같은 마제석기들이 그것이다.
일본의 야요이문화는 종래 전기전반으로 편년되었던 이타츠께(板付)Ⅰ식 토기 단계 보다 한 단계 앞선 유우스식(夜臼式) 토기(최근에는 야요기문화 조기로 편년됨)부터 무문토기의 영향이 나타난다. 도작농경에서도 남방설에서 주장하는 중국적인 요소가 거의 없고, 북방설과 같이 중국 화중(華中) 이북에서 한국을 거쳐 일본 전달되었으며 그 시기는 유우스식 토기 단계로 보인다. 또 지석묘와 마제석기도 이 시기에 전달되었고, 그 연대는 기원전 400년경으로 올려보았다.
그런데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방사성탄소연대법의 하나인 AMS법에 의한 결과를 받아들여 야요이문화의 시작연대를 기존의 연대보다도 500년 올려보아 기원전 930년경에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의미는 일본의 농경문화의 연대가 한국보다도 늦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신속하게 일본 고고학계에 확산되고 있다. 이 경우에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시작연대도 당연히 기원전 1500~1300년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의미의 문화교류는 철기시대에 시작하였다. 철기시대는 청동기시대와 다르게 중국으로부터 파급된 철기문화가 한국의 남부지역을 거쳐 일본지역으로 들어갔다. 기원후 3세기 후반경에 기록된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대방(帶方)으로부터 일본에 이르는 해로가 기록되어 있고, 기원전 2-1세기부터 철기시대의 패총이 형성되면서 중국계 유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낙랑과 대방이 변한으로부터 철을 수입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남해안지역에서 일본계 유물이 발견되는 것은 두 지역이 지속적으로 문화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지역에서 철제공구의 출현은 야요이 전기 초두이고, 중기 전반에 철제공구가 보급되며, 중기 후반을 철제무기의 보급기, 후기 후반을 철제공구의 실질적인 제작, 개시 및 보급기로 구분하고 있고, 그 중심지는 북부 규수지역이다. 당시 일본에서 사용되는 철제무기는 대부분 한국에서 수입한 것이다. 특히 야요이 후기 중반 이후가 되면 중국 기록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남부지역의 철 소재를 일본이 공급받아 철기생산이 가능하게 되고, 그 생산량도 증가되며, 철기가 부장품뿐만 아니라 생활주거지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또 일본지역에서는 낙랑계 토기와 한국계 토기들이 나타났다. 한국계 토기로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단면원형 점토대토기가 야요이 전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것에 이어, 철기시대의 토기인 삼각형 점토대토기가 야요이 중기 후반의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반면 이 시기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입되는 유물로는 야요이식 토기가 있는데 사천 늑도유적을 비롯하여 경남지역에서 출토된 바가 있다.
마지막으로 삼국시대의 교류는 다음과 같다. 즉 일본지역에 나타나는 한국계 유구와 유물은 다음과 같다. 4~5세기에 북부 큐슈에 집중되었던 수혈계 횡구식 석실묘는 한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계통을 가야의 횡구식 석실묘에서 찾는 경우와 백제의 횡혈식 석실묘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묘의 구조적인 면과 출토유물에서 낙동강과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 북부 큐슈일대에서는 스에기[須惠器]가 사용되기 전에는 가야토기가 수입되었고, 5세기 후반에는 가야계가 소멸되면서 신라계토기가 보이게 된다. 그리고 갑주(甲冑), 환두대도(環頭大刀) 등의 무기류, 장신구류, 마구류, 철기류 등이 한반도에서 넘어가 영향을 주었다. 4세기 대의 유물에는 철부(鐵斧), 칠지도(七支刀), 단갑(短甲) 등이 있으나 5~6세기에 이르러 더 많아진다. 무령왕릉 출토 수대경(獸帶鏡)과 금제이식(金製耳飾) 등이 큐슈 구마모도(熊本)에서 발견되었고, 구마모도의 강전선상고분(江田船山古墳) 출토 금동관모(金銅冠帽)와 금동신발[金銅飾履], 귀장식[耳飾] 등은 나주 신촌리 9호분 및 공주 무령왕릉 출토품과 유사성이 있다. 그밖에 6세기대 이후 일본으로 불교가 전래되면서 절의 가람배치와 와당(瓦當), 전(塼)의 제작에 백제와 신라의 영향이 크게 미쳐 나라시대(奈良時代)를 형성하였다.
반면 한국 남부지역에 나타나는 일본계 유적과 유물은 다음과 같다. 동래패총과 김해 부원동 패총에서 보이는 하직기류[土師器類], 김해 대성동 29호에서 출토된 철촉 2점과 2호․13호 등에서 출토된 파형동기(巴形銅器)와 촉형석제품(鏃形石製品), 벽옥제 석제품(碧玉製 石製品), 18호 출토 방추차형 석제품 등이 있다. 경주 월성로 유적의 돌팔찌[石訓]와 하직기계토기[土師器系土器], 부산 복천동과 김해 예안리의 하직기계토기[土師器系土器] 등이 있다. 이들 유물들은 주로 4세기경에 해당한다.
전방후원분 모형도
일본의 문화요소가 한반도 서남해안지역으로 유입되는 예는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된 전방후원형 고분을 들 수 있다. 이들 고분은 석실의 채색, 부장방법, 고분의 주변에 배치하거나 주구(周溝)에서 발견되는 원통형토기(하니와; 埴輪) 등으로 보아 왜(倭)와 관련된다. 다만 전방후원형 고분의 피장자가 재지계(在地系)인지 왜계(倭系)인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들 고분이 이 지역에서 상당한 신분을 가진 자(在地系)가 문화교류를 통해 알게 된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모방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들 고분이 나타나게 된 것은 이 지역이 백제의 중앙정부로부터 간섭이 적었던 시기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전북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 5~6세기대의 왜계 유물이 많이 나타났다. 개배, 고배, 제병(提甁) 등의 스에기[須惠器]와 편마암제 유공원판(有孔圓板) 등의 각종 석제 모조품 등이 있는데, 이 지역 고대항해와 관련된 제의(祭儀)에 사용되었던 유물이다.
과거 일본연구자들은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제기한 바가 있으나 이제는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성립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다만 일본지역과의 교류는 4세기경에는 가야, 신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점차 백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백제지역과 일본지역과의 관계는 5세기 전반까지 일본지역으로 일방적인 교류가 이루어졌으나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 양 방향의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5. 맺음말
이상과 같이 고고학의 성격, 최근 한국고고학의 최근 연구성과, 그리고 고고학으로 본 고대한일문화교류를 살펴보았다.
고고학은 물질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한국고고학의 역사는 60년이 넘지만 학문으로서의 성장이 느리다고 볼 수 있다. 고고학은 결코 유물과 유적만을 연구하는 분야가 아니라 한국 역사의 앞부분을 연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전국적으로 중요한 발굴이 많이 이루어지므로 고고학적 연구성과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국토개발과 더불어 구제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굴된 자료의 분석과 해석이 이를 따르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다.
한편 과거 문헌사 중심의 고대한일문화교류가 고고학 자료가 증가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일본 야요이문화의 형성과 고분문화에 끼친 한국문화의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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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교사연수 자료 중에서
출처 - http://blog.naver.com/bshhtt/54071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