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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5-11 13:22
[통일] 2차 고수전쟁 수나라의 300만 대군은 얼척의 과장인가?
 글쓴이 : 굿잡스
조회 : 10,335  

잡게에서 이관련 이야기가 있어 한 글 올립니다.
 
정규전투병만 113만 3800명 그기에 따른 보급부대가 2배로 300만에 이르렀
 
는 건 학계의 고구려 전문가분이나 저 역시도 이에 실제 무게를 두는 입장
 
니다.
 
왜 그럴까?
 
우선 어떤분은 애초에 300만이 동원되었으면 300만 대군이라고 기록하지
 
그것을 누락한채 113만이라고 쓰진 않겠지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수서
 
원문의 내용을 정확히 보지 않은 듯 하군요.
 
<隋書卷四 帝紀第四 煬帝下>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
 
 수서 양제하편에 보면 마지막 구절에서 '기궤운자배지'라는 문구는
 
이 113만대군 그기에 두배에 이르는 운반 보급부대를 말하는 것임. 즉 이
 
113만은 따로 보급부대가 섞인 숫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호이백만
 
이라고 113만을 과장해서 200만까지 그기에 보급부대의 숫자까지
 
합쳐 과장해서 400만  과장하지 않고 300만이라고 서두에서부터 못을 박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숫자가 너무 커니 혹자는 선입견으로 믿지를 않다보니
 
수나라가 서토를 통일하기전 남조 정벌시의 반쪽짜리 북조 군사력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 오면서 나름의 설득력을 가미하는 식의
 
반론들이 나옵니다.물론 이 내용만을 보면 나름 일리가 없지 않는 주장이긴
 
합니다.
 
 
 
騎兵四十隊. 隊百人置一纛. 十隊為團,團有偏將一人.
기병은 40대다. 1대는 백명으로 1개의 깃발을 둔다. 10대는 1단으로 삼는데, 단에는 편장 1명이 있다.(4000명)

又步卒八十隊,分為四團. 團有偏將一人.
또 보졸은 80대를 두고 4단으로 나눈다. 단에는 편장 1명이 있다.
 
물론 이런 편제방식은 2차 고수전쟁에서도 나름 다르지 않습니다.
 
그기에 보졸 숫자는 앞선 기병에서 1대대를 백명으로 말했기에 생략했다는
 
식으로 주장을 합니다만 <실제 2차 고수전쟁에서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뒷
 
침하기에는 요동성등 요동일대 강력한 고구려 성곽을 제대로 뚫지 못한
 
수나라가 30만 5천명을 통해 오골성을 지나 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게 한 별동대의 실제 병력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
 
임.>
 
우선 사료에서는 보병부대에 대한 정확한 숫자가 나오지 않는 점. 그기에 수
 
양제가 친정하면서 24군 외의 6군은 글자 그대로 황제를 가장 최일선에서
 
보호해야하는 부대로 일반적 편제 병력수와 동일하게 볼 수 없는 부분에 실
 
제 기록상에도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즉 보병과 황제측근부대의 정확한
 
기록은없어 편제 방식과는 별도로 이에 따라 얼마든지 병력의 증감 여지를
 
보여주는)
 
그렇기에
 
왜 30만 5천의 기록에 주목해야 하는가하면 실제 이들은 따로 보급부대가
 
없는 글자 그대로 평양를 치기 위한 순수 정예전투 별동대 병력이라는게 학
 
계의 중론입니다.
 
그렇기에 빠른 진격을 위해 따로 보급부대를 두지 않고 각 병사들에게
 
100일치의 식량을 주었고 평양일대에서 내호하 수군를 통해 추가 보급지원
 
을 받을 계획이였음.
 
그럼 이들을 보면 실제 고수 전쟁 당시의 윗 편제에 따른 1개군의 실제 병력
 
수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우중문,우문술이 이끈 9개군으로써 총 30만 5천병력을 이끌었고 결
 
국 1개군당 대략 3만 3800명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병력은 실
 
제 수서 본기에 해당하는 양제편 선두에서 밝힌 전투병력만 113만에
 
해당하는 병력수에도 상당한 일치를 보입니다.(3만 3800x 30개군 =101만4
 
천명 여기에 앞서 말한 황제 보호의 측근 6개군은 일반 편제의 병력 동원수
 
일하게 보지 않으면서 나머지 113만에서의 10만 정도 병력차는 이들
 
황제쪽에 좀더 붙어 있었을 가능성을 열어 두어 실제 이 계산치에도 편차는
 
거의 나지 않는다는 점임)
 
 
그리고 통일왕조 수나라때의 경제력은 엄청났습니다. 그기에 징병제에
 
따른 물자 및 인력 동원도 무자비할 정도로 막대했고(이때문에 산둥일대고
 
자신의 손을 자르고 산으로 들어가거나 요동에 가면 죽는다는니 그 막강한
 
경제력을 보이든 수나라 왕조는 무리한 고구려원정의 대실패로 왕조가
 
결국 붕괴되었던게 실제 역사. 이때문에 당나라 초기는 돌궐의 군사력도
 
제대로 막지 못해서 굴욕적 조공까지 했었음.)
 
또한, 고대의 병력 차출은 지금같은 20세 이후 단기가 아니라 20세이전부
 
터 60세 이하까지 웬만한 나이때의 장정들이 병력으로 차출을 했던 시기였
 
고 굳이 수나라시절뿐 아니라 통일왕조 송나라때도 정규군만 125만에 예비
 
군 100만을 둘 정도로 수나라 시절 저 병력수가 딱히 환타지 숫자가 아니라
 
는 점이죠.
 
그외 당시 통일왕조 수나라는 돌궐 앞에서도 100만명이 갑옷을 입고 도렬해
 
서 그 군세만으로 그 호전적 전투 북방 유목민족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깨
 
깽 지지칠 정도였음(물론 이후 고구려에 망하고 혼란기의 당나라초기에는
 
돌궐이 이를 틈타 서토에 군사적 우위를 보이기도 함) 특히나 수양제는
 
과시욕이 강했고 앞선 1차 고수전쟁에서 30만 대군도 고구려에 제대로 싸우
 
지도 못할 만큼 대패를 했던 선례가 있어 2차 시기는 다른 기록을 봐도 알겠
 
지만 전혀 저 기록이 과장되지 않게 탁군으로 몰려드는 군사와 물자가 어마
 
어마할 정도에 상당히 착실하게 보급과 군사준비를 진행했습니다.
 
(특히나 황제가 직접 나선 전쟁이였기에 더욱)
 
 
 다시 정리하자면 수서 초기의 정규 전투병력 113만은 단순히 선입견과
 
이전 남북조시절의 병력수로 동일선상에서 볼 여지보다는 사서에
 
정확히 기록한 그대로 볼 여지가 앞선 명확한 기록부터 30만 별동대의
 
병력수등을 봤을때 신뢰가 가능하다는 점을 밝힙니다.(그리고 4개단의 치
 
중,융거,산병부대를 따로 두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말은 이들도 딱히 단
 
순 보급부대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치웅의 경우는 옷이나 무기류등을 수송하던 부대로 보급성격이 높지만
 
융거는 수레에 3명이 조를 이루는 선두 전투부대이고 산병 역시도 선두와
 
측면에서 보조하는 병력들이라는 말이죠. 즉 기마, 보병 빼고는 다 보급부대
 
원 어쩌고도 정확한 해석이 아님.)
 
 
 
 
 
隋書 卷四 帝紀 第四 煬帝 下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 號二百萬, 其餽運者倍之. 癸未, 第一軍發, 終四十日, 引師乃盡, 旌旗亘千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隋書 卷八 志 第三 禮儀 三  
大業七年(611), 遼東, 煬帝遣諸將, 薊城桑乾河, 築社稷二壇, 設方壝, 行宜社禮. 帝齋於臨朔宮 懷荒殿, 預告官及侍從, 各齋于其所. 十二衛士並齋. 帝袞冕玉輅, 備法駕. 禮畢, 御金輅, 服通天冠, 還宮. 又於宮南類上帝, 積柴於燎壇, 高祖位於東方. 帝服大裘以冕, 乘玉輅, 祭奠玉帛, 並如宜社. 諸軍受胙畢, 帝就位, 觀燎, 乃出. 又於薊城北設壇, 祭馬祖於其上, 亦有燎. 又於其日, 使有司幷祭先牧及馬步, 無鍾鼓之樂.

    衆軍將發, 帝御臨朔宮, 親授節度. 每軍, 大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置一纛. 十隊爲團, 團有偏將一人. 第一團, 皆靑絲連明光甲鐵具裝靑纓拂, 建狻猊旗. 第二團, 絳絲連朱犀甲獸文具裝赤纓拂, 建貔貅旗. 第三團, 白絲連明光甲鐵具裝素纓拂, 建辟邪旗. 第四團, 烏絲連玄犀甲獸文具裝建纓拂, 建纓拂 對照其他各團所用器物的顔色, 第四團用烏絲連玄犀甲, 疑此處 建纓拂當作 緇纓拂. 建六駁旗. 前部鼓吹一部, 大鼓小鼓及鼙長鳴中鳴等各十八具, 掆鼓金鉦各二具. 後部鐃吹一部, 鐃二面, 歌簫及笳各四具, 節鼓一面, 吹篳篥橫笛各四具, 大角十八具. 又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有偏將一人. 第一團, 每隊給靑隼盪幡一. 第二團, 每隊黃隼盪幡一. 第三團, 每隊白隼盪幡一. 第四團, 每隊蒼隼盪幡一. 長槊楯弩及甲毦等, 各稱兵數. 受降使者一人, 給二馬軺車一乘, 白獸幡及節各一, 騎吏三人, 車輻白從十二人. 承詔慰撫, 不受大將制. 戰陣則爲監軍.

    軍將發, 候大角一通, 步卒第一團出營東門, 東向陣. 第二團出營南門, 南向陣. 第三團出營西門, 西向陣.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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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스 14-05-11 13:40
   
113만은 정규전투병으로 수서에 이미 기록한 그대로 볼 여지가 높은 것이지 그 숫자가 많다고 선입견하에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건 자의적 해석의 범주로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전구역을 5부로 나누고 욕살을 두었는데 서부 지역 즉 수나라와 최전선 대치의

일선 최대 도시 중 하나가 오골성입니다. 이 오골성은 성곽 둘레가 자그만치 16킬로에 이르는

구릉지의 거대 도시형성곽입니다.(고구려 수도 장안성이 23킬로) 이게 당시 얼마나 큰 도시 규모인지를

당시 로마제국과 비교하자면 로마제국의 가장 큰 도시 중 3번째 안티오키아나 4번째 카르타고보다

훨씬 큰 도시입니다(당시 유럽 최대도시라는 로마랑 맞먹음) 이런 도시들이 고구려는 수도인 국내성

한성 평양성의 3경외에 각 주요 욕살이 거주하는 도시들이나 특히 강력한 요동 방어 일대에는

상당한 중대형 도시형 산성이나 성곽들이 존재했고 이런 강력한 대형의 밀집 방어 성곽들을

통해 수당이라는 강력한 통일제국과도 맞짱을 떴고 단순히 공성전만 능했던게 아니라 주필산처럼

혹은 살수대첩처럼 육박전을 통한 평지전투에도 탁월했기에 유기적으로 성내와 밖을 통해 적의 대군을

요리하고 대패를 시켰던 원동력이죠.

이런 이야기를 왜 다시 하느냐하면 만약 100만명에 정규전투병력이 단순히 기존의 숫자씩이

였다면 실제 정예 전투병력으로 평양에 진격한 30만 대군외에 수양제를 보호하던 부대는 글자그대로

일반 허술한 보급부대들이 보호했다는 이해되지 않는 전황묘사가 되어 버린다는 점이죠

 이를 경우 서부일대의 고구려 중대형 내의 군사력은 서로 모을시에

일시에 10만 대군 이상도 가능한 상황인데 그런 왕조시대 친정온 황제가 사로잡히면 말짱 도루묵인

상황에서 30만이라는 전투대병력을 따로 별동대로 진격시켰다는건 맞지 않는 해석일 수 밖에 없다는 점임.
굿잡스 14-05-11 13:44
   
그리고 이런 우리 고구려의 5부 욕살 제도 및 다중 수도체제의

대형 도시 구축을 바탕으로 한 행정, 도시문명의 영향력은

이후 발해에 와서도 5경체제로 이어집니다.(이런 발해의 도시문명력은 다시

요,금에 중축적,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함)
     
박애주의 14-05-11 22:17
   
굿잡스님 뜬금없는 말이지만 고수 전쟁이 아니라 여수전쟁이 맞지 않나요? 그전까지는 마땅한 명칭이 없어서 고수전쟁이라고 부르다가 요즘에 와서야 나제연합,여몽연합군이라 부르듯이 끝음을 따와서 여수,여당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네이버에도 그렇게 나와있구요.
          
굿잡스 14-05-12 16:24
   
려수전쟁 어쩌고도 부르긴 하는데 보통 고수전쟁으로 많이 부르죠.(딱히 어느 것이

맞다는 식은 아닌걸로 보이군요)
gaevew 14-05-11 14:30
   
햄돌 14-05-11 15:01
   
굿잡스님, 정말 뭐하는 분인지 . .
방대한 지식이 놀라워요
나와나 14-05-11 15:43
   
고수 전쟁은 세계 대전 이전까지 역대 사상 최다의 군대가 동원된 전쟁이죠
파르라니 14-05-11 17:52
   
굿잡스님의 방대한지식에 저도 감탄합니다 ..
 정말 대단 하십니다 ..
길로틴 14-05-11 19:32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gagengi 14-05-11 23:35
   
수나라는 선비족이 중국을 정복한 경우고
로마는 중동인들이 중동문명을 유럽에 세운 경우죠.

황당한 것은 수나라가 중국의 위대한(??) 제국이고 로마가 서양의 위대한(??) 제국이라는 식민빠적 발상입니다. 

수나라는 알타이계 북방민족인 선비족의 제국이고 로마는 중동인들의 제국입니다. 유럽인종 자체가 중동에서 이주한 중동인들입니다. 유럽문명은 중동문명이 전파되어서 형성된 것입니다. 유럽빠들이 마치 유럽문명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떠벌이는데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Assa 14-05-12 15:04
   
그럼 고구려가 동원할수있는 군인수가 궁금해여 평지전투와 공성전을 잘하드라도 어느정도의 군대수가 되기에 113만명을 막을수있었던것이 아닌지?
     
굿잡스 14-05-12 16:48
   
고구려는 상비군이 30만 전시에는 최대 50만 이상도 가능했던 걸로 보입니다.

이는 안시성 일대에서 당군이 수도 내지로 진격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급파한 고구려

군대가 15만대군에 달했던 점으로 봤을 때 설득력이 높다 하겠습니다. 이 병력은 북부와

남부 욕살인 고연수, 고혜진이 일부 말갈과 함께 급파한 군사로 볼때 이정도 규모의 병력을

일시에 보낼 정도이면 최소 수십만의 상비군이 존재했다는 걸 뒷바침 하겠죠. 여기에

고구려는 강력한 요동일대 방어를 위해 중대형 밀집 성곽을 만들어 놓아 요동성에만

자체 50만석을 두고 전쟁을 치룰 수 있도록 하는등 비사성, 안시성, 요동성, 부여성,

오골성, 박작성등에는 각각 수만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고 그기에 평양일대 수도방어부터

국내성, 남부의 한성, 동만주 일대등 각지역의 자체 방어 병력까지 합친다면 15만보다 훨

씬 많았을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고당전쟁에도 이런 공성전뿐 아니라

주필산 전투에서 육박전을 통해 일부에서는 당의 계략에 넘어간 경우도 있지만 구당서

의 기록이 과장됨이 6800명 정도의 포로이지 그외의 고구려가 이끌고온 군사력은 여전

히 건재하면서 당나라를 주필산에서 50여일동안 발을 묶어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죠 이때

문에  요동에서 안시성 사이에 박혀 갇혀버린 이세민은 결국 고구려 내지로 제대로 발

도 밟아 보지 못하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거세 추격에 실달리다 이후 돌아와 1

여년이 안되어 병사하게 됩니다. (물론 과거 2차 고수전쟁 역시 요동성을 뚫지 못하자 평

양 직격으로 보낸 30만의 수나라 별동 대군 역시도 다시 요동성일대로 살아 돌아간 숫자

는 2700여명에 불과) 그기에 고구려는 이미 5세기부터 명실공히 왕중의 왕 태왕으로 불

리면서 주변 부용세력들을 제압하고 거느린 실질적 흉노제국의 대선우격에 올라있던 국

력을 가졌던 나라입니다. 이를 통해 요서일대 거란 세력을 부용화함으로서 고수, 고당전쟁

에서 적의 보급을 끊고 괴롭히는 전술부터 말갈등을 통한 선제공격이나 여러 육박전도

과감하게 실행했던.
          
나와나 14-05-12 22:43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 동천태왕을 흉노의 선우라고 불렀죠
즉 3세기 때 고구려가 이미 흉노급의 위용을 보여준 강국이었던 거겠죠(비록 위나라 관구검에게 깨지고 약해지긴 하지만)
               
굿잡스 14-05-13 11:56
   
동천왕 시기의 관구검 침입에 대해 좀 더 첨언을 하자면

이때는 단순히 위나라뿐 아니라 모용선비에 커지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부여는 식량 제공등 연합세력이였습니다.

물론 초기에는 동천왕이 이끈 강력한 철기군은 양맥에서

6천명을 도륙하면 두번이나 승리하자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면서 이후 방진에 걸려

고구려 수도까지 털리는 초유의 사태가 난 사건이죠.

물론 이당시의 동천왕이 이끈 군사는 5부 세력 전체가 아니라 태왕의 측근

군사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는 이후 부여를 흡수하고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고구려 내지를 보호하기 위해 요동일대에 강력한

중대형의 방어성곽을 더욱 조밀하게 만들어 육박전뿐 아니라 공성전등

방어전략에도 매우 치밀하고 높은 인프라를 구축해 놓게 됩니다.
뿡뿡 14-05-14 08:38
   
초기 관구검을 거의 다 때려잡았을때 분위기만 좀더 업했으면 지금의 동아시아 역사는 우리가 상상할수 없는 지금이 되지 않았을가 하네요...
푸컴 14-05-23 00:32
   
이분들 타이머신 만들어서 고구려로 보내주고 싶네...ㅠㅠ
하늘나비야 18-11-28 13:18
   
굿잡스님 글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진자 지식이 방대하시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굿잡스님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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