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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5권, 2년(1778 무술 / 청 건륭(乾隆) 43년) 1월 13일(갑술) 1번째기사
유학 남재흥이 폐사군(廢四郡) 지역 중 후주에 고을을 설시할 것을 상소하다
대개 압록강(鴨綠江)·두만강(豆滿江) 두 강의 근원은 다같이 백두산에서 나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흐르다가 바다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는 곧 우리 나라의 경계(境界)입니다.
옛날이 지금 현대마냥 뚜렷한 국경선이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되죠.. 과거에는 보통 산과 강이 국경선이었으니 압록강-두만강 이남은 조선의 직할지죠
그리고 압록강-두만강 너머 조선의 간접지배지가 있었는 데 그곳이 바로 간도죠..
나중에 청과 분쟁이 일자 대한제국 때 보호령을 내리거나 세금을 걷는 등 직할지로 포함시킨 거구요
조선 왕조실록에 두만강 압록강을 국경으로 한다고 딱 적혀있는데
자꾸 간도를 조선땅이었다고 우기면 안되죠.
세금걷고 어쩌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간도가 조선땅이었다면말이죠...
간도에 관리 파견 처음한게 언제죠? 1898년인가...그때가 처음이죠?
그럼 그전엔 관리도 파견안하고 뭐했을까요. 조선정부 놀았나요?
엄연히 국사시간에 배우잖아요. 조선 초 전국에 지방관 파견했다고. 근데 간도는 왜 없죠?
군대도 파견한적 없고 관리자도 파견한적 없는 땅. 하지만 조선사람은 사는 땅.
네 딱 코리아타운이죠. 한국관리도 없고 한국군대도 없지만 한국인이 사는 땅.
이걸 어떻게 조선땅이라고 부릅니까.
간접지배? 님이 만든 개념인가요? 간접지배는 어떻게 하는게 간접지밴가요..
수백년동안 간도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으므로 조선땅이라는 근거가 희박하지만...
그냥 봐줄께요.
그럼 지방관비스무리한(지방관은 무슨 ㅋ) 놈을 파견했으면 최소한 간도협약 이전까진 유지를 했어야죠. 청나라가 조선이 수상한 짓거리한다는거 파악하고 항의해서 바로 회수했죠. 이게 무슨 조선땅이에요.
“말썽은 반드시 큰 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작더라도 화(禍)가 맺히는 수가 있습니다. 신이 육진(六鎭)에서 귀양살이할 때에 경흥 부사(慶興府使)가 백성의 식량이 모자라기 때문에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저들의 땅에 침입하여 빼앗았으므로, 이응거도(伊應巨島)에서 경작하는 호인이 원한을 갖고 후라도(厚羅島)·극성보(棘城堡) 등에서 도둑질하여 병화(兵禍)가 잇달아 있었으니, 이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선조실록> 7권, 1573년(선조 6년>
"경흥 부사(慶興府使)가 백성의 식량이 모자라기 때문에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저들의 땅에 침입하여 빼앗았으므로,"
백성이 먹을 식량이 모자라가 조선의 관리가 두만강 너머 "저들의"땅에 가서 ...
두만강 너머가 "저들의 땅"이라는 것을 알수있고...조선인또한 여진족을 약탈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ㅋ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협상했던 나라는 청나라일뿐 중국이 아닙니다. 중국은 청나라가 정복한 여러 식민지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간도는 청나라와 조선사이의 분쟁이었을 뿐 식민지였던 중국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한국사였던 금청사를 배제시켜놓으니까 간도가 마치 중국과의 분쟁이었던 것처럼 날조되는 것입니다.